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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책읽기

《대망(大望)》 1권 리뷰

어멍 2016. 2. 3. 23:52

 

      대망(大望)1권 리뷰

 

 

1권 표지 전면과 후면 12권 모두 일본 화가들의 일본풍 그림을 표지로 쓰고 있다.

 

 

    장장 22개월에 걸쳐(2014/03/11~2016/01/28) 총 열두 권을 읽다보니 처음 1, 2권 내용은 가물~가물~ (.) 이대로 끝내기가 섭섭하기도 하고 기억도 되살릴 겸, (줄거리가 아닌) 밑줄 치며 읽었던 부분만 빠르게 넘기면서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원문은 파란색으로 따로 구별한다.

 

 

    사람 마음속에는 부처님과 악귀가 함께 살고 있단다. 악귀뿐인 사람도 없고 부처님뿐인 사람도 없어. 상대 마음속의 악귀와 사귀어서는 안 돼. 그러면 너도 악귀가 되어야만 하는 이치니까. (72p)

    - 게요인(이에야스의 외조모)이 딸 오다이(이에야스의 생모)에게 하는 말.



에셔(Escher)의 목판화 <원의 극한Ⅳ(천국과 지옥)> 1960년

천사와 악마가 함께 살며, 천국이기도 지옥이기도 한 우리 마음속 모습


 

    마음속엔 부처님과 악귀가 함께 살고 있고 오른쪽과 왼쪽에는 천사와 악마가 각각 속삭이고 있다. 악귀와 악마를 외면하고 부처와 천사를 따르는 것이 바른 길을 가는 요체!

    의심이 생기면 있지도 않은 귀신이 나온다는 의심암귀(疑心暗鬼)라는 말도 있고 부처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도 있는 것처럼 마음먹기, 마음가꾸기가 중요하다.

    부처는 돼지를 가엾게 여기지만 돼지는 부처를 기피하고 증오한다. 어쨌든 서로 친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선은 선과 친하고 악은 악과 친하다. 그래서 유유상종한다. 악한 사람은 악한 사람과 어울려 더한 악으로 타락하고 선한 사람은 선한 사람과 어울려 더한 선으로 상승한다. 만약 지극히 선한 사람이 지극히 악한 무리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 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다면 그가 바로 부처고 예수다.

 

    악귀뿐인 사람도 없고 부처뿐인 사람도 없지만 사람만이 악마(절대악)와 천사(절대선)에 다다를 수 있는 존재다. 개나 소는 다 그 개가 그 개고 그 소가 그 소지만 사람은 절대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다. 여나 야나 정치하는 놈들은 다 그 놈이 그 놈이 절대 아니라는 거! 정치권 밖에도 정치권 안에도 나보다 더 똑똑하고 더 능력 있고 더 존경할 만한 훌륭한 인재들은 많다. 다만 그런 인재와 세력에게 시민들이 힘을 실어주지 못하는 것 뿐!

    인간만큼 개체와 개체간의 편차, 한 개체 안에서의 신축성이 큰 존재가 없다. 지능도 인품도 천치에서 천재, 악마에서 천사까지 하늘과 땅이지만 서로간의 유전자의 차이는 무의미할 정도로 똑같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안에 선한 본성과 악한 본성을 똑같이 갖고 있는, 근본에선 모두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동시에 끝 간 데 없이 타락할 수 있는 존재, 더 없이 상승할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선천적인 품성 못지않게 후천적인 공부, 특히 마음공부가 중요하다. 배우고 익히고 깨우치면 오늘의 나는 절대 어제의 내가 아니다. 사람의 인생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공부하고 누구를 만나 어떤 길을 가게 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좋은 할머니와 어머니를 만나고, 좋은 가신들과 훌륭한 스승들과 친구들과 호적수들을 만나면서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종식시키고 일본에 통일과 평화를 가져오는 길을 걷게 된다.

 

    사람이 결코 쉽게 변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지만 다른 종에 비해선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크다. 따라서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배우고 익히고, 대화하고 소통하기를 미리 포기할 필요는 없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교학상장(敎學相長)이 다 이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아마도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참뜻 역시 이것이 아닐까!

    죄인(악인)과 선인(성인)과 나는 다 같은 본성을 가진 다 같은 사람이다. 악인 안에도 선한 본성이 있고 성인 안에도 악한 본성이 있다. 따라서 나 역시 악인과 같이 죄를 범할 수 있고 성인과 같이 선을 행할 수 있다. 악인을 불쌍히 여기고 성인을 흠모하며 스스로를 경계한다면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른 길을 갈 수 있으리라.

    못난 사람, 굽은 사람, 악한 사람을 보고 미워하고 분노하기 전에 슬퍼하고 안타까워하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먼저 일어난다면 그 사람은 선인, 의인, 성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사람만이 상대방 마음속에 숨어 있는 부처와 천사를 불러낼 수 있고 만날 수 있다.

 

 

   유리, 너는 몇 살까지 살 작정이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유리는 대답한다.

    “마님 분부대로 언제까지라도 모시겠습니다.”

    오다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가 아무리 잘못 알아들어도 일단 고개를 끄덕이는 게 오다이의 습관이었다. (중략) 말이란 늘 소원을 말하기는 쉽지만 진리에 닿기에는 부족한 것, 인간의 가련함은 그 이면에 있는 듯했다. (149p)

    - 일종의 동문서답. 오다이는 인간, 인생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는데 시녀는 자신의 충심어린 소원을 말하고 있다.

 

    오다이의 응대법은 맞습니다. 맞고요.” 식의 노무현 전 대통령의 화법이랄까! 이것을 형식적인 빈말, 겉치레의 무의미한 관용구로 여길 수도 있고 상대를 방심하게 한 후 반격하기 위한 교묘한 웅크림으로 폄하할 수도 있으나(곧이어 상대의 모순과 미비점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반론을 제시한다.) 중요한 건 의식적이든 그렇지 않든 이런 습관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위의 부처, 악귀와 같은 맥락에서 상대의 마음속에 있는 부처, 천사부터 찾아보는 자세여야 한다는 것! 어떻게든 상대의 선한 마음, 선한 의도부터 찾으려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떻게든 상대에게 악한 의도가 있지 않나 경계부터 하는 사람도 있다. 사기를 당하는 등 억울한 사연이 많으면 의심부터 하게 되고 대인기피증, 피해망상증마저 보이는 안타까운 경우도 있지만 내 마음속의 천사, 부처부터 마중 나가 귀한 손님 영접하듯 해야 한다.



선한 의지, 긍정의 마음으로 쉽게 사람을 믿었던 순수한 사람

그 믿음과 호의가 배반당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렀던 불쌍한 사람


 

    동문서답! 악한 의도든 선한 의도든, 거짓말이든 갸륵한 정직함이든 가리지 않고 대화가 겉도는 경우가 많다. 이해력이 딸려 요점을 파악하지 못하고 오해하거나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 마음속으로 딴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도 마음이 바쁘고 생각이 꽉 차있어 새로운 것이 들어갈 틈이 없다. 깨달음을 얻고 진리에 닿기 위한 공부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듣기 전에 일체의 선입견, 편견, 자기생각, 지식 등은 뒤로 물려야 한다. ()과 무()의 자세로 상대에게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채우려면 비워야한다. 비우려면 버려야한다. 때로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일체의 것을 철저히, 남김없이 버려야한다.

 

    의식하지 못한 체 줄기에서 벗어난 자기생각을 어느새 얘기하고 있다. 대개 자기주장, 자기변명이다. 상대가 말하는 동안 보이는 것은 있지만 들리는 것은 없다. 비디오는 켜져 있지만 오디오는 꺼져 있다. 그 시간! 어떻게 자기 말을 할까, 어떻게 방어하고 공격할까만 열심히 궁리하고 연습중이다. 혹 열심히 들으려는 의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상대의 허점과 실수를 낚아채 물고 늘어지기 위함이다.

    의식적으로 귀를 닫는 경우도 있고 입까지 닫는 경우도 있다. 마음속으로 너는 떠들어라. 나는 내 갈 길 간다.’ ‘됐거든()’ ‘그래서 나보고 워쩌라고’ ‘흥칫뿡이다. 듣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묵묵부답이다. 몸은 여기 있지만 생각은 외출중이다. 엄마아빠에게 꾸중과 잔소리를 장시간 듣는 아이처럼 지루함과 괴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전혀 관련 없는 딴 생각을 필사적으로 찾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맥락은 이런 모든 경우를 떠나 사람의 마음이 아무리 지극하고 갸륵하고 성실하더라도 진리에 닿기가 어렵다는 것! 그래서 인간이 불쌍하고 가련하다는 것이다!

 

 

   물론 준비하도록 했습니다.”

    “물론은 필요 없는 말이다.” (443p)

 

    비슷한 맥락으로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면 쓸데없이 말이 많아진다. 화려한 말, 교묘한 말, 긴 말보다 소박한 말, 곧은 말, 짧은 말이 더 진실한 경우가 많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더 진실한 사람, 참된 사람이다.

    물론, 솔직히, 정말, 진짜로, 맹세컨대 적게 쓸수록 좋은 말들이다. ‘참기름이면 족하지 굳이 ‘one hundred percent pure 순 진짜 참기름이라고 할 필요는 없다. 결코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 맹세하지 마라.”[마태 5:34] 너희는 그렇다라고 할 때만 하고, 아닐 때는 아니오라고 말해라. ‘아니오이상의 말은 악한 생각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

 

 

    사람은 먹을 것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창은 버려도 살 수 있어요.”

    “!”

    셋사이는 놀란 듯 일부러 눈을 둥그렇게 했다.

    “공자님도 다케치요와 같은 대답을 하셨다. 병을 버리라고.” (중략)

    “나머지는 식과 신...... 신을 버립니다. 식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의기양양하게 대답하자 셋사이는 미소 지었다.

    “다케치요는 식에 매우 얽매이는군. 오와리에서 배를 곯은 모양이지?”

    “, 산노스케와 도쿠치요와...... 배가 고프면 모두 기분 나쁘고 한심스러워졌습니다.” (567p)

    - 스승인 셋사이 선사가 공자와 자공의 대화를 예로 들며 어린 다케치요(이에야스의 아명)를 문답식으로 가르치는 장면.

 

    병()과 식()과 신() 중에서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하는가?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 신이 가장 소중하고 그 다음이 식이요 마지막이 병이다. 뺏고 빼앗기고 죽고 죽이는 전국시대에서 식이 병보다 중하다는 어린 다케치요의 대답에 셋사이는 놀라 흐뭇해한다. 하지만 어린애는 어린애! (^.^) 신보다는 식! 먹는 게 중하다.

    하지만 어른도 마찬가지! 너도 나도 가릴 것 없이 대개의 인간은 이 수준에 머문다. 다케치요의 말처럼 배가 고프면 모두 기분 나쁘고 한심스러워지는 게인간이다. 움직이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싫고 짜증만 난다. 사흘만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게 된다는 말도 있다. 먹는 것 뿐 아니라 저차원, 고차원적인 갖가지 욕망 앞에선 신의도 없고 부모자식도 없다.

    풍속이 타락하고 패륜이 빈번한 것은 이렇게 물질과 쾌락을 향한 욕망에 인간의 도덕이 패한 때문이다. 신보다 식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이어서 셋사이 선사는 다케치요에게 먹을 게 생기면 시동(侍童)인 산노스케, 도쿠치요 이렇게 세 명이 어떻게 나누어 먹느냐고 묻는다. 다케치요가 답하길...

    예전엔 가장 어린 산노스케를 먹이고 제가 먹고 다음에 도쿠치요가 먹었습니다. 도쿠치요는 제가 먹기 전에는 먹지 않았으므로... 그 뒤로부터 산노스케도 도쿠치요를 흉내내 먼저 먹지 않게 되어 지금은 처음부터 셋으로 나누어 먹습니다.

    이 대답을 듣고 셋사이는 다시금 흐뭇하게 여기며 다케치요에게 왜 식보다 신이 중요한지 힌트를 준다. 결국 얼마 되지 않는 먹거리로 세 사람이 목숨을 영위하고 정을 나눈 것은 그 누구도 혼자 독차지하여 남김없이 다 먹지 않을 것이라는 서로간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

    식이 있어도 신이 없으면, 그 식이 싸움의 씨가 된다.’ (570p) 이때는 악인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까지 너도 나도 악귀가 되어 신을 버리고 병을 취하여 식을 뺏고 빼앗긴다. 식이 넘쳐나더라도 이 세상은 아수라가 되고 지옥이 된다.


    <論語(논어)> 第十二篇(제십이편) 顔淵(안연)

 

    7. 子貢問政. 子曰 足食, 足兵, 民信之矣.” - 자공이 정치에 대해서 여쭙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풍족하게 하는 것, 군비를 넉넉히 하는 것, 백성들이 믿도록 하는 것이다.”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三者, 何先?” - 자공이 말하였다. “어쩔 수 없어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曰 去兵.”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무기를 버린다.”


    子貢曰 必不得已而去, 於斯二者, 何先?” - 자공이 여쭈었다. “어쩔 수 없어서 다시 한 가지를 버려야 한다면 이 두 가지 가운데 무엇을 먼저 버려야 합니까?


    曰 去食, 自古皆有死, 民無信不立.” -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식량을 버린다. 예로부터 모두에게 죽음은 있는 것이지만, 백성들의 믿음이 없으면 나라(공동체)는 존립하지 못한다.”


 


    《대망(大望)1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