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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21 : 사무엘하 18장~24장

어멍 2010. 8. 9. 22:41
 

    다윗의 이스라엘 왕국은 점차 안정되고 여러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강력해진다. 하지만 방심하고 안이해진 탓일까. 권력에 취해 교만해진 탓일까. 다윗은 충성스런 부하의 아내를 욕정에 들떠 빼앗는 죄를 범하기도 하고 자식들 간의 말썽과 다툼에 상심하기도 한다. 급기야 압살롬의 반란과 세바의 반란을 격기도 한다. 특히 압살롬은 다윗의 셋째 아들로 진압과정에서 압살롬이 죽자 다윗은 크게 슬퍼하며 울부짖는다.



18장 33절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죽어야 되는 건데!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비극이다. 권력을 사이에 둔 아비와 자식 간의 사생결단이다.

    양치기 소년, 수금을 잘 탔던 멋진 청년, 골리앗을 쓰러뜨렸던 용감한 전사, 요나단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다정다감했던 친구, 시편을 쓸 정도로 예술적 문학적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인이 자식을 잃었다. 부모를 여의면 땅에 묻고 자식을 보내면 가슴에 묻는다고 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숨마저 막혔을 것이다.

    다윗은 분명 사랑 많은 아빠, 자상한 아버지였을 것이다. 그깟 권력 줘버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요 하나님의 종이기도 하다. 다윗이 너무, 계속 슬퍼하자 전투를 치루었던 군사령관 요압이 다윗을 나무란다. 다윗은 따르는 무리의 우두머리다. 그들에게 위엄을 보여야 한다. 이득도 나누워 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력이 유지되고 굴러간다.

    다윗 역시 인간이고 압살롬 역시 인간의 아들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마저 불완전한데 하물며 그 인간이 낳은 아들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지만 아비가 위인이라고 반드시 아들이 훌륭한 것은 아니다. 부모가 아무리 개막장이라고 해서 반드시 자식 역시 그러한 것은 아니다. 훌륭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다. 그럴 확률이야 높겠지만 한 뿌리서 나온 가지도 다 제각각이듯이 자식들 역시 다 제각각이다. 구악(舊惡)도 찜져먹는 세련되고 거침없는 신악(新惡)이 있을 수 있고, 훌륭한 선배마저 부끄럽게 만드는 도덕적이고 진취적인 후생가외(後生可畏)가 있을 수 있다.

    권력의 비정함, 애끓는 자식사랑... 모두 이 땅의 왕이기에, 하나님의 종이기에 다윗이 짊어져야만 했던 짐이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다윗)상 - Michelangelo, David




전면, 측면, 후면의 모습 - 르네상스 예술의 극치,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




포인트인 얼굴과 손



미켈란젤로가 26세 때 만든 작품(헐~! 천재!! 하나님이 내린 사람이다.) 4미터가 넘는 대작이다. 왼손엔 물매의 가죽끈을 매고 오른손엔 돌맹이를 쥔 채 골리앗이 다가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다. 긴장된 상체 근육과 얼굴 표정에서 전투를 앞둔 정중동의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몸체에 비해 크게 강조된 손과 머리는 종교적이면서 세속적이고 육체적이면서 정신적인 것을 동시에 보여주는 완벽하고도 초월적인 미를 이루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다듬어진 육체, 아름다우면서도 탐나는 완벽한 남성의 몸이다. 다비드는 라틴어로 ‘강한 손을 가진 자’란 의미로 힘줄을 드러낸 긴장된 큰 손은 다윗의 힘과 권능을 상징하고 있다.(반면에 고추는 유난히 작다. ^.^)


양치기, 음악가, 전사, 왕, 시인이기도 했던 다윗을 미켈란젤로는 완벽한 균형과 강인함을 갖춘 육체의 형상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강한 믿음과 용맹을 지닌 전사로 표현해냈다. 하지만 그(다윗)도 어쩔 수 없는 한 사람의 아비요, 지아비였다는 거...

 


23장 4절

그런 너는 새벽빛과 같고, 구름 끼지 않은 아침과도 같으며, 비 온 뒤의 햇살과도 같고, 땅에서 새싹을 돋게 하는 햇살과도 같다.

 

    다윗의 노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럴 듯한 자신의 모습이다. 아름답고 유려하다. 시편(의 대부분)을 지었다는 다윗의 문장이다. 그의 문학적 예술적 재능, 감수성을 알 수 있다.



24장 13절

갓이 다윗에게 가서 말했습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하나를 고르십시오. 왕과 왕의 땅에 칠 년 동안 가뭄이 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니면 왕의 원수가 왕을 세 달 동안 뒤쫓는 것이 좋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왕의 나라에 삼 일 동안, 전염병이 도는 것이 좋겠습니까?”

14절

다윗이 갓에게 말했습니다. “정말로 큰일 났구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매우 자비로우신 분이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주시는 벌을 받는 편이 낫겠소. 사람들 손에 벌을 받는 것은 싫소.”

 

    다윗 왕과 예언자 갓과의 대화. 여호와께서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노하시어 벌을 주기 전에 갓을 통하여 다윗에게 세 가지 벌 중에 하나를 택하라 하신다. 그래서 삼 일 동안의 전염병으로 죽게 되는 사람이 칠만 명! 엄청나다. 지(다윗왕) 혼자 살자고, 세 달 동안 쫓기는 게 싫어 삼 일 동안 칠만 명을 죽여?? 숫자로만 보면 첫째와 둘째가 오히려 나을 성 싶다. 과연 그럴까?

    첫째 칠 년 동안의 가뭄, 기아다. 둘째 세 달 동안의 쫓김, 전쟁이다. 셋째 삼 일 동안의 전염병, 질병이다. 기아와 전쟁과 질병이다. 칠 년과 세 달과 삼 일이다. 하나님의 벌, 인간의 벌, 하나님의 벌이다. 정말 큰일 났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게 없다.

    다윗은 기간의 장단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다만 이왕이면 하나님의 벌을 받겠노라고만 언급한다. 분명한 것은 칠 년 동안의 가뭄은 둘째 치고 세 달 동안의 쫓김도 어떤 고통을 몰고 올지, 어느 정도의 피해가 발생할지 가늠할 수 없다는 거다. 단순히 몇 명이 몇 명을 쫓는 병정놀이, 서바이벌 게임이 아니다. 일순간에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전쟁이다. 질병에 의한 칠만 명의 죽음이 어쩌면 하나님의 자비일 수도 있다.



24장 17절

다윗이, 백성들을 친 천사를 보고 여호와께 말씀드렸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백성들은 양처럼 저를 따르기만 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저와 제 아버지의 집안에만 벌을 주십시오.”

 

    실지로 다윗은 지 살 궁리만 한, 속 좁고 욕심 많은 왕이 아니었다. 다윗이 온전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 하나님께 회개하며 기도를 하자 이스라엘에 내렸던 재앙이 멈춘다.


    사무엘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