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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05 : 창세기 50장

어멍 2010. 3. 25. 09:09


    [창세기 28장 이후의 줄거리]

    쌍둥이 형 에서를 피해 외삼촌 라반에게 몸을 의탁한 야곱. 그의 딸 라헬에게 맘이 있었던 야곱은 7년을 일한 후 첫날밤을 보냈으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옆에 누워있는 신부는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인 레아.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위해 다시 7년을 일하게 된다. 다시 6년 동안 라반 밑에서 일하여 도합 20년을 보낸 야곱은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으로 향하여 형 에서를 만나 화해한다.

    야곱은 아내 라헬 사이에 늘그막에 본 아들 요셉을 더욱 사랑하였는데 이로 인해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받기 일쑤였다. 결국 형들은 아버지 야곱을 속이고 이집트에 요셉을 종으로 팔아버린다.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혀있던 요셉은 파라오가 꾼 꿈을 해몽(7년 대풍, 7년 기근)하여 파라오의 절대적 신임을 얻어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총리자리에 올라 이집트의 모든 국정을 관장한다.

    기근이 들자 양식을 얻기 위해 이집트를 찾은 형들을 만나게 되고, 결국 그들에게서 높임을 받게 되고, 아버지 야곱까지 이집트로 오게 된다. 야곱은 자신을 가나안 땅에 묻으라는 유언과 함께 12명의 아들들에게 복을 빌어준 후 숨을 거둔다. 이 12명이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이다. 이후 요셉은 다음과 같은 출애굽의 예언과 유언을 하면서 죽는다. 창세기의 끝 장면이다.



창세기 50장 24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셨던 땅으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25절

그리고 나서 요셉은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 약속을 하게 했습니다. “형님들이 이집트에서 나가실 때, 내 뼈도 옮겨 가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생각해보면 기구한 운명, 기구한 민족이다. 선택받은 민족이냐는 논외로 치더라도 축복받은 민족, 유복한 민족은 아니다. 긴 역사를 통틀어 유대민족은 번영했던 강대국의 기간보다 핍박받고 고난받던 약소국이었던 기간이 더 길었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의 역사는 물론이요, 신약의 로마제국 시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이집트와 광야에서의 그들의 처지는 고난의 행군에 오히려 더 가깝다. 파라오라는 절대권력자가 지배하는 강대국 이집트에 머리를 조아리거나 저항하는 약소국, 약소민족이다. 요셉도 기껏해야 파라오 밑의 총리일 뿐이다. 과연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받은 민족일까? 축복받은 민족일까? 적어도 세속적 현실에서는, 현재까지는 자신있게 긍정할 수 없다.

    정작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은 이스라엘이 아닌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국수주의 주장을 하려는 게 아니다. ‘선택받았다’는 주장, ‘특별하다’ 그래서 ‘특권이 있다’라는 주장의 허구성, 위험성을 말하려는 것이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과 ‘선택받은 민족’이란 말은 확연히 그 뉘앙스가 다르다.

    유럽 기독교인들의 유태인 박해, 유태인 혐오는 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데에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 예수를 죽인 민족이란 거다. 이것도 선택받음으로 봐야하는 건가? 현재 이스라엘은 놀랍게도 인구의 대부분이 유대교도들로 기독교도들은 채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종교자유를 주장해야만 할 정도로 기독교도들이 유대교도들에게 박해를 받고 있다. 아프리카, 아프카니스탄 등의 오지나 이슬람권에 선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땅, 예수님이 나신 이스라엘에 먼저 선교해야 한다.

    보통 이스라엘과 우리 한민족을 비교하여 머리 좋은 민족, 부지런한 민족, 우수한 민족 심지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란 주장이 있다. 처음부터 타고났다는 거다. 과장된 거다. 오만하고 교만한 국수주의다. 풍습, 역사, 주위환경에 따라 기질과 민족성에는 일정부분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인간(호모 사피엔스)은 다 거기서 거기다. 인종, 민족은 다 거기서 거기다. 대학교수나 청소부의 선천적 지력, 뉴욕 맨하탄 백인 아기나 아프리카 초원 흑인 아기나 맨 처음의 타고난 품성,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 면에선 별반 큰 차이가 없다.

    탁월한 학생이 선생님 눈에 띄듯이 선택받았다고 주장하기 전에 그 모습에 눈길이 머물도록 스스로 노력하고 구해야 한다. 효성 깊은 자식이 부모의 어여쁨을 받듯이 사랑받기 위한 존재라고 떼쓰기 전에 그 예쁜 품행에 자연스레 사랑이 갈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해야 한다. 나만이 선택받았고 나만이 옳다는 주장은 위험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할 수 있다. 호가호위(狐假虎威)! 여우가 호랑이 거죽을 걸치고 호랑이 권세를 누리려는 거다.



                                                      예상과는 달리 유대교에 의해 박해를 받고 있는
                                            이스라엘 기독교인들의 실상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 <회복>



    한 가지 개인적으로 의문인 것이 아브라함 이하 족보에서 나타나는 장자(長子)에 대한 푸대접(!)의 전통(!)이다. 어떤 경우 아예 내 논 자식이다. 아브라함(장자)-이삭(장자 아님)-야곱(장자 아님)-요셉(장자 아님)으로 이어지는 족보는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 공교롭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사라에게서 본 적자(嫡子)였으나 장자가 아니었고, 야곱은 이삭과 리브가 사이에서 동복(同腹) 쌍둥이 형 에서 다음으로 태어났으나 자신을 더 사랑한 어머니와 공모하여 형 에서의 권리를 속임수로 빼앗았으며, 요셉 역시 야곱이 늘그막에 둘째 부인 라헬에게서 본 막내였다. 리브가는 물론이요 특히 사라와 라헬의 경우 다른 부인(들)보다 외모가 출중한 미인으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각별한 사랑과 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서 몇 가지 공통점을 추출해볼 수 있는데 첫째가 (축복의) 상속권, (가계) 계승권을 결정하는 요소에서 적어도 구약시대에는 장자의 자격이 결정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둘째가 아버지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어머니의 신분, 의지, 처지도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거다. 즉 사라의 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보다 사라가 늦게 본 이삭이 그 권리를 잇고, 레아보다 더 사랑받은 라헬에게서 나은 막내 요셉이 그 권리를 이은 것이다.

    이 상황을 그리며 전형적인 소설을 하나 써보자. 갖은 고생 끝에 제국을 통일한 황제가 있었다. 시골 한량일 때 별 볼 것 없는 신분에 어찌어찌 소개받은 동네 처녀와 결혼을 올린 다. 이후 수많은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함께 한 조강지처다. 황제에 오른 후 이웃나라 신분 높은 공주를 두 번째로 맞아들이나 단지 제국의 안정을 위한 정략결혼일 뿐이다. 황제는 얼마 후 신분은 그리 높지 않으나 자신이 마음에 두었던 여인과 세 번째 결혼식을 올린다. 셋째 황후를 끔찍이 사랑한 황제는 그녀와의 사이에서 늘그막에 본 총명하고 어린 왕자를 사랑하여 왕위를 물려줄 생각이 있었으나 남성 못지않은 권력욕을 가진 첫째 황후와 대신들의 반대로 자신이 죽은 후 황후와 왕자의 안전을 노심초사 걱정만 하다가 결국 명을 다한다.

    둘째 황후는 자기 나라로 도망치고 첫째 황후는 자기 아들을 황제에 앉힌 후 셋째 황후의 아들을 독살하고 선황의 총애를 받던 셋째 황후는 손과 발을 잘라내고 눈을 뽑고 귀를 태우고 벙어리가 되는 약을 먹여서 돼지우리에 살게 하며 ‘사람돼지’라고 불렀다.

    너무 끔찍하고 잔인하여 비현실적인 얼토당토않은 소설인가? 그런 사이코패스적인 악녀가 과연 있을까? 파란 부분은 실제 역사적 사실이다. 첫째 황후는 한고조 유방의 첫째 황후인 여태후, 그 아들은 효혜제, 셋째 황후(셋째인지 몇째인지는 분명치 않다)는 척왕후, 죽임을 당한 그의 아들은 조왕이다.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우리에게도 가깝게는 태조 이성계와 그를 이어 형과 동생을 제끼고 왕위에 오른 태종 이방원의 유사한 이야기가 있다. 왜일까? 여러 부인들 간의 갈등, 적서의 갈등뿐만이 아니라 부부, 부모자식 간에도 힘의 관계가 변화하기 때문이다. 아직 노쇠하지 않은 아비와 이미 장성해버린 아들은 권력을 사이에 놓고 라이벌이 되곤 한다. 심지어 한 여자를 놓고 다투기도 한다. 자신의 힘은 점점 줄어들어 따르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줄어들고 커가는 아들의 힘은 점점 강성해져 사람들이 하나둘씩 붙기 시작한다. 조강지처는 욕심만 늘어나 점점 억세지기만 하는데 새로 얻은 여인은 젊고 아름답고 여성스럽고 애교까지 부릴 줄 안다. 게다가 손자 같은 아들이라도 하나 낳아 떡~ 안겨주면 조강지처 처소는 물론이요 조정에도 들를 일 없이 시간가는 줄 모른다. 굳이 배다른 형제가 아니더라도 장성한 형이 아비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어린 동생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은 잦다. 가인과 아벨도 이것을 시사하지 않을까. 창세기에 언급된 인류의 첫 번째 살인은 형에 의한 동생의 죽음이다. 하여튼 왕의 사후를 전후한 양위기간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살육의 피바람이 불곤 했다.

    적장자(嫡長子)이며 아비의 사랑을 받는 어미의 자식이며 아비와 갈등이 적은, 아비에게 섣불리 대들거나 맞서려지 않는, 게다가 성격과 취향까지 아비와 죽이 잘 맞는 아들이라면 아비의 권리를 상속받고 가계를 계승하기에 최상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일부다처제의 부족사회, 봉건제 시절에는 흔치 않다. 드물다. 대개의 경우 비록 적장자라 할지라도 그 자리는 언제고 위태롭다. 이삭처럼 아버지에게 목숨을 내놓고 충성하든지 야곱처럼 장자의 권리를 훔치던지 요셉처럼 스스로 고생하며 자수성가해서 인정받든지 이방원처럼 스스로 아버지의 힘을 뺏든지 해야 한다.

    성경이야기보다 역사이야기가 많았다. 하늘의 말씀보다 인간의 이야기가 많았다. 하늘의 영광과 하나님의 축복보다 땅의 냉혹함과 인간의 비루함이 많아 밝기보다 어두운 글이 되었다. 28장 이후가 대개 스토리 위주다보니 내 글도 자연히 이리 된 것 같다. 묵상하고 음미하고 성찰하기에는 짧은 잠언, 금언 형식의 말씀이 한편으론 더 나은 점도 있으나 성경 속 이야기, 인간세상사 갖가지 이야기, 동서고금의 역사 속에서도 음미하고 얻을 게 많다.


    뭐 어둡다 어둡다 해도 지금은 밝고 행복하니까 범사에 감사해하며 살자. 그런 면에서 민주주의나 일부일처제는 인간에겐 축복이다. 여성입장에서야 말할 것도 없고, 제도만 그럴 뿐 실질적으론 여럿 거느린 능력남도 간혹 있기야 있겠지만 대개 말년이 흉한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사라가 자기 종 하갈에게 느끼고 라헬이 언니인 레아에게 느끼고 여태후가 척왕후에게 느꼈던 시기와 질투의 감정은 인간의 원초적 감정이다. 한때는 질투(嫉妬)가 칠거지악(七去之惡) 중 하나라고 여겨지던 시대도 있었지만 질투하지 말라는 것은 배고파하지 말라는 말과 비슷한 불가능한 주문이다. 남성역시 마찬가지다. 만약 일부다부제(一婦多夫制) 사회에서 밤마다 남성 여럿이 한 여성의 간택만을 초조하게 기다려야 한다면 큰 길에선 결투가 끊이질 않고 헬스장은 근육질 교태(!)를 부리는 데 필요한 몸짱을 만들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는 남성들로 넘쳐날 것이다.(-.,-:;) 남성들이여,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행복한 세상인가. 모두 하나님의 축복이요 섭리다.

    창세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