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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73 : 마태복음 1장

어멍 2011. 4. 12. 00:47
 

    성경읽기 0073 : 마태복음 1장



    저자 :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인 마태(Matthew)

    주요 인물 : 예수님,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 세례 요한, 예수님의 제자들.

    기록 목적과 대상 : 예수님의 어록을 자료로 주로 유대인들을 위해 쓰여진 복음서로, 왕으로 오신 예수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임을 강조.



    신약에 들어가기 전에 그 구성을 일별해보자. 신약은 크게 나누어 4권의 복음서, 1권의 역사서, 21권의 서신서, 1권의 예언서, 도합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교회가 인정을 받은 이후 성서학자들이 복음서 몇 가지와 사도의 서신 몇 가지만 취하기로 결정하면서 완성된 것이다. 최초 표기는 헬라어, 곧 그리스어로 히브리어, 아람어로 쓰여진 구약보다 훨씬 후에 쓰여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의 정수이자 예수님의 말씀과 생애를 기록한 4대 복음서는 마태(Matthew), 마가(Mark), 누가(Luke), 요한(John)복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약간 혹은 많이, 문체와 특징을 달리하는데 그 중 마태, 마가, 누가 세 복음서를 일컬어 공관복음서(共觀福音書, Synoptic Gospels)라고 한다. 이는 많은 부분 그 내용이 서로 중복, 일치 또는 차이가 있어서 함께(syn) 보며(optic) 참고, 대조해야 한다는 의미다.




공관복음서 간의 관계



1장 1절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마태복음 첫 장 첫 절, 신약 첫 장 첫 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로 시작하고 있다. 참고로 구약의 첫 장 첫 절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창 1:1]다. 구약은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약은 (주로)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1장 20절

“다윗의 자손 요셉아, 마리아를 아내로 삼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가 아기를 가진 것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21절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의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낼 것이다.

23절

보라!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와 약혼한 요셉이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파혼하려 하자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하는 말이다.

    처녀가 임신을 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당장 더럽고 추한 생각부터 난다. 수군수군대며 손가락질 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의로운 사람 요셉은 마리아를 창피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파혼하려 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이것(23절)은 이미 이사야 7장 14절에서 예언되어졌던 것이다.


    그럼 반대로 예수님이 요셉이든 누구든 인간을 아비로 둔, 인간의 실질적인 혈육이라고 가정해보자. 예수님의 신성(神性)에 치명적이지는 않더라도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그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신화, 탄생설화에는 비슷한 구조가 있다. 알에서 태어나고, 바다에서 태어나고, 구름과 달과 별과 해에서 태어난다. 그래야 인간을 초월해 신에 버금가는 자격이 있다.

    과학적으로는 ‘처녀생식’이라는 용어도 있다.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란 얘기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성령으로 잉태한 것이 말이 되냐는 불교도에게 그럼 부처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말문을 튼 것은 말이 되냐고 되묻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비과학적이라고 비판하는 무신론자들에게 처녀생식을 근거로 재반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차라리 생명의 근원, 존재의 근원에 대해 되묻는 것이 더 낫다.


    아무 것도 없던 태초에 생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어떻게 무에서 유가 있게 되었을까. 무생물과 생물, 무기질과 유기질에서부터 의식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처음 존재하기 시작했을까. 이것이 기적이 아닌가! 이것보다 더한 이적이 있는가! 일이 가능하면 백이 가능하다. 백이 가능하면 무한수가 가능하다. 태초에 무에서 유가 있게 된 기적에 비한다면야 성령잉태의 사건은 무한수가 아닌 백일 뿐이다.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께는 여반장(如反掌)한 일상다반사일 수도 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논리와 과학으로 말이 되네, 안 되네 갑론을박, 티격태격하는 게 큰 의미가 없다는 거다. 단지 불가지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종교와 과학, 영성과 이성이 차원을 달리함을 얘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사실여부, 믿음은 종교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독실한 기독교도가 듣기에 당황되고 불쾌할 정도로 발칙하고 불경스런 상상이지만... 설혹 아니면 어떤가.


    성경은 오묘하다. 그 오묘함은 가장 비루한 것과 가장 성스런 것이 함께 함이요, 가장 더러운 것과 가장 순결한 것이 함께 함이요, 가장 악한 것을 가장 선한 것으로 감싸 안음이요, 가장 추악한 것과 가장 아름다운 것, 가장 큰 증오와 가장 큰 사랑이 혼재하는 이 세상의 이치를 드러내주고 있다. 예수님은 더러운 병자, 냄새나는 빈자, 모두가 꺼리는 흉측한 문둥병자, 미움 받는 세리, 돌팔매 당하는 창녀를 위해 변호하셨다. 세상의 이치로 보면 이들은 모두 더럽고 추하고 천하고 악하기까지 하다.

    예수님은 어떨까?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다. 하지만 예수님 역시 이러한 출신성분이었다면... 인간의 혈육은 물론이요 우리식이라면 백정, 갖바치, 망나니의 비천한 집안 출신이였다면... 어쩔 것인가?! (하긴 목수 출신 예수님도 지금, 우리 기준으로는 그리 좋은 직업 축에 들진 못한다.) 예수님 역시 성골진골, 양반상놈 따지듯 그 피의 순수성을 따지고 그 출신성분을 들먹여야 할까. 여기서 한 치라도 벗어나면 하나님의 유일한 성령의 아들이라는 자격이 박탈되는 걸까. 그것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상상만 하는 것도 용납돼서는 안 되는 신성모독죄가 되는 것일까.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그 피의 순수성, 혈통에 있지 않다. 그 분의 십자가의 희생에 있다. 흔치 않을 뿐, 때론 가장 천한 것에서 가장 귀한 것이 나고, 가장 귀한 것에서 가장 천한 것이 날 때도 있다. 때론 가장 낮은 자만이 가장 높은 위치에 오를 자격과 가능성이 있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비루한 인간들의 세속적 가치판단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이런 것들까지 감수하고 그 분을 따라야 한다. 믿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의 근거는 기적, 이적에 있지 않다. 당시에도, 지금도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듣고 그를 따르고 믿었으나 예수님은 보지 않고도 믿는 자가 더욱 복되다고 말씀하셨다. 그 믿음은 기적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가르침에 대한 믿음이다.


    구약의 천지창조, 홍해의 기적부터 신약의 성령잉태, 오병이어까지 성경에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숱한 기적, 이적이 나온다. 성도들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믿어야할 아멘이기도 하지만 비기독교들은 대개 무슨 허무맹랑한 얘기냐며 손사래를 친다. 이제까지 이런 이적에 관해 구체적으로 자세히 언급하지 않은 것은 이것이 핵심이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논리와 과학으로 다룰 사안이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성령잉태에 이어 앞으로 본격적으로 많은 이적에 얽힌 얘기가 나오기에 한번쯤 길게 다루어봤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이적과 권능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진의와 사랑이 더욱 값지다. 성경을 읽는 것은 연애 소설을 읽듯 달콤한 재미를 얻기 위함도 아니요, 마법판타지 소설을 읽듯 놀라움과 환상을 맛보기 위함도 아니다. 명상록을 읽듯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얻기 위함도 아니요, 인문철학서를 읽듯 지식과 지혜를 얻기 위함도 아니다. 하나님의 본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참사랑을 알기 위함이다.


    ‘임마누엘’, 이 땅에 내려와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인 예수 그리스도의 본모습은 놀라운 기적에 있지 않다. 놀라운 사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