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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42 : 잠언 16장 1절 33절, 17장 12절

어멍 2010. 12. 18. 18:07
 

    성경읽기 0042 : 잠언 16장 1절 33절, 17장 12절



16장 1절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은 여호와이시다.

33절

사람이 제비를 뽑지만, 그 결정은 여호와께서 하신다.

 

    16장의 첫 절과 끝 절이다. 같은 의미 다른 표현으로 대구(對句)를 이루고 있다.

    제비뽑기는 고대국가의 거의 모든 생활에서 활용되었다. 제비뽑기로 관리들이나 사제들을 선출했으며, 정복한 나라의 땅도 분배하였다. 약속의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할 때도 제비뽑기가 사용되는 등 성경 속에서도 많이 언급되고 있다.

    어떤 계획을 세울지, 무슨 제비를 뽑을지는 사람의 의지이나 그것을 이루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영역이다. 운(명)의 주재자로서 모든 때에 임재하시며 모든 곳에 역사하신다.


    제도로서의 제비뽑기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운이나 재수에 기댄, 지금은 거의 사라진 낡은 제도에 불과할 뿐일까. 원시인이 쓰던 부싯돌처럼 지금은 쓸모없는 엉성한, 그래서 우스꽝스럽기도 한 유물일 뿐일까.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다. 나름대로 장점도 많은 제도란 거다.

    첫째 의외로 평등한 제도다. 부자든 가난뱅이든, 힘센 자든 약한 자든 제비뽑기의 운은 동등하다. 심지어 인격이나 실력의 높낮이와도 무관하다. 모두 1/n 이다. 하나님 앞에 모두 한사람의 개인일 뿐이다.

    둘째 공동체에 대한 책임의식, 윤리의식을 고취시킬 수 있다. 누구라도 리더가 될 수 있는 자격을 갖고 있다면 누구라도 공동체에 대한 희생정신과 책임의식을 얼마간은 갖지 않을 수 없다.

    셋째 대중은 그렇게 올라간 리더를 더 쉽게 견제할 수 있고, 그 리더는 초심을 벗어나지 않고 자기의 수준을 더 높일 수 있다. 그를 보고 모두는 희망을 가지며 자기 실력을 쌓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덩달아 그 사회의 평균수준이 올라가는 것이다.


    건너 마을 배추농사 짓던 갑돌이가 제18대 대통령 제비뽑기 인터넷 추첨에서 선발되어 청와대로 들어갔다. 그는 어릴 적 함께 발가벗고 뛰놀던 내 XX친구다. 그는 너무 놀라 잠시 기절까지 했었다. 하지만 깨어나더니 딴 사람이 되었다. 지금은 진지하면서도 의욕적으로 성심성의껏 대통령직을 수행하고 있다. 그는 본디 순박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 요즘은 나라걱정에 밤잠을 설치며 노심초사하고 있다. 얼마 전 어릴 적 고향친구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갖은 모임에서는 얼굴이 예전보다 훨씬 늙어 보이기도 하고 현명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 당첨(!)을 수락한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지만 힘에 부친다고 한다. 외롭지는 않지만 가끔 예전이 그립다고 한다. 개인적으론 밭 매고 땀 흘릴 때의 자신이 더 행복했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어떻게 국민과 농민들을 배반할 수 있겠는가. 우리 위에 군림하고 우리를 다스리려 하겠는가.

    너무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정치소설인가. 그렇지 않더라도 가장 이상적인 것만 나열한 것은 사실이다. 부정적으로 쓰자면야 얼마든지 각색이 달라질 수 있다. 원래 대통령 그릇이 아닌 것이 우연치 않게 대통령에 당첨되더니 완장 찬 종놈처럼 제 신분도 모르고 날뛴 끝에 제 몸도 망치고 나라도 패망케 한 만고의 역적이 될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최상에서 최악까지 가능한 것이지만 우리가 제비뽑기나 순번제를 지나치게 과소평가하고 심사제나 선거제를 너무 과대평가, 과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전자(前者)에 대해 재평가하고 현실에서 적용범위를 넓힐 여지가 있는지 찾아보아야 한다. 실지로 초등학교에서는 어설프게 어른흉내 내는 무분별한 선거제보다는 제비뽑기나 순번제가 더 낫다. 공동생활의 가치와 윤리, 책임의식을 함양하고 리더로서의 훈련이란 측면에서 더 교육적이다.

    얼마 전에 순번제로 우리나라에서 치루었던 G20 행사도 마찬가지다. 외교력 강화, 국력 신장의 좋은 기회로서 선용하든지 정권 홍보, 국내 정치 이용으로 악용하든지는 따로 하고 순번제는 구속력을 높이고 멤버쉽을 강화하는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비록 현실적으로 형식과 내용은 틀릴지언정 회원국이라면 모두 동등한 자격, 동등한 권리를 갖는 제도인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자치단체장, 국회의원 등도 제비뽑기가 더 나을 성싶다. 최고 권력자, 대통령은 아직 시기상조고 위험부담이 있으니 제외로 하고, 19세 이상 심신건강한 성인 중에 직능별 비율을 정해놓거나 무작위로 컴퓨터로 돌려 뽑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 날뛰며 나라가 엉망진창, 코미디가 될 수도 있겠으나 작금의 현실정치와 비교해본대도 그리 뒤떨어지거나 흉한 그림이 나올 것 같지는 않다.


    언론을 중심으로 한 이중삼중의 토론과 검증을 거친다 해도 올바른 대표자를 뽑는다는 보장이 없다. 실력자 위주로 운용되는 대의민주주의의 한계는 물론이고 전체대중의 주도하에 운용된다 해도 이상적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꽃피운다는 보장이 없다. 가장 악독한 히틀러는 바로 정상적인 민주주의제도를 통해 그 자리까지 올라갔다.

    중우정치다. 악이 득세하는 세상,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높은 자리의 후보가 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미 배추농민 갑돌이보다 못한 해로운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누굴 찍어도 말 그대로 그 놈이 그 놈이다. 언론이 썩어있다면 검증이나 토론은 오히려 면죄부를 주거나 판단력을 흐리는, 없느니만 못한 야바위 절차가 되고 만다.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예 모르는 것만 못하다. 썩은 언론은 아예 없는 것만 못하다. 때론 순수한 '무지는 힘'이 될 수 있지만 잘못 배웠거나 편향되고 불완전한 정보만 접한다면 악해지거나 어두워진다. 거칠고 무식하고 못생긴 순박한 처녀가 세련되고 유식하고 예쁘더라도 영악한 아가씨보다 좋은 이치다.


    우리는 어떤가. 이명박 대통령은 어떤가. 우리의 선택은 현명하였는가. 그 선택의 결과 우리는 좀 더 행복하고 자랑스러워졌는가.

    회의적이다. 결과로 치면 제비뽑기든 투표든 매일반이다. 이명박 후보든 갑돌이 후보든 당첨은 매일반이다. 시류를 잘 탄 억세게 운 좋은 대박남임은 마찬가지다. 검증절차 없이 뽑기로 뽑힌 갑돌 대통령이 검증절차를 거친 이명박 대통령보다 더 잘할 것만 같다. 더 나라를 걱정하며 공공의 이익에 봉사할 것 같다. 국민들을 더 편안히 모시며 국민들의 자존심을 지켜줄 것만 같다. 결국 엉터리 검증, 우매한 군중이었다는 거다. 검증의 실패, (대의)민주주의의 실패다.




투표함 또는 뽑기함, 당선 또는 당첨



    정치와 종교는 얽혀있으면서도 떨어져 있다. 투표를 하기 전에는 정보를 취합하고 스스로 심사숙고한다. 제비를 뽑기 전에는 행운을 빌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역사하심이다. 이것은 단순한 운명론이나 결정론이 아니다. 악인의 권세, 악한 권력자의 출현 역시 악을 통해 선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통해 우리를 징계, 경계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다.

    오류를 줄이고 죄를 면키 위해선 스스로를 탓하고 하나님께 겸손해야 한다. 하나님은 변치 않는 부동의 하나님이시다. 1년 365일 24시간 언제나 그곳에 계시다. 다만 우리 인간이 헤매며 그 분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주장할 뿐이다. 하나님을 믿고 기다리며 뜻을 지켜라. 찾지 않아도 우리에게 그 옷자락 끝을 보이실 때가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불같은 벼락을 내리치실 때가 있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자연의 이치가 있다. 악인의 권세를 부러워할 필요도 없고 그 패망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분통을 터뜨릴 필요도 없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의 것,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가이사의 소유는 모두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차면 기울고 기울면 차는 달과 피면 지고 지면 피는 꽃들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이치대로 될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될 것이다. 아멘!



17장 12절

새끼들을 빼앗긴 암곰을 만나는 것보다도,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를 만나는 것이 더 두렵다.

 

    새끼를 빼앗긴 암곰은 얼마나 사나운가! 하다못해 기르던 강아지도 갈기를 세우고 이빨을 드러낸다.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는 얼마나 답답한가! 만약 그가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리더나 상관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인가! 군대에서도 강한 적보다 멍청한 지휘관이 더 두려운 존재다.

    멍부, 멍게, 똑부, 똑게란 말이 생각난다. 곧 ‘멍청하면서 부지런한’, ‘멍청하면서 게으른’, ‘똑똑하면서 부지런한’, ‘똑똑하면서 게으른’ 것을 줄여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직장이나 모임에서 멍청한 대다가 부지런하기까지 해서, 사고만 치고 방해만 되는 타입이 가장 피곤하고 두려운 존재란 우스갯소리다.

    멍청하다, 똑똑하다란 말은 머리, 지능의 의미가 크다. 지혜롭지 않다는 뜻에서의 어리석다는 의미와는 사뭇 다르다. 지혜는 단순한 IQ도 아니고 지식의 축적도 아니다. 세상의 이치,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말함이다. 그럼 어부, 어게, 지부, 지게로 나눌 수 있다. 곧 ‘어리석으면서 부지런한’, ‘어리석으면서 게으른’, ‘지혜로우면서 부지런한’, ‘지혜로우면서 게으른’ 것을 줄여 일컬을 수 있다.


    혹자는 이명박 대통령을 멍부(멍청하면서도 부지런한)로 빗대 놀리고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멍청하지 않다. 부지런한 것은 확실하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다. 악재를 이겨내는 수완, 말을 바꿔 합리화하는 순발력을 보면 머리가 좋다. 비상하다고 평할 순 없으나 평균이상이다. 머리가 나쁘면 절대 그 자리까지 올라갈 수 없다. 그렇다고 국정을 운영하는 것을 보면 똑부(똑똑하고 부지런한)라고 부르기도 뭐하다. 똑똑해도 바르지 않은 쪽으로 똑똑한 것이다. 머리가 좋아도 다른 방면으로 좋은 것이다. 시민들에게 무식한 대통령으로 각인된 김영삼 전 대통령도 권력투쟁과 조직운영에는 비상한 재능을 보여주곤 했다.

    내 생각엔 이 대통령은 ‘멍부’가 아니라 ‘어부’(어리석으면서 부지런한)다. 세속적 수완, 이재엔 밝지만 이 세상의 이치, 하나님의 뜻에는 어둡다. 어리석다. 의롭지도 않고 지혜롭지도 않다. 실재로 유권자들도 그에게 도덕성을 바라고 뽑은 것은 아니다. 다만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가 되면 내 재산 좀 늘지 않을까 해서 뽑은 것이다.


    혹자는 최고의 리더는 똑게(똑똑하면서도 게으른)라고 한다. 똑똑한 건 이해되는데 왜 게을러야 하나? 부정적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나대지 말고 갈구지 말라는 거다. 아랫사람 들들 볶거나 눈치주지 말라는 거다. 아랫사람에겐 게으르고 무심하게 대하고 스스로는 솔선수범 지 할 일이나 알아서 표 나지 않게 하라는 거다. 단순 업무, 일상 업무는 부하 직원에게 맡기고 설렁설렁 놀아도 좋으니 결정적일 때 난관을 해결하고 비전을 제시하는 크고 중요한 업무만 하라는 거다.

    긍정적 시각에서 해석하자면, 대현(大賢)은 대우(大愚)라! 하나부터 열까지 이미 익숙하고 일머리를 알고 있다고 해도 부담되게 직접 나서지 말고 각자에게 주워진 공간과 역할을 보장하라는 것이다. 알아도 모르는 척, 똑똑해도 어리석은 척 겸손하라는 것이다. 용(勇)이 아닌 지(智)로, 지가 아닌 덕(德)으로서 통솔하라는 것이다. 자연스레 똑게보다 지게(지혜로우면서 게으른)쪽 의미로 넘어온다.

    용장(勇將)보다 지장이요, 지장보다 덕장이다. 똑똑함보다 현명함이요, 현명함보다 올곧음이다. 지식보다 지혜요, 지혜보다 신실함이다.


    멍부든 어부든 똑같이 최악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하지만 똑게든 지게든 리더라면 설마 게으르기야 하겠는가! 천재도 아니고, 설령 마법사라도 나태하고 게을러서는 절대 리더가 될 수 없다. 타인에게 신경 끄고 게으르게 대해달라는 아랫사람들의 이기적 표현이든지 겉보기에 게으른 척, 모자란 척 해야 된다는 역설적 표현이다. 결국 최고의 리더는 지부(지혜로우면서 부지런한)다. 지혜롭다면 부지런한 티를 내어 자랑치 않고, 무리에게 괜한 스트레스를 가하지도 않을 것이다. 겸손하고 현명하게 처신할 것이다.

    그럼 고 노무현 대통령은 어느 스타일일까. 그 역시 이 대통령처럼 부지런했다. 똑똑했다. 결국 어리석은가 지혜로운가에서 갈린다. 스스로 ‘바보’라는 별명을 가장 좋아하기도 하였지만 참여정부 내내 갈등의 골이 깊고 사회가 시끄러웠던 것은 사실이다. 조중동이 사사건건 시비를 건 측면도 있었지만 그 자신이 풍운아, 쾌남아 같은 독특한 개성의 소유자인 것도 크게 작용하였음은 물론이다.


    신선하기도 하고 노골적이기도 한 솔직한 화법은 비판자로부터는 천박하다는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지지자들에겐 속 시원하고 사태의 본질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보이기도 했다. 그 스스로 사태의 중심에 서서 실무자의 눈으로 말들을 쏟아내면 뒤이어 조중동이 시끄럽게 떠들어대니 공무원 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도 은근히 스트레스가 쌓인다. 실재로도 본인을 과장급 대통령이라고 하며 공무원들에겐 대통령급 과장, 시민들에겐 대통령급 시민을 요구하니... 알아서 지시하고 알아서 다스려주었으면 오죽 좋으련만... 한마디로 피곤하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석 받침돌에 새겨진 신영복 선생의 글씨
깨 있기도 피곤한데 조직하라니... ㅠ.ㅠ



    젊은 날의 노무현도 임기가 다하고 현실정치에서 은퇴하자 좀 더 얌전(!)해진다. 깍이고 다듬어져 이제 어엿한 덕장의 이미지를 갖추어간다. 바야흐로 혈기왕성한 똑부에서 원숙한 지부이기를 소망했다. 하지만 정치는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았다. 굴곡의 역사를 거쳐 온 이 시대가 그의 조용한 전원생활을 허락하지 않았다. 대통령 전후뿐만이 아니라 그의 전 인생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덤볐다기보다는 세상이 그를 가만히 놔두지 않은 책임이 더 크다.
    이 대통령이 대박남이라면 노 대통령은 비운남이다.


    나쁜 것부터 순서대로 정리해 나열해보자. 『어부〈 어게〈 지게〈 지부』다. 이명박 대통령은 똑부(여기서의 똑똑함은 가치중립적인 지능을 의미)이자 어부다. 노무현 대통령은 지부를 소망했던 비운의 똑부(역시 가치중립적 의미)다. 어쩌면 이미, 우리가 생각하기 훨씬 이전에 지부에 도달하였던 현자였을지도 모른다. 같은 똑부지만 천양지차다. ‘노명박’이란 말은 ‘이명박’에겐 영예요, ‘노무현’에겐 모욕이다.

    바보! 다 익은 열매 열 개를 주고 씨앗 한 개를 받은 바보!...... 현자! 그 씨앗을 틔워 열매 수백을 얻고 수천을 먹인 현자!......노무현! 바보를 꿈꾸던 현자, 현자를 꿈꾸던 바보였지 않았을까?!


    주여! 그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의 지친 영혼에 편안한 안식을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