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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13 : 신명기 21장~34장

어멍 2010. 5. 29. 23:41
 

21장 16절

남편이 자기 재산을 아들에게 물려주는 날에 맏아들, 곧 그가 사랑하지 않는 아내의 아들이 받아야 할 몫을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의 아들에게 주면 안 되오.

 

    여럿 부인중에서 비록 사랑하지 않은 부인이 맏아들을 낳았더라도 그 맏아들의 권리는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말. 이것은 동시에 맏아들을 낳을 확률이 큰 첫째부인 즉 조강지처의 권리를 보호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일부다처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필요한 율법이다.

    금실 좋은 첫째 부인 사이에서 맏아들을 보고 영원히 함께 사랑하며 해로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세상이 어디 그런가. 세월이 가며 조강지처는 늙어가고 장성해가는 맏아들과는 왠지 서먹서먹해진다. 반면 둘째, 셋째 새로 들인 부인은 젊고 예쁘며 손자 같은 아들이라도 떠억 안기면 전세 역전이다.

    이삭, 야곱, 요셉 모두 장자가 아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예전 포스팅(성경읽기 0005)에서 이미 했으므로 생략한다.



24장 16절

자식이 잘못했다고 해서 부모를 죽이지 마시오. 그리고 부모가 잘못했다고 해서 자식을 죽여서도 안 되오. 사람은 자기가 지은 죄로만 죽임을 당해야 하오.

 

    사형제는 반대하지만 어쨌든 맞는 말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나라에도 연좌제라는 것이 버젓이 있었으니 법률로만 본다면 수천여년 전보다 지금이 그리 나아졌다고도 볼 수 없다.



28장 53절

여러분의 원수가 여러분을 에워싸서 먹을 것이 다 떨어져 굶주리게 되면 마침내 여러분은 아들과 딸들을 잡아먹을 것이오.

54절

가장 점잖고 온순한 사람도 잔인한 사람으로 변할 것이오. 사랑하는 형제와 아내, 그리고 자식에게도 먹을 것을 나누어 주려 하지 않을 것이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고 죄를 지으면 원수, 흉악한 외적이 침입할 것이라고 경계하고 예언하는 말씀. 눈 뜨고 볼 수 없는 참상, 비극이다. 인간성을 말살하는 전쟁의 비극이다. 하지만 과연 외적의 침입, 전쟁시에만 이럴까. 소돔과 고모라는 스스로 타락하여 무너졌다. 우상숭배, 탐욕, 폭력, 증오, 시기, 성적 문란 등으로 풍속이 타락하여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아비귀환의 지상의 지옥이었다.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 불관용의 사회. 나눔과 돌봄은 없고 뺏고 빼앗기는 약탈과 방화가 난무하는 사회. 도덕과 품위를 잃어버리고 길거리에서 똥오줌을 싸며 혼음을 하는 사회. 만인에 대한 만인의 아귀다툼. 이웃이 이웃을 해하고 부모가 자식을 팔아먹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고 결국에는 자기 이외의 모두를 적대하고 제거하여 이 넓은 우주에 홀로 남겨진 후 종국엔 팔이 다리를 베어내고 이빨이 혀를 씹어먹고야 말 것이다. 유황불이 아니라 이것이야말로 바로 지옥의 모습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금은 어떤가. 입에 담지 못할, 상상할 수도 없는 잔혹한 흉악범죄가 심심찮게 뉴스에 오르내리곤 한다. 자식 같지 않은 자식뿐 아니라 부모 같지 않은 부모가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언제 어디서나 있을 수밖에 없는 극히 일부분의 문제로 치부하고 넘어가야 할까? 우리 사회는 여기에 대해 책임이 없을까?

    우리 사회는 지금 소돔과 고모라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건강하지는 않다. 왜일까? 왜 포동포동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부모에게 천국을 보여주었던 아기들이 흉악한 패륜아로 변해갔을까? 왜 출산의 고통을 기꺼이 감수했고 제 몸이 마르더라도 젓을 물리던 엄마, 자식들을 위해 뼈가 부서져라 일을 하던 아빠가 아등바등 제 배만 채우고 결국엔 제 아들딸들을 잡아먹을까? 왜 가장 점잖고 온순한 사람이 잔인한 사람으로 변하였을까?


    나면서부터 타고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면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우리 사회가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된 것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 모두의 책임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마나한 얘기다. 모두의 책임은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결국 이 책임은 힘 있는 사람, 리더, 지도자, 그 중에서도 최고지도자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남 탓만 하는 못난이, 지도자를 원망하는 무능한 백성으로 보일 수도 있다. 철인정치에 치우친 영웅주의 역사관으로 오해될 수도 있다. 하지만 리더의 역할과 비중은 생각보다 크다. 올곧은 정신, 바른 마음, 탁월한 능력의 리더는 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피치못해 전쟁을 하더라도 야만과 타락으로부터 도덕과 인간성을 지켜낼 수 있다. 평시에도 증오, 탐욕, 질투, 경쟁을 부추기기보다 사랑, 용서, 화합, 평화를 말한다. 문화와 풍속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다.

    리더는 그 집단을 대표하며 그 집단의 평균수준을 상징한다. 주파수를 맞추어 라디오를 듣고 표준시계에 자신의 시계를 맞추듯 사회는 최고지도자에게 안테나를 맞추고 그를 닮아간다. 의식치 못하더라도 거의 순식간에 물리적, 심리적으로 그를 향해 눈길이 모아지고 줄이 세워지고 동기화된다. 리더의 수준에 따라 사회 전체의 수준이 짧은 기간에 업그레이드되기도 하고 다운그레이드되기도 한다. 때론 멸망과 번영, 생존과 죽음으로 그 운명이 극명하게 엇갈리기도 한다.




     이 산이 아닌게벼?                        아까 그 산이 맞는게벼!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지만 리더가 멍청하면 배가 곧장 침몰하는 수가 있다.



    한명한명 개인적으로 보면 착하고 예의바른 얌전한 일본인들이 어떻게 그런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야만적 전쟁과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을까. 2000년대의 일본인과 1930년대의 일본인들은 다른 종족이었나. 물론 아니다. 단, 지도자가 바뀌었을 뿐이다. 생각 없는 천황과 호전적, 패권적 군국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런 지도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그런 역사는 언제고 되풀이될 수 있다.

    우리의 리더들은 어떠했나. 이승만부터 노무현까지 이들의 수준은 어떠했나. 전체적으로 만족스럽지 않다. 그러면 리더를 선출하고 통제한다는 측면에서 시민들의 수준은 어떠했나. 권력자가 아니라 시민들의 수준을 평가하고 그에 따라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것은 사실상의 직접투표가 시행된 87체제 이후라고 본다. 이승만 대통령 시절엔 투표라고 해봤자 당시 조선백성의 티를 채 벗지 못한 민도로 봤을 때 시민들에게 공동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박정희씨, 전두환씨, 노태우씨 등은 강제로 밀고 들어온 군인들이었으니 뒤엎어 쫓아내지 못한 것의 책임을 묻는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총칼 없는 시민들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고. 하지만 민간인 출신이 뽑힌 김영삼 대통령 때부터는 시민들도 책임의 일부를 나누어 져야 한다. 시민수준, 민도는 어떠했나. 개인적으로는 굴곡도 많고 아쉬움도 많았다는 정도......


    이명박 현 대통령은 어떤가. 이유야 어찌됐든 시민들의 자유투표로 뽑힌 대통령, 가뜩이나 기독교 장로로서 기독교세의 지지에 크게 힘입어 당선된 대통령이니 시민과 기독교인들의 책임이 크다. 그가 잘못하면 우리 잘못이요. 그가 죄를 지으면 그에게 죄를 지을 기회를 부여하고 방치한 우리의 죄이다.

    그를 왜 뽑았을까? 그의 무엇이 닮고 싶었을까? 도덕성? 인간성? 철학? 역사의식? 주님에 대한 신실한 믿음? 4대강 747 등의 정책? 의문이다. 부지런함, 불도저 같은 강력한 추진력도 인간적 매력이라면 매력이랄 수는 있다. 하지만 많이 미흡하다. 그런 자질이라면 차라리 힘센 마당쇠가 오히려 낫다.

    결국은 그를 인간적으로 닮고 싶은 것이 아니라 그의 성공이 부러웠기 때문이다. 그가 그의 부지런함, 처세술, 정력을 통해 이룬 부와 성공이 부러웠고 그를 통하여 그것을 기대하고 약속받기 원했기 때문이다. 그가 약속하며 내걸었던 표어인 ‘국민성공시대’의 성공은 비록 넉넉하진 않지만 아빠, 엄마, 아들, 딸 오손도손 나눠먹는 소박한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의미하진 않았다. 비록 가진 건 없지만 서로를 보듬는 애틋함이 넘치는 사회는 결코 아니었다. 그 성공은 먹을 게 진진하여 각자 욕심껏 밥그릇을 채우고도 남아도는 성공을 의미했다. 국민들은 그를 보며 분명 그것을 기대했다.


    결론은 탐욕이다.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느니 정치보다 경제가 우선이라느니 하는 말들이 결국은 다 이 말이다. 우상과 물질을 경계하라던 하나님,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신명기 8:3]고 가르치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반성해야 한다.

    내 딸, 아들을 포함하여 대통령이 장래 꿈이라는 어린이들에게 이명박 대통령을 닮으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다. 그를 롤모델로 추천할 수가 없다. 현 리더(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우리의 민도는 예전보다 올라갔는가. 분명 내려갔다. 예전만 못하다. 유감이다. 하지만 감수할 수 있다. 다만 잘못된 리더, 잘못된 리드로 전쟁과 멸망을 불러오는 일만은 없어야겠다. 우리 아들딸들을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요즘 조금 불안하다. 그래서 성경읽기에 점점 정치이야기가 많아지는 듯하다. 선거니 천안함이니 전쟁얘기까지 나오고......주저리주저리 할 말이 많아진다.



28장 66절

여러분은 언제나 생명의 위협 가운데에 살 것이오. 여러분은 밤이나 낮이나 무서워하며, 살지 죽을지 확실히 알지 못하게 될 것이오.

67절

아침이 되면 ‘저녁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저녁이 되면 ‘아침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할 것이오.

68절

여러분은 여러분의 원수들에게 여러분 자신을 노예로 팔려고 하겠지만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오.

 

    역시 계속 이어지는 이야기.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비참한 상황이다. 유대인들이라면 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를 연상할 것 같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살아있다는 것에 대해 안도와 원망이 반반이다. 두려움에 가슴 졸이며 지내야 할 하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째깍 째깍 순간 순간 지나가는 삶의 시간이 아쉬움이고 불안이다. 현재를 향유치 못하고 저녁과 아침을 기다리지만 그 때에 이르러도 그 곳엔 여전히 공포와 불안만이 기다리고 있다.

    맨주먹으로 맞서 싸울 수는 있어도 항복하여 노예로 삼아주길 부탁하거나 빌 수는 없다. 그들이 내게 바라는 건 오직 죽음 뿐!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도망 뿐! 숨을 곳 없는 광활한 벌판에서 흉폭한 아가리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야수에게 안식 없이 쫓기는 영원한 도망이다.




프랑스 영화 <늑대의 후예들, Le Pacte Des Loups>의 한 장면

프랑스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늑대와 비슷한 야수, 식인귀에 대한 전설이 전해오는 듯하다.
※Loups는 프랑스어로 '크고 흉악한 늑대(the big bad wolf)'를 의미



    원수들에게 나의 존재란 버리는 게 귀찮아서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선반위의 박스, 시선을 어지럽히는 의미 없는 동작(動作)일 뿐이다. 극한의 공포, 극한의 절망에 부딪히면 사람의 눈동자가 풀어지고 표정은 없어지며 눈물도 분노도 사라진다고 했던가. 사람을 죽여 비누를 만들던 아우슈비츠! 그 곳에서 인격, 품위, 도덕, 존엄, 생명을 말하는 것, 웃고 울며 기쁨과 슬픔을 느끼는 것은 사치다.

    인간의 죄가 너무 크다!



30장 19절

여러분 앞에 생명과 죽음, 복과 저주를 내놓았으니 이제 생명의 길을 고르시오. 그러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손이 살 것이오.

 

    기독교인가 천주교인가, 성명서인가 신문칼럼인가, 4대강을 반대하면서 이 말씀을 인유(인용하여 비유함)한 것을 읽은 기억이 있다. 휴~~ ㅠ.ㅠ

    한마디로 죄 짓는 거다. 죽음과 멸망의 길이다. 공사전후의 사진을 보면 그야말로 살육의 현장이다. 기독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가 모두 들고 일어나 반대운동에 나섰다. 정치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기 때문이다.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 마쳐야겠다. 4대강에 대해 적자면 너무 길어지기도 하고, 하도 어이가 없고 안타까워 한숨부터 나오고 기운이 쏙 빠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하자. 집사인 내가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에게 감히 주님의 이름을 빌어 명령하노니...


     당신은 더 이상 생명을 죽이지 마시오. 죄를 짓지 마시오.
    당장 죽음의 길에서 나와 하나님과 생명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시오.



                                                   살육과 파괴의 현장 - 남한강 대신리의 공사전후 모습




34장 5절

여호와의 종 모세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압에서 죽었습니다.

 

    모세는 모압에서 약속의 땅을 보지만 그 땅에 들어가지는 못한다. 당시 그의 나이 120세.


    신명기 끝. 모세오경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