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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07 : 출애굽기 20장~23장 (부제 : 십계명)

어멍 2010. 3. 27. 23:44
 

십계명(출애굽기 20장)

① 3절 너희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마라.

② 4절 너희는 우상을 만들지 마라.

③ 7절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④ 8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한 날로 지켜라.

⑤ 12절 너희 아버지와 어머니를 잘 섬겨라.

⑥ 13절 사람을 죽이지 마라.

⑦ 14절 간음하지 마라.

⑧ 15절 도둑질하지 마라.

⑨ 16절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을 하지 마라.

⑩ 17절 이웃집을 탐내지 마라.

 

    모세가 시내 산(일찍이 모세가 불붙는 나무의 이적을 보았던 호렙 산이다.)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십계명을 그 백성에게 전한다.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은 후에 언약궤에 넣어져 만나가 넣어진 항아리와 함께 지켜졌다고 한다.

    백성들이 두려워 떨자 모세가 그들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시험하시고, 또 여러분에게 두려워하는 마음을 주셔서 죄를 짓지 않게 하시려고 오셨을 뿐이오.”[출애굽 20:20]

    십계명은 가장 큰 계명으로 이후 모든 율법의 모법, 헌법적 성격을 띠고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기를 바라면서도 그 분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우리를 함부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지만 도망가지 말라 하신다. "내려가서 아론을 데려오너라. 하지만 제사장이나 백성은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여라. 그들은 나 여호와에게 가까이 오면 안 된다. 가까이 오기만 하면 내가 벌을 내릴 것이다."[출애굽 19:24] 하나님은 시내산 기슭에 경계선을 정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신다. 무슨 의미일까? 세 번째 십계명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의 의미이다. 휘장으로 두른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스런 장소인 지성소 역시 1년에 단 한 번 대제사장만이 정해진 의복을 입고 정해진 의례에 따라 들어갈 수 있었다. 무릇 하나님께 가까이 올 때는 몸과 마음이 성스러워야 한다는 말이다. 두려운 마음에 옷깃을 여며야 한다는 말이다.

    사람도 가까워지고 익숙해지면 상대를 함부로 대한다. 얕본다. 인간은 원래 약한 동시에 간사한 존재다. 잘 나갈 땐 모두 하하호호 하며 친한 척 하지만 어려운 처지에 빠지면 모두가 외면한다. 함께 고생하며 일을 도모했다 하더라도 잘 나가기 시작하면 사람이 돌변하여 욕심을 부리며 공을 탐한다. 과거를 잊고 교만해져 남을 깔보기 일쑤다. 인간의 교만은 끝이 없어 지 잘난 맛에 하나님도 업수이 여기기가 다반사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은 절반의 진실이다. 때론 잘 나갈 때 함께할 수 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다. 고난을 함께하기에 적당한 친구가 있고 성공을 함께하기에 적당한 친구가 있다. 즐거우나 괴로우나 못 나갈 때나 잘 나갈 때나 한결같은 친구,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인간이 되기는 참으로 힘들고 드문 일이다.

    힘들 때나 즐거울 때나 잘 나갈 때나 못 나갈 때나 하나님 앞에 한결같이 겸손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되 삼가 두려워하고 두려워하되 멀리 하지 않아야 한다.


21장 15절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를 때린 사람은 죽여라.

24절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25절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갚아라.

 

    십계명 이하 가지를 치고 나누어지는 갖가지 율법과 규율을 설명하고 있다. 일부다처제나 노예제 등 그 사회와 시대가 필요로 하고 또 그러한 시대상을 반영하는 법과 제도들이 있어왔지만 지금의 잣대로만 보면 야만적이고 잔인하기까지 하다. 더구나 죽이는 방법도 28절 29절 32절 세 차례나 반복하여 ‘돌로 쳐 죽이라’고 노골적, 구체적, 야만적으로 명시하고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넘어 때로는 15절처럼 눈 하나 잃고서 목숨을 앗으려하기도 한다. 죄에는 벌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상응하는 이상의 형벌은 그 자체로 죄이다. 신호위반했다고 사형선고 내리는 격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고대의 법률과 형벌은 야만적이고 잔인했다. 법가를 중용하여 국가의 기본운용원리로 삼은 진나라 시황제의 치국은 획기적인 것이었으나 가혹한 형벌로 인해 민심은 평안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그의 사후 제국은 급속히 붕괴된다. 진나라 수도 함양을 점령한 유방은 첫째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둘째 남을 해친 자나 도둑질한 자는 엄벌에 처하고, 셋째 나머지 진나라 법은 폐한다는 ‘약법삼장’을 선포하여 불안에 떨고 있는 민심을 안정시킨다. 밭 갈고 소 모는 무지렁이 백성들도 외울 수 있는 초간단 법률이다. 난리통에는 이것만 지켜진데도 민초들은 가슴 졸이지 않아도 된다.

    무릇 율법, 법률이란 간단해야 한다. 쉬워야 한다. 하지만 사회가 고도로 발달하고 복잡해지면 약법삼장, 십계명 갖고는 어림도 없다. 법전만 해도 《성경》정도 볼륨의 책이 수십 권이라도 모자랄 것이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정의와 인정이 넘치는 태평성대, 하나님의 나라가 이상향이지만 역사와 문명의 발전단계로 보면 점점 법률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추세다. 그래서 쉽고 간단하되 구체적이고 명확해야 한다. 아무리 잡다하고 세세한 법률이 많다 해도 체계가 잡히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고 명확하지 않으면 쓰레기일 뿐이다. 없느니만 못하다. 이현령비현령! 자의적 판단과 해석이 개입할 소지가 많은 법률은 판관을 비롯한 법률기술자들의 권력을 강화하거나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위해 쓰이는 도구일 뿐이다.

    악법도 법인가? 악법도 법이다. 동시에 악법도(은) 악이다. 뭐가 더 중요한가? 고칠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이 내심 주구장창 악용할 심보로 악법도 법이니 일단 지키라는 말은 사악하고 교묘한 괴변이다. 악법은 악(일 뿐)이다. 인지한 순간 당장 시행을 보류하고 폐지절차에 돌입해야 한다. 법 위에 정의 있고, 사법 위에 정치 있고, 율법 위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심판보단 용서다. 형벌보단 자비다. 미움보단 사랑이다. 죽음보단 생명이다. 무릇 모든 종교(宗敎) 즉 ‘근본 가르침’, ‘으뜸 가르침’의 핵심이다. 그래서 최근 모든 종교가 강약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한목소리로 사형제와 4대강 사업을 반대한다. 그것은 진보, 보수, 좌우를 떠나 모든 종교가 외면할 수 없는 신의 뜻이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무릇 인간과 자연을 존중하고 뭇 생명들을 귀히 여기는 종교라면 사형제와 4대강 사업은 반대할 수밖에 없다. 반대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어디 가서 종교(宗敎)의 자격이 있다고 명함을 내밀 수 있다. 미움의 종교, 죽음의 종교, 파괴의 종교, 돈의 종교는 있을 수 없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대해 율법학자와 다투는 등 갈등이 있었다. 법률은 법률 자체를 위해 있는 게 아니다. 물론 율법학자, 법률가의 권력을 위해 있는 것도 아니다. 겁주고 벌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죄를 짓지 않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기 위해 있는 것이다.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위인도 법 없이는 굴러갈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면 법은 어떠해야 할까. 언뜻 모순되는 역설적 표현이지만 법은 최대한 쉽되 최대한 정교해야 한다. 최대한 간단하되 최대한 세밀해야 한다. 최대한 최소화하되 최대한 구비돼야 한다.

 

    고대 법률, 율법의 또 하나의 공통점은 형벌 위주라는 것이다. 그 형벌도 야만적이고 가혹하고 잔인한 형벌이다. 누려야할 권리, 인권에 대한 것보다는 지켜야할 의무, 금해야할 금기와 형벌에 관한 것이다. 대개 ‘~하지 마라. ~하면 ~의 벌을 내릴 것이다.’의 형식이다. 약법삼장, 십계명 역시 마찬가지다. 십계명은 8개항이 금지형이고 나머지 2개항은 의무를 지우는 명령형(안식일을 지켜라. 부모를 공경하라)이다. 마라. 마라. 하라. 하라. 이 역시 무법천지였던 고대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사회가 진보하고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인권, 시민의 권리가 중요시되고 강조된다. 조선왕조와 대한제국, 일왕의 군국주의 그리고 이승만, 박정희씨의 독재 등 무소불위의 힘을 휘둘렀던 소수 권력자들의 횡포를 경험한 대한민국의 헌법 제 1 조 첫 문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이다. 나치의 참혹한 학정과 야만을 경험한 독일의 헌법 제 1 조 첫 문장은 ‘인간의 존엄성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이다. 모두 금지형, 부정형, 명령형이 아닌 선언형, 긍정형, 당위형이다. 하나는 국가와 정체(政體)를 말하고 있고 하나는 인간과 인권을 말하고 있다. 그 인권은 하나님이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공평하게 주신 천부인권이다. 우리나라의 헌법 첫 문장도 그리 흠 잡을 데는 없으나 개인적으로는 독일 것이 더 마음에 든다.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국가가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정치란 것도 다 개개 인간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래야만 하는 것 아닌가!

    십계명을 계기로 법 이야기가 길어진다. 아직까지 신도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이해도 짧고 법률에는 문외한인 일개 시민일 뿐이다. 하지만 같은 성도, 시민들의 (율)법 의식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단지 준법의식, 법치주의를 말하려는 건 아니고...법을 대하는 태도, 법을 이해하는 수준이 만족스럽지 않다.

    (불법시위) 엄단, 발본색원, (범죄나 부패와의) 전쟁이란 프레임에 휩쓸리거나 본때를 보여줘 뿌리를 뽑아야 한다며 맞장구를 친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날까’ 무죄추정의 원칙은 고사하고 일단 검찰과 언론이 떠들면 ‘그럼 그렇지’ 보호받아야 할 인권은 고사하고 재판 전에 이미 죽일 놈 된다. 이런 풍토에선 일개 형법 조문이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명시한 헌법을 능멸하고 자치단체의 조례 한 문장이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불허한다. 아무리 아름답고 지당하신 헌법이라도 법전 속에서 잠자는 사문(死文)일 뿐이다. 책 속에서 튀어나와 현실에서 펄펄 살아있는 헌법이어야 한다.

    우리의 헌법은, 현실은 어떤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인가?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가? 31운동의 정신과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고 있는가? 혹 권력은 재벌과 조중동 사주와 토호에게서 나오고 있지는 않은가? 아직도 친일반민족과 총독부 부역자의 후예들이 득세하며 법통을 잇고 있지는 않은가?

    십계명은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듣고 백성들에게 전해준 율법이다. 하지만 우리의 헌법은 우리 모두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해야 한다. 그리고 현실 속에서 살아 숨 쉬도록 항상 힘써 실천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22장 20절

여호와 외의 다른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사람은 없애 버려라.

27절

그가 나에게 부르짖으면 나는 들어 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자비롭기 때문이다.

28절

너희는 재판장을 욕하거나 너희 백성의 지도자를 저주하지 마라.

 

    예수천국 불신지옥?! 하나님은 자비롭다. 단. 나를 섬기며 나에게 부르짖는 자에게만 자비롭다. 질투의 하나님, 시기의 하나님, 심지어 협박하는 하나님이다. 질투의 대상은 바알 등의 다른 신들이다. 그리스 민족에게 제우스가 다른 신들과의 투쟁에서 승리하여 최고신에 올랐듯이 여호와 하나님도 이스라엘 민족의 갖가지 신들과의 투쟁에서 최후의 승리를 쟁취한 신 중의 신, 최고신의 성격을 갖고 있다. 십계명 첫째와 둘째에서 보이듯 초기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신, 우상들을 섬겼다. 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통합된 다신교는 아니었으나 여러 신들을 섬기는 사회였던 듯싶다.

    고만고만한 부뚜막 신, 담장 신, 아궁이 신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같은 유일신 종교는 운명적으로 타 종교, 타 문화와의 갈등의 소지를 안고 있다. 현재를 봐도 그렇고 역사를 봐도 그렇고, 극심한 갈등과 대규모 전쟁, 학살에 관련된 종교들도 역시 이 종교들이었다. 한국의 4대 종파인 기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 중에서 가장 배타적인 종교가 기독교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상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으로 회자되며 도리어 비웃음이 되고 비판받듯이 가장 공격적인 선교활동을 하는 종교 역시 기독교다. 기독교도라면 지혜롭고 조신하게 처신해야 한다.

    사랑과 십자가의 예수님의 뜻을 널리 알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우리의 지혜롭지 못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훼손되고 예수님이 오해받게 해서는 안 된다. 왜곡, 표절, 도용, 살포, 호가호위 심지어 스스로 선택받은 자, 선지자, 메시아라 참칭하기까지 한다. 예수님이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고 언제나 주 안에서 사는 삶은 그 무엇보다 값지지만 무엇이든 망령되이 예수님의 이름을 앞세우고 갖다 붙이지는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욕되게 하고 그 이름의 값어치를 떨어뜨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십계명의 뜻,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의 또 다른 숨은 의미가 아닐까.


    ‘재판장과 지도자를 욕하거나 저주하지 마라’라는 구절도 비판적으로 읽어야 할 여지가 있다. 그 시절이야 모든 힘이 한 곳에 집중된 사회, 제정일치의 사회였으니 위 구절은 재판장(사법), 지도자(정치) 외에도 제사장(종교)이 포함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이명박 대통령 혼자서 행정도 하고 판결도 하고 설교도 했던 시절이다. 지금 그런다면? 독재다! 이런 식이면 판례비평, 정치평론, 설교비평 등이 모두 존재할 의미가 없어진다.

    종교야 논리나 가치판단을 넘어서는 (개개인의) 믿음 차원의 문제이니 설교비평의 필요성과 공공성이 다소 떨어지지만 정치평론이나 판례비평은 시민사회에서 되도록 활성화되는 것이 좋다. 정치적 안목이 높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시민들의 뒷담화, 심지어 악에 바친 저주와 육두문자마저 누르는 것보다 풀어놓는 것이 좋다. 하지만 높으신 어르신들은 묶고 가두려고만 하며 그들의 심기는 언제나 불편하다. 언제나 사법권 독립을 위해 포퓰리즘에 치우치지 않으시고 구국의 결단을 위해 독선이라 손가락질 받더라도 역사를 보고 뚜벅뚜벅 가신다.

    이명박 대통령을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그를 축복하진 않는다. 넓고 교만한 오지랖이라 할지라도 그가 옳은 길로 접어들 수 있도록,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 하지만 그의 세속적 성공을 위해 그를 축복하진 않는다. 남을 섣불리 판단하여 정죄하거나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컬어서는 안 되지만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심판을 바라며 악을 통하여 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그와 함께 하기를 바란다.

    박정희씨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동시에 축복할 수는 없다.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것도 축복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두 사람이 동시에 대통령에 선출되라고 축복하고 바랄 순 없다. 두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는 있어도 투표소에 들어가 두 사람 이름위에 모두 도장을 찍을 수는 없다. 정치는 정치고 종교는 종교다. 정치는 기도와 축복의 대상이라기보다 비판과 감시의 대상이다.



23장 2절

다른 사람들이 다 악한 일을 한다고 해서 너희도 악한 일을 하면 안 된다. 다른 사람들이 다 거짓 증언을 한다고 해서 너희도 함께 거짓 증언을 하여 공정한 재판을 방해하면 안 된다.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3절

재판을 할 때, 무조건 가난한 사람을 편들지 마라.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斗護)하지 말지니라

6절

너희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그에게 불리한 재판을 하지 마라.

너는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공평치 않게 하지 말며

 

    <쉬운 성경>과 개역판 성경구절 말씀이 뜻과 뉘앙스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저기 휩쓸리기 쉬운 인간은 다수에게 자유롭기가 쉽지 않다. 모두가 예라고 할 때 혼자 노라고 하기는 쉽지 않다. 뛰어난 분별력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까딱하면 친구 따라 장에 가기 다반사다. 모두가 더 많이 갖기 위해, 혹은 살아남기 위해 돈과 권세를 쫓아 숨 가쁘게 뛰어다니는 세상,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끊임없이 불어대는 대세의 광풍에 중심을 잡고 서 있기만도 힘에 부친다. 잠시 멈추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마저 허락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도덕적인 존엄한 인간으로 서려면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지어다.”



                                           바람이 세찬 벌판에 서 있으려면 뿌리가 깊고 단단해야 한다.

 

    3절과 6절의 말씀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요약하자면 공정하라는 말씀. 레위기 19장 15절을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재판을 할 때는 공정하게 하여라.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감싸 주거나, 힘있는 사람이라고 해서 편들어 주지 마라."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에 얽매이지 말고 오직 옳고 그름만을 판단하라는 말씀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 약자를 응원하는 억강부약(抑强扶弱)의 마음은 인지상정이고 정상참작이라는 법정신에도 부합하지만 값싼 동정심, 자의적 인정은 위험하다는 거다.

    억울한 판결을 막기 위해 판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도 사형을 언도할 수 있을 정도의, 일말의 치우침도 없는 불편부당한 공정성이다. 선과 악을 그것대로 절대적 잣대로 정확히 측량해야 하고 그것을 다른 사건과 차별되지 않게 상대적 균형감을 가지고 공평하게 판결해야 한다. 그래야 법과 법관의 권위가 올바로 설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약자를 도와주기는커녕 여전히 유전무죄 무전유죄, 유권무죄 무권유죄쪽에 더 가깝다. 약자에겐 쇠뭉치, 강자에겐 솜방망이다. 약자의 정상을 참작하기엔 악덕 주인처럼 매몰차고 인색하며, 강자의 공로를 인정해 주는덴 노예처럼 비굴하고 헤프다. 약자에겐 추상(秋霜)이요 강자에겐 춘풍(春風)이다.

    분명한 것은 <검사와 여선생>처럼 법과 원칙의 엄정함과 개인적 은혜와 정 사이에서 갈등하는,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안타까운 필부필부의 신파극보단 거악을 척결하고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는, 쿠데타 세력을 준엄하게 단죄하고 그 수괴를 사형에 처하고, 사회적 공헌 운운하며 재벌 회장님들을 방면하지 말고 중형에 처하는 것이 떳떳하게 목에 힘줄 수 있는 참된 법과 법관의 권위에 훨씬 가깝다는 점이다.

    선 속에서도 악을 찾고, 악 속에서도 선을 찾고, 죄인에게도 공을 찾고, 자신에게도 죄를 찾는 판관이어야 한다.


    악(마)에게도 선(의)가 있을까? 일말의 선의도 없다는 절대악, 사탄은 무슨 보람으로 존재할까? 사탄은 어떨지 몰라도 인간이라면 어떤 악당이라도 파리똥만큼이라도 선의라는 게 있다.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다. 절대선인 하나님이 될 수도 없고 절대악인 사탄이 될 수도 없다. 아무리 사이코패스적 살인마라도 선의를 찾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선의를 찾기 힘들다 해도 필경 그렇게 된 연유는 쉽게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그러한 자, 악한 자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거다.

    힘들게 찾아 나선 선의의 초라한 정체, 위선적인 모습에 실망한다 해도 찾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 무엇인가? ‘도둑의 선의’, ‘늑대의 선의’, ‘시기와 질투의 선의’다. 도둑질하면서 그 집의 번창을 기원한다. 양을 잡아먹으면서 새끼를 많이 낳고 살찌기를 기원한다. 다음을 위해서다. 너도 좋고 나도 좋고 모두에게 좋다. 이왕이면 내가 훔친 것보다 더 많이 번창하기를, 내가 잡아먹은 것보다 더 많이 번성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이렇게 이웃과 형제자매의 성공을 위해 기도한다. 단. 나보다, 내 자식보다 덜 성공하기를 기도한다. 이것이 인간의 비루하고 초라하고 위선적인 선의다.

    선행과 자선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이르시길 “자선을 베풀 때에는 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3] 하였거늘 대개가 자랑하기에 안달이 나 있다. “아무도 너의 구제함을 모르게 하여라. 그러면 숨어서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 하였거늘 대개가 안 알려지고 묻힐까 조바심을 낸다. 자기 PR시대인지라 대놓고 자랑만 안 해도 양반 축에 속한다. 넌지시 말하고 돌려 말하고 어떻게 해서든 제 3 자를 통해서라도 알려지기를 바란다. 하나님 아버지가 갚아주실 때까지 도저히 기다리지 못한다. 나의 선행을 아무도 모른다는 게 너무도 억울하여 화병이 날 지경이다.


    분명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선의가 있다. 떠들썩하게 장학재단도 세웠다. 그에게도 분명 장점이 있다. 부지런하고 추진력이 강하다. 마른 장작처럼 정력적이다. 순발력이 뛰어나다. 홍보능력, 포장술이 뛰어나다. 그의 일처리를 보면 고층빌딩의 건설현장을 방불케 한다. 어쩌다 지나가다 보면 우후죽순처럼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하는 모습이 경이롭다. 현장에 장시간 고정된 카메라의 필름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상을 보듯 탄성을 자아낸다. 그렇게 성공하며 승승장구해온 인생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한 나라의 복잡다단한 국정을 맡기엔, IT BT 등 최첨단의 신경제를 운용하기엔 낡은 스타일이다. 순발력 역시 용기와 기지를 발휘해서 위기를 극복하는 위기관리능력이 아니라 팽팽 도는 잔머리로 이리 막고 저리 둘러대 위기를 회피하고 키우는 위기모면능력, 위기지연능력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스타일보다 더욱 문제되는 것은 그의 선의다.

    이명박 대통령도 분명 국가와 민족이 부강해지고 국민들이 행복해지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내 보기에 그의 선의는 대개가 상기(上記)한 것과 같다. 낙수효과만을 강조하며 부자와 강자만을 챙기는 심보 속에 숨겨진 선의는 ‘도둑의 선의’, ‘늑대의 선의’다. 전임 대통령들과 박근혜 대표에 대해 언급하는 멘트 속에 숨겨진 선의는 ‘시기와 질투의 선의’다. 덧붙여 그의 선의는 ‘몽상가적 선의’다. 4대강이든 대운하든 아무리 반대해도 일단 만들어 놓으면 반듯하게 깍인 시원한 강변에서 머릿결을 휘날리며 하하호호 좋아하고 칭찬이 자자할 것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다. 백보 천보 양보해도 뜻은 순수하나 결과는 최악인 ‘빗나간 선의’, ‘주책바가지 선의’다. 이거 참 곤란하고 피곤하다. 원치 않는데, 이렇게 사양하는데도 왜 그리 해주겠다고 고집이신지...ㅠ.ㅠ


    성경 말씀 뿐 아니라 이명박 대통령과 정치, 법에 대한 부정적, 비판적인 이야기가 많았다. 부정적 생각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만들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즐겁게 비판하고 떨어져 생각하기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생각 같아서는 지도자를 축복하고 판결에 숙연해지고 설교에 감동받기만 하면야 얼마나 좋겠는가.

    요즘 분위기가 집권당 유력정치인인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스님 발언을 비롯하여 열거하기 힘든 사건들이 빵빵 터지면서 메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비이성의 광기가 판치는 분위기라 어수선하하고 걱정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불교계에게 역행보살(逆行菩薩)이라고 불리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게다가 서해에선 해군초계함까지 침몰하고...

    나라 안팎이 불안하다. 아직 원인파악중이라니 섣불리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나 사건이 발생한지 이제 만 하루 하고도 2시간이나 지났는데도 명확한 사실관계를 파악치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고 세계적으로도 창피한 일이다. 아직까지도 우왕좌왕, 장님 코끼리 만지듯 계속 말이 바뀌고 있다. 우리 군, 우리 정부가 이것밖에 안되나. 사악한 의도가 없는 한 분명 심각한 무능력을 노출하는 것이다. 지하벙커에 모인 안보관계장관회의 멤버도 대통령 이하 군 면제자가 군필자보다 더 많다니 한숨만 나오고 든든하지 못하다. 현재까지 희생자는 모두 사병이고 장교들은 100% 생존하였다는 것은 또 무슨 해괴한 이야기인가! 어떤 상황이었길래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오리무중이요 불가사의한 미스테리다. 정권이 신뢰를 잃으니 정부발표든 언론보도든 무엇하나 미덥지가 않다.
    끝까지 구조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하루빨리 능력을 발휘해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숨김없이 진실을 공개하여야만 불안한 민심이 평안해질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가뜩이나 불안한 정국에 민심이 날로 흉흉해질 것이다. 삼가 청춘을 채 꽃 피우지도 못하고 비명에 간 우리 조국의 아들들의 명복을 빈다.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 땅에서 보여지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젊은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지켜주소서!

    신이시여! 우리를 도우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