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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79 : 마태복음 15장~19장

어멍 2011. 6. 28. 00:25
 

    성경읽기 0079 : 마태복음 15장~19장



15장 11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17절

입으로 들어가는 것은 모두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결국 뒤로 나가는 것을 모르느냐?

18절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마음에서 나온다.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든다.

 

    몇몇 바리새파 사람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은 것을 지적하며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욕설, 험담, 냉소, 비아냥, 시기, 질투, 저주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면 51점 답안이다. 아무리 거칠고 혐오스런 말글이라도 엄밀한 의미에서 그 자체가 더러운 것은 아니다.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말, 그리고 비방이 나오는 마음[마태 15:19]이 본질이다.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만드는 것이다.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마태 15:20]


    원효대사는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예수님도 원효도 위로 들어가는 것, 앞뒤로 나오는 것을 더럽다 여기지 않으셨다. 그 분들이 진정 더럽다 여기신 것은 비루한 마음, 음험한 마음, 악한 마음이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17장 1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야고보의 동생 요한을 데리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2절

그들 앞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변화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해같이 빛나고, 옷은 빛처럼 희게 되었습니다.

3절

그 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4절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주님, 원하신다면 제가 여기에 천막 세 개를 세우겠습니다. 하나는 주님을 위해, 또 하나는 모세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엘리야를 위해서 말입니다.”

5절

베드로가 말하는 동안에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 위를 덮고, 그 속에서 “이는 내가 사랑하며 기뻐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9절

산 아래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부하셨습니다. “인자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너희가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12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자기들 마음대로 하였다. 이처럼 인자도 그들로부터 고통을 받을 것이다.”

13절

그 때서야,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높은 산에서 예수님은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화하신다. 그곳에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의 세 제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예수님, 모세, 엘리야 세 인물이 모여 함께 말씀을 나눈다. 그 때 하나님이 빛나는 구름 속에서 예수님이 그의 사랑하고 기뻐하는 독생자임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이미 자신이 죽임을 당할 것을 아신다. 엘리야가 이미 왔지만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듯이 예수님도 그들로부터 고통을 받을 것을 예언하신다. 그때서야 제자들은 엘리야가 곧 세례자 요한임을 깨닫는다.


    예수님의 변용(變容) 이후, 산에서 내려온 예수님은 제자들이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고 있지 못함을 보시고 “아! 믿음이 없고, 뒤틀어진 세대여! 도대체 언제까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야 하겠느냐? 언제까지 내가 너희를 참아야 하겠느냐? 그 아이를 내게 데리고 오너라.”[마태 17:17]고 말씀하신 후 소년을 치료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의 변용과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신 구절은 [마가 9:2]이하, [누가 9:28]이하에서도 나온다. 마가에서는 예수님이 내려왔을 때 제자들이 소년과 아버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율법학자들과 논쟁 중이었다는 내용과 소년을 치료하신 후 “이런 종류의 귀신은 오직 기도로만 쫓아낼 수 있다.”[마가 9:29]는 예수님 말씀이 나온다. 마태에서는 귀신들렸다는 표현과 함께 간질(발작)(ASV는 epileptic, NIV는 seizure)이라고도 표기한 구절이 보인다. 누가에서는 이 내용들이 훨씬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다.




라파엘로(Raphael) <그리스도의 변용(The Transfiguration)> - 로마 바티칸 미술관
상단부에 예수님, 모세, 엘리야가 보이고 바로 밑 언덕 위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있다.
하단부엔  귀신들린 소년과 아버지,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당황하는 나머지 제자들이 보인다.
왼쪽에 책을 펼쳐 쥐고 있는 이는 율법학자인 듯.
천상은 밝고 평화롭지만 지상은 어지럽고 소란스럽다.



    예수님의 변용은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거친 후의 승천을 예고하신 것일까?

    산상수훈을 마치신 후 예수님이 행하신 공생애는 영광과 기적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십자가의 희생과 고통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는 일정이기도 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반드시 가야만 하며, 거기서 장로들과 대제사장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고난을 받아 결국엔 죽임을 당할 것[마태 16:21]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부정하지만 도리어 예수님께 꾸중만 듣는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고,[마태 17:22] 사람들은 그를 죽일 것이다. 그러나 삼 일째 되는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다.”[마태 17:23]



18장 3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4절

이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19장 14절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18장 말씀은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높은 사람입니까?”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부르시더니 제자들 앞에 세워 놓고 하신 말씀이다. 19장 말씀은 사람들이 자기의 자녀들을 데리고 와서, 예수님께서 손을 얹고 기도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이들을 꾸짖으며 제지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말리시며 하시는 말씀이다.

    ‘어린아이처럼 됨’[18:13] ‘어린아이와 같음’[19:14]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기를 낮춤’(겸손)과 ‘순수, 천진난만함’을 말함이다. ‘어린 영혼’이란 것이 ‘겸손한 영혼’과 ‘순수한 영혼’의 의미를 모두 내포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비유로서 이 둘을 모두 말씀하고 계시다. 하지만 문맥상, 정황상 18장은 ‘겸손’을 19장은 ‘순수함’을 강조하신 것으로 여겨진다.




어린아이들을 축복해주시는 예수님
제자들 : 애들은 가라! 예수님 :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마라!



    어린아이는 키가 작다. 힘이 약하다. 다 큰 어른과 물리적으로 비교대상이 아니다. 어른을 앞지르고 주도적으로 인도하기 보다는 뒤따르며 수동적으로 인도받기 마련이다. 품행과 말씨가 공손하고 방정하면 어른들의 칭찬을 받기도 한다. 이런 것을 ‘자신을 낮춤’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겸손’과는 적지아니 차이가 있다.

    ‘겸손’은 적극적이며 철저히 의식적인 개념이다. 힘(권력)이 세면서도 절제하는 것, 부자이면서도 검약하며 돈을 옳게 쓰는 것, 높은 신분이면서도 낮은 곳에 임하여 함께 어울리는 것, 많이 배웠으면서도 가르치려 하지 않는 것, 선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워 굳이 감추려 하는 것이 바로 겸손이다.

    스스로 이러한 겸양지덕을 체득한 어린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어리다’라는 개념에는 ‘분별없다’, ‘어리석다’의 의미도 있다. ‘어린 영혼’은 때에 따라 ‘어리석은 영혼’, ‘미성숙한 영혼’이란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18장 4절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사람’에 대해 토를 달자는 것이 아니다. 비유로서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말하고픈 것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고 그곳에서 가장 높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지 모든 ‘어린아이’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어린아이들이 자신을 낮추는 것은 아니고, 순수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본질은 ‘어린아이’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음’, 곧 그 본성이다. 즉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고 ‘교만하지 않은 마음’과 때 묻지 않고 순수한 ‘천진난만한 마음’이다.

    ‘교만하지 않은 마음’은 소극적 표현이다. ‘겸손한 마음’은 적극적 표현이다. 같은듯하지만 다르다. 교만하지 않은 어린아이는 훌륭하다. 하지만 겸손한 어르신은 더 훌륭하다. 어린아이 같은 어린아이는 자연스러울 뿐이지만 어린아이와 같은 어르신은 광채가 난다.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는 귀엽고 사랑스러울 뿐이지만 천진난만한 어르신들은 경이롭고 존경스럽다.


    다윗은 시편 131편 2절 ‘예배드리러 올라가는 자의 노래’에서 하나님 앞에 선 자신을 “내 영혼이 어머니와 함께 있는 젖 뗀 아이와 같습니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은 부모요, 우리들은 어리나 늙으나 그 분의 어린 자녀다. 젖 뗀 아이다. 그 사랑을 벗어나 스스로 교만해지는 것이 죄의 시작이다. 하나님이 슬퍼하신다.

    다 큰 어른, 일국의 최고 권력자 다윗의 노래다. 어떻게 우리는 세월을 이기고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지켜낼 수 있을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더욱 겸손해지고 현명해지면서도 천진난만함을 잃지 않을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어린이는 어리지만(순수하지만) 어리다.(어리석다.) 늙은이는 어리지 않지만(어리석지 않지만) 어리지 않다.(순수하지 않다.) 무엇이 도달하기 힘든 최상의 선일까? 아름다움일까? 혹은 무엇이 가장 경계해야 할 악일까? 추함일까? 내 나름대로 나쁜 것부터 좋은 것 순으로 나열해보자. 『 악한 아이, 교활한 청년〈 우매하고 노욕에 찌든 노인〈 순수한 아이〈 현명한 노인〈 어린 현자〈 늙은 순수 』다. (자세한 것은 ☞ 성경읽기 0039 참조)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하고,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다. 그가 어린이라면 높게 자리할 것이요, 그가 늙은이라면 더욱 높게 자리할 것이다.



19장 21절

만일 네가 완전해지길 원한다면,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물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와서 나를 따르라!

22절

이 말씀을 들은 청년은 매우 슬퍼하며 떠나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가진 재산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24절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다. 역시 비유의 말씀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 불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욕심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그래서 불교에서도 인간이 가장 경계해야 할 탐진치(貪嗔癡,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 셋 중에 욕심을 제일 첫째로 들고 있다. 자신의 것을 내려놓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욕심도 그에 비례하여 커진다. 점점 버리기가 어려워지고 오히려 아등바등 지키려고만 든다. 오히려 아흔 아홉칸 가진 부자가 백칸을 채우려 하고, 양 백마리 가진 부자가 가난한 자의 양 한마리를 빼앗으려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100개 가진 자는 101개의 욕심을 가지고 있고, 1000개 가진 자는 1001개의 욕심을 가지고 있다.

    시기, 질투,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말, 그리고 비방 등 인간의 모든 비루하고 악한 생각은 욕심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의 것 중 가장 큰 것은 사랑이고, 인간의 것 중 가장 큰 것은 욕심이다.


    찔끔찔끔, 야금야금 내 놓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모두 버리라고 하신다. 그것은 ‘완전’해지는 것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불가능에 가까울 뿐,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스스로 회개하고 간절히 구한다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 곳에 임한다면, 가능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