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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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와 고호가 별이 빛나는 밤에 종서의 모나리자를 만나 예술과 인간을 논하다

어멍 2010. 7. 5. 21:47


    (제목이 좀 산만하고 껄쩍지근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고도 볼 수 있지만은... 어쨌든)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말이 있다. 옛말에 인물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데 기준이 되는 네 가지 곧 신수, 말씨, 문필, 판단력을 이름이다. 물론 선천적인 기형, 말더듬, 악필, 우유부단하고 내성적 성격의 소유자 등에게는 참으로 억울한 말일 것이다. 하지만 전혀 근거없는 얘기도 아니다. 그 중 글씨(체)에만 한정하여 얘기해보자.

    글씨체가 어느 정도 그 사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남자글씨 여자글씨 쉽게 어림잡아낼 수도 있고 성격이나 품성 심지어 삶의 이력까지 나타내 보이기도 한다. 그 때 그 때 감정의 기복이나 컨디션이 나타나기도 한다. 많이 익히면 글씨가 예뻐지기도 하고 간혹 세월과 성격이 변함에 따라 새로운 모양의 글씨로 변할 때도 있다.


    중학교 방학 때 심심해서 펜글씨 교본을 끄적거린 일이 있다. 다 쓰고 나니 손글씨가 몰라보게 예뻐져 있었는데 당시에 느낀 게 ‘글씨는 획을 긋는 게 아니라 공간을 나누는 것’, ‘선이 공간을 가르고 글자가 공간을 점유하는 것’이란 깨달음 아닌 깨달음이었다. 가지런히 질서정연하게 써진 글씨는 글자 하나도, 문단 전체도 보기 좋다.

    하지만 추사의 글씨 등 옛 작품들을 보면서 이것이 다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한 일(一)자 하나만 보아도 ‘기계적 공간의 분할’ 이상의 멋과 경지가 있다. 단순히 깔끔하고 예쁘장한 것으로만 따진다면 흠잡을 데 없이 정연한 컴퓨터 글자체가 얼마나 많은가! 결국은 획 자체에서 느껴지는 이완과 긴장의 생동감, 공간보다는 하나의 획에 다시 시선이 꽂히게 됐다. 상하좌우 때론 강하게 때론 약하게 느리고 빠르면서, 나가고 멈추며 끊고 이어지는 한 획 한 획의 율동과 긴장을 비로소 느끼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기(技)나 술(術)이 아니라 쉽게 흉내낼 수 없는 향기를 담고 있다. 거기에는 흑과 백, 종이와 먹 이상의 정신(精神)이 담겨져 있다. 기(技)에서 예(藝)로 예에서 도(道)로 가는 경로가 이런 것이 아닐까.

    뭐 일반인들이야 목욕재계하고 낙서장이나 일기를 쓸 일이야 없겠지만... 그렇다는 얘기다.




전혀 예쁘장하지 않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 <마천십연도록>




처음 보면 뼈 속까지 한기가 느껴지고 계속 보면 코끝이 찡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추사의 <세한도> : 국보 제 180 호
세한도에 얽힌 더 자세한 이야기는 요기



    생활인들이야 이런 걸 따질 겨를이 없다. 단지 향유할 뿐이다. 그것으로 족하다.

    하지만 예술하는 사람이라면, 프로라면 어느 정도 도달해야 할 경지가 있는 법이다. 모방이 창조의 어머니라고 처음엔 아닥하고 흉내 내고 단순 반복하는 과정도 거쳐야 하지만(구구단이나 알파벳 외우기에 무슨 경지와 이론이 있겠는가) 거기에 머무른다면 주위의 칭찬은 듣겠지만 대중의 탄성과 감동을 일으킬 수는 없다. 자기만의 개성과 스타일, 일가를 이루어야 한다.

    추사의 글씨와 한석봉의 글씨를 짬뽕한다거나 해서체 전서체를 번갈아 쓴다면 아름답지도 않고 어지럽기만 하다. 한 사람 안에 다중의 인격이 있는 것과 같다. 말이 안 된다. 개인의 글씨도 변화되는 도중이라거나 섣불리 남의 것을 흉내 내려 한다면 왠지 어색해진다.


    서예작품들을 보면 단순한 글씨라기보다는 미술이라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럽다. 회화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림과의 경계가 모호한 게(실지로 ‘그림글씨’라는 말도 있듯이) 미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글씨를 쓴다’라는 표현보단 ‘글씨를 그린다’란 표현이 오히려 본질에 다가가는 합당한 표현일 수도 있다. 실재로도 대가들은 서화(書畵)에 모두 능했다.

    예술이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경로, 밖에 있는 작품이 내 안에 있는 심장을 울리는 경로는 오감이다. 시간과 공간 차원에서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등등 육감적으로 느끼고 깨닫는 과정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받는 느낌은 기계적이지 않고 복합적이다. 미켈란젤로의 벽화 <천지창조>중 ‘아담의 창조’, ‘해와 달과 별들의 탄생’이 바닥에 그려져 있으면 무슨 감흥이 있겠는가. 천정에 그려져 있기에 우리가 비로소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정에 그려져 있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을 도떼기시장 같은 군중의 땀내 속에서 쑤시는 다리로 까치발로 본다면 무슨 감흥이 있겠는가. 조용한 음악, 은은한 조명 아래서 편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음미해야지만 비로소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다.




고호의 <별이 빛나는 밤> : 뉴욕 현대미술관



    이렇게 우리가 받는 느낌과 감동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상황에 따라 각자의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같은 것을 보고 듣더라도 누구는 눈물을 철철, 누구는 콧방귀를 끼며 심드렁하다. 어느 때는 심심해서 졸음이 쏟아지지만 어느 때는 가슴에 쇠망치를 맞은 듯 전율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러한 상대성 가변성의 한계에서 자유로울수록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근엄한 돌부처도 벌떡 일어나 덩실덩실 춤추게 하고, 금수의 심장을 가진 괴수도 눈물짓게 하는, 인간의 심성 가장 밑바닥에 있는 근원을 뒤흔드는 절대감동이다. 예를 들면......




아무리 피곤하고 우울해도 보는 즉시 만인에게 웃음과 활력을 주는 이종서 화백의 작품 <모나리자 2010>
작가, 작품 소개 : 최근 한국화단에 혜성같이 등장한 천재 소년화백(초딩 1년) 이종서군의 2010년도 작품.
레오나르도 다빈치 원작을 피카소의 입체풍, 달리의 초현실주의풍을 가미하여
새롭게 해석한 획기적이고도 난해한 작품.
혹자는 작가가 이 작품을 그의 모친에게 헌정한다고 밝혔던 탓에
작품명을 <엄마 2010>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그런 면에서 생각의 동지, 정치적 동지보다 감성의 동지, 문화적 동지가 더 귀하고 근원적이지 않을까 싶다. 같은 정당의 지지자보다 같은 음식을 즐겨먹고 같은 옷을 즐겨입는(민망한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이건 아닌가?...) 아무튼 같은 취향의 동지가 더 반갑다는 뭐 이런 거....

    4대강만 해도 그렇다. 물론 토건족을 중심으로 한 이명박 정권과 기득권 세력의 거대한 금전적, 정치적 이권이 핵심이겠지만 그(들)의 직선선호형, 성형미인 선호형의 개인적 취향도 무시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 막무가내고 맹목적이다. 분명 인간의 손길이 되도록 닿지 않도록 하여 자연미를 강조한 한국식 정원보다 인위적으로 깍고 다듬어 조형미를 강조한 일본식 정원을 선호할 것이다.

    사람들이 왜 반대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투다. 반대한 이들도 반듯하게 깍인 강변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깊고 넓어진 강에 띄워진 유람선 위에서 시원한 강바람에 머릿결을 나부끼면 분명 하하호호 칭송이 자자할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다. 횟감이 아닌 관상용이라면 로봇물고기를 더 아름답다 여길는지도 모른다. 태극의 곡선도 눈에 거슬려 직선으로 바꾸고픈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다. 그만의 취향에 불과한 것일까??...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예술은 자연의 모방 : 무엇이 더 아름다운가. 무엇이 더 마음에 평안을 주는가.
                                              대운하 조감도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을 끼고 도는 낙동강 전경



    그에겐 정치적 지지자뿐 아니라 그와 미학적 취향을 공유하는 문화적 동지들도 무시할 수 없이 많다. 몇십년 산을 즐겨 타오며 그 안에 깃든 온갖 생명들을 보고 듣던 산사람이라도 의외로 산기슭을 깍아 위락편의시설을 짓고 산 정상까지 케이블카를 놓는 것을 지지하기도 한다. 생명과 자연에 둔감하고 개발위주 정책을 지지하는 한나라당 성향의 사람들이다.

    당장 직선형 인공수로인 청계천에 열광한다. 정치적으로 성공했고 재미를 봤다. 규모면에서 질적으로 틀린 4대강도 일단 완성되어 모습을 드러내면 삐까번쩍, 상전벽해다. 입이 떡 벌어진다. ‘보아라! 우둔한 국민이여!’ 이명박 대통령 각하 폐하께서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아하실 것이다.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에 쫓기며 사는 시민, 콘크리트 빌딩숲에 갇혀 마땅한 휴식과 놀 거리가 없는 시민들에겐 도심 한복판에 있는 인공자연, 돈 내고 즐길 순 없지만 볼 수만 있다면 성형미인이라도 감지덕지다. 하지만 언제까지 인공으로 자연을 덮을 순 없다. 성형이 천년만년 유지될 수는 없다. 분명 길고 지루하지만 무자비하고 무서운 자연의 보복과 재난이 예비되어 있다.


    이당이냐 저당이냐, 진보냐 보수냐 보다도 화려한 상감청자냐 소박한 분청사기냐 아니면 단아한 백자항아리냐, 깨달음의 연꽃이냐 부귀영화의 모란꽃이냐... 무엇을 좋아하고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가가 더 중요하고 결정적이다. 머리보다 가슴, 생각보다 느낌, 논리력보다 심성이 먼저다.

    나 같은 경우엔 생명을 귀히 여겨 4대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지지자가 4대강을 찬성하는 건설현장 노동자보다 정이 더 갈 듯싶다. 슬픈 장면에서 눈물 훔치는 한나라당 지지자보다 팔짱끼고 냉소짓는 진보신당 지지자가 정이 더 안갈 듯싶다. 실재로 정치적 각성은 부족하지만 심성이 순수한 한나라당 성향의 사람이 간혹 있기도 하고 진보쪽에도 머리는 뜨겁고 기름지며 가슴은 차갑고 메마른 헛똑똑이가 심심찮게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제목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산만하고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 없지 않아 있지만은... 어쨌든)

    언제나 결론은 이념, 철학보단 인간, 품성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