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52 : 이사야 58장~66장

어멍 2011. 1. 18. 23:37

     성경읽기 0052 : 이사야 58장~66장



58장 4절

보아라. 금식하는 날에 다투고 싸우면서 못된 주먹이나 휘둘렀다. 그런 식으로 금식을 하면서 내가 너희 기도를 들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라.

5절

그런 금식은 내가 바라는 금식이 아니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 몸을 괴롭히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바람 앞의 풀잎처럼 머리를 숙이고 거친 베옷을 입으며, 재 위에 앉는다고 해서 내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내가 바라는 금식이 되겠느냐?

6절

내가 바라는 금식은 너희가 부당하게 가두어 놓은 사람을 풀어 주고, 그들의 사슬을 끊어 주며, 억눌림 당하는 사람들을 풀어 주고, 그들이 하는 고된 일을 쉽게 해 주는 것이다.

7절

너희 음식을 굶주린 사람에게 나누어 주고, 가난하고 집 없는 사람을 너희 집에 들이며, 헐벗은 사람을 보면 그에게 너희 옷을 주고, 기꺼이 너희 친척을 돕는 것이 내가 바라는 것이다.

 

    잘못된 금식과 올바른 금식을 말하고 있다. 곧 올바른 금식, 예배, 기도, 경건함, 선함과 의로움에 관한 말씀이다.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행동은 악하고 비루해서는 안 된다.


    금식은 일종의 고행이다. 스스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고난을 체험하며 그 앞에 경건함을 드러내는 수행일 수 있다. 간절한 기도의 표시, 믿음을 굳게 세우는 수단일 수 있다. 중세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금식, 금욕하고 심지어 자신을 채찍으로 때리는 등 스스로를 학대하며 고통을 체험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금식과 고행을 자처하면서도 행동이 의롭지 않고 이웃을 괴롭히며 가난하고 불쌍한 자를 외면한다면 이것만큼 더 큰 위선은 없다. 하나님은 이웃을 학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학대하는 것 역시 바라지 않으신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스스로 자기 몸을 괴롭히는 것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59장 13절

우리가 여호와께 죄를 짓고 여호와를 배반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께 등을 돌렸다. 우리가 남을 해칠 궁리나 하며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았고, 거짓말을 계획하여 그대로 행했다.

14절

정의를 멀리 몰아내고 공평을 쫓아냈다. 거리에서 진리가 사라졌으며, 성 안에서 정직이 없어졌다.

15절

어디에서도 진리를 찾을 수 없게 되었고, 오히려 악한 짓을 그만두려는 사람이 공격을 당한다. 여호와께서 정의가 없는 것을 보시고 진노하셨다.

16절

아무도 남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놀라셨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몸소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능력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뜻이 희미해지고 악이 득세하는 세상의 타락상이다.

    의인이 쫓겨 도망다니고 크고 작은 악인들이 호령하며 군림한다. 거리에 진리가 사라졌고 나라 안에 정직이 없어졌다. 그 어디에서도 정의와 진리를 찾을 수 없다. 악한 짓을 그만두려는 동료에게 괜한 짓, 서툰 짓 하지 말라고 윽박지른다. 옳은 소리 할라 치면 착한 체, 잘난 체 하지 말라고 면박을 주고 조롱한다.

    심드렁하니 분위기 썰렁해지며 옳은 소리, 쓴 소리는 메아리 없이 허공 속으로 사라진다. 왁자지껄 분위기 뜨거워지며 그른 소리, 단 소리는 서로 다투며 증폭하고 장단 맞추기 바쁘다. 돌연 등을 돌려 앉아 침묵하다가 돌연 면상을 들이대며 침을 튀긴다. 악인의 주위로는 소인들이 몰려들고 의인의 주위에는 기르던 개마저도 남아있지 않다. 사람들에 왕따 당하고 세상에 버림받는다.


    여호와께서 정의가 없는 것을 보고 진노하셨다. 아무도 남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놀라셨다.

    제 한 몸 위하기도 힘들고 바쁜데 어찌 남을 도우려 하겠는가. 두려워서, 손해 보기 싫어서 돕지 않는다면 그래도 양반이다. 불의와 불행을 보고도 못 본 체 하는 것은 이제 무관심과 귀차니즘의 경지까지 이르렀다. 끝 간 데 없는 탐욕과 더불어 극단적 개인주의가 이 시대의 또 다른 악이 되었다.


    전철 안에서 힘세고 우락부락한 덩치 큰 깡패가 가냘픈 소녀를 괴롭히며 치근대고 있다. 남자 친구 소년이 항의해 보지만 곧 내동댕이쳐지고 두둘겨 맞아 코피를 쏟는다. 소녀가 깡패를 때리며 저항해보지만 때리는 건지 토닥이는 건지 역부족이다. 깡패는 소녀의 머리채를 잡고 소년 앞으로 질질 끌고 가선 소년 앞에서 소녀를, 소녀 앞에서 소년을 욕보이고 조롱한다. 소년, 소녀가 피와 눈물로 뒤범벅된 채 기진맥진하고 나서야 깡패도 거친 숨을 진정시킨다. 마침 전철이 역에 정차하자 깡패는 짧은 쌍소리를 내뱉은 후 어슬렁거리며 전철을 내려 여유 있게 사라진다.

     전철 안의 사람들은 이 모든 것을 다만 지켜보거나 외면하고 있다. 다부진 청년도, 젊고 아름다운 언니, 오빠, 형, 누나들도, 딸자식을 둔 아빠, 엄마들도, 따끔하게 꾸짖어야 할 어르신들도 바들바들 떨고만 있을 뿐 침묵하고 있다. 잔혹극이 벌어진 그 10여분동안 죽음과도 같은 침묵만 흐를 뿐, 전철 안에는 깡패의 고성, 소년의 신음, 소녀의 비명만 있을 뿐이었다.

 

    너무 비현실적인 얘기인가? 황당무계한 시추에이션인가? 좀 극단적이긴 해도 비슷한 얘기들을 우리들은 주위에서 한두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깡패와 군중의 딜레마다. 모두 달려들면 이길 게 분명하지만 누구도 혼자서는 이길 수 없다. 용기를 내어 달려들더라도 누군가 합세하지 않으면 나도 저 소년 꼴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만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바들바들 떨고만 있을 뿐, 누구라도 한두 명 합세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슬금슬금 피하며 깡패의 횡포를 위한 공간만 열어줄 뿐, 눈만 질끈 감고 있다. 두려움 때문이다.

    정신을 수습한 소녀가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다친 소년을 위해 구급차를 부탁하고 고발을 위해 경찰을 불러 달라 부탁하고 목격한 것을 증언해 달라 부탁한다. 여전히 모두가 외면한다. 두려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찮음 때문이다.

    대로변에 사람이 쓰러져 미동도 하지 않고 엎어져 있어도 누구 하나 흔들어 깨우려 하거나 일으켜주지 않는다. 신기하고 추한 것을 본 것처럼 힐끗 눈길만 줄 뿐, 가던 길도 피해가며 접근조차 하지 않는다. 두려움보다는 귀찮음 때문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여 거리를 걷고 전철을 탄다면... 예수님이 보이는 첫 번째 반응은 슬픔과 탄식보다는 놀라움이리라. 아무도 남을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을 보시고 놀라실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진노하실 것이다.

    그래서(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몸소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더 이상 선을 행할 의로운 사람이 남아있지 않아서 몸소 구원하셨다. 죄악만 저지르는 악인들만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몸소 구원하셨다. 진노를 심판으로 단죄하지 않으시고 구원으로 용서하셨다. 여호와의 의로움으로 능력을 나타내시고 여호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 땅에 정의와 공평, 진리와 정직이 자취를 감춰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 때, 그 때가 패망이 가까운 날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 심판을 받을까 두렵다. 하나님의 사랑을 감사하라.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하라. 더 이상 하나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라.



60장 4절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사람들이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멀리에서부터 네 아들과 딸들이 함께 올 것이다.

5절

그들을 보는 네 얼굴이 기쁨으로 빛날 것이며, 흥분한 네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


20절

나 여호와가 영원히 네 빛이 되고 네 슬퍼하는 날이 끝날 것이므로 네 해가 다시는 지지 않고 네 달이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예루살렘의 평화다. 하늘엔 영광, 땅에는 평화다.

    순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 의롭고 선한 사람들이 모여들어 내게로 오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오랫동안 멀리 떨어져 오매불망 보고 싶고 그리워했던 아들, 딸들이 찾아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서둘러 동산에 올라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그들을 맞는다. 그들의 그림자에서 그들의 기쁜 얼굴을 본다. 그들의 발소리에 내 마음이 흥분하여 두근두근 고동친다. 모두가 얼싸안고 정을 나누며 선을 이루리라.




 

어여 오라! 동틀 때의 쏟아지는 햇살을 뒤로 하고 내 자녀들이 돌아오고 있다!

다시스의 배들이 먼 곳에서 네 자녀들을 데리고 가장 먼저 은과 금을 싣고 온다.[이사야 60:9]



    슬픔이 없고 기쁨만이 있다. 고통이 없고 즐거움만이 있다. 악인이 없고 의인만이 있다. 부족함이 없고 풍족함만이 있다. 폭력과 파괴가 없고 평화와 세움만이 있다. 저주와 미움이 없고 축복과 감사만이 있다. 멸망이 아니라 영광, 심판이 아니라 자비만이 있다. 어둠이 없고 밝음만이 있다.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다. 이사야의 예언이다. 주전 700여년에 활동한 이사야 시대로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예언은 성취되었는가? 성취된 적이 있던가? 성취될 것인가? 성취 가능한 것인가?... 이것은 단지 이상향, 유토피아일 뿐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망이다. 소명이다.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서 성취하는 것은 우리의 힘만으로 가능하진 않지만 우리의 힘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분명 우리가 담당할 우리의 몫이 있다. 그 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덧입혀질 때만 가능할 것이다. 둘 중 하나라면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무가 없어도 태양은 존재하지만 태양이 없으면 나무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모신 곳, 하나님의 사람이 모이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바로 교회다. 교회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정의 앞에 바로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애초에 꿈꾸어선 안 되고, 꿈꿀 자격조차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작은 나라다. 교회가 특별히 올바르고 정의로워야 할 이유, 기독교인들이 특별히 선하고 도덕적이어야 할 이유다.


    축복과 은혜, 평화와 기쁨, 진리와 정의만이 충만한 세상! 우리 안에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그것을 우리가 보고 깨닫는다면 언제고, 어디서고 하나님 나라는 성취될 것이다. 태양이 하늘에서 비추듯 이 모든 것이 주 하나님이 비춰주시는 빛 때문이다. 그 빛을 바라봐야 한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65장 25절

이리와 어린 양이 평화롭게 함께 먹으며, 사자들이 소처럼 마른 풀을 먹을 것이다. 뱀이 흙을 먹고 살며 아무도 해치지 않을 것이다. 내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는 일도 없고, 상하게 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66장 2절

겸손하고 자기 죄를 뉘우치는 사람, 나를 두려워하고 내 말을 따르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다.


9절

어떤 고통이 있을 때, 내가 반드시 새 생명을 낳게 하겠다. 생명을 주는 이가 어찌 태를 닫겠는가?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곳에선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뛰놀고 사자가 풀을 먹고 뱀이 흙을 먹는다. 갈등도 미움도 다툼도 없다.

    이 평화와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에게 선택받은 사람이다. 선택받은 사람은 누구인가.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다. 겸손하고 죄를 뉘우치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다.

    죄를 뉘우치고 거듭남에는 고통이 따른다. 진통 없이 아기를 낳을 순 없다. 모든 낳음에는 고통이 있다. 모든 열매에는 수고가 있다.


    하나님은 때론 심판하고 단죄하시지만 하나님의 본성은 용서와 자비에 있다. 고통과 재앙에 있지 않고 생명과 축복에 있다. 그 크신 사랑에 있다. 하나님은 생명을 앗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려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과 함께 고통도 달게 받아야 한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지 말아야 한다.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흔들리지 않고, 불평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믿고 의지해야 한다. 거기에 생명이 있고 은혜가 있다.


    이사야 끝.

 

 

 

※ 다음은 2018/11/08 추가함.

 

 

 

네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아라.

사람들이 모여 너에게로 오고 있다.

멀리에서부터 네 아들과 딸들이 함께 올 것이다.

그들을 보는 네 얼굴이 기쁨으로 빛날 것이며, 흥분한 네 마음이 즐거움으로 가득 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