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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 퇴출보다 복귀가 낫다.

어멍 2009. 9. 21. 23:15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의 글(박재범은, 돌아온다) 요약


박재범 비판그룹

1그룹. 순수 소비자들(가장 다수)

2그룹. 또래 수컷 경쟁자들, 주로 군 미필 남성(가장 극렬)

3그룹. 순수 우파, 보수, 국가주의자들(가장 소수)

세 그룹을 칼로 물 베듯 나눌 수 없고 서로 뒤섞여 있으나 대개 이 범주를 벗어나지 않음.

1그룹 소비자들의 반응은 자연스러운 것. 그들에겐 그럴 권리가 있음.

일이 꼬이기 시작한 건 두 번째가 세 번째 언어를 구사하며 첫 번째처럼 행동하면서부터.

신속하고 비정하게 그를 버린 소속사는 욕먹어 마땅하다.

자신의 열패감을 애국주의로 치환하는 치졸한 수작만큼이나 웬만한 ‘애국’감성은 간단히 파시즘으로 매도하는 그 게으르고 강박적인 호들갑, 먹물들의 관습적 훈장질도 안쓰럽다. 그건 오만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적 태만이다.


※4그룹. 억지로 끼워 넣는 감이 있으나 차별과 특혜, 불공정의 배경에 있는 미국풍에 대한 대중의 추종을 비판하는 입장, 미국풍이 갖는 특혜의 아이콘으로서의 박재범을 비판하는 입장.(내가 임의로 설정한 그룹)



    역시 딴지총수! 명불허전이다. 전체를 조망하는 시야. 깔끔하게 요약하면서도 빠뜨린 것이 없다. 사고의 깊이가 김동렬과 같이 깊다. 구지 비교하자면 분석력은 김어준이 더 뛰어나고 통찰력은 김동렬이 더 뛰어나다. 김어준이 좀 더 문화적이라면 김동렬은 좀 더 정치적이다.

    김동렬의 글(외국인 노동자의 불행)에는 있고 김어준의 글에는 없는 것은 차별, 특혜, 계급, 공정성, 노예근성이다. 따라서 그 수는 적지만 이 입장에 서는 제 4의 비판그룹을 설정할 수 있다. 1그룹의 소박한 서운한 감정, 괘씸한 감정과도 다르고 2그룹의 적대적 증오심과도 다르고 3그룹의 교조주의적 애국심과도 다른 보다 정치적, 구조적으로 접근하는 비판그룹이다. 평소의 문제의식이 재수 없게 걸린 박재범에 의해 드러난 경우다. 엄밀히 말하면 철없고 당돌한 박재범 개인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구지 박재범을 퇴출시키고 매장하려는 것이 아닌 박재범, 박진영으로 대표된다고 생각되는 어메리칸 스타일 상품, 문화사대주의와 이에 휘둘리는 우리 대중문화, 대중의 성향을 비판한 것이다. 논리비약의 위험성은 있으나 미국에 대한 막연한 동경, 미제는 똥도 향기롭다는 노예근성, 미국풍이라는 것만으로도 특권과 경쟁력을 갖는 시장구조에 대한 문제인식이다. (어디 문화뿐이랴! 정치, 경제, 교육, 학문 방면에서의 미국풍, 미국추종주의도 의식, 무의식중에 그 뿌리가 깊다. 야망이 있는 정치인들의 미국 방문 혹은 체류일정은 필수코스이고 박사라도 미국 박사를 훨씬 더 쳐준다.)

    따라서 김동렬의 타켓은 연예인인 상품 박재범보다 연예기획사인 사업가 박진영에 맞추어져 있다. 그는 박진영이 미국에 대한 선망, 심하게 표현하면 우리의 열등감, 노예근성을 자극하는 미국풍 문화상품을 팔고 있다고 본 것이다. 덧붙여 기본적인 인성과 자질은 도외시한 채 재능과 끼만 보증된 아이돌을 집단합숙, 학습시켜서 쇼부보려는 연예기획사의 상업주의까지 비판한다. 그러면서 그는 이기려면 팔다리(박재범)를 조준할 게 아니라 어느 경우든 머리(박진영)를 조준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인즉슨 맞다. 하지만 조준하려면 총부터 있어야 하고 총을 드는 팔이 있어야 한다. 총을 들어 방아쇠를 당기는 몫은 궁극적으로 대중의 몫이다. 총이라는 생산수단, 물적 토대, 물리적 수단을 대중이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 인디문화나 대중 스스로 만들어 대체할 수 있는 문화상품은 일천하고 대중이 장악하거나 주도권을 행사하는 미디어가 전무한 상황에서 대중이 갖고 있는 물리적 수단은 여론과 불매운동이 다일 수밖에 없다. 결국 관건은 대중이다. 대중의 각성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대중의 욕망이 바뀌지 않는 한, 유권자의 성향이 바뀌지 않는 한, 불량상품은 계속 팔려나가고 불량정당, 불량정치인들은 계속 활개칠 것이다.

MADE IN U.S.A. - 너무 너무 멋져! 눈이 눈이 부셔!


박재범 옹호그룹

A그룹. 순수 소비자들(가장 소수)

B그룹. 충성도 높은 열혈 암컷 추종자들, 소위 빠순이들(가장 극렬)

C그룹. 순수 좌파, 진보, 자유주의 지식인, 먹물들(가장 다수)

 

    김어준의 비판그룹의 대립항으로서 내 나름대로 나누어 보았다. A그룹은 남녀불문하고 연예인은 춤과 노래 등 실력으로만 승부하고 평가하면 되지 그게 무슨 죽을 죄냐 하는 입장. 별로 기분 상하지 않은 쿨한 소비자들. 소극적 옹호자들. 소수일 것이다. B그룹은 오빠부대(요즘은 미소년을 좋아하는 언니들도 많다고...) C그룹은 가벼운 먹물과 진짜 지성인으로 나눌 수 있을 듯. 4그룹의 대립항으로서 D그룹도 설정 가능하지만 대놓고 특권을 옹호하고 문화사대주의를 주장할 이가 몇 명이나 될지는 의문이다.

    이 중에서 나는 어디에 속해 있을까. 내가 이번 건에 대해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입장과 감정은 대충 4그룹 40%, 1그룹 20%, 2그룹 5%, A그룹 15%, 3그룹 5%, C그룹 15%(합 100%) 정도 되겠다.

    1그룹. 당연히 기분이 나쁠 수밖에 없고 소비자로서 불만을 얘기하고 지지를 거둬들일 권리가 있다.

    2그룹. 또래 수컷은 아니지만 주는 것 없이 왠지 얄미운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감정과 정서의 문제다. 아이돌 문화에 대한 기성세대로서의 몰이해, 배짱이를 보는 일개미의 감정도 작용한 듯.

    A그룹. 실력만을 중시하고 공정경쟁을 강조하는 측면에서는 4그룹의 입장과 일맥상통. A그룹이 소박한 자유주의자라면 4그룹은 비판적인 구조주의자.

    3그룹. 애국주의적 경향. 개인적으로는 애국주의자라기 보단 자유주의자에 가깝다. 국가, 국기, 애국가. 국기에 대한 맹세,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 국민교육헌장 등에 대해 그다지 애정도 없고 예의를 차리지 않는 삐딱한 자세이지만 이왕이면, 같은 값이면 가까운 것, 우리 것 먼저 챙기고 팔아주자는 입장. 자본의 성격이야 국외든 국내든 서양이든 동양이든 매한가지이지만 이왕이면 이웃의 일자리를 늘리고 나라경제에 보탬이 되면 좋겠다는 소박한 생각. 거창하게 애국주의라고 부르기보단 자연스런 삶의 방식, 소비행태라고 부르는 게 더 어울릴 듯. 희소성을 제외하면 로열티, 관세, 마진, 부대비용 등을 고려할 때 비용 대비 품질 면에서 대부분 국산이 유리하므로.

    C그룹. 내가 지식인의 책무를 강조하면서도 지식인에 대해 비판적이고 인색한 것은 지식인 중에 제대로 된 진짜 지성인이 극히 드물다는 것. 먹물, 지식인, 지성인, (선비), 열사, 지사, 의사 중에 대부분 먹물이나 지식인에 그친다는 거다. 대부분 대가 약하고 문약하고 비겁하며(심하면 비열하기까지) 결정적 순간에는 대개 세속적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거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도 그 뜻을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하고 독립선언 33인의 대부분도 결국에는 변절, 타협, 굴복했다고 한다.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지식인의 역할과 값어치도 그 효용성이 많이 떨어졌다. 누구나 뜻만 있으면 고급정보를 접할 수 있고, 공부할 수 있다. 지식과 정보의 독점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지식인의 특권도 값어치도 떨어졌다. 앞으로의 시대도 지식의 대중화, 대중의 지성화를 요구하고 있다. 어줍지 않은 훈장질은 사양이다. 수준 얕은 꼰대짓은 망신사기 십상이다. 하지만 사회가 지성에게 부여한 소임이 있으니 지성은 지성의 역할, 주워진 책무를 해야 한다. 지난 포스팅(박재범, 2PM 사태에 대한 몇 가지 단상)에서 역할놀이로 부정적으로 묘사했지만 할 일은 해야 한다. 역할을 방기하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나 역시 옹호의 역할이 주워지면 천박하고 잔인한 군중심리를 비판하며 인권이 어떻고 ‘사코와 반제티’에서 ‘드레퓌스’까지 언급하며-이방인, 아웃사이더, 약자에 대한 잔인하고도 완고한 박해란 측면에선 같지만 주류 상류 기득권이 주도한 박해란 측면에선 다르다-전혀 새로운 글을 펼칠 수도 있다. 내세울 논리와 근거는 많다. 잘못에는 응당의 처벌이 주워져야겠지만 죄 값을 넘어서는 가혹한 형벌도 그 자체로 죄악이니까. 하지만 어줍지 않은 훈장질, 대중을 깔보고 무시하는 우월적 계몽주의여서는 안 된다.

    덧붙여 주의해야 할 것은 설혹 대중을 존중하면서도 올곧은 선의로 주장을 편다 해도 이 땅의 지식인들은 특별히 좀 더 신중해야 하고 전략적일 필요가 있다는 거다. 우리사회가 가지는 일극 편향적 구조, 이리 쏠리고 저리 몰리는 승자독식의 성향 때문이다. 미국이나 유럽이면 지식인들이 각자 입장대로 소신대로 마음대로 지껄이며 자기주장이나 역할을 하기만 하면 된다. 왜냐하면 지식인 사이에 어느 정도의 상호견제가 되어 담론시장이 스스로 자연스레 균형을 잡아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EU는 말할 것도 없고 미국도 동부와 서부, 뉴욕과 워싱턴과 LA, 하버드, 예일, 스탠포드, MIT, 시카고대 등 어느 부문, 어느 대학이든 각각의 특징과 경쟁력이 있는 다극화, 다원화된 사회다. 시장자체의 볼륨도 크다. 하지만 한국은 모든 것이 서울, 서울대가 장악한 일극사회다. 땅도 좁은 데 그마저도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시장이 좁고 그마저도 독점, 과점되어 있다. 도망을 다니더라도 숨을 곳이 없다. 웬만해선 한 치 거쳐 두 치 혈연, 지연, 학연으로 얽히지 않는 곳이 없다.

    해방 전후만 해도 평양, 개성, 서울, 대구, 진주 등으로 정치, 경제, 교육 등이 어느 정도 다원화된 사회였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서울로 서울로 집중된 사회다. 그리고 이 추세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충남대, 경북대, 전남대 등 대표적인 지방 국립대의 위상도 예전보다 많이 떨어진 게 지금은 서울의 고만고만한 여느 사립대와 맞먹는다. 이런 것이 담론시장, (진보) 지식인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승자독식, 서울대 학벌, 패거리 문화. 견제와 균형이 없다. 부지불식간에 같은 패거리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독선과 아집에 빠지고, 의도하지 않더라도 주류 수구기득권의 이익에 봉사하는 엉뚱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나마 정보사회의 발달, 인터넷의 보급으로 김동렬, 김어준 같은, 이에 버금가는 많은 파워블로거, 시민논객의 출현, 시민계급의 성장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의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본다.

    조직력이 떨어지고 때론 그 실체도 모호하지만 시민계급이야말고 이념에서 가장 자유로운 실용세력, 가장 강력한 잠재적 파워를 가진 신흥세력이다. 지식인 집단과 대중 사이에 나타난 신흥세력, 대중 속에서 스스로 자생한 가장 대중친화적인 신흥세력이다. 김동렬은 각성한 시민, 지성인에게 있어서 대중은 어버이와 같다고 했다. 노무현은 농부(지성인, 정치인)는 밭(대중, 유권자)을 탓할 수 없다고 했고 유시민은 대중은 왕이요 정치인, 지성인은 신하라 했다. 신하가 왕을 받드는 심정으로 바른 길로 인도하고 때론 상소, 읍소도 해야 한다고 했다. 밭을 탓하는 게으른 농부, 임금을 탓하는 불충한 신하, 부모를 탓하는 어린 자식이어서는 안 된다. 부모의 실수와 단점에 내심 그 보란 듯 쾌재를 불러서는 안 된다.

대중은 가르치고 혼내야 할 학동이 아니라 모시고 공경해야 할 부모다.


    우파는 대중을 끊임없이 우매하게 만들려 하고 좌파는 대중을 끊임없이 똑똑하게 만들려 하고 각성한 시민, 지성인은 대중을 깨닫고 각성하게 만들려 한다. 우파는 대중의 주의를 돌리면서 정치와 권력에 관심을 끄려하고 좌파는 억지로 앉혀놓고 가르치려 한다. 중우정치와 학습정치다. 하지만 대중을 가르쳐야 하는 무지렁이, 가르쳐도 별 수 없는 무지렁이로 보는 입장에선 한가지다. 우파가 우매한 군중의 대중독재니 하며 두려워하고 좌파가 국개론(국민 개X끼론)까지 들먹이며 한탄하는 것도 매한가지다. 대중을 무시하고 그 역량을 폄하하고 불신하는 데는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귀족은 귀족끼리 서민은 서민끼리, 선생은 선생대로 학생은 학생대로다.

    우리 시대 마지막 남은 성역인 대중, 국민을 비판하는 것을 금기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성찰과 각성은 필요하다. 하지만 대중을 무시하고 국민을 욕보이고 부모를 깔보고 왕을 소외시키고 밭을 탓해서는 안 된다. 어느 경우든 대중을 신뢰하고 대중의 편에 서야 한다. 대중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은 지성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요 수구우파 귀족의 주장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대중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옳다. 일이 상황에 따라 엉뚱하게 전개될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항상 대중의 승리로 귀결돼야 한다.

    경제력으로 무장한 우파 귀족, 지식으로 무장한 좌파 귀족을 막론하고 귀족의 힘은 약해지고 시민대중의 힘은 더 강해져야 한다. 강해지기만 해선 안 되고 실력과 품위를 겸비해야 한다. 시민 각자가 모두 정치평론가, 문화평론가가 되어야 하고 지성인,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항상 이웃, 시민에 대한 애정을 잃지 말아야 한다. 자만과 나태에 빠져 시민에게 냉소적이 되어선 안 되며, 유혹에 빠져 시민을 배반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돈에 포섭되는 지식, 지식의 권위에 포섭되는 (시민)의식이어서는 안 된다. 혹여라도 귀족들에게 픽업되어 신분상승을 통한 귀족 이너써클 편입을 오매불망 바라는 시민이어서는 안 된다. 재벌에 봉사하는 떡값 검사, 졸부 장인을 위해 봉사하는 가난한 고학생 출신 판사 사위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판검사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주눅이 드는 시민이어서는 안 된다.
    시민계급에서 인물이 나오고 최고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시민계급이 스스로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고 밀어올리는 자체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시민(지도자)이 시민(대중)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난세에 영웅이 난다고, 숨가빴던 근현대사를 풍미했던 영웅, 김영삼(시민계급 출신인지는 의문. 민주화 운동 경력은 인정. 민주시민세력을 배반한 것은 확실.) 김대중 노무현의 시대는 갔다. 시민사회, 시민계급의 전반적인 수준, 전체적인 역량이 그래서 더욱 중요해졌다. 이것은 결코 투쟁적 계급의식이 아니다. 자각이다. 조화롭고 평화롭고 균형잡힌 모두가(최소한 절대다수가) 행복한 이상향, 그런 이상향을 위한 필요조건이자 충분조건이다. 고 노무현 대통령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유지인 '깨어있는 (성숙한) 시민의 조직된 힘!' 이것이면 충분하다.
    나는 시민이다.


    박재범은 돌아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김동렬도 김어준도 가타부타 말이 없다. 무엇이 모두에게 이익일까. 무엇이 대중의 승리일까. 개인적으로 초기보다 재범군에게 호의적으로 변한 게 사실이다. 덜 적대적으로 변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겠지. 괘씸한 감정이야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지금도 연예인은 공인이라는 생각, 박재범군이 (정체성 면에서)미국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지난번 본인의 포스팅을 돌이켜보면 사적인 것을 너무 공적인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것은 아닌지, 억울해도 할 수 없다는 듯이 공개된 것을 기화로 너무 공적 의미를 부여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점검하게 된다. 개성과 취향의 문제를 도덕성의 문제로 비약시킨 것은 아닌지, 기존의 대중문화에 대해 갖고 있던 부정적 인상이 애꿎은 박재범에게 투영된 균형감각을 상실한 글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된다.

    대중은 보다 성숙해지고, 지식인들은 보다 겸손해지고, 연예인은 범생이는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인성과 자질에 보다 신경 써서 처신에 조심하고, 기획사는 상업성에만 치우치지 말고 예술성을 회복하고, 방송과 언론은 섹시한 것, 자극적인 것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황색 저널리즘에서 벗어나 스포츠, 연예면에서도 품격과 깊이를 보여주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대중문화가 보다 다채롭고 수준 높아지는 이상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려면 일이 어떻게 전개되고 매듭지어져야 할까. 박재범보단 박진영, 박진영보단 전체 연예생태계의 구조, 전체 대중문화에 주목해야 한다. 심심찮은 표절시비, 빈번한 리메이크와 샘플링, 중독성 있는 짧고 단순한 멜로디와 랩의 무한반복과 섹시코드로 무장한 춤과 외모, 꼬인 발음과 어눌한 한국말이 경쟁력이 되고 선호되고 특권을 갖는 대중문화, 대중의 기호와 취향이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박재범 개인을 물고 뜯을 필요가 없다. 이쯤 했으면 차고 넘친다. 이보다 더한 숱한 사건사고를 일으키고도 얼마 안 있어 은근슬쩍 복귀하는 다른 연예인과의 형평성에 비춰볼 때도, 우리 대중문화의 포용성과 성숙도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조만간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 이후에 뜨든 지든 별개의 문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내뱉지 말고 소화시키는 것이 맞다. 내치고 방치하는 모양새가 되서는 안 된다. 품어 안고 스스로 해결해내는 우리사회의 역량, 대중의 역량을 보여주어야 한다.


PS : 연예인은 욕쳐먹는 것보다 잊혀지는 것이 더 두렵다고, 끼 많은 박재범군도 한시바삐 돌아와 무대에 서고 관심과 환호를 받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것이다. 어차피 박재범의 뜻보다 박진영의 뜻이 중요하겠지만 돌아가는 모양새가 박재범의 복귀는 정해진 수순인 듯하다. 문화사대주의와는 별도로 이번에 보여준 박진영의 처세술은 세련되고 (너무)신속했지만 비판할 점이 많다. 그는 더 이상 연예인도 엔터테이너도 아니다. 이미 사업가, 비즈니스맨이 다 되었다. 하긴 뭐 사업가보고 사업 잘 한다고 탓할 수야 없는 노릇이겠지만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