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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61 : 호세아 2장~14장

어멍 2011. 2. 28. 23:07

    성경읽기 0061 : 호세아 2장~14장



    저자 : 호세아

    주요 인물 : 호세아, 호세아의 아내 고멜, 호세아의 자녀들.

    핵심어 : 결혼, 용서

    주요 내용 : 호세아가 간음한 자기 아내를 용서하고 노예시장에서 다시 찾아오기 위해 나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이스라엘을 용서하시기 위해 그들을 찾고 계신다는 내용으로 자신을 배신한 이스라엘을 끝까지 동정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고 있다.



    다니엘을 끝으로 대선지서 5권이 끝나고 호세아로부터 소선지서 12권이 시작된다. 저자이자 등장인물인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로 (북)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와는 다른 인물이다. 본 편은 호세아와 그의 부정한 아내 고멜의 관계에 빗댄 하나님과 그의 부정한 백성인 (북)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는 이중구조로 되어있다. 즉 호세아는 하나님이고, 고멜은 이스라엘 백성이다.


2장 7절

그녀가 사랑하는 자들을 좇아다녀도 따라잡지 못할 것이요, 찾아다녀도 찾지 못할 것이다. 그제서야 그녀는 ‘이제 첫 남편에게 돌아가야겠다. 지금보다 그 때가 더 살기 좋았다’라고 말할 것이다.

 

    있을 때 잘해! 조강지처(糟糠之妻)가 아니라 조강지부(糟糠之夫)다. 그 지아비는 호세아고 하나님이다. 고멜은 처음부터 바람기 있는 부정한 여자였다. 떠나간 정부(情夫)를 잊지 못해 뒤쫓아 집을 나가지만 집밖의 현실은 춥고 배고프다. 그제서야 그 때가 더 살기 좋았고, 첫 남편이 더 좋은 사람이었음을 깨닫는다.

    철없는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탐욕이라 부르기에도 유치할 정도의 1차원적 욕심이고 욕망이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졸리면 자고 싶고, 부러우면 닮고 싶고... 보고 싶고, 갖고 싶은 동물적인 본능이다. 그 어느 것이든 속세의 부귀영화, 이해관계를 떠난 순수한 열정, 지고지순한 사랑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와 다산의 상징인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겼다. 그도 부족해 집집마다 사람 모양의 작은 우상인 드라빔을 모셔두고 행운을 빌었다. 우리 역시 비슷한 신앙을 가진 적이 있었다. 부뚜막신, 아궁이신... 배운 것 없고 단순한 백성들이 의지했던 소박한 민간신앙, 옹기종기 사이좋게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는 다정하고 해학적인 신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종교(宗敎-으뜸 가르침)가 될 수는 없다. 삶을 관통하는 믿음과 지침이 될 수는 없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자연과학이나 철학에 의지하는 것이 낫다. 소박함은 자칫하면 비루함이 되기도 하고, 비루함은 쉽게 죄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절제되지 않은 원초적 본능, 허약한 소박함은 유혹에 약하다. 종국에는 하나님의 공의를 저버리고 타락할 수도 있다.

    어리석고 어리석도다.




나무 십자가 - 성스런 소박함



4장 7절

제사장들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그들의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거두어 가고 대신 부끄러움만을 안겨 주겠다.

15절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

5장 7절

그들의 거짓된 예배가 그들과 그들의 땅을 망하게 할 것이다.

 

    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백성들의 죄보다 지도자들의 죄가 더 크고, 성도들의 죄보다 제사장들의 죄가 더 크다. 알면서 저지른 죄가 더 크듯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운 거짓말이 더 악하다. 진실한 눈물은 귀하듯 하나님의 이름은 무겁고 두렵고 존귀한 것이다. 눈물이 흔하면 값싸 보이고 의심이 간다. 하나님의 이름 역시 함부로, 자주 쓰여져선 안 된다.


    십계명에도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출애굽 20:7] 하였거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빌려와 식언하고 허언하고 거짓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맹세하고 약속하고 확신하고 있지는 않은가!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욕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그럼 현재는 어떨까? 우리의 제사장, 지도자들은 어떨까?


(최근 한기총의 돈 선거 파문을 지켜보면서) 창피하고 화가 난다...... 개신교는 핍박을 받아야 순수해진다. 지금처럼 특권을 누리면 반드시 타락하게 되어 있다...... 한국 교회는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다. 돈 잘 버는 사람이 복 받은 사람이 되어버렸다.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라도 돈을 버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성경의 가르침과 너무 어긋난다. 예수님은 철저히 가난했고, 사도들도 다 가난했다...... 윤리적인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 또 하나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라’라는 말씀이다. 물론 나의 원수는 용서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내 이웃의 원수를 용서할 권한은 없다. 오히려 분노해야 한다. 나의 원수와 내 이웃의 원수를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

 

    <시사저널>이 개신교계 원로인 손봉호 서울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한 “한국 교회, 개신교 역사상 가장 타락했다”(2011/02/25) 기사 중 내게 가장 와 닿는 일부분이다.

    기독교 역사를 봐도 교회는 특권을 누릴 때 타락했고, 핍박을 받을 때 순수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막강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 탄생의 최대 지지세력으로 권력과 유착된 특권을 누리고 있기도 하며 그 스스로도 권력도 함부로 못할 막강한 이해집단을 형성하였다.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져 너무 세속화되고 정치화되었다. 그것도 보수 쪽으로 너무 편파적으로 치우쳐있다. 심지어 지난 대선 때 이명박 후보를 초청한 간증집회를 열어 노골적인 유세를 하기도 했다. 손봉호 교수의 말에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다.


    공동선, 하나님의 공의를 좇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이익을 좇으며 그 이익에 걸림돌이 되는 것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배척하고 죄악시하고 있다. 자기의 원수는 세상 끝까지 좇아가 죽일 기세지만 이웃의 원수, 절대악에 대해선 화해와 용서를 남발하고 있다. 아예 관심 밖이고 무감각하다.

    선택적으로 개입하고 선택적으로 침묵하는 방식으로 정치문제에 있어 종교적 잣대를 들이대고 종교문제에 있어 정치적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용산참사로부터 구제역(으로 인한 야만적인 살처분 방식), 4대강 등 생명파괴, 자연파괴에는 침묵해도 수쿠크(이슬람 채권) 도입에는 결사반대다.


    조용기 순복음교회 원로목사가 지난주에 말하길 ‘이 대통령 당선을 위해 노력했는데 수쿠크법이 통과한다면 목숨을 걸고 하야운동을 벌이겠다.’고 한다. 이 대통령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나 조용기 목사가 교계에서 차지하는 위치로 볼 때 위험하고 오만한 발언이다. 정치에 대한 종교의 과도한 도발일 수 있다. 굳이 반대한다면 자신의 오판을 시인하고 지지철회를 선언한다고 하면 그만이다.

    하야발언이 일파만파 문제가 커지자 주일인 어제 조 목사가 ‘심려를 끼쳐 죄송하고 대한민국과 이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사과 비슷한 해명을 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어기는 수쿠크법은 절대 반대한다.’는 설교말씀도 아울러 하셨다. 수쿠크법의 찬반여부를 떠나서 결과적으로 앞전의 말이 식언이 되어버린 것이다. 단순히 언론의 장난질, 왜곡으로 벌어진 일은 아니다.


    수쿠크는 내가 알기로 이자가 없다. 투자에 대한 이익금, 배당금을 수익으로 하는 펀드다. 부정한 아내와 누이를 재판 없이 죽이는 명예살인 등 야만적인 이슬람 문화는 배척하고 비판해야겠지만 수쿠크는 탐욕을 제어하는 인간적이고 종교적인 좋은 제도다. 하나님도 고리의 이자를 받거나 과도한 담보를 잡고 돌려주지 않는 것을 죄악시하고 나무라지 않았는가.

    반대이유는 이슬람 문화의 유입과 자금 중 일부가 이슬람 테러단체로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테러단체로의 유입을 이유로 반대하는 것은 견강부회, 침소봉대다. 이것은 왜곡되고 과장된 이슬람 혐오증, 이슬람 포비아(공포증)다. 그런 식이면 원전수주, 수출입 같은 이슬람권 나라들과의 교역과 투자도 반대해야 한다.

    월스트리트 달러는 선이고, 오일 달러는 악인가. 스님이 자비를 말하면 악이고, 목사가 사랑을 말하면 선인가. 부처의 자비와 예수의 사랑은 결국 한가지다. 이것은 기독교계의 종교적 도그마에 근거한, 본질을 보지 않은 편협하고 배타적인 반대다. 수쿠크는 종교적인 문제보다 정치, 제도적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기독교인, 성직자라도 공동선에 관심을 갖고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나무랄 일은 아니며 오히려 권장할 일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도 반드시 수신을 마친 이후라야 평천하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의롭고 신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이웃을 탓하고 사회에 쓴소리 하기 전에 반드시 한번쯤은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해야 한다. 내 알기로 가족친지 등 조 목사의 주변이 그리 깨끗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윤리적인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인은 반드시 윤리적이어야 한다. 정직한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인은 반드시 정직해야 한다. 공명정대한 사람이 반드시 개신교인은 아니다. 하지만 개신교인은 반드시 공명정대해야 한다. 신실한 사람이 반드시 목자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목자는 반드시 신실해야 한다.

    기독교인은 정직하고 정의롭고 신실해야 한다. 편협돼지 않고 온화하며 품이 넓어야 한다. 말은 거칠지 않고 품위가 있어야 하고, 행동은 가볍지 않고 무거워야 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항상 경계해야 한다. 목사, 전도사, 장로 등 교계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기독교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거짓된 예배가 우리와 우리의 땅을 망하게 할 것이다.’[호 5:7]



11장 8절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남에게 넘겨주겠느냐? 너 때문에 내 가슴이 뛰고, 너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불붙는 듯하구나.

14장 9절

여호와의 길은 올바르기 때문에 의인은 그 길을 따라 가지만,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질 것이다.

 

    이사야 이후의 예언서들의 내용은 분량 면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보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악상에 대한 질책과 한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훨씬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가 점점 부패하고 타락하는 쇠퇴와 멸망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한 선보다 쌓은 죄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책임이요, 인간의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저주보다 축복이다. 멸망보다 평화다. 심판보다 회복이다. 회개와 갱생을 한 번 권면하고, 두 번 부탁하고, 세 번 애원하신다. 하지만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치셨다. 애원하다 애원하다 질리셨다. 이제 남은 건 심판을 통한 회복이다. 인간이 자초한 일이며, 인간의 책임이다.


    하나님의 길은 언제나 올바르시다. 인간은 다르다. 의인은 의인의 길을 가고, 죄인은 죄인의 길을 간다. 하지만 죄인이 멸망하는 것은 딱히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걸려 넘어지기 때문이다. 죄인의 길에는 교만, 무지, 탐욕, 배신, 불안, 시기, 질투 등의 덫이 예비되어 있다. 이것이 죄의 속성이다.

    의인의 길은 좁고 험한 듯 보여도 밝고 평안하며 평화에 이르는 길이다. 악인의 길은 넓고 형통한 듯 보여도 어둡고 위험하며 멸망에 이르는 길이다. 의인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께 다다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구하고자 한다면 성령님은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신다. 그 길 끝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다.


    호세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