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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歲寒圖)-추사 김정희

어멍 2009. 10. 9. 22:39



<세한도> 전체




<세한도> 그림부분



    세한도(歲寒圖, 국보 제180호, 1844작) : 이 그림은 세로 23센티미터, 가로 108센티미터의 족자 형식으로 된 그림이다. 가로로 긴 화면에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과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고 나머지 화면은 텅 비어있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 '세한도'란 화제와 우선시상(藕船是賞: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 완당(阮堂:김정호의 또 다른 호)이란 관지에 정희(正喜).완당(阮堂)이라고 새긴 낙관이 되어 있다.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용비늘이 덮인 노송과 가지만이 앙상한 늙은 잣나무를 통해 작가의 농축된 내면세계가 담백하고 고담한 필선과 먹빛으로 한지에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지극히 절제되고 생략된 화면에서 험한 세상을 살면서도 지조를 잃지 않으려는 선비의 고졸한 정신이 엿보인다. 병제에도 '날씨가 차가워진 뒤에야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음을 안다'고 했듯이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사람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고 한다.

 

    이 그림에는 추사 김정희가(1786-1856) 제주도에 유배당해 살던 때(1844년, 59세) 당시 역관으로 있던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를 위해서 그린 그림이다.

    이상적은 역관으로 있으면서 중국을 다녀올 때 스승인 추사에게 줄 책을 구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두 번이나 제주도로 들어가서 책을 전해 주었던 것이다. 당시의 김정희는 지위와 권력을 박탈당한 채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런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이성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냈던 것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냉랭한 세태에서 선비다운 지조와 의리를 훌륭히 지켰던 것이다.


    옛말에 '대감 집에서 키우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이으나 정작 대감이 죽으면 대문이 쓸쓸하다'하여 권세와 이익만을 좇는 세상인심을 빗댄 말이 있다. 김정희는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그래서 세한도를 그려 인편을 통해 보내 주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해였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한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칭찬하고, 이어서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추사체로 써 그림 끝에 붙였다. 소나무는 책을 구해 준 이상적의 지조를 뜻하고 잣나무는 금번에 또다시 책을 구해준 절개를 상징하는 듯하다.

 

    그림을 받은 이상적은 그 후 북경으로 가 그곳의 학자들에게 두루 이 그림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장악진, 조진조 등 16명의 명사들이 앞을 다투어 그림을 칭찬하는 찬시를 지어 그림 끝에 붙였고 그 후 김정희의 문하생이던 김석준의 찬시와 오세창, 이시영의 그림에 대한 감상문이 덧붙여져 현재와 같은 두루마리 형태로 완성되었다.



추사 김정희 초상(허필련 작)

      

    김정희(1786-1856)는 증조모가 옹주였던 명문가의 자손이다. 병조판서 김노경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태기가 있자 그의 모친이 전염병을 피해 예산으로 내려왔다.

    그가 모친의 뱃속에 있을 때 팔봉산의 초목이 시들고 우물까지 마르더니 아기가 태어나자 산천초목이 다시 생기가 돌고 우물에서 물이 솟았다고 하고, 세 살 때부터 글씨를 썼다고 한다.

    김정희는 후사가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들어가 어린 시절을 보내고 젊어서는 청나라를 왕래하며 옹방강 등과 사귀며 그들로부터 금석문의 감식법과 서법을 익혔다.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 완당은 당시 옹방강에게서 해동 제일의 문장이란 칭찬과 함께 지어 받은 것이다.

    그는 북학파의 거두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실학에 대한 학문을 전수 받았고,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여 북한산의 진흥왕순수비를 발견하며 조선에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1819년 30대 초반에 문과에 급제하고 예조참의, 병조참판,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순탄하게 벼슬길을 걷다가 부친이 비인 현감(현재 충남 서천)을 지내면서 김우영을 파직시켰는데 그 일로 안동 김씨의 탄핵을 받아 김정희는 고금도로 귀양을 갔다. 순조의 배려로 귀양에서 풀렸으나 헌종이 즉위하면서 안동 김씨가 다시 득세하자 1840년 제주도 정포에 다시 유배된다. 부친인 김노경은 그 해 사약을 받고 죽었고 김정희는 영의정을 지내던 친구 조인영의 도움으로 죽음은 면하고 제주도 서쪽 백 리 거리의 외딴 집에서 8년간 유배되고 그는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오로지 학문과 예술에만 정진한다.

 

    이 때 죽음도 불사하고 찾아준 사람이 소치 허유와 역관 이상적이었다.

    허유는 김정희가 가장 아끼던 제자로 죽음도 불사하고 두 번이나 스승을 찾아 그림과 시 그리고 글씨를 배우고 갔다. 훗날 허유는 그때의 심정을 "가슴이 매어지고 눈물이 앞을 가리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한국 남종화를 일으킨 서민적이고 지성적인 화가로 아들인 허형, 손자인 허건, 조카인 허백련으로 화풍이 이어졌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압록강 동쪽으로 소치를 따를 자가 없다"는 칭찬과 함께 호를 받았다. 이들의 작품과 흔적은 진도 운림산방을 찾으면 자세히 볼 수 있다.

 

    김정희는 헌종 말년(1848)에 제주도 귀양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1851년 친구인 권인돈의 일에 연루되어 66세 노인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다시 유배되었다가 2년 만에 풀려났지만 다시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고 부친의 묘가 있던 과천의 한 절에 은둔하며 학문에 몰두하다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친다. 현재 그의 묘는 추사고택의 왼쪽 산자락에 있고 묘 앞에는 밑동에서 세 줄기가 올라와 비스듬히 구부러진 반송이 서 있는데 혼탁한 세태에 김정희의 고졸한 예술 정신을 일깨우는 듯하다.

 

 

     이상적이 소장해 나라 안팎의 명사들이 두루 감상했던 세한도는 백여 년의 세월동안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는 알 수가 없고, 세상에 다시 나오게 된 것은 1945년 이전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일본인 후지즈카 지카시(1879-1948)에 의해서다.

    후지즈카는 북경의 한 골동상에서 우연히 세한도를 만났는데 그림을 본 순간 전율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운 좋게 그림을 입수하고는 틈만 나면 세한도를 들여다보며 살았다. 그러다 김정희의 학문과 예술을 연구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문학박사 학위를 청구하면서 발표한 논문은 '이조에 있어서 청조문화의 이입과 김완당'이었다. 그가 얼마나 김정희의 작품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나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자 후지즈카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으로 들어갔다. 세한도가 이 땅에서 사라질 운명에 놓인 것이다.

 

    이 그림이 다시 고국에 돌아오게 된 것은 소전 손재형(1903-1981)이란 한 사람의 끈질긴 집념에 의해서이다. 손재형은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수장가며 대감식가로 고서화에 관해서는 당대 최고 중의 한 명이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나 양정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는 조선미전에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다. 효자동의 멋진 한옥집에서 살았고, 사랑방과 대청 벽에는 뛰어난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며 특히 김정희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이다.

    일제강점기 때 청자는 일본인들 사이에서 거금에 거래되었으나 고서화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겸재 정선의 화첩까지 부잣집 불쏘시개로 쓰이거나 대가의 작품이 벽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상의 뛰어난 예술혼이 배어있는 고서화가 지금까지 남아 우리의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세우는 데는 암울한 그 시대 몇 안 되는 선각자의 애정과 빼어난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손재형이 후지즈카에게서 세한도를 찾아오게 된 얘기를 들어보면 이렇다.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던 후지즈카, 미전에 입상할 정도의 실력을 갖춘 그는 상당량의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것들을 모아 박물관을 지을 꿈을 갖고 있었다. 그를 찾아간 손재형은 상당한 대가를 치르고 자신의 글도 상당량 써 줄테니 세한도를 양보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후지즈카는 자신이 추사 김정희 연구로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추사 작품을 양보하겠냐며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1944년 시국이 어수선해지자 그는 세한도를 가지고 일본 동경의 자신의 본가로 건너갔다.

    전쟁의 막바지라 동경은 연합군의 공습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되는 위험천만한 사지였으나 손재형은 물어물어 후지즈카의 집을 찾아 근처의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세한도에 대한 후지즈카의 애정이 대단했기에 손재형은 장기전을 작정하고 병석에 있는 후지즈카를 1주일간 매일 병문안했다.

 

    1주일 후 후지즈카가 매일 병문안 오는 목적을 물었고 손재형은 세한도를 양보해 줄 것을 요구했다. 후지즈카는 자신이 쓴 김정희에 대한 논문을 보이며 절대 양보할 수 없음을 강조했으나 손재형은 추사와 제자 사이의 뜨거운 사제의 정이 흐르고 아무리 후지즈카가 아끼는 작품이지만 그가 죽고 나면 그가 아끼는 마음처럼 다른 일본인들은 그처럼 하지 못하므로 세한도의 주인은 한국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를 백여일 간 두 사람은 반복적으로 논쟁을 펼쳤고, 후지즈카는 자신이 죽기 전에는 줄 수 없고 세상을 뜰 때 양보할 것을 유언으로 남기겠다고 말하지만 손재형은 전세가 어찌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해서 더욱 양보할 것을 주장한다.

    그 후로 손재형은 10여 일을 계속해서 찾아가지만 문전 축객을 당한다. 그리고 며칠 후 대문이 열리고 후지즈카는 손재형의 열성에 세한도에 마지막 인사를 하고 손재형에게 세한도를 양보해 준다. 얼마 후 후지즈카의 집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나 소실되고 만다. 조금만 늦었더라도 소중한 국보 한 점이 잿더미로 변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며 일제강점기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일본으로 건너가는 것을 고가로 사들여 지킨 민족 문화재 수호의 귀감인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온 손재형은 즉시 당시 최고의 감식가인 위창 오세창에게 달려가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고 오세창은 즉석에서 감상글을 써 주었다.

    "전화를 무릅쓰고 사지에 들어가 우리의 국보를 찾아왔노라"고.

 

    손재형은 [조선서화동연회]를 결성해 초대 회장이 되고 1947년 진도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대 후반부터는 정치에 투신해 정치가로 활약한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목숨을 걸고 지켰던 서화 작품들을 하나둘씩 저당 잡히고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고리대금에 손을 댄 것이다.

    신용을 생명처럼 여기며 가화동에 살던 개성인 이근태에게 손재형은 '세한도' 단원 김홍도의 '군선도' 겸재 정선의 '인왕재색도'를 맡기고 돈을 빌린다. 하지만 손재형은 첫 달부터 이자까지도 갚지 않았고 이근태는 몇 달 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웠다. 하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었고, 손재형을 몇 번이나 찾아가 사정을 해도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서 남의 이자를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의 작품을 여러 점 소장했었지만 그 작품들도 남의 이자를 막기 위해 모두 팔았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이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작품을 팔기 시작했으나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세한도'는 개성 갑부인 손세기에게 넘어갔고, 1974년 12월 31일 손세기의 아들인 손창근을 수장가로 하여 국보 제180호로 지정받았다.

    당시 손재형이 소장해 이근태에게 저당 잡혔던 김홍도의 '군선도' 김정희의 '죽로지설', 일제강점기 경성부사에 실렸던 정선이 76세에 비 갠 후의 인왕산의 모습을 그린 '인왕재색도' 등은 이병철에게로 넘어가 지금은 용인의 호암미술관에 소장 되어있다.


이상은 http://cafe.daum.net/jjj2468/BoKA/282?docid=174pZ|BoKA|282|20070830112728 에서 참조




김정희가 쓴 <세한도> 발문


다음은 발문


그대가 지난해에 계복(桂馥)의 『만학집(晩學集)』과 운경(惲敬)의 『대운산방문고(大運山房文庫)』두 책을 부쳐주고, 올해 또 하장령(賀長齡)이 편찬한 『황조경세문편(皇朝經世文編)』120권을 보내주니, 이는 모두 세상에 흔한 일이 아니다. 천만 리 먼 곳에서 사온 것이고, 여러 해에 걸쳐서 구한 것이니, 일시에 가능했던 일도 아니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권세와 이득을 좇는 풍조가 휩쓸고 있다. 그런 풍조 속에서 서책을 구하는 일에 마음을 쓰고 힘들이기를 그같이 하고서도, 그대의 이끗을 보살펴줄 사람에게 주지 않고, 바다 멀리 초췌하게 시들어 있는 사람에게 보내는 것을 마치 세상에서 잇속을 좇듯이 하였구나!


태사공(太史公) 사마천(司馬遷)이 말하기를 "권세와 이득을 바라고 합친 자들은 그것이 다하면 교제 또한 성글어진다"고 하였다.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사는 한 사람으로 세상 풍조의 바깥으로 초연히 몸을 빼내었구나. 잇속으로 나를 대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아니면 태사공의 말씀이 잘못되었는가?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송백은 본래 사계절 없이 잎이 지지 않는 것이다. 추운 계절이 오기 전에도 같은 소나무, 잣나무요, 추위가 닥친 후에도 여전히 같은 소나무, 잣나무다. 그런데도 성인께서는 굳이 추위가 닥친 다음의 그것을 가리켜 말씀하셨다.


이제 그대가 나를 대하는 처신을 돌이켜보면, 그 전이라고 더 잘한 것도 없지만, 그 후라고 전만큼 못한 일도 없었다. 그러나 예전의 그대에 대해서는 따로 일컬을 것이 없지만, 그 후에 그대가 보여준 태도는 역시 성인에게서도 일컬음을 받을 만한 것이 아닌가? 성인이 특히 추운 계절의 송백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 시들지 않는 나무의 굳센 정절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역시 추운 계절이라는 그 시절에 대하여 따로 마음에 느끼신 점이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전한(前漢) 시대와 같이 풍속이 아름다웠던 시절에도 급암(汲黯)과 정당시(鄭當時)처럼 어질던 사람조차 그들의 형편에 따라 빈객(賓客)이 모였다가는 흩어지곤 하였다. 하물며 하규현(下邽縣)의 적공(翟公)이 대문에 써붙였다는 글씨 같은 것은 세상인심의 박절함이 극에 다다른 것이라. 슬프다!

완당 노인이 쓰다.



이상적은 스승의 <세한도>를 받아보고 곧 다음과 같은 답장을 올렸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으려야 아니 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 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 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출처는 오주석의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pp.152~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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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 : 땅도 얼어붙고 하늘도 얼어붙고 시간도 얼어붙고...
오직 추위와 정적속에 송백만이 홀로 시들지 않고 그 푸르름을 더하고 있다.

그림을 언듯 보기만 해도 뼈속까지 한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계속 응시하다보면 어느 순간 털과 살이 올라서며 가슴이 뭉클해지고 코끝이 시끈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쓸쓸하고 고독하면서도 한 없이 고매한 추사의 인생, 인품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림 하나가 이런 감동을 주니 예술이란 얼마나 위대한가! 국보로서 손색이 없다.
후지즈카가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느꼈다는 전율과 같은 충격이 이런 것이리라.


PS 2 : 요즘 세상 돌아가는 꼴이 가관인 게......150여년전 추사가 한탄했듯이...
세상인심이 모두 권세와 이득만을 쫓고 있다. 위정자 뿐만이 아니라 일반국민들도 마찬가지다.
대통령, 총리에서부터 평범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돈, 효율, 권세, 물질을 쫓아 무한경쟁, 무한질주에 정신이 없다.

주역으로 치면 천산둔(天山遯)괘다.
소인배는 득세하고 군자는 은거하여 몸을 보전해야 하는 괘상이다.
도적, 사기꾼의 손에 쥐여진 칼에 의인, 선비가 베이고 쫓겨다니는 야만의 시대다.
도덕, 정의, 명예가 핍박받고 저잣거리의 놀림감이 되어 모두가 침묵과 굴종, 체념에 서서히 익숙해지는 불운한 시대다.

추사, 세한도의 기상과 절개, 선비정신이 더욱 그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