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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24 : 열왕기하 17장~25장

어멍 2010. 9. 1. 01:08
 

    성경읽기 0024 : 열왕기하 17장~25장



    열왕기하의 저자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예레미야가 썼다는 설이 가장 유력. 주요 인물은 엘리사, 나아만, 히스기야, 이사야, 므낫세, 요시야, 느부갓네살 등이고 핵심어는 ‘심판’, ‘포로 생활’이다. 전편인 열왕기상에 이어 분열하고 쇠퇴하여 결국 멸망해가는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의 왕과 예언자들의 이야기가 계속된다.



17장 6절

호세아가 왕으로 있은 지 구 년째 되는 해에 앗시리아 왕이 사마리아를 점령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앗시리아로 끌고 가서 할라와 고산강가의 하볼과 메대의 여러 성에서 살게 했습니다.

 

    여로보함 이래로 이어져 온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인 19대 왕 호세아에 이르러 북쪽에 있던 앗시리아 제국의 살만에셀 왕에 의해 멸망한다.



24장 17절

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은 여호야긴을 대신해서 여호야긴의 삼촌 맛다니야를 왕으로 세우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고쳤습니다.

25장 30절

(바빌로니아 에윌므로닥) 왕은 여호야긴이 살아 있는 동안에 날마다 그에게 용돈을 주었습니다.

 

    르호보함 이래로 이어져 온 남왕국 유다는 BC 587년 시드기야 왕에 이르러 동쪽에 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멸망한다.

    북왕국 이스라엘이 멸망한 후에도 유다왕국은 140여 년간 지속된다. 그 사이 몇몇 왕들이 개혁을 시도하기도 했고 앗시리아와 이집트의 침략을 넘기기도 했지만 결국 죄를 돌이켜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지 못하고 멸망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두 왕국이 망하고 그 백성들은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로 포로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 신세가 된다. 이후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물리칠 때까지 칠십년 동안 고난을 받게 된다.

    유다 최후의 왕인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가 조카인 여호야긴 왕을 바빌로니아로 끌고 간 후 세운 허수아비 왕이다. 그 역시 예루살렘의 함락과 멸망을 보게 된 후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감옥에 갇혀 있다가 죽임을 당한다. 이후 바빌로니아는 유다 땅에 그달리야를 총독으로 세워 식민통치를 시작한다.


    똑같다! 100년 전 대한제국의 멸망과 일제식민통치의 역사가 정확히 오버랩된다. 바빌로니아는 왕의 이름까지 맛다니야에서 시드기야로 고친다. 일제는 순종황제를 이왕(李王)으로 격하하여 고친다. 바빌로니아는 유다 땅에 총독을 세우고 일제는 우리 땅에 통감을 세운다. 시드기야의 전임 여호야긴 왕은 바빌로니아로 끌려가 용돈을 받으며 살아가고 이왕의 아들 의민태자(영친왕이라고도 한다)는 일본으로 끌려가 감시를 받으며 일본여자와 정략결혼을 하고 일본육사를 나와 일본군 부대 근무와 육사 교수를 거쳐 장성까지 진급한다. 여기에 들어가는 생활비, 학비 등은 일본에서 지급받았음은 물론이다. 황제에서 왕으로 왕에서 일제의 일개 군인으로 전락하는 대한제국 황실의 비극적 패망사, 한민족의 치욕적 식민사이다.

    지난 8월 29일은 마침 한일병합 100주년이 되는 날이다. 그 시절 활약했던 매국노들, 한일병합조약의 한국 측 대표였던 이완용 등 친일파들은 그 공으로 일제로부터 거액의 은사금과 이권을 받아 조선의 거부로 성장하여 호의호식했다. 거기에 뿌리를 둔 인사들을 우리는 한 번도 척결하거나 정리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영향이 엄연히 현재에도 미치고 있다. 정치, 경제, 사회, 언론, 학계, 문화, 예술, 군대까지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패망에 이은 좌절의 역사다. 두 번의 패배다. 통탄할 일이다.


    열왕기상, 하는 유대민족의 역사, 왕들의 이야기다. 그 중에 유독 유다왕국, 유다지파의 얘기가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다. 여러 지파의 북왕국 이스라엘에 비해 유다지파는 단독으로 대등한 유다왕국을 이뤘다. 왜 그런가? 잠깐 이스라엘이라고도 부른 인물인 야곱의 12아들, 12지파로 나누어진 창세기로 되돌아가보자.


창세기 37장 26절

유다가 형제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동생을 죽인 다음, 그 사실을 숨긴다고 해서 우리에게 무슨 좋은 일이 있겠나?

27절

차라리 요셉을 저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아버리자. 그러면 동생을 죽이는 죄도 짓지 않게 된다. 그래도 저 애는 우리 동생이고, 우리와 피와 살을 나눈 형제가 아니냐?” 그러자 다른 형들도 모두 유다의 말에 찬성했습니다.

 

    비록 팔아버리자고 제안했지만 여러 형들에게 미움을 받는 막내 요셉을 형들이 죽이려 하자 유다가 다른 형제들을 설득하는 장면이다. 이후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탁월한 능력으로 정치를 관장하여 이집트를 위기에서 구하고 부유하게 한다.


창세기 49장 8절

“유다야, 네 형제들이 너를 찬양할 것이다. 너는 원수들의 목을 움켜쥘 것이다. 네 형제들이 네 앞에 절을 할 것이다.

10절

유다에게서 왕이 끊이지 않을 것이고 유다에게서 다스리는 자가 끊임없이 나올 것이다. 유다는 참된 왕이 올 때까지 다스릴 것이다. 온 나라는 그에게 복종할 것이다.

22절

요셉은 열매를 많이 맺는 포도나무와 같고, 샘물가에서 자라는 풍성한 포도덩굴과 같다. 요셉은 담 위에 가지가 무성한 포도나무와 같다.”

 

    야곱이 죽음을 앞두고 12아들들을 축복하며 하는 말이다. 요셉도 축복하고 유다도 축복한다. 하지만 약간 다르다. 요셉은 풍요와 물질의 축복, 유다는 권능과 권력의 축복이다. 영적 장자는 유다다.

    요셉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신실하고 유다도 그렇다. 하지만 유다가 더 신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더 믿음직하기 때문이다. 실지로 유다는 여러 형제들에게 고루 신뢰를 얻어 그들을 조정, 통솔했다.

    무엇인가? 물질적 풍요가 다가 아니란 거다. 수완, 능력이 다가 아니란 거다. 형제자매들 간에도 돈만 많다고, 출세해서 감투만 썼다고 존경을 받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다. 신뢰다. 사람의 힘을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정치에선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야 사람들이 충심에서 믿고 따른다. 최고지도자의 최고덕목이다.

    양치기 다윗은 거인 골리앗을 이겼다. 동네 한량 출신인 유방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인 항우를 이겼다. 힘이 장사라도, 무력이 아무리 강해도 다가 아니다. 힘으로 제압하는 것은 이득을 나누고 조정하는 것만 못하다. 이득을 나누는 것은 덕을 베풀고 가치와 믿음을 나누는 것만 못하다.

    여기서 이명박 대통령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수완도 좋고 완력도 강하다. 그것이 능력이라면 능력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득을 나누거나 이권으로 낚는 것도 탁월하다. 하지만 허장성세식 뜬소리, 거짓말, 언행불일치는 한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다. 747, 주가3000, 친서민, 공정사회, 법치, 행복시 (말바꾸기), 4대강 (호도) 등이 다 그것이다. 사람이 이러면 믿고 따를 수 없기 이전에 정이 안 간다. 그 밑에서 일하기도, 그를 부하직원으로 두기도, 그와 동료로서 일하기도 싫다. 같이 엮이는 것 자체가 싫다. 과연 대통령 주변에 이득을 바라고 모여든 사람 외에 그를 진정으로 믿고 존경하는 이가 있을까 의문이다.

    무신불립(無信不立)이라고 했다. 힘으로 다스리려 하는 자는 하수다. 이득으로 설득하려 하는 자는 중수다. 믿음으로 이끌려는 자가 상수다. 그래서 유다지파에서 많은 사사들과 선한 왕들이 나왔다. 유다지파는 여러 이스라엘 민족 중에 명문지파, 명문가의 축복을 받았다. 다윗과 솔로몬,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다.


    사울, 다윗, 솔로몬을 통일왕국시대로 치면 대략 90여년이다. 이후 남왕국과 북왕국으로 나누어져 유다가 최종적으로 멸망하게 된 때까지를 분열왕국시대로 치면 대략 330여년이다. 통일은 짧았고 분열은 길었다. 결국 다시 통일되지 못하고 이스라엘, 유다가 순차적으로 멸망한다.

    구한말도 국토만 분열되지 않았을 뿐 친미, 친청, 친러, 친일로 국론이 사분오열, 사실상 국가가 분열된 상태였다. 결국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지리멸렬 일본에게 먹히고 말았다. 지금도 남북이 분열된 채 일제식민지 이전의 한민족 공동체로 회복돼지 못하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의 햇빛정책, 노무현 대통령의 평화번영정책은 후퇴하여 남북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멸망으로 가지 않도록 하루빨리 통일의 단초를 마련해야 한다. 신실하고 도덕적인 시민, 다윗과 솔로몬처럼 믿음 깊고 지혜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도 공정 사회, 정의 정치를 주창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과연 그러한가.

    8월 29일에는 경술국치 10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고 김태호 국무총리, 신재민 문화부장관, 이재훈 지식경제부장관 후보자가 청문회를 통과하지 못하고 자진사퇴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비록 조현오 경찰청장, 진수희 보건부장관, 이주호 교육부장관 후보자 등 비슷비슷한 비리의혹자, 문제인사들의 임명이 강행되어 많이 미흡하지만 그나마 다행이다. 아마도 여론, 특히 든든한 지지세력이었던 조중동의 여론이 불가로 돌아선 것이 결정적인 듯하다. 조중동도 밀어붙이기엔, 지지하기엔 한계라고 느낀 것일까. 해도 해도 너무했다고 느낀 것일까. 아니면 종편채널 이권을 앞두고 이명박 정부를 상대로 위력 시위라도 한 것일까.

    분명히 브레이크를 걸었다. 옳은 소리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본성이 바뀐 건 아니다. 일종의 관리다. 위기관리, 상황관리다. 아무리 시중에서 유전무죄 무전유죄,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뜻보다 힘, 정도(正道)보다 권도(權道)가 장땡이라고 한탄하고 체념하더라도 형식적, 공식적으로는 세상은 공정하고 평등하고 정의로워야만 한다.

    잣대는 반드시 한 개처럼 보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휘두르는 잣대는 반드시 2개여야 한다. 그들이 희망하는 바는 반칙의 비공식적 수용, 질서정연함 속의 불평등이다. 이 공공연한 비밀, 그들만의 전매특허가 어린 자녀, 힘센 청년, 평범한 소시민에게까지 공인되고 체화되면 궁극적으로 사회가 유지돼지 않는다. 이제까지 숙맥이고 호구였던 하층백성들이 어울리지 않게 반칙을 들고 나온다. 당황되고 혼란스럽다. 힘없는 백성이라도 체념이 분노가 되어 낫과 호미를 들고 대들 수 있다. 두렵다.

    반칙은 기득권만의 특권이어야 한다. 폭력은 그들이 장악한 공권력에 의해서만 질서정연하게 행사돼야 한다. 나만 할 수 있는 반칙과 폭력을 너도나도 하게 되면 아수라장 무정부상태가 되고 기득권 체제가 뿌리째 위험해진다.


    농장의 동물들이 독재자 농장 주인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들만의 공산주의 세상을 쟁취하지만 결국 그들의 지도자인 돼지 나폴레옹(스탈린을 상징한다.)은 독재자로 행세하며 동료 동물들을 착취, 억압한다는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은 분명 공산혁명과 공산주의 사회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독재, 독선의 가능성을 잉태한 권력, 기득권의 생리를 신랄하게 풍자, 비판하여 좌우익 모두에게 무시와 공격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권력은 타락하기 마련이다. 절대권력은 절대로 타락한다.”는 명언을 실감나게 그리고 있다.

    동물들은 혁명에 성공한 후 7계명을 세운다. 하지만 새로이 특권계층이 된 돼지들(공산당원이 연상된다.)에 의해 영원불변할 것 같았던 이 계명은 변질된다. “어떤 동물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는 “어떤 동물도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는 안 된다”로 바뀐다. “어떤 동물도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어떤 동물도 이유 없이 다른 동물을 죽여서는 안 된다”로 바뀐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는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욱 평등하다”로 바뀐다.

    결국 돼지들은 인간의 옷을 입은 채 종국에 두 발로 서고 앞발로 인간의 채찍을 든다. 마지막 장면은 어느 쪽이 인간이고 어느 쪽이 돼지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과 어울려 먹고 마시고 다투는 장면으로 끝난다. 어리석고 순한 동물이 똑똑하고 사악한 인간으로 변한 것이다. 동물의 인간화를 통해 인간의 동물화, 그 어두운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위장전입 해서는 안 된다”가 이번에 “너무 많이 위장전입 해서는 안 된다” 혹은 “이유 없이 위장전입 해서는 안 된다”로 바뀌었다. 자녀교육이 그 이유 안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모세의 십계명이 "너무 많이 도둑질하지 마라", "이유 없이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로 바뀐 것이다.

    바야흐로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시민은 다른 시민보다 더욱 평등하다.” 한나라당 측 인사가 다른 시민보다 더욱 평등해졌다. 역시 으뜸 정당, 럭셔리한 정당이다. 하지만 짐승처럼 추하고 비루한 몰골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 : 양복입은 짐승? or 꿀꿀대는 인간?



    여론의 강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현오 경찰청장의 임명이 강행되어 시끄럽다. 뚜껑을 열어보니 김태호가 사석이고 조현오가 대마다. 무엇인가? 정권보위에 필수적인 권력기관장이기 때문이다! 나폴레옹도 소, 양, 거위, 닭 심지어 같은 족속인 돼지까지 죽이지만 경호와 폭력을 행사하는 검고 큰 개들만은 애지중지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아랑곳 않고 “공정한 사회를 위해 총리, 장관의 사퇴를 수용”했단다. 어제는 불과 넉 달 만에 다시 열린 북중 정상회담을 놓고 “김정일 위원장의 잦은 방중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단다. 현실인식이 이렇게 엉뚱할 수 있을까. 이 대통령의 공정사회와 전두환씨의 정의사회가 무엇이 다른가. 과연 이외수씨가 일찍이 “졌다”라고 G·G 선언할 만하다.

    일찍이 ‘맨삽으로 BBK 치킨을 때려잡고 뻥튀기를 맨홀 뚜껑처럼 씹어먹으며 달리는 시내버스 2-1에서 청계천 은어에게로 뛰어내리셨던’ 이명박 대통령 각하 폐하의 4차원 언행이다. 아무리 상상력이 풍부한 소설가라도 예상할 수 없다. 하물며 나 같은 소시민으로서는 감히 이해할 수 없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다. 


    여러모로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모두 독특한 스타일, 말들 갖고 말도 많았고 언듯 보면 '노명박'이라고 비슷하게도 보이지만 자세를 고쳐잡고 정색하고 보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노 대통령이 선천적으로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고 자기자랑을 부끄러워한 반면 이 대통령은 거짓말에 능수능란하고 거짓이 먹혀들어가는 것에 대해 쾌감을 느끼는 듯하다. 자기과시와 합리화가 습관화되어 있다. 본능적으로 발달해 있다.

    노 대통령은 이런 식이다. 고 김수환 추기경의 하느님을 믿느냐는 물음에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신이란 존재를 어렴풋이 믿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병영 환경의 개선을 얘기하면서 “젊은이들이 군대 가서 2년을 썩는다.”라고 말한다. 국토균형발전 정책의 정치적 효과를 얘기하면서 “행정수도 공약으로 재미 좀 봤다.”라고 얘기한다. 남북관계의 사활적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이것만 잘하면 다른 건 다 깽판쳐도 된다.”라고 얘기한다.

    이 대통령은 이런 식이다. 인생의 지혜를 들려준다며 “못생긴 여자가 서비스가 좋다.”라고 얘기한다.(후에 기회균등 차원이었다고 말을 바꾼다. 놀라운 순발력과 두뇌 회전력이다!) 예산낭비를 얘기하면서 자기는 “한 쪽 눈만 감고도 수십조를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BBK, 도곡동 땅 등 숱한 의혹에 대해 “세상이 나를 죽이려 미쳐 날뛰고 있다.”며 한나라당 당원들 앞에서 자신은 결백하고 자신만이 한나라당의 숙원인 정권탈환을 할 수 있다며 설교하듯 “믿습니까? 여러분 저를 믿습니까? 저를 믿어주시겠어요?”를 연발한다. (관련 동영상을 보려면 요기 ☞ 이명박의 감동적 눈물과 검찰의 성(性)스런 분노)

    정권도 시대도 인물도 극과 극이다. 노 대통령의 마음속엔 항상 강한 근성과 함께 수줍음이 있었다. 이 대통령의 마음속엔? 항상 승부심과 욕심만이 가득하다. 노 대통령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진실한 사람이었다. 이 대통령은? 실없는 사람이다. 노 대통령이 철저히 위악적인 사람이었다면 이 대통령은 철저히 위선적인 사람이다.


    지당하신 말씀, 같은 말을 자꾸 듣다보면 나도 모르게(@.@)....모르게(@.@).... 믿어진다아아~아. 애초에 왜 화를 냈는지도 잊은 채 최면에 빠지는 듯 정신이 몽롱해진다. 가치관이 혼란스럽다. 분노와 냉소를 거쳐 체념에 이른다. 강적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황당, 엉뚱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사람이 실없으면서도 허허실실, 실실허허 은근히 진을 빼고 판단력을 흐리는 고단수다. 완력이야 자타공인이고 지성은 모자르더라도 지능, 속된 말로 잔머리만큼은 탁월하리라 추측된다. 그의 믿음은??... 남을 함부로 분석, 판단하고 특히 종교적으로 정죄해선 더욱 안 되겠지만 자꾸만 의문이 생긴다. 과연 그가 믿는 하나님과 내가 믿는 하나님이 같은 분일까. 그가 읽는 성경이 내가 읽는 성경과 같은 것일까.

    대통령은 주일에 교회도 가고 성경도 읽고 설교도 듣는다고 한다. 목숨을 걸고 다윗의 허물을 꾸짖은 나단 같은 선지자가 한국교회에는 없는 것일까. 하긴 나 같아도 포기할 것이다. 목숨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들어먹을 가능성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다윗은 잠깐 죄 지은 것을 빼면 줄곧 신실하고 정직한 인물이었던 반면 이 대통령은 줄곧 죄 짓고 정직하지 않은 인물이기 때문이다.

    교인이 아닌 일반시민의 눈에 이 대통령이 혹 양복에 성경책을 낀 거대 설치동물로 비취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같은 교인 입장에서 창피하고 원망스럽다.


    분열된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모세의 십계명을 지키지 않았다. (하나님의) 사랑과 율법에서 멀어져 죄를 짓고 결국 멸망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공공의 규칙과 법률이 있다. 그 이전에 도덕과 양심이 있다. 여기서 멀어진다면 마찬가지로 탐욕과 본능만을 쫓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되어 죄를 짓고 패망하게 될 것이다. 100년 전의 역사와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똑똑히 가르쳐주고 있다.


    항상 하나님의 뜻을 가까이 하고 되새기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를 멀리 내치지 마옵소서. 언제나 스스로를 경계케 하시어 죄를 짓지 말게 하옵고 야수의 심장이 아닌 하나님이 지으신 복된 인간의 심성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믿음과 양심을 주시옵소서.


    열왕기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