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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45 : 전도서 1장~4장(3절)

어멍 2010. 12. 25. 22:33
 

    성경읽기 0045 : 전도서 1장~4장(3절)



    전도서(傳道書, Ecclesiastes)라는 책 이름은 저자가 자신을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왕’인 전도자(傳道者)라 밝히고 있는 것에서 유래. 이는 곧 솔로몬을 가리킨다. ecclesia는 교회, 시민사회. ecclesiastic은 목사, 성직자. 비슷한 단어로는 preacher(설교자, 목사, 전도자)가 있으며 ‘the P~’는 전도서의 저자를 일컬음.

    주요인물은 솔로몬. 핵심어는 ‘헛되다’와 ‘야망’

    주요내용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일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모든 것은 공허하며 소망이 없다.’란 내용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허무주의, 인간의 업적과 지혜의 헛됨을 지적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따라 이루어짐을 받아들일 것을 이야기 함.



1장 1절

다윗의 아들로 예루살렘에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있었던 설교자가 한 말입니다.

2절

설교자가 말합니다. 인생은 정말 허무하고 허무하다. 세상만사가 너무 허무하다!

 

    다윗의 자손으로 예루살렘에서 전 이스라엘을 통치한 왕은 솔로몬이 유일하다. 솔로몬 이후는 북왕국 이스라엘, 남왕국 유다로 분열되어 다윗의 자손들은 유다만을 다스렸다. 자연스레 솔로몬 저작이 되고 저작 연대는 주전 935년경이 된다.

    반면 현대 학계에서는 새로운 저서에 유명한 현자의 이름을 붙여 저서에 무게를 싣는 당시의 풍습을 전도서의 저자가 사용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 경우 전도서의 저자는 예루살렘 사원 근처에 거주하던 지식인이며 저작 연대는 주전 250년경으로 앞당겨 추정된다. 서술 시점(視點)은 <느헤미야>와 같이 대부분 1인칭이나 1장 1절과 같이 제 3자인 설교자의 말씀을 전달하는 형식이기도 하다.

    솔로몬이 누군가? 온갖 부귀영화의 영광을 누리며 이스라엘 통일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왕이자 지혜의 상징이다. 인생의 덧없음과 지혜를 말하기엔 더없이 적당한 인물이다.




솔로몬의 재판(The Judgment of Solomon) -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

영광과 부와 지혜의 상징 솔로몬



    <쉬운성경>에는 ‘설교자’로 <개역성경>에는 ‘전도자’로 표기되어 있다. 원문은 ‘코헬렛’으로 히브리어로 ‘모으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즉 ‘격언이나 지혜를 모으는 것’, ‘그것을 구하는 사람들을 모으는 것’, ‘그렇게 모은 격언이나 지혜, 혹은 모인 사람들, 혹은 사람들을 불러 모은 사람’을 의미한다고 추정된다.

    따라서 종교의 전도와는 얼마간 거리가 있기 때문에 전도서라는 제목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내용 역시 하늘의 성스런 말씀보다 땅 위의 지혜의 말씀이 더 많은 인상이다. 때론 실생활에 유용한 실용적 처세술에 해당하는 경구가 보이기도 한다. 천주교에서는 제목과 저자 모두, 원문 그대로 ‘코헬렛’으로 옮겨놓고 있다.



1장 4절

한 세대가 가고, 다른 세대가 오지만, 땅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5절

해는 떴다가 지고, 다시 떠오르기 위해 그 떴던 곳으로 급히 돌아가는구나.

6절

바람은 남쪽으로 분다 싶더니, 다시 북쪽으로 향하고, 다시 이리저리 돌아 제자리로 돌아간다.

7절

강들은 모두 바다로 흘러들지만, 바다는 결코 넘치는 법이 없다. 강물도 다시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간다.

8절

세상만사 말로 다 할 수 없이 피곤하니, 눈은 보고 또 보아도 만족하지 않고, 귀는 듣고 또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다.

9절

이미 있던 것들이 다시 생기고, 사람들은 전에 했던 일들을 다시 한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욥기와 무척 대조적이다.

    욥기가 고통, 고난을 얘기한다면 전도서는 덧없음, 허무를 얘기한다. 욥기가 항변, 호소라면 전도서는 증언, 고백이다. 욥기가 욥이라는 개별적 인간에 집중한다면 전도서는 전 인류와 세계에 집중한다. 욥기가 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희곡이라면 전도서는 통시적이고 자유로운 수상록이나 회상록이다. 욥기가 파도가 굽이치듯 드라마틱하고 격정적이라면 전도서는 유유히 흐르는 강물같이 잔잔하고 관조적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인구에 회자되는 유명한 구절이다.



1장 17절

나는 지혜가 무엇이며, 미친 짓과 어리석음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생각해 보았으나 이것 역시 바람을 잡는 일과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18절

지혜가 많으면 괴로움이 많고, 지식을 쌓으면 그만큼 고통도 늘어난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지식도 헛되고 지혜도 헛되다! 아는 것이 병이요 맨 정신이 더 괴로울 때가 있다.

    실연의 아픔을 겪고 들판을 헤매던 나(베르테르)는 나비가 하늘하늘 날아다니듯 이 꽃, 저 꽃을 옮겨 다니는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았다. 꽃을 머리에 꽂은 그녀는 웃고 춤추며 행복하다. 그녀도 실연을 당한 것일까? 너무 괴로워서 미친 그녀가 부럽다. 고통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행복할 수만 있다면 미친들 어떠한가. 어리석고 무식한들 어떠한가.


    계속해서 2장 이하 인간의 쾌락, 수고, 목적, 성공, 욕심, 명성, 부(富) 등 모든 것의 헛됨, 허무함에 관한 설교가 이어진다.



3장 12절

내가 알기에, 살아생전에 행복하고 선을 행하는 일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13절

이처럼 하나님의 선물은 사람마다 먹고, 마시고, 자기의 수고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5장 18절

내가 관찰해 보니,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생애 동안 먹고, 마시며, 자신이 하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요, 적절한 일이다. 그것이 인생의 몫이기 때문이다.

19절

하나님께서 재산과 부를 주시고, 또 그것들을 누리게 해 주실 때, 자기 몫을 받아서 자기 하는 일에 즐거워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선물이다.

 

8장 15절

나는 삶을 즐기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해 아래서 먹고, 마시고, 만족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전 생애 동안 기쁨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9장 7절

그러니 너는 가서 즐겁게 먹고, 기쁜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셔라.

 

    기쁘게 일하고 해 놓은 일을 기뻐하는 사람은 행복하다.(괴테) 3장 12절 이하 비슷한 의미의 말씀들이다.

    하나님은 인내와 희생, 성스러움만을 바라지 않으신다. 먹고 즐기며 하나님이 주신 생명과 삶이라는 선물을 만끽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속된 일상에도 충실하라고 하신다. 미래를 준비하는 것은 필요하나 다가올 행복을 위해 지금 당장의 행복을 희생할 이유는 없다. 지금 이순간은 영원히 다시 맛볼 수 없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순간순간을 충실하라. 일하고 먹고 마시고 즐기고 표현하라. 지나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일어나 달려가라.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라.

    바로 앞 포스팅(성경읽기 0044) 잠언 30장 이하 적었던 결론과 동일하다. 하나님은 부모요 우리들은 자녀다. 우리를 먹이고 기르신다. 우리가 이 지상에서 감사함을 잊지 않으면서도 매순간 충실히 즐겁게 뛰어논다면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무척 흐뭇하실 것이다.



4장 1절

내가 다시 살펴보니, 해 아래서 온갖 학대가 자행되고 있었다. 학대하는 자들에게 권세가 있으니 학대당하는 자들의 눈물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구나.

2절

그래서 나는 말했다. “죽은 자가 살아 있는 사람보다 행복하다!”

3절

그러나 아예 세상에 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해지는 악을 보지 않은 자가 이 둘보다 더 낫다.

 

    학대하는 자들에게 권세가 있고 권세가 있고서야 학대도 가능하다. 학대당하는 자들을 도와주시는커녕 위로하는 사람조차 없다.

    저자는 긍휼히 여기는 동정심, 남의 아픔에 같이 아파하는 공감능력, 자신의 신변잡기를 벗어나 부조리한 이 세상에 분노하는 정의감이 유독 발달한 사람이다.

    살아있는 자가 죽은 자보다 불행하고 죽은 자가 아예 태어나지 않은 자보다 불행하다니... 그리고 그 이유는 태어나지 않은 자가 이런 슬픔, 부조리한 세상을 보지 않기 때문이라니... 그에게 이 부조리한 세상을 보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요 슬픔이다. 역설적 표현이라 해도 비관적 인생관, 염세적 세계관이다. 욥기에서 욥이 극심한 고통에 못 이기고 죽음을 소원하며 스스로의 생일을 저주한 대목과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