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大望)》 9권 리뷰
오야마에 있을 때도 모든 정보를 여러 장수들에게 감추지 않았다. 히데요리의 이름을 내세운 싸움이므로 의리를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쓰나리 편이 되라고 허심탄회하게 알렸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은 아직 그 실력과 과거의 전력(戰歷)으로 이에야스를 두려워했다. (15p)
히데요시 사후 그의 어린 아들 히데요리 대신 정치를 관장하게 된 이에야스가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상경을 명한다. 가게카쓰가 이를 거부하자 이에야스는 여러 장수들의 군사들을 모아 서쪽으로 정벌을 떠나고 이 틈을 노려 미쓰나리는 히데요리와 생모 요도마님을 부추겨 반대세력을 규합, 동쪽에서 군사를 일으킨다.
오야마 진중에서 이 소식을 접한 이에야스는 장수들에게 유리한 정보들은 숨기고 불리한 정보들은 적극 공개한다. 가뜩이나 히데요시 휘하에서 은혜를 입은 장수들로 그 아들 히데요리에 맞서기가 부담스럽다. 누가 누가 미쓰나리에 가담했느니... 어디가 함락됐느니... 처자식이 어디에 볼모로 잡혀있다느니... 어느 것 하나 여기 계속 있어야 하나 갈등을 일으키는 심란한 소식뿐이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전열을 이탈하지는 않는데...
현실적으로 이에야스의 실력이 두렵기 때문이다. 덧붙여 이제까지 보여준 이에야스의 정치가 신뢰와 안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쓰나리는 일종의 히데요시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야전경험과 전공(戰功) 등 전력(戰歷)면에서 이에야스에 비할 바가 못된다. 덧붙여 신뢰보다 지략에 의지하는 자로 여러 장수들의 인심을 잃었다.
조선출병에서 돌아온 무장파와 국내에서 히데요시를 보좌해온 문치파는 전공의 보고와 논공행상에서의 갈등으로 서로 증오하게 되어 문치파를 대표하는 미쓰나리는 무장파의 공공의 적이 된 것이다. 무장파는 문치파를 국내에서 편안히 있다가 개고생하고 돌아온 자신들 위에 군림하려는 얌체로 보았을 수 있다. 히데요시 생전이라면 몰라도 미쓰나리가 어린 히데요리를 등에 업고 명령을 내리는 꼴을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세키가하라 결전으로 이어지는 이 대립은 결국 이에야스의 동군의 승리로 귀결되는데 사실 애초부터 그 우열이 명확했던 것이다. 개인으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실력, 인격에서 미쓰나리(세력)는 이에야스(세력)에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이에야스는 장수들에게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불안하면 떠나도 좋다고 한다. 가뜩이나 사기를 북돋워야 하는데 아군에게 불리한 정보들만 공개하며 대놓고 떠나라고 하고 그것도 모자라 적군에 가담해도 양해한다고 하니 장수들은 의아하고 어리둥절하다. 그렇다고 반역자를 사전에 색출, 처단하기 위한 암수(暗數)도 아닌 것 같다. 정중하고 깍듯하여 이해받고 존중받는 느낌이다.
이것은 적극적인 마이너스 전략이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것을 제거하여 몸을 가볍게 한다. 불순한 것을 제거하여 조직의 결집력을 높인다. 실재로 동군은 서군에 비해 목표와 이해관계 면에서 더 균일했다. 반면 서군은 결집력도 떨어지고 동상이몽에 제각각이었다. 동군 역시 이에야스에 대한 두려움과 이해관계로 얽혀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더해 이에야스에 대한 최소한의 신뢰와 미쓰나리에 대한 뚜렷한 공동의 적의가 있었다.
비상시에는 비상한 수가 필요하다. 허둥대지 말고 더욱 침착하게 몇 수 앞을 내다봐야 한다. 폭풍우로 난파 직전일 때는 배안의 짐들을 가리지 않고 내다버려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비슷하거나 더 큰 덩치를 상대하려면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벗어던지고 최대한 몸을 가볍게 해야 한다. 다윗이 그랬고 몽골기병이 그랬다. 이것이 승리의 확률을 높인다.
모두 비상수단이나 이에야스의 것은 전자보다 후자다. 단지 살아남기 위한 것이 아닌 승리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에야스의 결연한 의지라기보단 자신감이다. 사즉생의 고독한 결단이나 모험이 아닌 다음 수를 내다본 치밀한 전략적 판단이다. 이 수로 동군은 더욱 단단히 뭉친다.
전쟁도 결투도 마이너스 전략이 유효하다. 신상품 개발도 마찬가지. 이것저것 갖다 붙인 만능박사 깡통로봇이 아닌 핵심기능에 집중한 상품이 시장에서 먹힌다. 나중 다른 기능을 추가하더라도 일단 마이너스 방향이어야 한다. 무엇을 더할까보다 무엇을 뺄까. 최종적으로 남겨할 것은 무엇인가에 집중해야 한다.
Simple is best! Simple is power! 아이폰은 기능도 단순, 디자인도 단순하여 성공했다. 터치 몇 번으로 원하는 기능을 작동시킬 수 있다. 어떤 극한 환경 속에서도 작동하는 것으로 유명한 구소련의 전설의 소총 AK-47의 경쟁력도 그 단순함에 있었다. 핵심, 본질에 천착했던 것이다.
마이너스 전략이 유효한 전략이지만 아무나 쓸 수 있는 전략은 아니며 그것 자체가 목적도 아니다. 말 그대로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한 ‘전략’이다. 빼고 빼다 보면 나중에는 아무것도 안 남는 것! 마지막 남는 단단한 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반드시 단단한 심(芯, Core)이 있어야 한다. 양파처럼 분해되거나 오징어처럼 흐물거리지 않고 굳은 등뼈가 있어야 한다. 많은 살을 붙일 수 있는 굳고 단단한 통뼈, 많은 에너지를 끌어당길 수 있는 선명한 눈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전략은 최고수의 강단과 실력이 있어야만 구사하고 운영할 수 있다.
순서와 타이밍이 중요하다. 반드시 순서를 마이너스 후 플러스로,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잡아야 한다. 힘들 때 비세일 때는 마이너스로 중심부로 웅크리고, 넉넉할 때 승세일 때는 플러스로 주변부로 펼친다. 겨울에 뿌리로 숨고 여름에 잎으로 틔운다. 그래서 이 전략은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순천지도(順天之道)다.
두 야당 중 김종인의 더불어민주당이 승세고 안철수의 국민의당이 비세다. 이치상 안의원이 마이너스 전략을 써야 하고 쓸 수밖에 없는데... 더불어민주당으로 갈 사람은 가라고, 자기는 죽어도 광야에서 죽겠다고, 결연하고 비장하게 큰소리쳤지만 성공가능성은 낮다. 보기에 애처롭고 답답할 뿐이다.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가야하는데 순서가 뒤바뀌어 플러스부터 시도했기 때문이다. 탈당 후 마이너스 전략으로 선명성을 좀 더 부각하며 중심부를 다졌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했던지 주변부 세불리기에 올인해서 당이 잡탕이 돼버렸다. 다시 마이너스 전략으로 돌아선대도 지금은 시간표상 플러스 전략을 쓸 타이밍이다. 세를 서서히 불리고 피치를 올려 4월 13일 터트려야 한다.
호기롭게 강(强)철수를 외치지만 야권의 주도권은 이미 넘어갔다. 이것은 스스로 마이너스 전략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 마이너스 당하고 있는 꼴! 조만간 국민의당의 운명이 결정되겠지만 이대로라면 다른 장수들을 떠나보내는 것이 아닌 혼자만 남게 되거나 쫓겨나는 모양새가 될 것이다.
가장 근본원인은 안철수 의원에게 애초부터 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정치’라는 게 킬러콘텐츠는 고사하고 변변한 알맹이 하나 없는 쭉정이었기 때문이다. 헌정치의 여집합, 대립항을 암시하는 구호에 그칠 뿐 구체적 설명이나 실천은 없었다. 이는 정치혐오를 이용하여 국회와 정치인을 타자화하고 적대시함으로서 이득을 취하려는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의 스텐스와 본질에서 동일한 것이다.
홀로 왕따 당하는 안의원에게 동정이 일 수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포함 기존 정치의 비정함에 비위가 상해서 안의원의 지지도가 상승하고 더민주에 역풍이 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잠깐! 대세를 돌리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순진한 국민들이 순진한 안의원에게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정치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의 세계다. 착한 사람이 아닌 의로운 사람, 순박한 사람이 아닌 투철한 사람이 해야 할 영역이다. 승냥이도 곤란하지만 약하고 순하기만 한 양이어서도 곤란하다. 힘 있고 의롭고 용감한 사자여야 한다.
착하고 순수하기만 한 양인지도 의문이지만 실력 없이 욕심만 많은 아마추어임에는 분명하다. 돌이켜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안의원이 없는 것이 더 낫다. 결과적으로 그로 인해 정치비용이 더 올라갔고 정치발전이 더 더뎌졌다. 앞으로도 이런 인물의 출현은 경계해야 한다. 뭣도 모르고 변변한 경력도 실력도 없이 정계에 진출해서는 안 된다. 민폐다.
고만고만한 재력가, 교수, 학자, 방송연예인... 과장하자면... 돈도 벌 만큼 벌었고... 명예도 얻을 만큼 얻었고... 이제 한가하고 심심하니 어디 정치 한 번 해볼까 하는 인사들은 곤란하다. 불의에 맞서 싸워본 적도, 피해본 적도 없고 공공을 위해 헌신 봉사한 적도 없이 날로 먹으려는 심보는 곤란하다.
정치인으로 나서려면 죽을 각오여야 한다. 본인뿐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까지 모두 사지로 끌고 들어가는 심정이어야 한다. 멸사봉공! 자신의 모든 것을 공공을 위해 희생할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아직 한국의 정치가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착한 것은 곤란하다. 정의로워야 한다. 무른 것은 곤란하다. 날카로워야 한다. 부드럽고 연한 것은 곤란하다. 굳고 단단해야 한다. 실력을 갖추고 그에 걸 맞는 각오가 있어야 한다.
“여러분께서는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 있으면서 어찌하여 팔짱만 끼고 계십니까.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18p)
“지......지......지금부터 말씀드리리다.” (중략) “여러분께서는 대군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 있으면서 어찌하여 팔짱만 끼고 계십니까. 참으로 이상하기 짝이 없습니다.” (23~24p)
앞에 것은 이에야스의 발언, 뒤의 것은 이에야스의 사신 무라코시 시게스케의 발언이다.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다.
오야마에서 방향을 틀어 서쪽으로 진군한 동군은 기요스에서 멈춘 채 에도의 이에야스의 출전명령을 기다린다. 차일피일 답이 없자 장수들은 이에야스가 이제 와서 발을 빼고 자신들을 외면하는 것은 아닌가 불안하고 초조하여 화까지 내며 진중이 동요한다. 이곳으로 이에야스는 사신을 파견하는데 그 인물이 하필이면 말주변 없고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무라코시다.
모두들 엉뚱한 인선이라고 의아하고 불안해하는데 그는 무식하다기보다도 다른 사람 앞에 나가서 하는 외교 따위에는 거의 알맞지 못한 고집 세고 우직한 사람으로 물고 늘어지라고 명령한다면 정말로 물고 늘어져 죽어도 떨어지지 않을 사나이...... 아니, 다른 사람을 잘못 물었다 하더라도 한 번 물게 되면 어쩔 수 없으리라 여겨지는 그러한 사나이였다. (16p)
모두들 목을 길게 빼고 기세등등하게 노려보는 앞에서 무라코시는 느닷없이 꼭두각시 인형을 연상케 하는 고지식한 인사의 자세를 잡은 채 고함소리에 가까운 목소리로 암기한 이에야스의 말을 순서에 맞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전한다. 다 전한 무라코시의 이마에도 목 언저리에도 구슬 같은 땀이 맺히고 어깨는 가늘게 물결치고 있다. 무라코시는 마침내 이에야스의 의지 이상 가는 매서움으로 그들 결심의 애매함을 꾸짖은 것이다. (24p)
요점은 왜 내 명령만 기다리며 움직이지 않고 있느냐다. 가신이라면 일일이 지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알아서 분발하라는 것, 내 싸움 이전에 너희들 싸움이라는 것이다. 먼저 진군하면 곧 뒤따를 것이니 모든 것은 너희들 마음가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메시지로 장수들은 이에야스 한 사람의 싸움에 원군으로 온 것이 아님을 깨닫고 분발한다. 불안, 초조에 짓눌려 있던 진중이 돌연 일변하여 활기를 띤다. 너나없이 서군에 덤벼들려는 참다운 의미의 선봉이 될 분위기다.
사실 이것은 지혜로운 동시에 교활한 수이기도 했다. 여러 장수들에게 전쟁에 억지로 끌려오거나 얼떨결에 휩쓸린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나선 것을 깨닫게 하여 능동성을 부여하고 사기를 진작시킨 지혜로운 수다. 동시에 싸울 줄만 알지 단순하고 우직한 장수들의 성향까지 파악한 후 자신의 세력을 보전키 위해 그런 장수들을 선봉에 앞세운 교활한 수다.
장수들이 진군하자 곧바로 이에야스도 에도를 출발하는데 자신은 기요스로 곧장 길을 잡지만 그 아들 히데타다에겐 주력군을 딸려 보내며 자신과 다른 경로로 되도록 돌아서, 천천히 전장에 도착하라고 이른다. 이것도 같은 맥락! 지혜로우면서도 교활하다. 가까이는 전쟁 후반부, 멀게는 전쟁 이후까지를 대비해 여력을 보존하려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전장으로 간 것도 같은 이치! 늙어가는 자신은 저무는 태양, 젊은 후계자인 아들은 떠오르는 태양으로 본 것이다. 만일의 경우에 자신보다 아들의 목숨을 보존하려는 것! 따로 비행기가 뜨는데 에어포스원은 아들이 타고 공중에서 비행하고 있고 에어포스투는 아버지가 타고 곧장 전장으로 날아가고 있다.
교활하든 지혜롭든 멀리 내다보고 두는 고수의 행마다. 깊은 지모다.
능동성이 중요하다. 억지로 하는 것과 좋아서 하는 것, 시켜서 하는 것과 알아서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그래서 이에야스는 내키지 않은 사람은 떠나도 좋다고 한다. 전장, 현장에선 소위가 대장! 소위가 죽으면 상사가 대장! 하염없이 대장의 명령만 기다리지 말고 알아서 분발하라고 한다.
통일성도 중요하다. 좋아서 하고 알아서 하되 가지런해야 한다. 오버하지 말고 어지럽지 않아야 한다. 저마다 독고다이(특공대) 식으로 제멋대로 좌충우돌하지 말고 본부의 지휘에 따라 같은 편끼리 이심전심 사인이 맞아야 한다.
스포츠라면 골프 같은 개인종목이 있고 축구 같은 단체종목이 있다. 음악이라면 피아노 솔로 독주가 있고 오케스트라 합주가 있다. 전쟁과 정치는 대표적인 단체, 집단종목이다. 축구처럼 조직력이 좋아야 하고 오케스트라처럼 화음이 맞아야 한다. 바로 팀플레이다. 혼자 100점 맞는 것보다 다 같이 80점 맞는 것이 최종승리에 더 다가갈 수 있다.
정당과 시민사회단체까지 포함해 한국의 민주진보 정치세력이 약한 점이 이것이다. 팀플레이 없이 개인플레이에 열중이다.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후 변변한 지휘부도 없이 제각각 지 잘난 맛에 골목대장 놀이에 한창이다.
대권엔 관심 없고 국회의원 뺏지에만 만족이다. 골 넣을 생각도 패스할 생각도 없이 혼자 구석에서 공놀이에만 재미들린 것이다. 전체 민주진보 세력의 역량강화와 승리에는 관심 없고 대통령 해먹을 궁리만 한다. 실력도 없으면서 스트라이커를 꿰차고 골문 앞에서만 서성이는 것이다.
감독도 팬도 동료도 안중에 없다. 대의를 외면하고 소의만 쫓는다. 여러 문제점이 많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것이다. 규율이 서고 팀플레이만 보강한다면 죽 쑤고 있는 새누리당을 능히 뛰어넘고도 남는다.
통신이 발달하지 않은 옛날에는 메시지를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사신, 전령의 역할이 중요했다. 무라코시의 경우 어느 정도 자율권이 주어진 특사나 전권대사가 아닌 단순 전달자에 불과했으므로 최상의 인선이었다. 어눌하여 말주변이 없고 고지식한 무라코시가 최적임자였던 것이다. 이 경우 필요 없는 억측과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성이 없고 더함도 뺌도 없이 정확한 정보가 복사, 전달될 수 있다.
고유의 문자가 없었던 초기 몽골초원에서는 많게는 다섯, 적어도 둘이 짝을 이뤄 전령을 보냈었는데 이는 만일의 사고에 대비하는 한편 혹 한명만 보내면 메시지를 헷갈려하거나 까먹어 정보가 왜곡, 누수될까 염려한 때문이었다. 문서라면 두 권을 써서 보낸 안전조치인 셈이다. 이들은 말 위에서 먹고 자며 하루 최대 1000km까지 달렸다는데 이는 믿거나 말거나...
이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첫째 강한 충성심. 중간에 도망가거나 배신하면 안 된다. 둘째 뛰어난 머리, 특히 암기력. 중간에 까먹으면 안 된다. 셋째 강한 체력과 생존력. 죽더라도 메시지를 전하고 죽어야 한다. 그래서 몽골병사 중 가장 뛰어난 자들이 선발되었다.
메신저는 본래의 메시지에 충실해야 한다. 일을 도모한답시고 임의로 더하거나 빼면 안 된다. 그것이 메신저의 본분이다. 하지만...... 세상사가 그것만으론 출세하지 못한다. 고대로 전달하고 전달받은 것을 고대로 실행하는 것만으론 2% 부족하다. 출세하려면 여기에 플러스알파가 있어야 한다.
기대한 것, 주문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면 최소한 자리는 보전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이상이면 도드라져 눈에 띈다. 남들보다 치고 올라가 승진하고 출세할 수 있다. 무라코시는 이 경우 본분에 충실한 최상의 메신저였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결국 메신저는 메신저, 심부름꾼은 심부름꾼에 그친다. 역사적으로 메신저 중에서 크게 출세한 이는 드물다. 실지로 ≪대망≫ 12권 중에도 무라코시 시게스케가 등장하는 대목은 이곳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일하다.
“어머, 놀리지 마세요.”
그리고는 별안간 얼굴이 새빨개지며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어쩐지 기쁜 모양이다......’ (330p)
그녀 또한 아내보다 더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푹 숙이더니 느닷없이 고에쓰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왔다.
“아저씨, 아주머니 앞에서는 그런 말씀 하시지 마세요......”
고에쓰는 그만 주먹을 쥐고 쳐들 뻔했다.
‘이 못된 것이......’ (331p)
괘씸한 애교, 주먹을 부르는 부끄러움인가! (^.^) 아내에게 ‘이 교토에 당신만큼 인물도 마음씨도 좋은 여자는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오키쿠라는 처녀에게 ‘너처럼 예쁘고 마음씨 좋은 여자는 이 넓은 세상에 다시없을 것’이라고 말하니 둘 다 어쩔 줄 몰라 하지만 싫어하지 않는 눈치다.
고에쓰가 소쿤의(둘 다 이에야스의 측근) ‘가만히 있는 건 남녀 간에 있어 하나의 무례’라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여 아내와 오키쿠에게 시험 삼아 달콤한 말을 건네 보는 대목이다. 원래 고에쓰는 마음에 없는 아첨이나 교언영색과는 거리가 먼 선비형의 인물로 이쪽 방면에는 어두웠던 것!
소쿤의 주장은 이것이다. 유혹해서 넘어가고 않고는 여자의 자유, 하지만 내버려둔다면 예의가 아니다. 먹고 안 먹고는 손님의 자유, 하지만 다과라도 내놓지 않는다면 손님대접이 엉망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칭찬하는 것은 칭찬받고 싶어하는 여인의 허영을 염두에 둔 위로인 셈으로 아무리 새초롬한 미녀라도 당신을 사모한다고 하면 노하지 않는다. 색이 싫다는 남자나 여자가 만일 있다면, 그야말로 병신이라는 거다.
미녀(뿐 아니라 모든 여자)에겐 유혹하는 것이 아닌 가만히 있는 게 무례라는 말! 일리가 있다. 남자에겐 유혹할 의무가 있고 여자에겐 유혹에 넘어갈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 하지만 무턱대고 들이대면 주책이고 민폐다. 눈치 봐서 상황 봐서 알맞은 방법으로 대시해야 한다.
여자도 마음에 든 남자에게 대시를 허락한다는 단서나 빌미를 제공해야 한다. 괜시리 웃는 낯으로 다정하게 대한다든가 핑계를 만들어 마주칠 기회를 만든다든가 그도 아니면 수건이라도 슬쩍 떨어뜨린다든가...... (^.^)
하지만 여자는 대상과 수위를 잘 조절해야 한다. 수위가 너무 높고 노골적이면 헤프다는 인상을 주며 마음에 들지 않고 꺼려지는 상대에게 과도한 친절을 베풀면 자기에게 마음이 있나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원래 젊은 숫놈들은 과대망상에 잘 빠진다. (^.^)
요컨대 남자든 여자든 대상에 따라 강약, 완급을 잘 조절해야 한다. 그런 센스와 눈치가 있어야 한다.
비호감이 아니라는 전제하에 남성은 여성을 유혹하는 것이 예의다. 최대 노골적인 들이댐에서 최소 접대성 칭찬까지 어쨌든 관심을 보여야 한다. 호감이 있다는 전제하에 여성은 남성이 자기를 유혹할 수 있도록 남성을 유혹하는 것이 예의다. 최대 연락처를 쥐어주거나 최소 잦은 웃음을 흘려주어야 한다.
적당한 접대성 멘트, 뻔히 속이 보이는 칭찬도 분위기를 살리고 관계를 부드럽게 한다면 이성간에는 요긴하게 도움이 된다. 돈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관심을 보이며 칭찬을 해주면 서로 간에 호감을 줄 수 있다. 의도가 불순하지 않고 과하지만 않으면 좋은 매너요 현명한 처세술이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에쓰는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성, 동성을 막론하고 속에 없는 빈말을 할 줄 모르는 사나이다. 그래서 고에쓰는 이런 아내와 오키쿠의 반응에 씁쓸하다. 인생이란 이 얼마나 어리석은 놀이터인 것인가. 일상행동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달콤한 말에 맥없이 넘어간다면, 고에쓰 같은 사나이의 가치는 반도 이해되지 않는 게 된다. (330p)
이것은 정치도 마찬가지! 이제까지 걸어온 삶의 여정으로 판단하지 않고 세치 혀로 농락하고 농락당하니 이 얼마나 어이없고 덧없는 세상인가!
고에쓰 같이 답답할 정도로 길이 아니면 가지를 않는 선비형 남자와 뛰어난 미모에 허영심이 많은 콧대 높은 여자의 조합은 어떨까? 생소함이 매력으로 다가와 남자는 여자를(요런 예쁘고 깜찍한 악마 같으니! 이런 느낌 처음이야!) 여자는 남자를(내게 눈길한번 안주다니! 이런 느낌 처음이야!) 강력히 끌어당길 수도 있다.
이 경우 소설에선 남자는 좀 더 경쾌해지고 여자는 좀 더 성숙해지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에선 남자는 뜻을 꺽고 낮아지거나 여자는 삐뚤어져 엇나가는 새드엔딩인 경우가 더 흔하다.
하여튼 시대가 바뀌어 고에쓰 같은 남자는 더욱 살아가기 힘든 세상, 인정받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묵묵한 사랑보다 솔직한 사랑이 통하고 진실한 사람보다 상냥한 사람이 경쟁력 있는 시대다. 하지만 이것을 꼭 대립항으로 볼 필요는 없다. 얼마든지 묵묵하면서도 솔직하고 진실하면서도 상냥할 수 있다.
굳이 칭찬을 아낄 필요는 없다. 굳이 딱딱하게 대할 이유는 없다. 상냥하게 칭찬하며 관심을 보인다면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 좋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여 반드시 명심해야할 것,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성 앞에서 다른 이성을 칭찬하지 말 것이다! 가벼운 사이라면 아무 쓰잘데기 없는 낭비요, 깊은 사이라면 무례를 넘어 범죄다. 애인이나 부부사이에선 금기다.
아무리 새초롬한 미녀라도 당신을 사모한다고 하면 노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곰처럼 둔하고 못생긴 추녀라도 당신 아닌 다른 여자가 더 예쁘다고 칭찬한다면 노하기 마련이다. (^.^)
원만한 남녀관계를 위한 모범사례
이것은 취향이 독특한 것이 아니라 자기암시에 능한 것!
《대망(大望)》 9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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