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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재냐 아니냐.

어멍 2009. 6. 16. 16:13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독재자 발언으로 시끄럽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정확히 모르겠다.(결론이 아닌가?!)

    2009년 6월을 가리키고 있는 달력을 보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여러 황당한 사례들을 보자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허접해서 오히려 친근한(!) 이명박 대통령을 보노라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검찰, 경찰 등의 권력기관들의 행태를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 ‘같기도‘ 정권이라고 불러야 하나. 아무튼 독재자라 부르기엔 꽤 만만한 구석이 있는 게 사실이다.(의도한 것도 있고 의도하지 않은 것도 있고, 그가 쌓은 이미지 덕이다.)


독재자 이명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부조화!
"그렇게 생긴 독재자가 어디 있느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은 관상이 독재하게 생겼는데~"
늙은 총각 김동길씨의 말에 공감이 갈 줄이야!



    독재자, 독재정권, 독재정부, 독재국가......

    옷걸이가 옷을 입듯, 한 개인 혹은 일부 집단이 권력을 장악하여 독재정치를 하면 그것이 독재정권이 되고 그 정권에 의해 운용되는 정부는 독재정부가 되고 대내외적으로 고착화되면 독재국가가 된다.

    권위주의, 전체주의, 파시즘, 유사파시즘, 변종파시즘, 파시즘X, 신자유주의 공안정권, 경찰국가...모두 유사한 개념이지만 각기 조금씩 다르다. 결론은 대중들은 독재자, 정권과 정부를 구별할 수 없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용어들의 미묘한 차이 역시 모른다는 거다.(나도 정확히는 모르고, 평범한 시민들이 구지 알 필요도 없지 싶다.)     

   “대중의 이해력은 아주 작으며, 잊어버리는 능력은 엄청나다.“ - 히틀러 <나의 투쟁>


    대중은 단지 만사형통, 고소영, 강부자 같은 저잣거리 유행어로서 어렴풋이 그들만의 정권, 독재의 향기를 맡을 뿐이다. 정치에 그리 관심이 없고 언론에 수동적이며 분석력도 떨어진다. 그리고 자유, 민주, 인권에 둔감하고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이들에겐 단지 시끄럽고 소모적인 논쟁, 어찌보면 한가한 신선놀음으로 비칠 수도 있다.

    설혹 독재라 해도 상관없다. 박정희씨든 전두환씨든 별 불편함 없었다고. 빨갱이 몇몇 죽어나가더라도,(사실 그들이 빨갱이도 아니었고 몇몇도 아니었다) 심지어 빨갱이를 때려잡기 위해선 독재가 필요했다고. 그 시절 대다수 국민들은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이들에겐 토론이나 논쟁 자체가 무의미하다.


    독재라면 유사독재, 변종독재인데 변종바이러스가 더 대처하기 힘들 듯, 이명박 정권을 파악하고 대처하기가 더 힘든 실정이다. 누구는 그를 기득권 체제, 앙시앙 레짐의 바지사장에 불과할 뿐이라고도 하지만 권력이란 개인차원을 떠나 그 자체로 무자비하고 냉혹한 속성을 갖고 있기에 그를 결코 우숩게 보거나 만만히 보아서는 안 된다. 그러다간 큰 코 다치는 수가 있다. 인간 이명박과 권력자 이명박, 후보 이명박과 대통령 이명박은 엄연히 다르다는 거다. 그를 옹립한 조중동이나 재벌, 강남에게까지 반항(!)하는 황당한 경우가 안 생긴다고 보장할 수 없다. 골룸이나 프로도나 절대반지를 끼면 절대권력자가 될 수 있긴 매한가지다. 역사이래로 있어왔던 독재자들의 비참한 말로도 권력에 의해 권력자가 휘둘리고 허우적거린 결과 아니겠는가.

    하지만 박정희씨, 전두환씨에 비해선 체급이 딸리는 게, 전통적인 독재자의 함량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박정희, 전두환 세력보다 약한 것도 아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그를 지원하는 경제계, 언론계, 관계 등 그들 세력의 전체적인 볼륨은 더 커졌다. 태풍의 눈은 작지만 공급되는 수증기는 많아졌고, 세포의 핵은 작지만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원형질은 풍부해졌다. 중심은 작아지고 타켓은 늘어났으니 조준하기가 더 곤란해졌다.


    독재냐 아니냐. 좀 더 많은 논의와 숙고가 필요하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대한민국이 중대한 기로에 처해 있다는 것만큼은 국민 대다수가 인정하는 분위긴 것 같다. 독재의 징후, 파시즘의 전조는 이미 충분하다. 혁명이든 반혁명이든, 역사의 도약이든 역사의 퇴보든 언제나 저항을 뚫고 꾸준히 그리고 어느 순간 갑자기 우리들 앞에 도래하였음을 교훈으로 삼고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이다. 

PS :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다.“  ”독재자는 성공할 수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독재자 발언이 일파만파 확산되는 양상이다.

    블로거들도 기다 아니다 의견이 분분하고 그 중에는 정치 9단의 노회한 정치인의 불순한 선동쯤으로 비판하는 블로거들도 있다. 하지만 비판과 비난은 한나라당 몫이다. 학자들은 논리적, 학문적으로 현 정치세력의 성격을 분석, 규정할 수야 있겠지만 그것 역시 학자들의 몫이다.

    지식인, 논객들은 곧 죽어도 민중의 편이어야 한다. 어떤 경우든 역사의 퇴보를 막고 역사를 진보시키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며 전략적으로 민중의 이익에 봉사해야 한다. 흥분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남 얘기 하듯 해서는 안 된다. 지식인, 먹물, 헛똑똑이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다. 수구꼴통, 진보꼴통과 더불어 천상천하 유아독존 꼴통을 자처해서는 안 된다.


    DJ는 한 때 선수로 뛰어봤던 사람이다. 여전히 감각이 살아있다는 거다.

    독재자냐 아니냐, 독재냐 아니냐 규정하는 것보다 더 이상의 민주주의 후퇴를 막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 한나라당이 호떡집에 불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언론과 논객들이 갑론을박하며, 잠들었던 무관심한 국민들을 일깨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것만으로도 의미 있고 유효하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냉소와 무관심, 침묵과 굴종이다. 옆집에 강도가 들었는데도 쿨쿨 자고 있어서는 안 된다. 깨어있었는데도, 그것을 알고 있었는데도 무서워서, 귀찮아서 내 일이 아니라며 모른 척 해선 안 된다. 하지만 진짜 무섭고 비극적인 일은 옆집과 사이가 좋지 않다고 그것을 별 일 아니라고 여기며 이웃 하나쯤 험한 일 당해도 마을의 일상에는 별 탈이 없지 않느냐는 무감각, 무개념이다. 필경 다음에는 자신의 집이 당할 것이고 마을에는 도둑과 강도가 들끓을 것이다.


    ‘권력을 더럽게 쓰지 마시오‘

    ‘권력이란 원래 더러운 것 아니겠소. 이만 포기하고 물러나시오’

    ‘당신들이 더럽게 쓰니까 권력이 더러워지는 것 아니오!’

    단체장 사퇴를 어르고 달래며 종용하는 이명박 정권의 인사와 해당 단체장 사이에 오갔다는 대강의 대화라고 한다. 이 정부인사는 이명박 정권의 타 인물보다 그나마 솔직하고 점잖은 편에 속한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최소한 자신들이 더럽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으니까.

    권력을 쥐고 휘두르는 자는 권력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하고, 그 권력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는 자는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하고, 단지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고만 있는 자들은 권력은 원래 그러려니 한다. 가해자는 당연하고 피해자는 억울하지만 배심원들은 무심하다.


    가해자들은 말한다. 웬 호들갑이냐고. 이 추모의 열기, 저항의 몸짓은 일부 노빠 광신도들의 선동에 의한 노비어천가의 우상화, 비정상적이고 일시적인 광풍, 광기일 뿐이라고.

    배심원들은 말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좀 심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불쌍하지만, 어떤 이유에서건 자살은 종교적, 도덕적으로 죄라고, 자살을 미화해서는 안 된다고.

    그들에겐 의미 없고 소용없는 말이지만 자살을 미화하는 것과 노무현을 미화, 추모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이것을 구별하려는 성의는 있을까??) 그리고 노무현의 자결은 완전히 다른 각도로 봐야 한다. 그의 고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단순히 괴로워서, 견딜 수 없어서 자결한 것은 아니다. 정치적, 역사적 심지어 철학적 의미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의 자살만을 꼬투리삼아 그를 비난하는 것은 그를 또다시 욕보이는 너무도 잔인한 짓이다. 그를 비난했고 그의 죽음을 방조한 책임을 이것을 빌미로 방어하려는 것은 비겁하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스레 무도한 가해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 숱한 학생, 노동자, 농민들이 분신, 투신으로 스스로 목숨을 던졌던 것을 두고 저들은 뭐라고 했나. 빨갱이, 불순세력의 사주를 받아 소중한 생명까지도 무기로 삼아 벌이는 정치적 선동, 승부수, 죽음의 굿판이라 모욕했다. 하지만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허위로 밝혀진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처럼 죽음을 부르고, 죽음 앞에서 거짓을 말하며 그 죽음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것이 저들이다.


    자살은 없어야 한다. 개인적이든 정치적이든, 자살이든 타살이든 모든 죽음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 우리 곁에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을 이가 누가 있는가? 대의를 위해 희생할 이가 남아있는가? 충만한 정의감에 거칠 것 없어야 할 젊은이들은 더 이상 예전의 그 젊은이들이 아니다. 개인적이라기보단 이기적이고 비겁하기보단 영악해졌다. 불의에 저항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단지 귀찮을 뿐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시간과 수고가 아까울 뿐이다. 그들에겐 불의에 애써 눈 감은 후 자신을 위로하고 변명하는 아Q의 정신승리법까지도 사치일 뿐이다.

    

    2001년 도쿄 신주쿠역에서 자신을 희생해 얼굴도 모르는 일본인을 구해낸 아름다운 청년 이수현. 당시 개인주의가 팽배한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지금 이런 청년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이수현, 노무현, 김대중. 이들에게 우리가 감동 혹은 충격을 받고 이들로 인해 인심이 출렁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이들이 잠자고 있는 우리를 흔들어 깨우기 때문이다.


    사람은 24시간 깨어 있을 수 없다. 배겨낼 수 없다. 그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의 문제이다. 스스로 깨어날 때도 있고 잠이 쏟아질 때도 있고, 정신이 맑을 때도 있고 몽롱한 때도 있고, 몸이 나른해도 정신이 말똥말똥 잠이 안 올 때도 있고 약에 취해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못하는 때도 있다.

    대중은 무심하다. 여전히 평온하고 달콤하고 나른한 잠에 빠져 있다.

    하지만 이미 뒷집이 털리고 앞집이 죽어났다.

    도둑과 강도를 때려잡진 못해도 옆 사람을 깨워 경계라도 서야 한다.

    

    지금은 깰 시간이다. 깨어 있을 시간이다.


※ 쓰다 보니 본문보다 길어졌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