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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범, 2PM 사태에 대한 몇 가지 단상

어멍 2009. 9. 14. 00:22
이전 펌질 포스팅인 김동렬의 글(외국인 노동자의 불행-출처는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85499)을 읽고 들었던 몇 가지 단상이다. 글이 길어져 따로 올린다.

1. 연예인은 공인인가, 아닌가.
2. 박재범은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3. 이번 건에 있어서의 차별과 특권의 배경은 국적인가, 계급인가.
4. 이번 건에 대해 지식인과 대중이 보인 반응은 정당한가 혹은 적절한가.
5. 이번 건 외에 우리 사회가 하나의 이슈를 다루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어떠한가.

    2PM의 (박)재범 때문에 연예계와 인터넷이 뜨겁다. 하이엔드급 탑스타가 아닌 웬만한 연예인들의 이름은 생소한, 강호의 숨은 왕비호(2PM? 재범? 누구?)인 나에게까지 소식이 들려오니 물 만난 호사가들은 수다에 시간가는 줄 모른다.

    그(들)이 누구인지 무슨 언행을 했는지 자세히는 모르고 그다지 관심도 없다. 내게 흥미로운 것은 그것을 놓고 벌어지는 우리사회 각각의 반응과 논쟁의 양상들이다.

    연예인은 공인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공인이다. 예전에는 아니었더라도 지금은 공인이 되었다. 예전에는 비천한 광대신분에 불과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막강한 영향력과 돈과 명예까지 거머쥘 수 있는 모두의 선망이 되었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실상은 기획사에겐 을이요 미디어에겐 병이 되는 초라한 삐에로라 하더라도 그 지위와 영향력이 예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커진 것은 사실이다.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여느 정치인들보다 더 크다. 따라서 팬들의 돈과 사랑만을 탐하고 어떠한 견제도 받지 않으려는 연예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우리 사회가 유독 연예인들에게 더 가혹한, 때론 잔인할 정도의 잣대를 들이댄다는 것이다. 그런 잣대와 열정으로 정치인들을 심판하고 분노했더라면 이미 우리 정치는 세계일류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정치인들에겐 유권자를 불러 모으는 호객꾼, 얼굴마담일 뿐이고 어둠의 실력자들에겐 부르면 내키지 않아도 언제고 달려 나가야 하는 노리개감일 뿐이고 대중들 역시 열광하고 선망할지언정 진정으로 존중해주진 않는다. 아직까진 함부로 해도 될 만한 만만한 존재로 모두에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아직까진 구걸을 위해 재주를 부리던 광대, 때론 몸을 팔던 남사당패라는 천박하고 권위적인 편견, 봉건적 사고의 잔재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연예인 입장에서는 불공정하고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연예인에게 진실을 바라는 것은 정치인에게 진실을 바라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부질없다.
                                   그러나 대중은 정치인의 거짓말보다 연예인의 거짓말에 대해 더 가혹하다.
                              ※ 'Fool me once, shame on you. Fool me twice, shame on me.'(서양 속담)
               직역-(내가) 한 번 속으면 (속인) 당신의 부끄러움이지만, (내가) 두 번 속으면 (속은) 나의 부끄러움이다.
                              의역-한 번 속으면 속인 사람 책임이지만 두 번, 세 번 속으면 속는 사람 책임이다.

    대중은 공인의 무엇을 감시하고 심판하여야 하는가. 공인의 공사(公事)를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은밀한 사생활, 종교와 정치적 신념, 사상의 자유, 성적 취향 등등은 마땅히 존중해주워야 하고 가타부타 시비치 말아야 한다. 머릿속까지 검열하려 덤벼들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면 누구나 개성을 가질 권리, 그 개성을 드러내고 표현할 자유 혹은 감출 자유를 가진다. 특히 재능이 있는 자, 천재들은 특별히 대중들을 기쁘게 하고 공헌하는 공이 있으므로 일반적 편견(!)으로는 이해하기 힘들 정도의 괴벽, 모나고 까칠한 개성까지도 사회가 포용하고 용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천재에게 괴팍할 권리는 있지만 부도덕할 권리는 없다. 재범군이 마이스페이스에 올렸다는 글은 무엇인가. 독백이었나 대화였나 방백이었나. 일기였나 대자보였나. 비밀글이었나 공개글이었나. 보호받아야 할 취향인가 비난받아야 할 부도덕한 행동인가. 사생활인가 아닌가(얼마나 사적인가, 그 사적인 정도를 나누는 것도 얼마나 어렵고 애매한 문제인가!)는 애매하지만 단순한 개인취향의 문제만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그것은 억울함을 떠나 이미 공개된 이상 공사(公事)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박재범은 한국인인가, 미국인인가. 당연 미국인이다. 만민평등의 글로벌 시대에 단순히 국적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중국적이면 한국인도 되고 미국인도 될 수 있다. 형식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정체성을 말하려는 거다. 니편내편 따지자는 것이 아니라 정직성과 페어플레이를 말하려는 거다. 미국식 입맛, 미국식 취향, 미국식 언어, 미국식 사고를 갖고 있으면 부모가 한국인이더라도, 설사 한국에서 나고 줄곧 한국에서 자랐더라도 그는 미국인이다. 이것부터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공정하고 정직하게 경쟁해야 한다. 아메리칸 스타일의 특권과 토종 국산의 장점만을 동시에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 짬짜면처럼 미제 빠다와 시골 된장을 동시에 맛볼 수는 없다.
    고향보다 중요한 게 피고 피보다 중요한 게 생각이다. 출생지보다 중요한 게 거주지이고 거주지보다 중요한 게 현재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느냐이다. 출생지로만 따져 정운찬씨가 충청인이라면 이명박 대통령은 일본인이고 아놀드 슈워제네거(Arnold Alois Schwarzenegger) 미국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오스트리아인이다.(엄연한 미국 시민권자이지만 자국 영토내의 출생자가 아닌 그는 법률상 대통령 출마자격은 없다.)
    오랜 세월 떨어져 살고 있는 친자식보다 오랜 세월 키워오고 있는 남의 자식이 내 자식이다. 검은 머리 외국인보다 노란머리 한국인이 한국인이다. 정치인들도 마찬가지. 문서상의 주소지만 지방에 두고, 나고 자란 곳이 어디입네 하지만 실지로는 일상의 대부분을 서울에서 살면서 선거때만 얼굴 디미는 충청인, 전라인, 경상인들의 정체는 서울인, 강남인들이다. 십중팔구 균형발전론, 분권론자들이 아닌 서울, 강남일극의 중앙집권론자들이다.


    분노와 배신감을 증폭시킨 심리적 배경에 있는 것은 국적인가, 계급인가. 외견상 국적이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실상은 계급이다. 단순한 연예계 가십거리에 외국인 노동자가 나오고 차별, 특권, 계급, 노예근성까지 들먹인다고 김동렬의 글을 비판하는 이가 있을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깊이있게 본질을 통찰하는 글이다. 같음과 다름, 동료와 이방인. 차별과 특권이 동시에 존재하듯이 선망과 멸시도 동시에 존재하고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것도 동시에 존재한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재벌가 럭셔리한 도련님이면서도 함께 어울리며 도시락도 까먹고 인간 냄새 풀풀 풍기며 동고동락했던 친구가 알고 보니 뼈 속까지 서민을 경멸하는 인간이었다면. 자신들은 안중에도 없이 색다르고 한가한 서민체험, 서민놀이를 즐기고 있었던 거라면 배신감과 분노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이명박 대통령의 민생행보도 진정성이 결여된 민생체험, 민생놀이, 이미지 메이킹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지만 그가 극빈층 친구이면서 우리를 속였다면, 동남아 외국인 노동자 주제에 언감생심 한국을 비하하고 깔봤다면 가볍게 무시하고 신경끄면 그만이다. 이토록 흥분하고 분노할 이유가 없다. 일방적, 잠재적으로 갖고 있던 선망이 배반당하고 환상이 깨져버린 것이다. 기브미초코렛. 겟아웃. (한쪽 주먹을 쑥 내밀며) 퍽유다. 재범군은 미국에서 건너 온 특권을 가진 경쟁력있는 선망하는 스타였지만 한순간에 미국인이라는 차별을 받아야 하는,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백인, 서구, 미국의 깨끗하다, 온화하다, 고귀하다 그리고 흑인, 동남아, 아프리카의 더럽다, 위험하다, 비천하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러한 왜곡되고 부당한 이미지의 배경을 이루는 본질은 경제적 계급이다. 만약 백인이 흑인의 노예였다면, 아직까지도 흑인, 아프리카가 이 세계의 경제적 주류, 상류층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면 분명히 이 같은 이미지는 역전되어 있을 것이다. 으슥한 밤거리에 흑인보다 백인이 뒤따라오는 것이 더 무섭고 불안하여 당신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이번 건은 과장하여 말하자면 백인인줄 알았는데 벗겨보니 흑인이었다는 배신감, 좀 순화하자면 성공스토리를 써가는 건실한 교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순 생양아치였다는 모욕감, 오리 사회로 와 기꺼이 어울려 노는 백조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뻐꾸기에 불과했다는 실망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엔 백인, 교포라는 경제적 주류와 미국에 대한 선망의 심리가 깔려 있다. 이웃의 행복에 대한 부러움, 질투, 시샘이나 이웃의 불행에 대한 안타까움 혹은 동병상련적 안도감이 동류, 같은 계급 사이에서 느껴지는 소박한 감정이라면 경외, 선망, 공포, 멸시, 증오 같은 보다 강력하고 폭력적인 감정은 다른 계급, 이방인들에게 투사되는 감정이다. 박재범은 이렇게 선망의 대상에서 증오의 대상으로 추락하여 저 멀리 이국땅(본인에겐 자국땅)으로 내쳐졌다.

    연예계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는 이 숭고(!)한 분노들의 정체는 무언가. 쇼비니즘(맹목적 애국주의)? 마녀사냥?
    몇몇 식자층의 걱정, 반론, 견제는 무언가. 계몽주의? 훈장질?
    양측 주장에 모두 논리와 설득력이 있으나 일부 대중들의 반응이 천박하고 잔인한 것도 사실이고 지식인인양 이를 섣불리 훈계하려는 자세도 느끼하고 거북하긴 매한가지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나마나한 양시론적 덕담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격인 양비론적 독설(毒舌 혹은 獨說)은 간략히 하고 결론을 말하자면, 한 쪽 손을 들어준다면 대중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대중을 무시해서도 깔봐서도 얕봐서도 안 된다. 대중은 무지하지만 직관적이다. 대중은 무지렁이이면서도 천재다. 대중은 무지하지만 더 순수하고 지식인은 유식하지만 그 의도는 더 불순하다. 섣불리 지식인인양, 전문가인양 먹물티 내며 가르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어설픈 담탱이, 꼰대짓, 훈장질로는 대중을 설득할 수도, 계몽할 수도, 그 거대한 원초적 에너지를 담아내어 승화시킬 수도 없다. 어느 경우든 집단지성을 신뢰하고 이에 보탬이 되는 방향이어야 한다. 대중의 권력, 대중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곧 죽어도 대중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
    일부 대중의 분노는 적절하지 않았고 일부 지식인의 견제는 정당하지 않았다.

    이번 일로 우리 사회는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사회적 합의나 교훈은 고사하고 한바탕 소란으로 끝나고 이 기억마저도 멀지 않아 잊혀질 것이다. 김동렬님의 말처럼 연예산업의 구조와 생리,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수용자들의 입맛과 성향이 바뀌지 않는 한 언제고 재발할 것이다. 재범군은 갔어도 박진영, 이수만들은 남았다. 그리고 대중들이 바뀌지 않는 한 제 2의 박진영, 제 2의 이수만 같은 연예사업자들은 계속 나타나 연예''의 인성과 기본적인 자질은 도외시한 체 대중의 욕망에만 부응하는 수익성있는 '상품'만을 공급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중요하고 뜨거운 이슈, 논쟁들을 다루는 모양이 매번 이 모양이다. 깊이도 없고 성찰도, 대책도, 합의도 없고 무엇보다도 마침표가 없다. 마침표가 없으면 작은 매듭이라도 지어야 하는데......그저 시끄럽게 떠들기만 한다눈......

    문제가 많은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시스템, 문제를 깊이있고 차분하게 대하는 마인드의 부족이 문제다. 갈등의 과잉이 문제가 아니라 갈등의 미봉과 회피 그로 인한 갈등의 누적과 종국엔 파국으로 치닫는 갈등의 심화와 폭발이 문제다. 쓰레기를 구석에다 숨겨놓고 똥을 비단으로 가리어 놓고는 게걸스레 밥을 먹고 태연히 손님을 맞는다. 쓰레기는 또 쌓이는 것이고 똥은 또 눌 것이고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 지구는 끊임없이 돌고 있고 내일은 어김없이 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막힌 벽을 투사하여 통과할 수는 없는 법이다. 최소한 매듭지을 것은 매듭짓고 풀 것은 풀고 가야 한다.
    선진국일수록 사소하고 하찮은 문제에도 과열을 걱정할 정도로 전 사회가 참여하여 치열한 논쟁의 과정을 거쳐 합의를 도출해낸다. 프랑스인들처럼 노천까페에서 철학적 문제를 주제로 대화하고 논쟁하는 것만큼의 열정과 노력을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세율 1%에 모두가 달려들어 치고받고 논쟁하자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관계의 정치적 거대담론은 물론이고 양심적 병역거부, 군가산점, 사형제, 균형발전, 성범죄자 신상정보 공개, 신영철 대법관 등 얼마나 많은 논쟁거리가 있었나. 이명박 정부의 독재적 행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저항과 시국선언이 있었나. <나는 고발한다>는 프랑스를 들끓게 했던 에밀 졸라의 명문에 버금가는 명문장이 얼마나 많았던가. 매듭없이 넘어가는 갈등에서 모두가 지치고 무감각해져 버렸다. 알맹이 없는 쇼와 이미지, 감각적 자극에만 이리저리 휘둘리고 있다.
 

    용산참사가 있은 지 8개월째가 넘어가고 있다. 아직도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유족들은 가슴깊이 한을 쌓아가며 울부짖고 있다고 한다. 우리 시대 가장 대표적 서민들인 6인의 죽음을 뒤로 하고 이명박 정부는 사과 한마디 없다. 서민들을 위한 복지예산은 자르고 4대강에 예산을 쏟아부으며 우리의 돈(세금)을 허투루 낭비하고 있다. 엄한 곳에 꼬라박고 있다. 정책은 개떡같이 펼치면서 서민행보, 민생행보라며 장터에 고추밭에 군부대에 사진찍고 이미지 메이킹에 재미가 붙었다. 꿈을 주고 밥을 뺏고 있다. 앞으로는 헛된 희망을 주고 뒤로는 일용할 양식을 빼돌리고 있다. 그런데도 언론과 대중들은 덩달아 환호하고 대통령과 정권의 지지도가 회복세를 타고 있다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 개인도 촛불의 추억, 노무현 대통령 서거의 수세국면과 죄의식(죄의식이란 게 있기나 한 위인인지 의문이다)에서 벗어나 표정이 환해지고 자신감이 넘친다. 절대고수도 미처 예상치 못한 치졸한 수법으로 치명상을 입히고 결국엔 명줄을 끊어놓은 시정잡배가 두려움과 죄의식에서 벗어나 개선장군 행진하듯, 장원급제 유가하듯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 거인을 보내버린 소인배, 호랑이를 떠나보낸 굴속의 여우가 제 세상을 만났다. 너구리(KBS)와 삵괭이(조중동)까지 앞장서 나팔을 불어대니 굴속에서 나와 온 숲속을 활개치며 거리낄 것이 없다. 두 대통령을 잃은 대중들은 의지하고 마음 둘 곳 없어 미우나 고우나 현존하는 권위에 반대급부적으로 더욱 의지하고 허전함을 달래려는 것 같다.(대중은 일정부분 영웅, 위인, 인물, 권위자, 권력자, 실력자, 지도자를 찾아나서는 성향이 있다.) 

    옆집에서 아직도 곡소리가 멈추지 않고 있으면 웃음소리도 조심스럽게 내야 하는 법이다. 용산참사의 해결없는 민생행보는 결단코 위선이고 죄악이다. 권위에 의지하지 말고 거짓평화에 안주하지 말고 시민대중이 스스로 연대하고 의지하고 행동하며 합당한 대우와 해결책을 요구하고 관철해야 한다. 시혜와 처분을 바라지 말고 제대로 된 합의를 도출하고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교훈은 아니더라도 뭔가 남는 게, 얻는 게 있어야 한다. 모두가 합의하고 동의하는 선례를 만들어가야 한다. X 싸고 X 닦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함, 희생자와 열패자들을 버려두고 나서는 씁쓸함, 너도 알고 나도 알고 있는 문제를 애써 덮어두고 어렵고 거북한 본질을 모두가 외면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돌아서는 위선적 일상은 이제 끝장내자.
    개인적으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흡족하지 않더라도 모두가 합의하여 마침표라는 것을 개운하게 한번이라도 찍고 넘어가보자.

PS1 : 그나저나 인터넷 글쓰기 조심해야겠다. 영원히 남아 내 딸, 아들, 손자, 손녀까지 볼 수도 있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겠다. 말은 흩어지고 잊혀지는 과거완료형이지만 글은 영원히 존재하는 현재진행형이다. 병역, 세금, 위장전입 등의 문제보다 인터넷에 남긴 극히 사소하고도 사적인 글 몇 마디로 더 크게 곤혹을 치루는 경우가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PS2 :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SBS 토론회에서 한 말씀 하신 모양이다. 사이버 공간이 잔인한 놀이터가 되었고 인터넷을 규제해야 된다나. 광포하고도 비열한 군중으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인권을 옹호하려는 전여옥 의원의 고결하고 숭고한 인품에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나. 어설픈 지식인들의 훈장질이 어떤 효과를 유발하는지, 어느 집단의 이익에 복무하는지 의식하지 못한 헛똑똑이 역할놀이라면 이것은 지식인이 아닌(대표적인 반지성, 사이비 지성인이리라) 정치인의 정치적 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경우라 하겠다. 홍위병, 인민재판, 군중심리, 과격 시위꾼, 길거리 정치 등의 프레임을 사용하여 수구기득권은 언제고, 어느 이슈이건 일반대중, 시민사회를 통제하고 옥죄어 그 힘을 약화시키려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진보, 자유주의)지식인들의 좀 더 냉철하고 깊이있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