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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읽기

토머스 고든 <부모역할훈련> & 자녀교육에 관하여

어멍 2015. 8. 19. 21:40


      토머스 고든 <부모역할훈련> & 자녀교육에 관하여



※ 오래전(2009/04/15) 블로그에 올렸던 글을 조금 수정, 정리해서 <문학, 책읽기> 카테고리에 다시 올린다. - 일종의 지능적 울궈먹기! ^^



    예전에(2006/10/30) 토머스 고든(Thomas Gordon)이 지은 <부모역할훈련(Parent Effectiveness Training : P.E.T)>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참 인상 깊고, 느끼고 얻은 것이 많았던 기억이 있는데 내용을 최대한 요약해 보면

 


 

 


아빠, 엄마 되기도 공부가 필요하다.
(학습, 훈련은 물론 수양까지... 헉헉 -.-:;)

 


 

 

① 적극적 듣기

② 나-메시지로 말하기

③ 무패방법(No-Lose, Win-Win)으로 문제를 객관화시키고 공유하여 함께 참여하여 해결하기.


    ①②는 기존의 가치판단 없이 감정을 중심으로 듣고 표현한다. ①②③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것은 아이든 어른이든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존중되어야 할 독립된 개체라는 믿음 또는 입장!



    우리에겐 낯설고 생소한 가장 이상적인, 민주적인 심지어 자유방임적인 교육철학이랄 수 있다. 보수적, 유교적인 일부 극성맞은 학부모들에겐 가축(!)적인 분위기의 무책임한 방목, 방기로 읽힐 수도 있다. 예를 들면


물고기를 주지 말고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라.(탈무드) --- X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스스로 그 방법을 탐구하고 찾게 하라. --- O


    즉 어린 이, 자기 자식이라 하더라도 완전한 독립체로 보고 믿음과 존중을 전제로 한 일임, 혹은 방임까지도 감수하는 자세이다.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것도 오만한 태도라는 입장이며 어른과 어린이, 부모와 자식이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 배우고, 가르치고, 협력하는 관계이다.

    가정에서나 학교에서나 사회에서나 장유유서(長幼有序), 심지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가부장적, 권위적 교육문화가 뿌리 깊은 우리 실정에서는 쉽게 이해하기도, 실천하기도 어려운 교육철학이랄 수 있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참을 인자를 새겨가며 수도자적 자세로 임해야 할 철학이고 사교육이건 공교육이건 기존의 교육기득권자들에겐 혁명에 버금가는 위협이 되는 교육철학이랄 수 있다.

    설혹 어렵게 이런 방식의 교육을 수용하고 실천한데도 개인과 가정만으로는 한계가 많다. 학교가 담당해야할 몫이 따로 있고 사회, 국가와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효과가 날 수 있다.

 


 

 

    아빠로서 자녀교육은 아내의 의견을 따르는 편이다. 그리 열성적이지 않아서라기 보단 어차피 아이들 사정도 더 잘 알고, 아이들에게 쏟는 시간과 수고가 나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는 유리한, 책임 있는 위치에 있어 우선권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훗날 혹시라도 ‘애를 어떻게 길렀길래 이 모양이야‘ 라고 아내에게 자조적 비수를 꽂는 못난 아빠가 되지 않기 위해 관심과 성의를 보이고 면피를 구하는 중이다.

 


    개인적으로는 아이들을 대하고 교육하는데 아빠로서, 부모로서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가,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

    사랑의 매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개가 자기감정, 자기절제를 못한 어른들의 분풀이인 경우가 많다. 공포에 질린 아이의 눈을 본 적이 있는가? 육체적인 상처도 상처지만 영혼에 남기는 상처의 흔적은 더 치명적이고 유해하다. 손쉽게 아이들을 다룰 수는 있으나 그 때뿐이다.

    폭력으로 가르친다면 아이는 폭력으로만 설득할 수 있는 아이, 폭력 앞에서만 마지못해 굴복하는 아이로 자랄 것이다. 단지 고통과 무섭다는 이유만으로 교육의 효과가 나타나는 순간 그 교육은 이미 실패한 교육이다.

 


    물론 부족한 자제력, 절제력, 규율, 성실함을 단지 말만 갖고 가르치긴 힘들다. 하지만 폭력만은 안 된다. 부모가 폭력을 쓰는 순간 자신도 거기에 노출되게 되고, 자신에게도 행사한 꼴이 된다.(드라마, 특히 외국드라마에서 보면 분을 참지 못하고 순간적으로 손찌검을 한 후 당황해하고 괴로워하는 부모가 나온다. - 내게 일체의 폭력을 강요하지 말라. 그것이 나에겐 폭력이고 벌이다.)

    자녀 학대의 일종인 무관심과 방치 혹은 과보호보단 매가 낫다는 의미에서 ‘매 끝에 정 나고 효자 난다’란 속담이 생기기도 했겠지만 여자입장에서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한다’란 흉악살벌한 속담이 황당하고 혐오스럽듯이 힘없는 아이입장에서는 일방적이고 억울한 폭언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은 힘없는 약자(여자와 아이)에 대한 강자(남자와 부모)들의 자기변명, 합리화에 불과하다.

    아버지가 잘못한 자식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 패고 괜히 미안해서 신나게 놀아준다거나, 어머니가 회초리로 엄하게 벌을 준 후 자식이 잠들기를 기다려 몰래 약 발라주며 눈물짓는 것이 지극한 자식사랑의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인가??? 부모로서 자식교육의 무능과 실패의 고백에 다름 아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상황이 여기까지 이른 총체적 책임은 결국 부모에게 있다.

    자율적이고 민주적인 교육방법으로 능동적이고 책임감 있는 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것, 타율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으로 수동적이고 책임감 없는 미성숙한 인간으로 키우는 것, 매로 효자를 만드는 것, 사랑으로 효자를 만드는 것...... 무엇이 성공한 교육인지, 어느 부모가 유능한 부모인지는 자명하다.

 


    생각해보면 선행에 대한 보상도 그렇고, 잘못에 대한 벌칙, 규제에도 다양한 수단과 방법이 있다. 폭력만이 능사가 아니다. 부작용이 가장 크며 장기적으로 보면 효과 면에서도 가장 떨어지는, 가장 피해야 할 벌칙이다.

    부모가 자녀와 상의해서 벌칙에 대한 다양한 옵션을 미리 정해놓고 원칙에 벗어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때그때 자녀와 협상, 타협해서 그 방법과 강도를 스스로 선택하게끔, 스스로 받아들이고 납득하게끔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유도 모르고 받는 벌은 억울함만 키운다. 잘못에 비해 과하다고 생각되는 벌은 원망만을 키운다. 스스로 받아들이고 납득할 수 있는 벌만이 반성과 개선, 자아성장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둘째가, 올바른 언어생활.

    행동만큼이나 말 씀씀이가 중요하다. 물리적 폭력만큼이나 언어의 폭력은 강력하다. 비속어, 욕설, 험담, 흉보기, 과격한 표현뿐만이 아니다. ‘너 때문에 내가 미쳐’, ‘못살아 내가 증말’, ‘커서 뭐가 되려고 그래’, ‘이것밖에 못해’, ‘잘 하는 게 도대체 뭐니’, ‘참 가지가지 한다’ ...... 아이는 큰 상처를 받고 억눌려 어두워지고 부정적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욕하면서 배우고 당하면서 배운다고, 상처를 받으면서도 부모의 언어를 그대로 따라한다. 짜증내며 말하는 부모의 아이들의 말에는 항상 짜증이 묻어난다. 부모들이 이웃을 흉볼 때 아이들은 친구를 흉본다. 부모들이 조폭 말씨를 쓸 때 아이들은 깡패 말씨를 쓴다. 아이들은 부모의 언어습관, 억양, 뉘앙스까지 따라 배운다.

 


    나머지는 뭐 잡다한 것. 눈높이에 맞출 것. 생각만 맞출 것이 아니라 실재로 무릎 꿇고 행동으로 맞춰야 한다. 그것도 진지하게. 의견을 경청하고 선택권을 가능하면 최대한 보장할 것.

    하지만 이런 나도 아이들 공부를 봐주다 보면 울화통이 터져서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고 밖에서 학교에서 안 좋은 언어를 배우고 와서 써먹는 것을 보면 속상하고, 앞집 뒷집 뭐 시킨다 뭐 다닌다 하면 내 생각이 한가하고 안이한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학교에서 선생이나 학생에게 시푸르덩덩 맞고 들어오면 어쩌지??? 이러다 평균아래에서 헤매다 대학도 못 들어가면 어쩌지???)



    교육에 철학이 있고 없고 하는 한가한 얘기에 앞서 생계에 바쁘고, 부모는 부모대로 학생은 학생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생존경쟁에 치이다 보면 의도적이든 아니든 자녀교육을 회피하게 되고 떠넘기게 된다. 아빠는 엄마에게 엄마는 학교와 과외에, 학교는 가정과 사교육에 떠넘기고 국가는 개개인에게 떠넘기고......

    돈 있는 사람은 사람사서 과외에 떠넘긴다지만 여유가 없고 배우지 못한 부모들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자기자식들 좀 잡고 있어달라고, 집에선 잠만 자게 해달라고, 몽둥이로라도 때려서 가르쳐달라고, 심지어는 머리 좀 짧게 자르고 용모 좀 단정하게 해달라거나 핸드폰 좀 적게 사용하게 해 달라거나 하는 시시콜콜한 것까지......

    엄한 학교, 때리는 학교, 숙제 많은 학교, 시험 자주 보는 학교, 공부 많이 시키는 학교, 뺑뺑이 많이 돌리고 오래 잡고 있는 학교가 인기다. 가정에서 엄마아빠도 잡지 못하는 걸 선생님에게 잡아달라니...... 선생님을 신으로 아는 건지, 머슴으로 아는 건지......

    비단 학부모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교육에 문제의 핵심은 교육에 대한 확고한 비전 없이 단지 시험점수를 위해 정부도 국민도, 학부모도 학교도, 사교육도 공교육도 다 같이 미쳐 돌아가면서도 남 탓만 하면서 책임회피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러면 모두의 책임인가? 모두의 잘못은 아무의 잘못도 아니다? ..... 아니다! 잘못은 국가에 있다. 정부에 있다. 책임질 능력이 있고 해결할 능력이 있기에 국가책임이다.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남 눈치 보며, 자기자식 챙기는 것은 화재시 비상구로 너나 할 것 없이 몰려드는 것과 같은 본능적인 인지상정이다. 이들에게 설혹 잘못이 있더라도 궁극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개개의 자유가 보장되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가장 이상적인 상태로 발전, 유지된다는 ‘시장의 원리’는 대개 덩치 좋고 힘센 강자에 의해 유포, 강요된 논리다. 민간자율에서 민간이란 시민사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기실 거대자본, 한국에선 주로 재벌을 뜻한다. 개개의 이익이 항상 전체의 이익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시장의 실패’의 대표적인 예가 투기와 사교육이다. ‘변호사의 아내’님의 표현처럼 그것이 유전자처럼 박혀있는 한국인에게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이런 것을 적절한 정책수단을 써서 조정하고 절제시켜야 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은 교육의 공공성을 방기하는 것을 넘어 이러한 개개의 욕망을 부추기는 방향으로만 폭주하고 있다. 더구나 기름도 붓고 부채질도 해대면서 공교육을 강화한다느니 사교육비를 절감한다느니 듣기 좋은 엉뚱한 말만 해대고 있으니 제정신 갖고 지켜보고 있는 입장, 당장 아이의 교육이 걸려있는 학부모의 입장에서는 복창이 터질 노릇이다.

 


    비단 교육정책뿐만이 아니다. 거의 모든 정책이 앞뒤가 안 맞는다. 이것은 뭐랄까??? 부패나 무능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거다. 왼손이 쓰는 정책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 왼쪽으로 우회전? 네모난 세모? 미래의 기억?? 시쳇말로 ‘개념이 없다’라는 표현이 딱 맞다. 일부러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원래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국민들을 허탈, 황당하게 만들고 급기야 약 올려 죽이기라도 하려는듯한 기세다. (말하다 보니 또 열 받네!!) 웬만큼 관심 있고 끈기 있는 시민이 아니라면 지쳐서 나가떨어지게 된다. 관심을 끊고 체념하고 된다. 새로 계발된 국민탄압정책, 통치술치곤 너무 세련되고 고차원적이지 않은가!

 


    모두에게 유리하고 모두를 만족시키는 정책이란 없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은 대다수의 평범한 학생과 학부모에게 피해를 끼치는 정책, 학생들을 피폐하게 만들고 가정경제에 만만치 않은 부담을 주는 정책임에 분명하다. 또한 내놓는 정책마다 역주행인 것은 그렇다 치고 서두르긴 왜 이렇게 서두르나. 누가 쫓아오나.

    졸속에, 백화점식 중구난방에, 교육을 공기에 쫓겨 삽질, 공구리치듯하니 아마추어도 이런 아마추어가 없다. 선무당이 사람 잡듯 노가다가 애들 잡고 있다. 교육은 국가의 백년지대계라 했는데 5년지계, 정권지계도 못되는 수준이다.

 


    다른 정책과 달리 교육정책은 좋은 정책이든 나쁜 정책이든 너무 빨리, 너무 자주 바꾸면 안 되고 특별히 신중해야 한다. 학생, 학부모, 국민에게 주는 혼란과 영향이 너무 크고 섣부른 정책변화는 공교육의 경쟁력만 떨어뜨리는 결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수능, 입시, 점수 - 특히 점수만 놓고 볼 때는 어느 정책이든 몸집이 작고 날렵한 사교육이 절대유리하다. 과목개설과 배정의 커리큘럼을 자유자재로 짤 수 있는 것에서부터 하루아침에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도 없어지기도 하는 학원시장의 민첩한 적응력과 경쟁력을 절대 공교육이 따라잡을 수 없다.

 


    교육과 관련해선 누구든 만족이 없고 한 가지씩 불만불평이 있을 정도로 관심이 많다. 학부모며 자녀며, 교육자며 학생이며 관련되지 않은 국민이 없다. 하지만 푸념만 하고 국제중이며 일제고사며 새로운 정책의 총성이 울리면 재빨리 적응하고 편승하기 바쁘다. 모두가 힘들어 하면서도 핀란드식 교육정책을 부러워하기만 할 뿐 정책을 바꾸기 위해 세를 모으고 정치적 의사표시와 압력을 넣는 것에는 무관심하다.

    얼마 전의 경기도 교육감 선거에서는 다행히 반이명박 후보가 당선이 되었지만 20%에도 한참 못 미친(12인가 13%) 투표율은 반성해보아야 한다. 4월말에 있을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는 또 얼마나 관심을 갖고 투표를 할지... 교육감 하나 바뀐다고 개선될 상황이 아니다.

 


    서울대권력으로 대표되는 학벌엘리트와 강남, 대치동권력으로 대표되는 지역 및 사학이해집단의 결합은 공고해졌고 우리의 국민성, 유전자로선 자발적으로 이를 해체, 극복하기엔 한계가 많다. 서울대를 나와 강남구 대치동의 수십억 아파트에 살며 자녀는 근처 학원에서 고급과외학습을 받는 법관, 고위관료, 정치인들이 법과 정책을 주무른다.

    서울대 폐지나 사교육 금지(혹은 이에 준하는 대폭적이고도 강도 높은 사교육 시장 축소정책) 등은 수도이전보다도 저항이 심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혁명에 준하는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전두환식 과외금지 같이 독재적 방식이 통하는 시대도 아니다. 결국 국민투표가 답이다. 국민투표에 부치기에 충분히 가치가 있고 자격이 있는 이슈다.

 


    아무리 주관이 뚜렷하고 귀가 두껍더라도 한 개인, 한 가정이 이러한 교육환경에서 중심을 잡기란 힘들다. 허리가 휘는 것이 아니라 꺽이고 두 동강 나더라도 자녀교육은 포기하지 않는 것이 한국부모들이다. 설혹 경제력이 빵빵하고, 고상하고 뚜렷한 교육철학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격류에 휩쓸리거나 코가 꿰어 끌려가기가 십상이다.

    눈치 보며 어울려 따라가느냐, 신경 끄고 내 갈길 가느냐! 교육은 이미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가 되었다. 국가가 해결해주지 않으면 개인이 해결해야 할 밖에... 자기안의 혁명이다. 이 땅에서 그러한 결단력이나 경제력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이민, 유학 등의 도피밖에는 없다.

 



쌀이 질어서 (모종의) 실험을 망쳤다?



    “살기 싫다~ 시험 x_x”

    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 중고등학생이 유성펜으로 쓴 듯한(초등학생일지도 모르겠다) 낙서다. 보기 그래서, 내 아이가 볼까 봐, 지울 수가 없어서 “쌀이 질다~ 실험 x_x”로 고쳤다. 이 무슨 슬픈 코미딘지 ㅠ.ㅠ

    아이들도 죽이고, 부모들도 죽이고, 나라도 죽이는...... 지금의 교육은 살리는 교육이 아니라 죽이는 교육이다.

 


    졸린 눈, 늘어진 어깨, 힘없는 발걸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집과 학교와 학원을 뺑뺑이 도는 우리 아이들의 고생, 고난의 행군을 보노라면 참 안쓰럽고 어른으로서 못할 짓 시킨다는 미안함이 든다. 어른들이 잘 해야 한다.

 



※ 5년 전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과 지금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하에서의 교육환경은 별반 다르지 않다. 단 이명박 정권의 교육정책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고 잡다했다는 것. 박근혜 정권의 교육정책은 너무 느리고 아예 없다시피 하다는 것이 다를 뿐! 실속이 없기는 마찬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