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찐 소파에 대한 일기
황지우 원작을 어멍이 수정, 가감, 편집, 표절함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니다, 사실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 식탁에 앉았더니
엄마가 먼저 세수하고 와서 앉으라고 해서
나는 세수하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다시 뎁혀져 뜨거워진 국이 내 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침부터 길게 하품을 하였다.
소리를 내지 않고 하악을 이빠이 벌려서
눈이 흉하게 감기는 동물원 짐승처럼.
하루가 또 이렇게 나에게 왔다.
지겨운 食事, 그렇지만 밥을 먹으니까 밥이 먹고 싶어졌다.
그 짐승도 그랬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상기(想起), 그것에 의해
요즘 나는 비참할 정도로 편하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식탁에 앉아서 아침밥 먹고,
물로 입 안을 헹구고, (이 사이에 낀 찌꺼기들을 양치질하듯
볼을 움직여 물로 헹구는 요란한 소리를 엄마는 싫어했다.
내가 자꾸 비천해져간다고 주의를 주며 어린놈이 아저씨 같다며 눈살을 찌푸리셨다.)
나는 어색한 가죽부대에 담긴 나를
소파에 내던진 채 옷걸이에서 떨어진 옷처럼
그 자리에 허물어져 버렸다.
그러나, 소파!
‘소파’하면 나는 ‘비누’ 생각이 났다가 또 쓸데없이
‘부드러움’이라는 형용사가 떠오르다가 ‘거품-의자’가 보인다.
의자같이 생긴, 젖통이 무지무지하게 큰 구석기시대의
이 다산성 여인상은 사실은 비닐로 된 가짜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오우 소파, 마이 마미!” 나는 속으로 이렇게
영어식으로 말하면서, 그리고 양놈들이 하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면서
소파에 뉘앉던 거디었다.
나는 오늘 아침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다.
소파에 앉으면 거실이 번역극 무대 같다.
중앙에 가짜 가죽 소파 하나, 그 뒤에 오전 9시를 가리키고 있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고, 세잔풍 정물화 한 점, TV 세트,
창을 향한 행운목(幸運木) 한 그루, 그리고 끊임없이 부글거리는 수족관:
그렇지만 이 무대에서 번역될 만한 비극은 없다.
다만 한 사나이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았던 거디었다.
나는 멍하니 소파에 앉아, 마치 동물원 짐승이 그렇게 하듯이,
다시 하품을 길게 하고, 눈물이 난 두 눈을 두 번 깜,빡,깜,빡 한 후
하도 할! 일이 없어 생각의 강물에 내 몸과 맘을 내맡기기로 하였다.
나는 행복한 순간들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누군가가 낮잠 자고 있는 나에게 가만히 다가와 나의 발톱을 잘라줄 때,
혹은 나를 자기 무릎에 눕혀놓고 내 귀지를 파줄 때, 좋다.
그리고 무엇보다 누군가 나에게 (아부든 칭찬이든, 진실이든 거짓이든) “너 참 잘났다!”라고 말해줄 때 난 행복하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유가 생각난다.
산들거리는 들판에서 유가 랭보의 <감각>을 속삭여 준다거나
졸음 겨운 봄날 햇살 아래 유가 내 머리카락을 커트해주거나 흰머리를 뽑아준다면
그거슨! 비달 싸순이의 손길보다 나를 더한 행복에 잠재우리이이~라아.
나는 어느새 엄마 품에 잠든 아기사자 심바처럼
달콤한 미소를 머금은 채 하마터면 잠들 뻔 했었다.
아~~! 그러나 내가 “멈추어라! 순간이여. 너 참으로 아름답도다!”(파우스트 中)
라고 외쳐본 지 그 언제였던가.
나는 눈을 감고 유의 모습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려본다.
스웨터 속에서 숨 쉬고 있는, 유의 두 개의 젖가슴은
푸딩처럼 땡글땡글, 비둘기 가슴처럼 연약하고, 고분(古墳)처럼 둥그렇다.
그리고 이번엔 유의 스커트와 허벅지의 경계선을 따라 그리며 음흉한 미소를 지어본다.
그것은 1cm만 움직여도 섹시함과 우아함이 넘나드는 절묘한 높이를 가로지르고 있다.
나는 어느새 주책맞은 상상 속에 빠져들어, 넋 나간 짐승처럼
입을 헤 벌린 채 하마터면 침을 질질 흘릴 뻔 했었다.
유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삐삐를 쳐볼까.
그러나 운명과 맞먹는 “무위(無爲)”라는 놈의 강력한 가속력은 한편으론 나를 짓누르고 한편으론 나를 유혹하기에 나는 이미 그의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 놈의 가속력이란 사물에 내재된 가장 강력한 힘으로
왼손으론 윽박지르고 오른손으론 달래주니
나는 어느새 그 놈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게 되어
달콤한 자학을 앞세운 채 저항함을 내려놓고 투항했던 거디었다.
나는, 엄마가(그도 안 되면 유라도) 나를 일으켜주고 목욕시켜주고 나에게 밥도 떠먹여주고
똥도 받아주고, 했으면 좋겠다.
나는 나의 남은 생을, 그녀(들)에게 몽땅 떠맡기고 싶다.
코로 숨만 쉴 뿐, 꼼짝도 않고 똥그란 눈으로 뭔가 간절히 바라고 있으면
그녀가 다 알아서 해주는 식물 인간이고 싶다.
가끔 햇빛을 보고 싶어하므로 창문을 열어줄 필요만 있을 뿐,
동정할 수는 있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이 행운목(幸運木); 나는
이 병실(病室)에서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오늘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 먹고 소파에 앉아서,
엄마가 나갔기 때문에 하루 종일 집에서 혼자 놀았다.
비계 덩어리인 구석기 시대 어머니상에 푸욱 파묻혀서
괘종시계가 내 여생을 사각사각 갉아먹는 소리를 조용히 들었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나의 시간들이 누에 똥처럼 떨어졌지만
나는 수락했다, 이것도 삶이며
이제는 그것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걸.
사람이 희극(喜劇)이 되는 것처럼 견딜 수 없는 일이 있을까마는
그러므로 무위(無爲)는 내가 이 나머지 삶을 견딜 수 있게 하는 격(格)이랄까.
돈키호테, 천둥벌거숭이는 물론이거니와
세상에 조금이라도 복수심을 갖고 있는 자들의 어쩔 수 없는 천함보다야
소심한 무위도식배(無爲徒食輩)가 낫지 않겠는가!
나는 그렇게 소파에 앉아서 하루 종일,
격조 있고 품위 있게, 혼자서 놀았다.
너무 많이 남아도는, 내가 손대지 않은 무구(無垢)한 시간을 뜯어먹는 누에가
다른 종류의 생을 예비하는 동안
나는 너무도 진부하기에 오히려 음미하기엔 적당한 몇 가지 우스 개소리를
생각해내기로 하였다. (모든 진부한 것들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때 인간은 또 한 번 성숙해 진다고도 하지 않던가!)
얘기 하나에 윗니를 드러내놓고 웃는 당나귀의 웃음 하나.
다시 얘기 하나에 텅 빈 골통으로부터 아가리로 울려나오는 하이에나의 웃음 하나.
또 다른 얘기 하나에 소리 없이 표정근(表情筋)만으로 실실 웃는 광년이의 웃음 하나.
이런 식으로 나는 멍청하면서도 천진난만하고, 백치미 넘치면서도 순진무구하고, 톡톡 튀면서도 자연스런 웃음을 연출하기 위해 신경을 썼던 거디었다.
어느새 탄식하는 시계는 분침과 시침을 벌려
역광을 받는 공작새처럼 화사한 오후를 만들어
거실 가득 햇빛의 파편들이 날아들었다.
순간 내겐 삶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삶.
삶이란 소중하다면 모두가 소중하고 하찮다면 모두가 하찮은 것.
진실로 소중한 것은 무관심도 집착도 아닌 오직 순진무구한 그 사랑인 것을
깨닫기는 힘든 일이요, 행하기는 그보다 천 배는 힘든 일이니
대지와 만물을 비추는 이 햇빛처럼
조건 없이 베푸는 사랑을 담기엔
인간의 마음은 얼마나 작고 변덕스러운가!
말이다.
햇빛 파편들로 눈부신 거실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나는 다소 피곤함을 느껴
눈을 감고 잠시 쉰 후에 다시 쉬기로 하였다.
뜬 건지, 떠진 건지
수족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얼굴에
횡으로 도열한 수마트라 두 마리, 열대어 화석처럼 박혀들어왔을 때
나는 내가 담겨 있는 공기족관(空氣族館)을 느꼈다.
지금, 여기에 살아있는 것은 나와 너희 둘 뿐!
부지런히 헤엄치지만 항상 정지한 듯 제자리를 맴도는 너희들처럼
한 자리에 누워있지만 나 역시 끊임없는 상념에 쉴 틈이 없다.
반갑고 나른한 생각에 나는 물고기 흉내를 내며 입을 열었다 닫았다, 벌렸다 오므렸다
(공기)고기처럼 입질 비슷한 하품을 해 보았다.
그렇게 오후가 지나가고
창밖에 어스름이 깔려 회색도시가 서로 뒤엉켜 서서히 검게 한 몸뚱아리를 이루고 있을 즈음
무대 왼편에서 엄마가 슈퍼마켓에 들렀는지 검은 비닐 봉다리를 들고 등장했다.
엄마는 TV를 켜고 저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미(美)의 여신의 시선에 부끄럽지 않도록
고개를 고혹하게 비스듬히 숙이고 TV를 보며, 나는 참 운이 좋고 행복한 놈이라는 생각을 했다.
TV를 보다가, 식탁으로 옮겨 밥을 먹으면서 TV를 보다가, 다시 밥을 먹은 후 소파에 앉아 TV를 봤다.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의리의 싸나이 장세동이 검찰청 앞에서
곤색 바바리코트에 검은 라이방을 쓰고 사진 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하는 거디었다.
나는 오늘, 밥 먹고 TV 보고 잤다.
자기 전에 엄마가 이 닦고 자라고 해서 이빨도 닦았다.
화장실 앞에서 의리의 싸나이처럼 포즈를 취했더니
엄마가 한심하다는 듯 웃었다는 것도 적어야겠다.
아 참, 오늘 날씨는 대체로 맑았고 서울과 중부 지방은 낮 18도였다.
내가 방문을 열면 무대, 불이 꺼진다.
나는 누에고치처럼 이불 속에 잠겨서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고 속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살아 있다!’라고 외쳐본다.
그리곤 쓸쓸한 웃음을 지어보았다.
어둠 속에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창밖으로 한 사나이가 외친다; “지금, 옥수수밭에 바람 지나가는
소리, 들리지?” 저 15층 아래 강;
“이 회색빛 도시를 떠나 강으로 나는 가고 있어.”
밤에는 강이 긴 비닐띠처럼 스스로 광채를 낸다는 걸 이제야 알았어!
가련한 공기족(空氣族)들이여,
그럼 안녕, 빠이빠이!
※ 위 작품은 저작권법에 의하여 저자의 허락 없이 무단 복제하는 것을 금함. 단 후배들의 청춘사업을 위하여 파격적인 저작권료-아이스께끼 하나(먹여주든 보여주든?!)-를 지불하는 자에 한하여 복제를 허가함.
이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2년 후인 1999년 후배의 부탁을 받고 클래식 기타 동아리인 “한음”에서 펴낸 소식지 <기타 등등>에 기고한 글이다. (대학재학중인 1994년 창간호에 기고한 글은 예전에 포스팅한 바 있다. ☞ 알바트로스에 대한 단상)
황지우 시인이 쓴 원작에 빼고 더하여 원작보다 길이가 다소 길어졌다.(원작은 검은색, 덧붙인 부분은 파란색) 주요 등장인물은 원작의 경우 40대인 나와 아내와 그(나를 3인칭으로 객관화한 He) 3인이고, 표절시는 20대 후반인 나와 엄마와 유(특정하지 않은 2인칭 You) 3인이다. 이미지는 오늘 덧붙인 것이고 행과 연은 블로그에 맞게 내 임의대로 재편집하였다.
살다보면 추억 속에서 문득문득 떠오르는 인상 깊은 순간, 선명한 이미지들이 있다. 들판에 땅거미가 지면 멀리 개 짖는 소리, 여기저기 아이들 불러들이는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이 평화롭고 아득한 순간, 아마도 나는 늦은 낮잠에서 깨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시골 대청마루에 앉아 처마 끝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물소리를 들으며 뿌옇게 희미해진 앞산 산등성이를 바라보던 그 서늘하고도 차분한 느낌, 어린 시절 세찬 바람이 불던 추운 어느 겨울날 양지바른 구석진 담벼락 밑에 쪼그려 앉아 쬐던 눈부신 햇볕의 그 따뜻하고도 졸린 느낌... 지금도 내 심상에는 선명한 이미지로 깊게 남아있다.
20대 후반, 하루 종일 집안에서 빈둥빈둥 놀던, 조용하고 화창했던 그 어느 겨울날 역시 마찬가지였다. 13년이 지난 지금 나는 원작의 ‘나’처럼 40대가 이미 훌쩍 넘어버렸다. 하지만 아내와 딸, 아들 두 자식을 둔 나에겐 ‘나’처럼 빈둥거릴 수 있는 남아도는 시간도, 무료함도 없다. 아쉬운 감이 없진 않지만 다행이다! ^.^
한 달 넘게 포스팅이 뜸해서 옛것이라도 재활용하여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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