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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2 : 마태복음 26장

어멍 2011. 7. 6. 23:31
 

    성경읽기 0082 : 마태복음 26장



26장 21절

모두들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말한다.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

31절

“오늘 밤, 너희는 모두 나를 버릴 것이다. 성경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목자를 칠 것이니, 양이 흩어질 것이다.’”

33절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다른 모든 제자들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34절

“바로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할 것이다.”

35절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과 함께 죽을지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모두 똑같이 말했습니다.

 

    21절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이 슬퍼하시며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은 이미 십자가의 길을 예비하시고 제자들과 마지막 음식을 나누신다. 빵을 떼어 주시며 내 몸이라 하시고, 포도주를 따라 주시며 나의 피, 언약의 피라고 하신다.

    가룟 유다는 그 전에 이미 대제사장들에게 가서 은전 삼십 개를 받고 예수님을 넘길 것을 약속한다. 베드로 뿐 아니라 모든 제자들이 그들 모두가 예수님을 버릴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며 죽음을 함께 할 것이라 맹세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The Last Supper)>
중앙 예수님을 기준으로 왼쪽 얼굴부터 요한, 베드로, 가룟 유다
베드로는 요한을 시켜 예수님에게 배반자가 누구냐고 물어보게 한다. 유다는 오른손에 돈주머니를 쥐고 있다.



    결코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가룟 유다는 악하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약하다. 베드로의 맹세는 적어도 그 때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다. 그는 악하지 않다. 다만 약할 뿐이다. 악한 것은 슬픔보단 분노를 일으키고, 약한 것은 분노 이전에 슬픔을 일으킨다.

    몇 마리 늑대에 수백 마리의 양떼가 도망간다. 어떤 양은 새끼를 버리고 도망치고, 어떤 양은 어미가 뜯어먹기고 있는데도 무서워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인간은 그런 존재다. 약하고 불완전한 존재다. 예수님을 지척에서 보아왔던 제자들마저 극복할 수 없었던 인간의 본성이다.

    유다는 벌을 받아 자살하여 죽는다. 하지만 나머지 열한 제자들은 벌을 받지 않는다. 예수님은 자신을 외면하고 부정하고, 멀리 도망친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으신다. 다만 슬픈 눈으로 바라보실 뿐이다. 고통 받고, 외면 받고, 돌아와 열한 제자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가 평안하냐?”[누가 24:36]며 첫인사를 건네신다.

    흉포한 늑대가 나타나, 모두 자신을 버리고 제 살길 찾아 뿔뿔이 흩어진다고 해도 양들을 걱정하는 목자의 마음이다. 예수님은 사악함을 미워할 뿐, 악에 맞서지 못하는 인간의 나약함은 안타깝고 긍휼히 여기신다. 악을 증오할 뿐, 인간은 사랑하신다. 제자의 배신, 원수의 박해까지도 굴복시킬 수 없었던 예수님의 본성이다.

    품삯을 받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사실 목자가 아니며, 양도 자기 양이 아니다. 그 사람은 늑대가 오는 것을 보면, 양만 남겨 두고 멀리 도망가 버린다. 그러면 늑대는 양을 공격하여 양들을 흩트린다.[요한 10:12] 예수님은 선한 목자시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11] 



26장 38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절

그리고 나서 약간 떨어진 곳으로 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길 원합니다.”

40절

기도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셔서, 제자들이 자고 있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41절

깨어서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영은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겟세마네의 기도다. 예수님은 그 곳에서 고난을 목전에 두고 슬픈 고뇌로 몹시 괴로워 하신다. 피땀을 흘릴 정도로 고통스러워 하신다.([누가 22:44]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습니다.) 어찌 보면 나사렛 예수, 인간 예수로서의 마지막 고뇌와 갈등이기도 하다.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왜 제게 이런 (정신적) 고뇌와 (육체적) 고통을 주려 하십니까? 아버지, 할 수만 있다면 거두어 주십시오.’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니다. 눈물이 있고, 슬픔이 있고, 웃음이 있고, 고통이 있다. 육신이 있고, 감각이 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이 손수 이런 인간의 고통과 갈등을 겪으셨다. 매 순간 짜장이냐 짬뽕이냐 갈등하고, 덥고 추운 것에 불편해하고, 손톱 밑에 박힌 가시에도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우리다.

    예수님은 이런 우리를 아시고 이해하신다. 이런 우리를 하늘 높이 먼 곳에서 오라고 손짓하지 않으시고 손수 내려와 품어주고 이끌어 주셨다. 땅 위의 우리에게 하늘에 이를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친근하고 애틋하고, 감동하고 공감하게 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아시고 이해하시듯 우리 역시 예수님의 고뇌와 고통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계시다. 길과 길이 만나는 교차로에 사람이 모이며 장이 서고,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바다에 어족이 풍성하고,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지점에 새로운 문명이 찬란히 꽃피듯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해주는 예수님은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과 이야기를 남겨주셨다.

    많은 능력을 보여주시고 기적을 행하셨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닐뿐더러 이것만 가지고는 뭔가 부족하다. 오히려 어디서 많이 봐왔던 그림, 들어왔던 이야기다. 그런 얘기는 반지의 제왕, 헤리포터, 슈퍼맨, 엑스맨......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쌔고 쌨다.

    예수님이 호언장담하며 폭풍우를 부르고, 십자가를 부러뜨려 날려버리고, 하늘의 군단을 불러 적들을 쓸어버렸다면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통쾌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액션영화 한편, 판타지 소설 한권 읽은 것과 다르지 않다. 겟세마네의 기도는 아예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는 난센스가 될 것이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죽을 정도로 괴로우시단다. 여기서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같이 좀 있으면서 깨어 있으란다. 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이 잔을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으시단다. - 혹 두려우셨나? 혹 외로우셨나?

    인간의 아들 나사렛 예수에서 시작해 첫 이적을 행하신 후 줄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서 공생애를 살아오신 예수님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제 마지막 남은 인간의 고통과 고뇌를 떨쳐내려 하고 계시다. 인간의 육체를 빌어 내려와 겪을 수밖에 없는 약하고 불완전한 인성(人性)을 벗어나 완전에 이르려고 하신다.

    하지만 예수님이 고통스런 기도를 하시는 동안 제자들은 졸음을 못 이기고 잠이 든다. 예수님은 한 시간도 깨어있지 못한다고 꾸짖지만 별 소용이 없다. 예수님이 두 번째, 세 번째 기도를 하고 오셨어도 그들은 여전히 자고 있다.

    

    내일이 시험이다. 준비는 아직 미흡한데 밤은 깊어가고 졸음은 쏟아지고 마음이 심란하다. 가로등도 꺼지고 앞집, 옆집도 꺼지고 건너 방, 안방도 꺼지고 오직 내 스탠드만 책상을 비추고 있다. 차도 멈추고 인적도 끊어지고 오늘따라 벌레 한 마리 우는 소리 없이 적막하다. 아빠는 코를 골고 주무시고 동생은 새근새근 단잠을 자고 있다.

    아빠가 깨서 내 옆에서 신문이라도 봤으면 좋겠다. 동생을 깨워 노래라도 부르게 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가. 어차피 내가 해야 할 공부다. 내 몫이다.

    외롭고 심란한 마음에 잠시 아빠 옆에 누워보지만 도리어 눈만 말똥말똥, 마음만 무겁고 초조해진다. 괜시리 스탠드와 책을 거실로 옮기고 세수를 해보지만 집중이 안 된다. 가능하다면 폭우가 쏟아져 학교가 휴교했으면 좋겠다. 할 수만 있다면 해피하게 넘어가고 싶다.

 

    자기만의 짐, 자신만이 질 수 있는 짐이 있다. 피를 나눈 부모형제도, 죽고 못 사는 연인이라도 대신 짊어질 수 없다. 그 누구도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수 없다. 각자에겐 자기가 져야할 십자가, 자신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가 있다.

    함부로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지려 하지 마라. 선의가 아닌 교만일 수 있다. 오직 댓가를 바라지 않는 자,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자만이 남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수 있다. 선의와 함께 능력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의 죄 사함을 위한 십자가지, 예수님 자신을 위한 십자가는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요, 예수님만이 짊어질 수 있는 십자가다. 우리의 죄가 너무 커서 너무도 무거운 십자가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 십자가의 무게로 인하여 괴로워하신다. 어깨를 짓누르는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앞서 마음을 짓누르는 겟세마네의 십자가를 지고 계시다. 하지만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그 잔이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이고, 그 십자가가 자신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임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미 예전부터 예비하신 것임을...


    ‘깨어있어라. 나와 함께 깨어있어라.’ 내가 힘들고 괴로우니 나를 도와주고, 옆에서 지켜주고, 내 무거운 짐을 나눠 지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그것은 너희 자신을 위함이다. 깨어서 너희가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여라. 하지만 너희는 한 시간도 못 버티니 영은 원하지만 육체가 약하구나.

    내가 나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너희는 너희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나에게는 나의 십자가가 있고, 너희에겐 너희 십자가가 있다.



26장 47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동안,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인 유다가 왔습니다. 대제사장과 백성들의 장로들이 보낸 많은 사람들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유다와 함께 왔습니다.

48절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가 이들에게 “내가 입 맞추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를 잡으시오.”라며 신호를 정해 주었습니다.

49절

곧바로 유다는 예수님께 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그러면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50절

예수님께서 “친구여, 무엇하러 여기에 왔느냐?”하고 묻자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붙잡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하신대 이에 그들이 나아와 예수께 손을 대어 잡는지라

 

    겟세마네 동산에서 홀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은 그 곳에서 적들에게 붙잡힌다. 그들을 안내하여 온 자는 이미 예수님을 배반해 팔아넘긴 가룟 유다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과 거리에서 대중을 가르칠 때 대중의 저항과 폭동을 두려워하여 예수님을 잡아가둘 수 없었다. 기회를 노리던 그들은 유다를 매수한 후 그의 입맞춤을 신호로 해서 예수님을 급습하여 체포한다.

    50절은 <쉬운 성경>과 <개역 한글>판이 약간 틀리다. 이미 예수님은 유다의 배반을 알고 계셨고 그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지 알고 계시므로 <개역 한글>판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가 더 적합할 듯하다.

    예수님이 붙잡히자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간다.




조토의 <유다의 입맞춤> 중에서
친구가 주는 상처들은 믿음에서 난 것이지만, 원수는 입맞추고 배반한다.[잠언 27:6]



26장 67절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리며

68절

“그리스도야! 누가 너를 때렸는지 맞혀 보아라!”하고 말했습니다.


70절

베드로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라며 모든 사람들 앞에서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72절

또다시, 베드로는 “나는 그 사람을 모릅니다.”라고 맹세를 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74절

그러자 베드로는 저주를 하며 맹세했습니다. “나는 저 사람을 모릅니다.” 그러자 바로 닭이 울었습니다.

 

    잡혀 온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 선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장로, 서기관으로 이루어진 70명의 의원으로 구성되었으며 최고 의장은 대제사장이 맡았다고 한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백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구타와 모욕과 조롱을 당하신다.

    그때 누군가가 공관 마당의 바깥쪽, 백성들 사이에 섞여 앉아있던 베드로를 알아보고 예수님과 한 패가 아니냐며 묻는다. 베드로는 두려움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다. 모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부인하고(70절), 맹세를 하며 부인하고(72절), 맹세에 저주를 더하여 부인한다.(74절) 그러자 바로 닭이 울고, 그 때서야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자신이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34절)을 떠올리고 밖으로 나가 몹시 운다.

    결국 예수님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주도한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는다. 하지만 그들은 사형집행권이 없었다. 예수님을 죽도록 죽이고 싶었던 그들은 예수님을 사형권을 갖고 있던 로마총독 빌라도에게로 끌고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