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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76 : 마태복음 6장 (부제 :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어멍 2011. 6. 17. 22:51
 

    성경읽기 0076 : 마태복음 6장 (부제 : 주기도문, The Lord's Prayer)



6장 3절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4절

아무도 너의 구제함을 모르게 하여라. 그러면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예수님은 공치사, 생색내기, 위선을 싫어하신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행, 자선을 하였다면 알려지길 원하고, 인정받고 칭송받길 원한다. 적극적으로 나팔을 불며 광고하기도 하고 소극적으로 은근히 알려지기를 바라기도 한다. 제 삼자를 통해 어떻게라도 알려지길 바라고 만약 그렇지 않고 영원히 묻힌다면 안달이 나서 밤잠을 설치기도 한다. 어쩌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처럼 대숲에 가서 자기자랑을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정도만 해도 양반이다. 여기에서 그친다면 애교로 봐주고 빙긋 웃어주면 그만이다. 칭찬은 고래라도 춤추게 한다는데 ‘대단하십니다.’, ‘훌륭하십니다.’ 칭송하고 그 용기를 북돋아주면 된다.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데 손해날 일은 없다. 모범을 보이고 선을 권면할 수만 있다면 널리 알릴수록 좋다.


    애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속보이는 속물, 얄미운 얌체족들이 있다. 귀가 아플 정도로 자기자랑을 반복한다. 한 가지 공을 두고두고 울궈먹는다. 공은 부풀리고 내세우며 과는 축소하고 감춘다. 일하러 갈 땐 굼벵이, 밥 먹으러 갈 땐 폭주족이다. 밥상이 차려지기만 기다렸다가 입과 숟가락만 들고 달려든다. 맛있게 먹고 우아하게 커피 한 잔 한 후 설거지를 할 때 보면 언제 내뺏는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얄미운 경우가 아니라 경계해야 할 악인들이 있다. 공은 가로채고 죄는 덮어씌운다. 죄악을 덮기 위해 거짓 선행으로 위장한다. 남을 짓밟아서라도 자신의 공을 내세우려 하고 자신의 죄가 드러나면 남까지 물귀신처럼 끌어들여 죄인으로 만들려 한다.

    진정 우리가 경계할 것은 이것이다. 자선의 본질을 훼손하는 위선이다. 선행을 가장한 악행, 악행을 덮기 위한 거짓 선행이다. 선행을 보여주기 위한 예비된 악행이다. 제비다리를 고쳐주기 위해 제비다리를 분지르는 것이다.

    조폭이 불우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무기상이 전쟁고아를 위한 재단을 설립한다. 부패정치인이 더러운 돈으로 장학재단을 설립하고 자선을 베풀며 생색을 내고 인심을 얻는다. 이것은 애교도 아니고 얄미운 것도 아니고 간악한 죄다.




 

- 악행을 행할 때에는 네 양손이 하는 일을 상대가 알게 하여라 -
겉보기엔 귀엽고 선하지만 맨 얼굴로 다리를 분지르는 어설픈 악인



    벼락치기 소박한 졸부가 약간의 공명심과 사회적 인정을 받으려는 열망에 좀 오바한듯한 자선을 행하는 일은 비웃을 일이 아니라 칭송할 일이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인색한 수전노라면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하다보면 보람을 얻고 뭔가 느끼는 바가 있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의에 다가갈 수도 있다. 하지만 숨어서 베푸는 자선의 기쁨, 내 안에서 나와 하나님만이 공유하는 참 행복을 느끼기엔 아직 멀다.

    자기PR 시대라고 한다. 홍보도 중요한 능력이고 조중동 같은 나팔수들이 판세를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얌전한 것이 숙맥처럼 무시당하는 바쁜 현대사회, 착한 것이 약삭빠른 것보다 손해 보는 치열한 경쟁사회라지만 이러한 참 행복은 허풍선이, 얌체족, 성공한 악인들의 차지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마음 속 깊이 새기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자의 차지다. 예수님은 스스로 행한 선행, 이적을 동네방네 소문내지 말라고 하셨다. 다만 보이고 증거하라고 하셨다.

    사람이 인격적, 종교적으로 성숙해져 예수님께 다가가 그 분을 닮는다면 그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6장 9절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으소서.

10절

아버지의 나라가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세상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절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소서.

12절

우리에게 잘못한 사람을 우리가 용서해 준 것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13절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으로부터 구원해 주소서.’ (아버지는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멘)

 

    위선적, 형식적인 기도를 경계하신 후 예수님께서 손수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기도, 즉 ‘주기도문’이다. 그 어떤 기도도 이보다 더 아름답고 지극할 수 없다. 경건하고 진실할 수 없다. 이처럼 군더더기 없이 심오한 뜻을 담은 기도는 없다.

    기존 <개역한글>판으로 암송하다보니 <쉬운 성경>판은 왠지 낯설고 어색하다. 주기도문만큼은 <개역한글>판과 <NIV 영어 성경>판을 병기해서 각 구절별로 묵상해보도록 하자. (13절 괄호부분은 어떤 고대 사본에는 없다.)



9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Our Father in heaven, hallowed be your name,

 

    우리(Our) 아버지(Father)다. 나만의 아버지도, 너만의 아버지도 아닌, 우리 모두의 아버지다. 민족, 인종, 빈부, 계급을 떠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존귀하고 평등한 아버지의 자녀다. 아버지! 여호와나 엘로힘이 아니다. 사랑을 받는 자녀가 사랑을 주는 아빠를 친근히 부르듯 God가 아니라 Father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냉담하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한없는 사랑과 관심과 책임감을 가지신 친근한 분이시다.

    호칭에서 그 마음이 드러나고 관계가 정립된다. 우리 아버지(Our Father)에서 하나님과 우리(인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가 정립되고, 하나님의 품성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이 이미 다 드러나 있다.


    하늘에 계신(in heaven) 아버지다. 왜 하늘일까? 물론 하늘에 계시다고 해서 땅이나 바다에나 우리 곁에나... 하늘 아닌 곳에는 계시지 않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왜 굳이 ‘모든 곳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일까?

    하나님의 본성, 본 자리는 하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땅에 드리우고 우리에게 임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모든 곳에 임재하시지만 모든 곳에서 드러나진 않는다. 성령은 모든 이에게 임재할 수 있지만 모든 이가 그 성령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곳에 계시며, 성령은 모든 곳에 임재하신다.'는 말은 자칫, 온 우주와 모든 사물에 이미 신이 존재한다는 범신론(汎神論)이나 만유내재신론(萬有內在神論)으로 오해될 소지가 있다.

    세상은 선하지 않다. 균일하지 않다. 선과 악이 섞여 있고 높은 산, 낮은 언덕, 깊은 강, 얕은 개울이 함께 있다. 모든 때, 모든 곳이 거룩하고 선하고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이 지상은 저 천국이 아니다.


    성령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충분조건이라면 성령을 볼 수 있고, 받을 수 있는 우리의 자세는 필요조건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먹고 마시기에 언제, 어디서고 충분하지만 그것을 찾아먹을 수 있는 우리의 자세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 눈, 그런 귀가 우리에겐 절실하다.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절실한 것은 바로 이 땅 위로 내려오신 하나님, 우리 곁에 있는 성령을 발견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비루한 이 지상의 풀 한 포기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보고, 평범한 사람들, 하지만 의로운 사람들에게서 예수님의 품성과 성령을 발견하는 것이다. 속된 것에서 성스러움을 찾고 성스러움에서 친근한 것을 찾는 것이다. 이것이 이 지상에서 발을 뗄 수 없는 속된 우리가 성스런 하나님의 사랑과 본성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발은 땅을 딛고, 눈은 별을 바라보되, 심장은 그 중간 어디쯤에 있어야 한다.

    성부(聖父), 성자(聖子), 성령(聖靈)은 하나다. 삼위일체(三位一體)다. 하지만 지상의 우리에게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 우리가 일상에서 찾아야하는 것은 성령이다. 성부는 성령의 모습으로 오신다. 성령은 평범한 모습, 때론 세속적 인간들이 보기에 비루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오시기도 한다.


    이것이 지상에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만나는 통로다.

    이것이 지상에 있는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게 하는 길이다.



10절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your kingdom come, your will be done on earth as it is in heaven.

 

    그리하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 위에서도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왕국, 곧 하늘나라가 이 지상에서도 도래할 수 있을 것이다.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11절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Give us today our daily bread.

 

    양식(bread, 빵)이다. 왜 양식일까? 일용할 옷, 일용할 잠자리, 일용할 돈이 아니라 왜 굳이 먹는 것을 드셨을까?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가장 원초적인 것인 동시에 종교적으로는 성스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떡집, 빵집이란 뜻의 베들레헴에서 나시고 짐승의 밥통인 여물통, 곧 구유에 뉘이셨다. 스스로 먹을 것이 되시어 먹히려고 오신 것이다. 당신 스스로를 '생명의 빵'으로 비유하셨다.[요한복음 6:35] 오병이어의 이적이나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이 빵과 포도주를 자신의 살과 피로 비유하신 것과 같이 종교적으로, 먹는 것은 성물(聖物)이고 먹는 것을 나누는 행위는 성스런 의식이다.

    빵이든, 떡이든, 밥이든, 먹는 것은 숭고하면서도 비루하다. 생명을 잇는 일용할 양식은 숭고한 것이지만 식욕 그 이상을 채우기 위한 밥, 고상한 미각만을 위한 밥, 심지어 과시를 위한 밥은 엄밀한 의미에서 밥이 아니며 비루한 것이다. 예수님이 말한 ‘일용할 양식’이 숭고한 밥이다. 예수님이 신명기 8절 3절을 인용해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마태 4:4]라며 마귀를 꾸짖을 때의 빵은 비루한 밥이다.


    사람이 (육의) 빵으로만 살 수 없는 것은 맞다. 하지만 (육의) 빵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 역시 맞다. 생명을 지탱할 수 없다. (육의) 빵은 하나님이 주시는 (령의) 빵 못지않게 중요하고 신성한 것이다. 입을 것이 없다고, 살 집이 없다고 죽진 않는다. 하지만 사람이 먹지 못하면... 죽는다.

    의식주(衣食住)는 중요한 순으로 말하면 식주의(食住衣)로 고쳐 부르는 게 맞다. 먹을 게 첫째고, 비바람을 피하고 잠을 청할 거처가 둘째고, 몸을 가릴 의복이 셋째다. 하지만 과시를 위해선 의주식(衣住食), 그 순서가 거꾸로 된다. 먹는 것보다 사는 것으로 뻐기기가 쉽고, 사는 것보다 입은 것으로 티내기가 손쉽다.

    차가 끼어든다면 의차주식(衣車住食)이 된다. 옷차림, 패션 잡화로 기선을 제압한 후 고급 외제차에 태워서 70평대 아파트로 초대한다. 꽃등심, 캐비어는 기본이요 최고급 포도주에 듣보귀(듣도 보도 못한 귀한) 푸아그라까지 온갖 산해진미를 내놓으면 퍼펙트! 자랑질 풀코스 완성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세 가지 모두 필요이상으로 갖고 다니지 말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식주는 명품 의류, 비싸고 진귀한 먹거리, 크고 럭셔리한 집이 아니었다. 거처할 집은 아예 없었으며 옷은 한가지였고 먹는 것은 일용할 양이면 충분히 감사하였다.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이다. 하루 먹기엔 충분하지만 이틀 먹기엔 부족하다. 오늘 먹기엔 충분하지만 내일, 모레까진 기약할 수 없다. 탐욕을 버리고 만족함을 알라는 말씀이다. 필요이상으로 재어놓고 쌓아놓지 말라는 거다. 감사히 받아먹고 낭비하지 말라는 거다.

    아무리 소비가 미덕인 현대자본주의 경제라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은 소비가 아니라 절약이다. 먹는 것 갖고 인심 잃어서도 안 되지만, 먹는 것 갖고 허세 부려서도 안 된다. 비싼 스테이크를 매번 절반이나 남기는 것은 우아하거나 있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천박한 것이다. 스테이크 고기뿐 아니라 소스까지 싹싹 깨끗이 비우는 것은 쪼잔하거나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스러운 것이다.

    발우공양(사찰에서 스님들이 하는 식사법)의 경우 싹싹 비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릇을 깨끗이 씻어 그 물까지 마신다. 수도승이 음식을 남긴다는 것은 나태, 방종 이전에 코미디 난센스다. 먹는 것에는 숭고한 생명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불교를 막론하고 모든 종교에서 먹는 것은 성스러운 것이다.

    경제력, 인간성, 문화적 취향을 떠나 남기는 것, 과소비는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다. 먹는 것을 남기지 마라.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양식을 허투루 버리지 마라.


    무상급식 이슈로 사회가 시끄럽다. 성경을 올바로 읽은 기독교도라면 고민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은 예쁜 사람, 미운 사람 가리며 만나를 주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돈 받고 오병이어를 백성들에게 먹이지 않으셨다. 모든 백성들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같은 조건에서 먹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만 따로 추려 모아 떡과 물고기를 나눠주고 말씀을 들려주지 않으셨다. 또한 혹시 부자들의 입맛에 떡과 물고기가 맞지 않지 않을까 저어하여 따로 케이크와 꽃등심을 주시거나, 차라리 나가서 네 돈 내고 네가 먹고 싶은 것 사먹고 들어오라고 하지 않으셨다.

    만나, 오병이어,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용할 양식, 빵과 떡은 단순한 먹거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에 대한 차별 없는 보편적 사랑이 담긴 가장 성스런 것들이다.

    전 국민에게 무상주거, 무상의복을 시행한다는 것은 우리의 능력 이상의 뜬구름 잡는 먼 얘기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라나는 어린세대에게, 먹는 것만큼은 눈치 볼 것 없이 너나없이 어울려 함께 먹게 해주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고 의미 있는 일이다.

    혹 무상급식은 하나님, 예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인간이 하려하는 교만이고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반대하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것은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적인 것이라고 반박하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바리새인이다. 이런 주장이 바로 형식주의 주장이다.

    먹고 사는 문제, 먹거리를 통해 사랑을 나누고 자녀세대를 양육하는 문제를 이념의 문제, 정파적 유불리의 입장에서 정치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반대하시는 기독교도들은 정치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차라리 종교적으로 접근하기를 권해본다. 무상급식에 부정적, 미온적인 두 분 장로 대통령님들에게 이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다.

    무상급식은 종교적, 기독교적으로 절대로 옳다. 하나님의 뜻과 의에 절대로 부합한다.


    ※ 먹거리, 무상급식과 관련해선 도덕, 당위론적 측면 / 교육적 측면 / 일의 효율과 비용의 측면에서 이미 예전에 살펴보았기에(☞ 무상급식-밥 먹이고 합시다. 참조) 글이 너무 길어지고 옆으로 셀 것 같아 여기서 줄이자.



12절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For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debt는 빚, 부채다. debtor는 빚진 사람, 채무자다. 거칠게 직역하자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사람들을 용서해(탕감해) 준 것같이 우리가 진 빚들을 용서해(탕감해) 주옵시고’가 된다. 의아해서 KJV, ASV 영어성경도 찾아보았지만 역시 debts, debtors다. 빚(debt) 진 것을 죄(sin or crime) 진 것으로 비유할 수도 있으나 이 둘은 사뭇 그 느낌이 다르다. 왜 굳이 빚(debt)으로 표기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채권채무관계, 계약관계로 많이 설명하고 있다.

    용어에 따라 느낌이 틀리듯이 순서를 바꾸어도 느낌이 틀리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 것같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할 수 있게 하옵시고’는 같으면서도 틀리다. 전자는 우리 죄를 사함받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것같이 우리 역시 이웃의 죄를 용서하기를 다짐하는 쪽에 가깝다.


    자기 죄는 용서받기를 바라도, 남의 죄는 용서하기 힘들다. 자기 빚은 탕감받기를 원해도, 남의 빚은 탕감해주지 않는다.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고, 자기 짐이 더 무겁게 느껴진다. 남의 눈에 든 것은 들보요, 자기 눈에 든 것은 티끌이다. 남에게는 엄격, 가혹해도 자기에겐 한없이 관대하다. 이것이 보통사람들의 심리요, 행동방식이다. 나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않다.

    받기 전에 주는 것, 만들어 놓은 걸 먹기 전에 남이 먹을 걸 만드는 것, 용서받기 전에 용서하는 것, 비난하기 전에 이해하는 것, 미워하기 전에 축복하는 것, 남보다 자신에게 더 엄격한 것... 어려운 일이다.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만일 너희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마태 6:14]

    하나님의 죄 사함을 받은 자는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할 의무가 있다.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한 자는 하나님의 죄 사함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다.



13절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And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the evil one.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temptation은 유혹이다. 윤리적, 종교적 시험이다. 테스트나 평가와 같은 단순한 시험과는 다르다. ‘the T~'은 광야에서 예수님이 마귀로부터 받은 시험을 말한다.

    temptation이든 test든 시험 좋아하는 사람 없다. 학업을 마친 후에도 얼마동안 시험치는 악몽을 꾸었던 기억이 난다. 째깍째깍 시간은 얼마 안 남았는데 문제는 1,2번을 풀고 있다. 안절부절, 눈앞이 하해지고... 하나둘 교실 문을 나가고... 혼자 남은 내게 감독관이 답안지를 가지러 다가온다. 악몽도 그런 악몽이 없다.

    원래 마음이 어둡고 나약한 자, 악보다 권태를 못견뎌하는 자라면 스스로 유혹(temptation)을 환영하고 기꺼이 빠져들겠지만 그 결말 역시 언제나 파멸과 타락의 새드엔딩인 것은 마찬가지다. 떠 보는 것을 당하는 것, 남으로부터 평가받는 것, 유혹을 받는 것은 나의 나약함과 불완전함을 전제로 한 시험이기에 어느 것이든 유쾌하지 않다. 괴롭다.

    유쾌하지 않지만.. 괴롭지만.. 어쩔 수 없다.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은 나약하고 불완전하며, 세상은 위험과 유혹이 도처에 널려있다. 극복하고 뿌리쳤더라도 temptation도 test도 끊임없이 계속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고 기도하는 수밖에는 없다. 매일. 항상. 언제나. 끊임없이.

    어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으니(12절), 오늘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혹 내일 우리가 시험에 든다면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13절)


    여기서 ‘but’은 ‘그러나’가 아니라 ‘다만’이다. 간절함의 강조다. (원)죄 많은 인간으로서,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영광과 권세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악에 빠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유혹에 물들지 않기를 기도할 따름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복을 빌지 않으신다. 축복과 영광을 달라고 기도하지 않으신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영원히 아버지의 몫이다. 우리를 ‘다만’ 악에서 구하옵고, 영광은 ‘다만’ 아버지께 돌릴 뿐이다.

    주여! 저희를 ‘다만’ 긍휼히 여기소서. 저희를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악에 빠진 저희를 ‘다만’ 구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의 영원함을 가지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들려주시기 전에 피해야 할 기도에 대해 말씀하셨다.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이나 길모퉁이에 서서 하는’[6:5] 위선적인 기도,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되풀이하는’[6:7] 말만 많은 무의미한 기도는 하지 말라 하셨다.

    주기도문은 위선적이지 않고 진실하다. 무의미하지 않고 속이 꽉 차 있어 어느 한 구절, 한 단어 버릴 것이 없다. 문장이 힘이 있고 권위와 품격이 있으면서도 쉽고 소박하다. 하늘의 아버지를 간절히 부르면서도 허황되게 정신이 허공에 둥둥 떠 있지 않다. 땅 위의 우리가 실생활의 규범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이 실용적이다.

    비교불가의 완전한 기도(문)다.



6장 19절

너희를 위하여 세상에 재물을 쌓아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훔쳐갈 것이다.

20절

그러므로 너희의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어라. 하늘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지 않으며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할 것이다.

21절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For where your treasure is, there your heart will be also.

24절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길 수 없다.

You cannot serve both God and Money.

 

   주기도문의 ‘일용할 양식’과 일맥상통한다. 탐욕을 버리고 필요이상으로 쌓아놓지 말라는 말씀이다. 숨어서 선을 행하는 것처럼 재물을 하늘에 쌓는 자만이 최고의 행복을 차지할 수 있다.

    19, 20, 21절의 재물은 영문판 모두 treasure다. 24절의 재물은 NIV는 money고 KJV, ASV는 mammon이다. treasure는 보물, 보배다. 애지중지 아끼며 비장하고픈 것이다. money는 돈이다. mammon은 물신(物神)이다. 각기 그 뉘앙스가 다르다. 돈, 재물, 보배 중 돈이 가장 가시적이고 보배가 가장 추상적이다. 예수님은 treasure(보배)는 긍정적으로 money, mammon(돈, 재물, 물신)은 부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쉬운 성경>은 뭉뚱그려 보다 가치중립적인 ‘재물’로 번역하고 있다.


    엄밀히 얘기해서 땅에 쌓으려는 것과 하늘에 쌓으려는 것은 다르다는 거다. 땅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훔쳐갈 것, 곧 돈(money)이고 물질(mammon)이다. 하늘에서는 좀이 먹거나 녹슬지 않으며 도둑이 들어와 훔쳐 가지도 못할 것, 곧 보물, 보배(treasure)가 된다.

    땅 위의 보이는 것과 하늘 위의 보이지 않는 것, 무엇이 더 부질없는 것일까. 마몬(mammon)에 경도된 이들은 악착같이 땅 위의 보이는 것을 추구한다. 하지만 결국 좀이 먹거나 녹슬어 못 쓰게 되고 도둑이 훔쳐갈 것들이다. 종국에는 연기처럼 사라질 것들이다. 어리석은 자는 팔짱끼고 지내다 굶어죽는다고 하지만, 바람을 잡고자 두 손 벌려 수고하는 것보다는 한 줌으로 만족함이 더 낫다.[전도서 4:5,6]

    하나님을 믿는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들은 땅 위의 것에 집착하면 안 된다. 마몬에 사로잡히면 안 된다. 만족함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의를 이루어 하늘에 보배를 쌓는 것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하늘에 쌓는 재물, 보배(treasure)는 자선, 선행, 사랑의 추상적인 것만 가리키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세상 모든 것에는 돈이 오고간다. 자선, 선행,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널 사랑하는 내 마음 알지!’, 달콤한 립서비스만으로는 영양가 없다. 말이야 사기꾼, 바람둥이가 오히려 더 잘한다. 실지로 돈이 오고가는 것으로 그 마음을 알 수 있다. 그 진심을 측정할 수 있다.

    네 재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돈이 모든 것을 말한다. 돈이 향하는 곳에 사랑이 있다. 돈이 모이는 곳에 권력이 있다. (검은) 돈이 흘러들어간 곳에 범죄의 단서가 있고 범인이 있다.

    Just Follow the Money!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 사건을 제보한 딥스로트가 <워싱턴 포스트> 밥우드워드 기자에게 한 말이다. 사랑도 마찬가지. 범죄도 마찬가지. 정치도 마찬가지. 돈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흐름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디서 걷어서 어디에 쓰는지가 중요하다. 돈 씀씀이를 보면, 사람이라면 생활패턴, 취향, 인간성까지 알 수 있고 정권이라면 누굴 위한 정권인지 정권의 본질, 정체가 드러난다.

    4대강? 우리들 호주머니에서 나와서 건설회사 금고로 들어간다! 무상급식? 우리들 호주머니에서 나와서 우리 아이들 입으로 들어간다! 또 글이 옆으로 세는데...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 강행이요, 오세훈 서울시장은 무상급식 태클이요... 요새 돌아가는 모양을 보면 하도 답답하고 화가 나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 하셨는데... 하지만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의 돈 씀씀이, 재정운용을 보면 위험수위다. "부족한 자에게서 먹을 것을 빼앗아, 부유한 자에게 보태어 주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예수님 말씀과 가장 가까운 겸애사상을 주장한 묵자(墨子)의 말이다.

    재물을 그르게 쓰며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사람들, 하나님과 재물을 같이 섬기는 기독교도들이 너무 많다. 경계할 일이다.

 


6장 25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느냐? 몸이 옷보다 훨씬 소중하지 않느냐?

27절

너희 중에 누가 걱정해서 자기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있느냐?

29절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에 견줄 만큼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보지 못하였다.

31절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33절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아버지의 의를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덤으로 주어질 것이다.

34절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고, 오늘의 고통은 오늘로 충분하다.

 

    걱정도 종류가 있다. 내몰려 하는 걱정도 있고 사서 하는 걱정도 있다. ‘먹을 수나 있을까?’, ‘마실 수나 있을까?’ 혹은 ‘입을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있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는 걱정도 있다. - 하지만 31절 말씀은 뒤이은 32, 33절 말씀으로 볼 때 문맥상 사서 하는 걱정보다 내몰려 하는 걱정 쪽에 가깝다.

    절대 빈곤과 행복한 고민이다. 절박한 걱정과 럭셔리한 걱정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자 혹은 후자의 걱정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으나, 빈자든 부자든 사람의 고민과 걱정은 대개 이 둘 중의 하나다. 내 판단에 예수님의 말씀은 이 둘을 포괄한다.


    먹는 것은 굶주림을 채우면 족하고, 마실 것은 목마름을 채우면 족하고, 입는 것은 몸을 가리고 깨끗하면 족하다. 그 이외의 걱정은 쓸데없는 걱정이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탐욕스런 걱정이거나 헛되이 우리의 정신을 소모시키고 방황케 하는 무의미한 걱정이다.

    굶주림을 채울 것이 없고, 목마름을 채울 것이 없고, 몸을 가릴 것이 없다.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당장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데 진선미(眞善美)는 무엇인가! 인간의 이상(理想)은 무엇이고, 하나님의 의로움은 무엇인가! 저차원의 비루한 걱정이지만 눈물겨운 걱정이다.




 

리히텐슈타인 작품 <행복한 눈물>을
‘어디에 감출까’하는 어느 재벌 회장님의 ‘행복한 걱정’



    예수님은 탐욕스런 걱정, 무의미한 걱정을 경계하시며 눈물겨운 걱정, 절박한 걱정을 위로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은 경계의 뉘앙스보다 위로의 뉘앙스다. 복음이요, 희망이다. 그리고 산상설교중이시다. 산 중에 모인 대중의 대부분은 힘없고 가난한 백성들이었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다 잘 될 것이다. 너희들이 믿고 따르면 하나님이 다 주실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이다. 탐욕스런 걱정, 행복한 고민들이 심심찮은 지금과 비교할 수는 없다. 예수님이 못박히신 후 로마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나눠가졌다는 것은 옷, 옷감이 당시에 상당히 귀한 재산이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몸을 가리는 것 자체가 결코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만 해도 불과 삼사십년 전인 1970, 80년대에는 빵꾸난 양말을 기워 신고 대부분의 성인들이 단벌신사였다.

    이런 걱정, 저런 고민 다 필요 없다. 어떤 걱정도 자기의 수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할 수 없다. 오직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그 안에서 평안을 얻을 수 있으리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태 11:28] 그러므로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고, 오늘의 고통은 오늘로 충분하다.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쾌활하고 낙천적이시다. 하지만 가볍거나 허황되지 않으시다. 진실하지만 답답하지 않으시고, 진지하지만 완고하지 않으시다. 그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시니 그 안에서 내 영혼이 쉼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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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는 마태복음 6장 3, 4절과 관련하여 2013/09/26 추가함



PS 1 : 예전에 목사님이 설교 중에 들려주신 이야기.


    한 우동집에 행색이 초라한 앞 못 보는 사내가 그의 아들, 딸로 보이는 아이 두 명의 부축을 받고 들어섰다. 사내는 가진 돈이 없으니 나눠먹을 수 있도록 우동 한 그릇과 빈 그릇 두 개를 달라고 하였다. 이를 불쌍히 여긴 가게 안주인이 남편인 우동집 사장에게 한 그릇 값만 받고 세 그릇을 주자고 하였지만 남편은 주문한 대로 우동 한 그릇과 빈 그릇 두 개를 내오는 것이었다. 안주인이 “뭔 돈 욕심이 그리 많아 야박하게 구느냐!”고 남편에게 한 마디 하자... 남편이 말하길... “온정을 베풀어 배고픔을 덜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존심을 지켜주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안주인이 살펴보니 남편이 내온 한 그릇 안에 세 그릇 분량의 우동이 넘쳐나게 있었다는...


    사랑과 동정과 자선을 베푸는 것도 세심해야 한다.

    자존심, 받는 사람의 처지와 감정까지도 살펴야 한다.

    주기 좋게 주는 것이 아니라 받기 좋게 주어야 한다.



PS 2 : 목사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아마도 앞 못 보는 아버지와 허기진 아이들은 우동을 배불리 먹고 우동집을 흐뭇하게 나섰을 것이다. 우동집 사장과 안주인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숨어서 베푸는 사랑과 자선의 참 행복을 맛봤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선 아름답고 감동적인 해피엔딩만 있는 것이 아니다.


    식사를 끝낸 사내가 돈을 지불하며 옆집에선 공짜로 먹여줬는데 여긴 인정머리 없이 제 값 다 받는다고 투덜대며 침을 뱉고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간다면... 짜다, 맵다, 벌레가 들어있다, 온갖 트집을 잡으며 가게를 소란스럽게 한다면... 가고 보니 오천원 내고 만원 훔쳐간 가짜 장님, 가짜 자식들의 도둑무리였다면...

    고마움을 표하기는커녕 선의를 악의로 갚는다면 괘씸하기 짝이 없다. ‘거지XX’, ‘깡패XX’, 육두문자를 날리며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다. 한 성질 하는 사람이라면 버르장머리를 고쳐놓는다고 뒤쫓아 가서라도 무전취식, 절도죄로 고발해 집어넣으려 한다. - 과연 이 우동집 사장님은 다음에도 이런 자선을 베풀 수 있을 것인가?

    감동적인 미담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왜 이리 부정적인가. 이야기가 전혀 아름답지 않아 받았던 감동이 일순 사라지고 기분 더러워졌지만 현실에서 전혀 상상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약하고 가난한 것이 곧 선하고 순박한 것이 아니고 강하고 부자인 것이 곧 악하고 탐욕스러운 것이 아니다. 강약과 선악은 다른 개념이다. 오히려 약할수록 비뚤어지기 쉽고 비뚤어지면 악의 유혹에 더 취약해진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사람은 더 비루해지고 더 비굴해지고 더 비열해질 확률이 크다. 그것은 어찌 보면 그들만의 생존술의 방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환멸을 일으킬 정도로 비굴하던지, 살의를 일으킬 정도로 비열하던지, 그들이 비참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들은 ‘레미제라블’이다.

    무엇인가? 진정한 선의와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한다는 것이다. 그 대상을 가리지 말아야 하며 아무 대가나 조건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랑질하기 위함도 아니고 대접과 칭송을 받기 위함도 아니며 남몰래 뿌듯함을 느끼기 위함도 아니고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상급을 은연 중 바라고 하는 것도 아니다. 선의와 사랑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는 주님의 가르침이지 주님께 인정받아 천국행 티켓을 예약하기 위함이 아니다.

    무조건, 무조건이다. 이것이 순도 100%의 완전한 사랑이다.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예수님의 절대사랑이다.


    이것은 내가 쓰면서도 내가 듣기에 거북한 지극히 오만한 도덕선생의 훈장질이다. 나 역시 불완전한 인간, 평범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들에겐 매정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주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이고 주님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주님의 말씀이 대개 이렇다. 간단치가 않다. - ‘아무도 너의 구제함을 모르게 하여라.’ 기와 조각으로 긁고 싶을 정도로 말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합니다. ‘원수를 사랑하여라.’ 처자식 사랑하기에도 힘에 부칩니다.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대주어라.’ 조건반사적으로 주먹이 먼저 올라갑니다. ‘1.5킬로미터 동행을 요청받거든 3킬로미터를 동행해 주어라.’ 일분일초라도 같은 공간에 있기 싫은 얄미운 사람입니다. ‘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주님~ 제게 고통을 주시려 오셨습니까!...... ㅠ.ㅠ


    인간은 무슨 보람으로 선행을 하고 의로움을 지켜야 하는가?......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이것 외에 딱히 이유가 없다. 기대도 보람도 없이 최대한의 선을 행하라. 세상이 알아주던지, 주님의 상급을 받던지, 그건 다음의 일이다.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오늘 베푼 자선을 내일 잊어버려라. 아무 기대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선을 행하고, 너를 포함하여 아무도 너의 구제함을 모르게 하여라. 그러면 굳이 바라고 졸라대지 않아도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PS 3 : 6장 3,4절과 비슷한 맥락의 구절을 <논어(論語)>에서 찾아본다면...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 不亦君子乎) :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서운하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