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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어멍 2009. 9. 9. 00:07
 

(전략)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마지막 일기장 제목이라던가.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잠시 몸이 뜨거워졌다. 물론 평범한 문장이다. 그러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저 문장을 매달리듯 읽었다. 그토록 고통스러운 인생이었고 그토록 절망적인 역사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생의 말기에 도달한 저와 같은 긍정은 아득할 뿐이다. 지금 나에게는 이 대구(對句)가 어떤 시보다도 위대하다. 게다가 지금은, 인생은 아름답지 않고 역사는 발전하지 않는다, 라고 말해야 어울릴 만한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고인은 쓰러져가면서 저런 문장을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니 저것은 평서문이거나 감탄문이 아닐 것이다. 청유문이고 기원문이며 끝내는 명령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옮겨 적는다. 인생은 아름다워야 하고 역사는 발전해야 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한겨레21> 776호 중에서

 


2009년 1월 7일
인생은 생각할수록 아름답고 역사는 앞으로 발전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 일기 중에서

 


    교양있고 품위있는 노신사의 달리 흠잡을 데 없는 평범한 표현인가.

    말년에 이른 유복한 늙은이의 자기애적 삶의 예찬인가.

    언뜻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김대중이라는 인물이 썼다는 사실로 인해서 전혀 평범치 않은 문장이 되었다.



    본인이 겪은 살해의 위협, 몇 차례의 테러, 납치, 감금, 폭행, 고문, 복역, 사형선고 등은 물론이고 그 가족과 지인들의 고초까지...나로선 진작에 배반, 변절하여 일신의 영달과 호의호식을 꾀했거나 그도 아니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광인, 패인이 되어있을 것이다. 이도 아니라면 김지하처럼 ‘생명과 평화’를 농하면서 옆에서 누가 죽어나가던지 학 타고 뜬구름 잡듯이 이 엄중한 시절에 도인이나 신선놀음을 하고 있을 것이다.

[속칭 대표적 진보지식인이라는 최장집 교수는 애초에 이렇다할 고초를 겪은 바 없기에 논외로 한다. - 이 분도 요즘 대의민주주의니 숙의민주주의니 어려운 말들로 어리석은 민중들을 가르치려 하신다. 김대중, 노무현에겐 가혹하고 이명박에겐 관대한 참으로 고매하고 차원높은 분이시다. 먼저 사과와 반성을 하라며 네(이명박) 탓 말고 내(김대중, 노무현) 탓을 하라며 네(김대중, 노무현)
 탓 중이시다.]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그였기에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말이 그저그런 평범한 덕담이 아니라 오히려 위선적 언사라는 인상을 풍기기도 한다. 정말 그리 생각하셨던 것일까. 신형철씨 역시 ‘인생은 아름다워야 하고 역사는 발전해야 한다’는 당위, 혹은 기원과 명령에 방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실재로 그 분은 그렇게 느끼고 확신했을 거라고 본다. 인생의 아름다움에 감사하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위선도 아니고 당위나 명령도 아니다. 수없이 생사를 넘나드는 고초를 격고 말년에 이른 노정객이 생을 관조하며 담담히 그러나 확신에 찬 어조로 들려주는 생에 대한 찬미요, 역사에 대한 증언이다.(적어도 일기를 적은 1월 7일 당시까지는 이에 대해 의심의 여지는 없다고 본다.)

    여기에 정치인 김대중, 인간 김대중의 위대함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