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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51 : 이사야 40장~53장

어멍 2011. 1. 15. 00:35
  

    성경읽기 0051 : 이사야 40장~53장



40장 31절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며, 독수리가 하늘 높이 솟아오르듯 올라갈 수 있다. 그러한 사람은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찬송가 <주를 앙모하는 자>다.

    독수리같이 힘차고 높이 솟아오르는 그 힘! 뛰어도 지치지 않고, 걸어도 피곤치 않는 그 힘은 무엇인가. 비행기를 조종하는 것도 아니요, 날개에 업혀 편승하는 것도 아니요, 불가사의한 초능력도 아니다. 그것은 믿음의 힘이요, 섭리요, 은총이다.


    아무리 힘이 센 인간도 유한하다. 아무리 지식과 지혜가 뛰어난 인간도 한계가 있다. 아무리 의로운 인간도 완벽히 선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지극한 인간이라도 하나님의 은총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날아오를 수 없다.

    소박한 무신론자는 억울함에 항변하고 논박하겠고, 철두철미한 실존주의자들은 냉담하고 초연하겠고, 쿨한 세속의 생활인들은 ‘그래서 뭐 워쩌라고?’ ‘설혹 그렇더라도 나완 상관없다고’ 개의치 않고 자기 갈 길 여전히 가겠지만 이것이 진리다.


    날아오르는 것은 상승이다. 하지만 그것은 세속적 부귀영화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비행체가 대기권을 뚫고 끝없이 올라가는 것, 마라톤을 수십 번 왕복해 뛰어도 지치지 않는 것, 3박 4일 자지 않고 걸어도 피곤치 않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물리(物理)가 아니다. 힘이 아니다.

    상승은 동행이요, 인도(引導)요, 은총이요, 구원이다. 하나님과 항상 동행함으로 끊임없이 새 힘을 공급받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끄시는 바른 길로 따라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한 후에, 해야 할 일을 다 한 후에 하나님이 내미시는 은총의 손길이다. 인력(人力)이 미치는 한계에 이르러 이리 둘러보고 저리 둘러봐도 더 이상 해야 할 일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을 때 내려주시는 은혜의 손길이다. 또한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 타락했을 때 내미시는 구원의 손길이기도 하다.


    악인이 스스로 회개하고 속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선한 자라도 인간인 이상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도 마찬가지다. 심성이 고약하지 않은 속인들도 속죄와 반성에 앞서 이리 재고 저리 잰다. 작은 이익에, 수치심에 요리조리 타협하며 찔끔찔끔 마지못해 반성한다. 스스로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한다.

    일부를 반성하고, 조금을 내려놓는 것은 회개가 아니다. 하물며 불세출의 악당, 만고의 악인이 회개를 하기를 기대할 순 없다. 그들의 회개는 하나님의 섭리와 은총이 개입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이것이 없이는 날아오를 수 없다. 아무리 선한 자라도 이것이 없이는 은혜를 받을 수 없다. 아무리 악한 자라도 이것이 없이는 회개를 통한 구원을 받을 수 없다.

    그래서 희귀하지만 악인들이 하나님께 귀의하고 그분으로부터 용기를 얻어 회개하는 경우가 있다. 그것은 부귀영화가 아니라 모든 것을 내려놓고 포기하는 속죄의 길이다. 세속적 눈으로 볼 때는 추락이요, 고행의 길인 경우가 많다. 세속의 모든 것을 떠나 하나님께 의탁하여 이제까지의 자신을 완전히 부정하고 소멸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이 아니면 그 무엇이 이 기적을 가능케 하겠는가!


    독수리같이 날아올라 승승장구할 수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밤늦게까지 일하며 성공하고 승진하고 출세하고 재산을 모으고 권력을 쟁취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평범하고 고단한 일상에 지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힘을 공급받아 활기차고 보람차고 즐겁게 삶을 영위할 수도 있다.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요 감사할 일이다. 하지만 더럽고 악한 영혼이 회개를 통해 구원받고, 하루하루 때 묻는 영혼이 날마다 새롭게 씻어지는 것 역시 하나님의 축복이요 영광이다. 위대하고 성스런 상승이다.

    독수리의 상승! 그것은 물질의 상승, 세속의 상승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정신의 상승, 영혼의 상승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높이 오르고 물질적 성공을 이루더라도 우리의 영혼이 깨끗이 정화되는 은혜의 축복이 없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항상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옳은 길, 성공적 삶을 살아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죄 많은 영혼이 구원을 받는 기적을 보이시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이요 축복이다. 독수리같이 날아오르는 기적이다. 대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마음의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그 일을 이루는 분은 여호와시다.[잠언 16:1]



41장 4절

“나는 처음부터 있었고, 마지막 때에도 있을 것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우주부터 우주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구절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 (I AM WHO I AM) [출애굽기 3:14]란 말씀이 연상된다.(☞ 성경읽기 0006 참조) ‘스스로 있는 자’만이 시공간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신이 아니다. 형상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분이시기에 사람의 도움을 받아 존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자신에 대해 어떠한 형상이든지 만드는 것을 금지하셨다.

    처음부터 있었고, 마지막 때에도 있을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나님은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으시고 누구에게도 제한받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시공간에 자유로운 절대주권자시다.



53장 4절

정말로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짊어지고, 우리의 아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 벌을 받아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5절

그러나 그가 상처 입은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짓밟힌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다. 그가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고, 그가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6절

우리는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갔으나, 여호와께서 우리의 모든 죄짐을 그에게 지게 하셨다.

7절

그는 매를 맞고 고난을 당했으나,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털을 깎이는 양과 같이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않았다.

8절

사람들이 정의를 짓밟고 그를 거칠게 끌고 갔다.


11절

많은 고통을 겪은 뒤에 그는 고난의 결과를 보고 만족할 것이다. 내 의로운 종이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할 것이며, 그들의 죄를 짊어질 것이다.

12절

그는 기꺼이 자기 목숨을 죽음에 내놓았으며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졌고, 죄지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용서를 빌었다.

 

    ‘종의 노래’다. ‘그’가 곧 ‘종’이다. 이 종은 그를 통해 이스라엘의 꿈이 실현되며, 하나님의 백성들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인물을 가리킨다. 곧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님, 주의 종인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다. 한편으로 종의 임무는 이스라엘 자체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사야에는 4개의 ‘종의 노래’가 나온다. 첫 번째는 [42:1~4]로 하나님의 종은 이스라엘과 이방에게 하나님의 의를 베풀 것이라는 내용, 두 번째는 [49:5~6]로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사명과 이방에 빛을 비추어 구원을 베풀 사명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내용, 세 번째는 [50:4~9]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종에게 원수의 공격을 견딜 수 있는 지혜를 주실 것이라는 내용, 네 번째는 [52:13~53:12]로 하나님의 종은 사람들의 죄 때문에 고통 받는 고난의 종이라는 내용이다.


    인과응보, 사필귀정이란 말을 함부로 써선 안 된다. 남을 함부로 단죄해서도 안 되며 남의 고통을 마땅한 벌이라고 쉽게 단정지어서도 안 된다. 하물며 남의 고통에 쾌재를 부르고 고소해하는 것은 천박한 죄다. 그것이 희생인지, 자신의 죄까지 대신하여 속죄하는 것인지 어찌 알겠는가.

    하지만 똥 묻은 개들이 겨 묻은 개를 집단으로 때리는 경우가 허다한 게 이 비루한 세상이다. 예수님이 숨을 거둔 후 그를 매단 병사들이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기하여 나눠가졌듯이 집단으로 물어뜯고 때려죽인 후 모두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로 가고 여전히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똥 묻힌 채 살아가는 것이 죄 많은 인간이다. 똥 묻은 개를 보고 자신에게 묻은 겨를 겸손하게 돌아보는 개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분이시다. 눈처럼 하얗게 순결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 분이기에 이 비루하고 죄 많은 우리 모두를 대신해서 속죄할 능력과 자격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토록 비루하고 죄 많은 존재이기에 그런 분을 죽인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그 높이를 알 수 없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십자가!! 예수님의 고난과 사랑!! 보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하나님의 사랑의 상징이요 정수다.


    사람들은 예수에게 가시면류관을 씌워줌으로서 거짓 왕, 거짓 메시아에 대한 최상의 모욕과 최고의 예우를 다해 준다. 예수는 무거운 십자가를 진 채 채찍에 피 흘리며 저잣거리에서 조리돌림하듯 조롱을 당한 후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힌다. 그들은 예수의 고통과 피에서 그도 별 수 없는 인간족속이었음을 확인하고 싶었고 종국에는 살려달라는 애원을 듣고 싶었던 걸 거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마태 27:46]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합니다.[누가 23:34]




 아버지,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희들은 저희들이 하고 있는 일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매맞고, 피흘림으로, 그의 얼굴과 모습이 너무 상하여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이사야 52:14]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 유언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을 볼 때 인간 노무현의 그것이 오버랩된다. 물론 노무현은 신이 아닌 인간이다. 흠 있고 불완전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가 비록 예수님을 영접하지는 않았더라도 그는 예수님의 품성을 닮은 인간이었다.


한 마리의 사자가 이리떼에게 포위되어 피 흘리며 외로이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많은 양들은 침묵하고 있다.

어떤 양은 귀찮아서, 어떤 양은 두려워서, 어떤 양은 풀을 뜯는 데 정신이 팔려서, 어떤 양은 같은 양이면서 잘난 체하며 사자의 탈을 쓰고 있다고 속으로 고소해하고 있다.

 

    예수님을 죽인 그들과 노무현을 죽음에 이르게 한 우리가 별반 다르지 않다. 2000여년전의 인간들과 지금의 인간들이 별반 다르지 않다.


    예수님은 많은 고통을 겪은 뒤에 그 고난의 결과를 보고 만족하셨다.[이사야 53:11]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신 후 고개를 아래로 떨구시고 운명하셨다.[요한 19:30] 예수님은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셨으며 그들의 죄를 짊어지셨다.[이사야 53:11]

    인간 노무현이 자신의 최후를 만족하였는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고통과 슬픔만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로 하여금 많은 사람이 깨닫고 의로워졌다. 가족을 포함한 주위 사람들이 정권의 탄압으로부터 얼마간 자유를 찾았다. 어쩌면 그는 이 시대의 모순과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음의 길로 걸어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그를 막연하게 얄미워했던 사람들마저도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숙연해졌던 이유일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모든 것을 다 이루셨다. 지상에서의 삶을 완성하셨다. 하나님의 뜻과 사랑을 선포하시고 열두제자로 하여금 그 뜻을 만대에 전하셨다. 온갖 기적과 권능으로 세상의 왕, 권력자가 되어 권세를 누리는 것으로 끝났다면... 부귀영화를 누리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났다면... 십자가의 은혜와 구원도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 리 없다.

    노무현도 마찬가지다. 큰 손실이고 슬픔이고 비극적 역사지만 그는 죽음을 통해서 많은 것을 남겼다. 그의 가치, 그 가치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그의 가장 커다란 유산이다.



    하나님! 예수님! 저희를 용서하소서. 염치없게 또 엎드려 비옵니다. 간밤에 죄 짓고 새벽에 회개하고, 아침에 회개하고 저녁에 죄 짓는 저희를 용서해 주옵소서. 왼손에 하나님의 성경을 들고, 오른손에 도적의 칼을 든 저희를 용서하소서. 성전에 나와선 하나님께 기도하고 시장에 나가선 예수님께 채찍을 휘두르는 저희를 용서하소서.

    상처로 저희의 허물을 가려주시고, 고통으로 저희에게 평안을 주시고, 희생으로 저희를 구원해 주시는 주님께 엎드려 웁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저희에게 구원의 복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저희가 기쁨과 행복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으로서 저희를 구원하심에 저희가 울며 기뻐하고, 기뻐하며 웁니다. 저희가 이리 어리석고 완악하며 뻔뻔해도 되는 것이옵니까? 이런 저희를 용서하고 안아 주시렵니까?

    저희가 십자가를 잊지 않고, 배반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가 그 크신 주 예수의 사랑에 실망을 드리지 않게 하여 주시고, 의인의 희생과 고난을 외면치 않게 하여 주시고, 뭇 생명의 아픔에 냉담치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