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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46 : 전도서 4장(4절)~5장

어멍 2010. 12. 26. 19:03
 

    성경읽기 0046 : 전도서 4장(4절)~5장



4장 4절

또 살펴보니, 모든 수고와 성취는 이웃에 대한 시기심에서 발생하였다. 이것 역시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허무한 일이다.

5절

어리석은 자는 팔짱끼고 지내다 굶어 죽는다고 하지만,

6절

바람을 잡고자 두 손 벌려 수고하는 것보다는 한 줌으로 만족함이 더 낫다.

 

    배 고픈 것은 참지만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고 시기심, 경쟁심, 질투심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다. 때로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에너지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을 불태우는 화염이 되기도 한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에너지가 되던 화염이 되던 모두 허무하다는 거다. 굳이 말하자면 이웃을 이기려고, 아등바등 바람을 잡으려고 수고하는 것보단 스스로 만족함을 아는 것이 더 낫다는 거다.

     성경은 사유재산제도를 인정하고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기심, 경쟁심, 호승심 역시 인정한다. 하지만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은 인정한다는 것뿐이지 긍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가끔 이것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될 수는 있겠지만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역사와 문명을 발달시킨 원동력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경마저도 그것을 인정한 양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간성에 내재된 본성으로서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지 결코 권면하거나 지고지순한 절대선으로 긍정하는 것은 아니다.

    악하고 권세 있는 자가 질투심과 열등감에 사로잡힌다면 ‘죄가 없는 자를 처벌하거나, 존귀한 사람을 정직하다고 해서 때리는 죄’를 범할 수 있다.[잠언 17:26] 분노는 잔인하고 화는 사람을 삼키지만, 질투처럼 파괴적이지는 않다.[잠언 27:4]



5장 10절

돈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돈에 만족하는 이가 없고,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치고 자기 수입에 만족하는 이가 없다. 이것 역시 허무한 일이다.

12절

노동자는 적게 먹든지 많이 먹든지 잠이 달콤하지만, 부자는 재물이 많으므로 걱정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10절은 지당하신 말씀이나 12절 말씀은 좀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근대 이전의 소박한 자급자족식 농경사회에서 노동의 몫은 대부분 노동자의 것이었다. 해가 뜨면 일어나 해가 질 때까지 밭을 갈며 땀을 흘리다 보면 추수를 맛보고 보람을 얻는다. 자신의 수고로 자신을 먹이니 자신이 소외되지 않고 걱정거리가 없다. 적게 먹든 많이 먹든 편안하고 달콤한 잠을 잘 수 있다. 건강한 노동, 아름다운 땀방울이다.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경지다. 일 년 농사지어 자식새끼들 먹이고 씨종자를 얻기만 하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반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노동, 또는 노동을 제공하는 노동자는 상품으로서 취급되고 그 가치가 결정된다. 노동은 노동자 본인의 것이 아닌 사용자의 것이다. 돈 주고 산 것이다. 인간이 소외되고 시장에는 돈과 상품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 가격은 (생활비에 비해) 생각보다 저렴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육체노동만으로는 주거비에 교육비에 식비까지, 4인 가족을 먹여 살리기가 만만치 않다. 문화, 여가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 워킹 푸어(Working Poor)다.

    혼자 산다면야 모를까 안빈낙도는 이상적인 낭만일 뿐이다. 딸린 식구가 있다면 자신의 취향, 철학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것을 찬미하더라도 타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권할 수는 없다. 연봉이 얼만지 차가 무언지 꼬치꼬치 알고 싶어 하는 것도 속물근성이지만 가족들을 헐벗게 하고 음풍농월(吟風弄月)하며 안빈낙도(安貧樂道)하는 것도 보기에 아름답진 않다.

    안빈낙도도 한계가 있다. 적게 먹는 것도 한도가 있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는 달콤한 숙면은커녕 잠을 청하기조차 힘들다. 아무리 육체가 건강하고 성품이 낙천적이더라도 일거리가 없으면 건강한 노동도 의미 없고 땀방울을 흘릴 일도 없다. 얼마못가 생활고에 지쳐 정신마저 피폐해진다. 배는 고프고 밤은 깊어가고 내일은 일거리를 얻을 수 있을까, 둘째 녀석 크레파스를 사줘야 되는데... 심란하다.




영화 <모던 타임즈> - 안빈낙도는커녕 허리한번 펴기도 빠듯하다.



    부자는 어떤가. 부자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도둑이 들지 않을까. 힘센 권력자에게 빼앗기지는 않을까... 부자 나름대로 걱정거리가 많다. 그래서 박정희, 전두환씨에게 타의로 뜯기고 자의로 바쳐온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은 손수 대통령이 되려고도 했었다.

    결국 객관적인 돈의 많고 적음보다 주관적인 만족감이 훨씬 중요하다는 거다. 그렇다고 참치캔 하나만 던져주고 만족하라고, 행복하라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객관적, 주관적 기준을 떠나 절대적 기준이라는 것이 있다. 최소한의 생계비용이 있다.


    지난여름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이 ‘최저생계비 한달나기 희망 UP 캠페인’에 참가하여 “6,300원으로 황제 같은 생활을 했다”는 등의 표현을 쓴 수기를 올려 구설수에 오르고 사과한 적이 있다. 그럼 나는? 황제 할애비 정도 되나. 황제 위가 없으니 마땅한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재벌 회장님께서 갈비를 뜯으시며 양념치킨에 푸념하는 노동자들에게 ‘나 어릴 적엔 그것도 없어서 못 먹었다’고 타박하는 것과 매일반이다.

    문제는 이런 식의 인식, 사고방식이 우리사회에 횡행한다는 거다. 최근에 있었던 이명박 대통령의 ‘우리 한국도 복지국가’란 발언도 이런 사고의 연장선상에 있다.


    한나라당으로 대표되는 6,70대 노년층, 부유층, 보수기득권층의 사고가 대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옛날에 비하면 천국이니 감지덕지하라는 거다. 먹여줬으면 감사하고 배부른 줄 알라는 거다. 좀 극단적, 자의적으로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요새 젊은 것들 게으르고 허약해. 몸집만 컸지 체력도 약하고 정신은 더 약해. 노는 날이 너무 많아. 공휴일을 확 줄이던지 해야지. 맨날 컴퓨터 앞에 죽치고 앉아 있고 힘들고 더러운 일 피하려고만 하지 몸을 놀리지 않아. 땀이라도 흘려봤나’

    ‘하면 된다!’ - 사회생활도 스포츠도 그 놈의 정신력을 몇십년째 울궈먹고 있다. 정신력을 집중해서 눈동자에 불꽃을 점화하면 상대가 브라질 국대라도 오금을 못 펴는 오합지졸로 돌변하는가. 뻥축구가 아트사커가 되고 날아오던 포탄이 비실비실 뚝 떨어지기라도 하는가.

    이명박 대통령은 한 술 더 뜬다. 바로 ‘말하면 된다!’다. 남북갈등이 최고조로 달했는데 ‘통일이 가까워졌단다.’ OECD 국가 중 복지비 지출이 꼴찌에서 두 번째인데도 ‘한국은 복지국가란다.’ 4대강 반대 국민여론을 보고선 ‘해놓으면 좋아할 거란다.’ 그 외 숱한 식언이 있지만 문제가 되면 ‘오해란다.’ 단지 ‘진의가 잘못 전달된 것’이라고 ‘말하면 된다.’ 뭐든지 립서비스! 입으로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사흘 밤낮을 먹고도 남을 떡을 만들 수 있고 세계정복도 가능하다.




이거슨 현실이 아닌 만화! 정신력이 아닌 초능력!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프로그래머를 한가하니 쉬고 있다고 닦달하고 바지를 걷고 들에 나가 땀 흘리며 삽질을 해야 건실한 청년, 부지런한 인재로 인정한다. 건강한 노동을 권장하는 것을 넘어 삽질을 옹호하고 자연스레 개발주의에 경도된다. IT, BT, 녹색성장은 구한말 조선백성에게 소개된 전화기처럼 생소하고 낯선 것일 뿐이다. 이해난망이다. 한나라당이 아무리 인터넷, 디지털에 공들이고 투자를 해도 안 되는 것이 이 때문이다. 그들의 두뇌에 개념을 탑재하기에는 서로 구조가 맞지 않다.

    4대강에 대해 한나라당 성향의 어르신들이 반신반의하면서도 적극 반대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녹색성장이라는 이명박 정권의 홍보를 믿어서가 아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이 토목개발이기 때문이다. 땀 흘리는 삽질이기 때문이다. 일자리가 생기고 돈이 돌아 경기가 사는 유의미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삽질이기만 해도 다행이다. 엄밀히 얘기해서 삽질이 아닌 포크레인질이다. 토목사업도 삽 들고 마을 길 닦던 예전의 토목사업이 아니다. 건설회사 몇몇, 정치인 몇몇, 덕 보는 이는 극히 한정되어 있다.

    돈이 아래로 퍼지는 쪽이 아니라 위로 몰리는 쪽에 가깝다. 돈이 서민들 통장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재벌빌딩 금고로 고이는 것에 가깝다.


    너무 터무니없는 얘기인가. 허무맹랑한 전개인가. 한국사회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 자체가 허무맹랑하지 않은가. 4대강, 대포폰, 연평도, 보온병에, 오세훈 서울시장의 급식 반대 어린이 누드 광고에,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의 ‘여자는 자연산이 좋다’ 발언에, 이명박 대통령의 ‘한국은 복지국가’ 발언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결과가 터무니없는 것은 원인이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진보 보수, 영남 호남의 대립만큼이나 신구세대간의 갈등 역시 중요한 대립축을 형성하고 있다. 아직도 왕년을 부르짖으며 1950년대, 60년대에 살고 있는 60,70대와 2010년대를 살고 있는 10,20대가 한 공간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조선시대 고루하고 노회한 노론 정치가들이 타임머신을 타고 대규모로 21C 광화문 사거리로 이주해 온 것과 같다. 더 황당한 일은 그런 영감님들이 여전히 이 사회의 실권을 쥐고 있는 주류라는 것이다.

    차이점을 부풀려 갈등을 증폭시킬 필요는 없지만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는 것이다. 신구세대간의 문화적, 정치적 간극이 서로 간에 쉽게 손이 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먼 것이 사실이다. 너무도 숨 가쁘게 달려온 압축성장기, 격동의 현대사였기 때문이다.




무슨 돈이 남아돈다고 부자에게까지 급식을 혀?

그 돈 아껴 토목공사 해야지!

- 허무맹랑한 시장의 허무맹랑한 광고 -



    신세대에게 비친 한나라당의 이미지를 물은 설문조사 결과 1위는 ‘촌스럽다’였다. 부패, 무능, 성희롱, 기득권 부유층 이미지보다 촌스런 이미지가 1위를 먹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만큼 신구세대간의 간극이 크고 그 간극을 좁힐 의지도, 가능성도 희박하다는 것을 나타내주고 있다.

    한마디로 최근 유행하는 스마트한 이미지와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대충 ‘답답하다’, ‘낡았다’란 이미지인데 가볍지만 쿨하고, 쿨하지만 스마트한 신세대와는 상극이다. 국가 차원뿐 아니라 한 가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소통이 어렵다. 소통을 시도하지만 매번 실패다. 지친다. 그러다가 포기하고 멀어진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것을 피한다. 불안한 평화, 무표정한 가정이다.

    이미지 정치에 능숙하고 그 덕을 톡톡히 본 한나라당 입장에선 위기다. 아무리 조중동, 공중파를 장악한데도 점증하는 인터넷, 스마트폰의 영향력을 저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구세대와 구미디어, 신세대와 신미디어... 시간의 문제일 뿐 한나라당이 변신하지 않는 한 승부의 결과는 자명하다. 이것은 정파적 지지 여부의 문제가 아니다. 달이 차면 기울고 기울면 다시 차듯 하나의 법칙이다. 자연의 이치이다.


    구세대의 노동관은 일그러진 면이 있고 신세대의 노동관은 뭐 하나 내세울 것 없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원초적이고도 건강한 땀의 기쁨, 노동의 신성함에 대해서 무지하다. 어떻게든 놀고 즐기며 생계를 꾸려가고 싶고, 몸을 놀린다면야 연예, 스포츠계가 다다. 노동, 노동자 자체가 기피대상이다. 하지만 모두가 사무직이 될 수 없을뿐더러 연예인의 문은 더 좁다. 더구나 희망만으로 일이 성사되는 것은 아니다.

    비행기를 염력만으로 띄울 수는 없다.(유시민)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먹어야 짠 법이다. 기성세대는 소중한 소금을 아등바등 집어먹어 배탈이 난 형국이고 신세대는 굶어죽을지언정 몸을 움직여 소금을 집어먹으려 하지 않는 형국이다.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마라.... 말을 적게 하여라.[전도서 5:2] 하였거늘 지혜롭고 명쾌한 성경말씀에 웬 사설이 이리 길은가. “적게 먹어도 마음이 평화로운 노동자는 달콤한 잠을 자지만, 많은 재물이 있어도 걱정이 많은 부자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쿨하게 해석하고 감사히 새기면 될 것을 웬 토가 이리 많은가.

    세월이 흘렀기 때문이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농경사회도 아니고 1950년대도 아니다. 노동의 값어치는 훨씬 떨어졌고 재물의 위력은 더욱 막강해졌다. 세상은 훨씬 복잡해졌다.

    전도서의 저자가 솔로몬이든 예루살렘 사원 근처에 거주하던 지식인이었든 육체노동자가 아닌 건 분명하다. 폭넓은 식견을 지닌 높고 깊은 정신의 소유자인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 때 그 시절 문자에 접근할 수 있는 지체 높은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는 세계를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보며 세세히 관찰했다. 내 사설이 길어진 이유다.


    하나님을 닮은 형상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상태는 육체와 정신사이의 그 어디쯤에 있다. 노동과 사유, 아날로그와 디지털, 심장과 두뇌, 개발과 보존, 유위와 무위의 조화와 균형이 중요하다. 손은 부지런하여 깨끗하고 더러운 것을 가리지 말아야 한다. 정신은 높고 깊고 선하며 여유로워야 한다.

    그런 인간만이 하나님의 참뜻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육신에 하나님의 은총이 깃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