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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5 : 누가복음 2장, 7장

어멍 2011. 7. 23. 23:42
 

    성경읽기 0085 : 누가복음 2장, 7장



    저자 : 누가(Luke).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하다.

    주요 인물 : 예수님, 세례 요한, 빌라도, 예수님의 제자들.

    기록 목적과 대상 : 로마 관리였던 데오빌로와 낯선 땅에서 어렵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던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을 정확히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복음서로 예수님은 유대민족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구세주심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의 65%는 마태, 마가와 중복되며 35%는 중복되지 않고 누가에서만 보인다.



2장 7절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첫아들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습니다. 그것은 여관에 이들이 들어갈 빈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8절

그 근처 들판에서 목자들이 밤에 양떼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10절

천사가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 마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

11절

오늘 다윗의 마을에 너희를 위하여 구세주께서 태어나셨다. 그는 곧 그리스도 주님이시다.”

13절

갑자기 그 천사와 함께 많은 하늘 군대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14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예수님의 탄생이다.

    로마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칙령을 내려 제국내의 모든 이에게 호적 등록을 하게 하였다. 갈릴리 나사렛에서 살고 있던 요셉도 마리아와 함께 유대지방에 있는 다윗의 마을, 곧 베들레헴으로 향한다.

    호적 등록을 위해 온 나그네들이 많았던 것일까. 원래 변변한 숙소조차 없는 보잘 것 없는 작은 마을이어서였을까. 요셉 일행은 빈 방을 구하지 못하고, 마침 출산이 임박한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을 낳아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놓는다.

    천사로부터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기쁜 소식을 들은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고 경배드린다.




귀도 레니(Guido Reni) <목동들의 경배(The Adoration of the Shepherds)> 중 일부분



    기쁘다! 구주 오셨다! 하늘엔 하나님께 영광, 땅에는 우리에게 평화!

    구유에 뉘여 나신 후 당나귀를 타고 오신, 온유하고 겸손한 예수님께서 오셨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후 부활하여 승천하신, 사랑과 능력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7장 31절

이 세대의 사람들을 무엇에 비교할 수 있겠느냐?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절

이들은 시장에 앉아 서로 부르며 ‘우리가 너희를 위해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았다. 우리가 울어도 너희가 울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33절

세례자 요한이 와서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다. 그러자 너희들은 ‘저 사람은 귀신이 들렸다’라고 말한다.

34절

인자가 와서 먹고 마셨다. 그러자 너희들은 ‘봐, 저 사람은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구나’라고 말한다.

35절

그러나 지혜는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예수님이 악하고 비루한 세대를 한탄하며 하시는 말씀이다.

    그들은 욕심이 많고 고집이 세다. 몽매한 아이들처럼 자기중심적이다. 자신이 피리를 불면 듣는 사람들은 춤춰야 하고, 자신이 울면 남들도 따라울어야 한다고 여긴다. 금식한다면 금식했다고 뭐라 하고, 먹고 마시면 먹고 마셨다고 뭐라 한다. 결국 이유는 없다. 이래도 저래도 저들은 욕한다. 왜? 밉기 때문이다! 미움에는 이유가 없다. 미운 놈 이쁜 점 없고, 이쁜 놈 미운 점 없다. 며느리가 미우면 며느리 발뒤꿈치도 밉다.


    세리(세금 관리)는 죄인인가? 왜 죄인과 같이 취급되며 언급되는가?

    죄인에 버금가게 백성들로부터 부정적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지금도 세금 좋아하는 사람 없고, 세무공무원 환영하는 사람 없다. 더욱이 당시 유대 땅은 로마의 반식민지였다. 동족이면서도 로마를 위해 세금을 걷는 일을 하는 세리를 좋게 보았을 리 없다. 게다가 그들 모두가 공명정대하거나 청렴한 관리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로마에 내야 할 세금에 흔히 자신들을 위한 플러스 알파를 더하였다.

    당시, 세금 걷는 권리는 구역별로 매매가 가능했다고 하니 투자(!)한 것보다 더 뽑아 먹으려 했을 것임은 당연하다. 분명 권력을 휘둘러 무리하게 세금을 걷거나, 뒷구멍으로 치부하는 자가 있었을 것이다. 과장하여 비유하자면 일제 식민치하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에 근무하며 동족의 고혈을 빨아 자신의 재산을 불리던 조선인 돈벌레, 일제 고등형사로 동족을 잡아 족치고 고문하던 악질 친일경찰이라고도 볼 수 있다.

    지금도 세무공무원들의 부패가 많고 그 덩어리가 크듯이 당시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세리 중 가난한 자는 없다. 일제 때 총독부, 경찰에 근무했던 조선인 중에 가난한 자는 없었다.


    앞서가면 튄다고 하고, 뒤처지면 몸 사린다고 하고, 왼쪽으로 가면 좌파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가면 우파라고 하고, 가만있으면 게으르고 우유부단하다고 한다. 모든 판단이 자기중심적이다.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타인에게 자신의 기준, 자신의 가치관만을 강요한다.

    경계병은 경계병의 역할, 궁수는 궁수의 역할, 기병은 기병의 역할이 있다. 전투에 지고 있다고 종군기자보고 소총을 들라고 할 수는 없다. 앞서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뒷치다거리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도, 가운데서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이리 와라, 저리 와라. 이게 옳다, 저게 옳다. 시끄럽다. 갑론을박, 중구난방... 정신이 없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이 주장과 저 주장이 부딪혀 상쇄되고, 이 소리와 저 소리가 뒤섞여 웅얼거린다.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소리 있는 침묵이다. 무의미하다.

    이 의미 없는 아우성에 방향을 제시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전장의 북소리, 새벽의 나팔소리 같은 울림이 큰 위엄있는 신호다. 큰 스피커에서 나오는 큰 목소리다. 현대에 있어서는 언론과 미디어다. 하지만 이 스피커가 고장났다면, 소리만 크지 찌직거리는 찢어진 소리, 깽깽대는 양철깡통 두드리는 소리만 내거나 대중을 헷갈리게 하는 잘못된 신호만을 주구장창, 의도적으로 내보낸다면 없는 것만 못하다. 시간은 걸리더라도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모여 스스로 방향을 잡고 물결을 이루는 것을 기다리는 편이 오히려 더 낫다.

    고만고만한 목소리들이 방향을 잡지 못하고 재잘재잘 떠들어대기만 해서는 소음에 그칠 뿐이다. 노이즈 마케팅에 이용되는 시선 끌기, 성동격서의 발목 잡아두기,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미로에 갇힌 진빼기에 불과하다. 올바른 말씀, 가치가 통하지 않을 때 사태를 결정짓는 것은 오직 힘이다. 권력이다.

    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요, 눈 있는 자는 볼 것이요, 입 있는 자는 떠들 것이요, 힘 있는 자는 결정할 것이다.


    그래서 악한 권력은 대중들에게 흥밋거리를 준다. 다툴 거리를 던져 준다. 상대를 속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상대를 혼란시키고 지치게 하기 위해 상반된 신호, 모순된 신호를 동시에 주기도 한다. 일부러 안하던 짓을 하기도 하고 지들끼리 역할을 분담하여 치고받고 한바탕 쇼를 하기도 한다. 남는 건... 없다. 결론은... 없다. 지리멸렬, 용두사미... 그저 끊임없이 윙윙거리는 소모전일 뿐이다. ‘상대를 설득할 수 없다면 상대를 혼란시켜라.’ - 트루먼

    당시의 제사장, 율법학자, 왕과 귀족들은 힘 있는 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미워했다. 그들이 이런 정치술, 정보전에 입각해 백성들을 소외시켜 묶어두었는지, 또는 선동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미워한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예수님은 그들에겐 오랜 세월 갈등을 심화시켜 온 오래된 적이었다.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최대의 당면한 적이었다.

    예수님을 못박으라고 주장했던 숱한 백성들 역시 분명 예수를 미워한 이유가 있다. 제사장, 율법학자들의 선동에 넘어갔던지, 잘 난체 하는 예수님이 꼴 뵈기 싫었던지... 영악하던지, 어리석던지, 못났던지... 그들 모두에겐 각자의 이유가 있다.

    며느리 뒤꿈치가 미운 것은 필경 무슨 다른 이유가 있어서다. 미움에는 이유가 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왁자지껄 상인들의 시끄러운 소음, 웅성웅성 학자들의 지루한 토론, 속닥속닥 여인들의 은밀한 수다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바른 말, 옳은 주장을 알아볼 수 있을까? 증명할 수 있을까? 거짓말과 참말, 감언이설과 충언을 구별하고 못된 며느리와 착한 며느리, 사기꾼과 진실한 사람, 가짜와 진짜를 분별할 수 있을까? 어떻게 속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속아도속아도 또 속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혜로운 사람은 말 씀씀이와 겉모습만 보고도 그 패턴을 살펴 콕 집어 미리 알아볼 수도 있다. 하지만 한계가 있다. 모든 사람이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지혜로운 사람도 고수가 있듯이 사기꾼, 거짓말쟁이들 중에도 고수가 있다. 결정적인 순간의 결정적인 행동은 언제나 거짓이 없지만 그 순간은 대부분 너무 늦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다반사요, 한탄하고도 또다시 말로 현혹하고 말에 현혹되는 것이 되풀이되기도 한다. 말은 말로서 증명되지 않는다. 행동으로 증명된다.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 의해 증명된다.

    “지혜는 그것을 따르는 자들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 예수님의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권능에 의해서 증명됐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것을 따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의해서 옳다는 것이 증명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