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09 : 레위기 8장~13장

어멍 2010. 4. 10. 23:51
 

레위기의 저자는 모세 / 주요인물은 모세, 아론, 아론의 아들들 / 핵심어는 성별, 거룩

레위인들 가운데 특별히 제사장들은 온전한 예배를 위하여 구별되었고, 모든 백성들에게 거룩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 주기 위하여 성별(聖別)되었다.



8장 9절

모세는 아론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관 앞면에 금패, 곧 여호와의 성결패를 달아 주었습니다.

 

    모세가 아론을 제사장으로 구별하여 세우는 위임식 장면. 금패(Gold Plate), 곧 성결패의 위에는 ‘여호와의 성결’이란 문구를 새김.

    레위기의 핵심어는 ‘성별(聖別)’, ‘거룩’이다. 거룩하게 나눔, 성스럽게 구별한다는 의미. 거룩하다, 성스럽다는 의미는 깨끗하다, 완전하다란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제물 역시 흠 없는 소와 양, 또는 순결의 상징인 비둘기를 쓰라 했다. 동정녀 마리아 역시 순결과 완전을 상징할 것이다.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한다는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분별하게 된 것을 연상시킨다.

    성과 속, 선과 악, 깨끗함과 더러움, 완전함과 불완전함, 흑과 백, 천사와 악마까지 기독교만큼 선명히 대립되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해석하는 세계관, 종교도 드물다. 하지만 현실에선 성이 곧 선이 아니고 속이 곧 악도 아니다. 단순히 성, 선, 깨끗함, 완전함, 백, 천사를 하나로 묶을 수 없고 속, 악, 더러움, 불완전함, 흑, 악마를 하나로 묶을 수도 없다. 이 복잡한 속세의 사정은 그리 간단치 않다.


    무언가를 A라고 이름 붙인다면 세상은 좁게는 A와 anti-A, 넓게는 A와 not A로 나누어진다. 선과 악, 또는 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까지 포함)으로 나누고 급기야 자기 외의 모든 것은 악이요 이단이 되는 절대주의, 근본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자기 외의 모든 것은 성스럽지 않고 더럽고 저급한 것이 되고 만다.

    당연한 말이지만 신의 종교가 아닌 인간의 종교인 이상 모든 종교에는 성과 속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예수님 역시 인간의 몸을 빌려 태어난 인간의 아들이자 하나님의 아들이었지 않은가. 성스러움만 강조하다보면 구름 위를 뚫고 안드로메다까지 갈 수도 있고, 속된 것에만 영합하다보면 땅 밑을 뚫고 지하까지 타락할 수도 있다.

    모든 근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독교 근본주의 역시 속된 것과의 분리, 교제의 단절, 악의 배격을 주장하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강력한 악의 전염성과 하나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함이다. 거룩함, 성스러움을 고집스레 추구하는 근본주의 입장에서는 미국 기독교 주류이자 아들 부시(Bush) 대통령의 든든한 후원자였던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목사로 대표되는 (신)복음주의는 너무 속되고 대중적이며 너무 실용주의, 상업주의에 빠진 부도덕하고 타락한 이단으로 보이겠지만 진보주의, 리버럴리스트에겐 매우 비타협적이고 편협한 보수주의로 비치기도 한다. 관대함과는 거리가 먼 고집불통, 독불장군, 정치적으로 보수적이며 부도덕하고 동시에 편협한 속된 복음주의자라는 최악의 조합! 누가 떠오르는가?

    부시 대통령은 하나님의 이름을 드높였나? 이명박 대통령으로 인하여 비기독교, 대중들은 하나님과 기독교에 대해 좀 더 호의를 갖게 되었나?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적그리스도, 거짓 선지자뿐 아니라 일반 성도들까지 스스로 몸가짐을 삼가야 할 것이다. 들어야 할 말보다 듣고 싶은 말만 들으려 하며 손바닥이 닮도록 세속의 복만 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들의 말로 소란스럽다. 재물이라는 마몬의 우상이 맹위를 떨치고 더욱 세속화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삼가고 경계해야 할 일이다.

    도도한 자본의 물결 앞에 아무리 정통과 성스러움을 고집하는 종교라도 세속화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처승은 물론이요 신부 역시 결혼허용에 대한 논란은 일찍부터 있어왔다. 사찰들은 도심으로 나온 지 오래고 락(Rock)으로 예수님을 찬양하기도 한다. 나 역시 기성세대에 편입되어 점점 보수화되어가는지 가끔 너무하다, 심지어 경망스럽고 본 줄기에서 일탈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평생 독신으로 수도원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새기며 살아갈 수는 없겠으나 무릇 신의 뜻을 따르려는 세상의 모든 종교는 세속과 구별되는 최소한의 원칙,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이 세속화 된 후라야 세속화되야 하는 것, 그것이 종교다. 그것은 이 지구라는 배의 선장이다. 배가 타락의 심연으로 침몰하더라도, 너나없이 서로 지 살길 찾아, 지 욕심 찾아 뛰어내리더라도 최후의 순간까지 구원을 위해 힘쓰고 끝내는 배와 함께 최후를 맞아야 하는 운명이 종교의 소명이다. 하지만 이 땅의 거룩함, 성스러움에는 하나님의 짓궂은 심술인지 오묘한 섭리인지..... 독선, 도그마라는 치명적인 운명적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어떻게 성스럽되 완고하지 않고 속되되 비루하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악에 대해서 불관용하면서도 여전히 관용의 자세를 견지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선한 의지, 신앙의 허약함과 인간의 탐욕, 허위의식에 대한 환멸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도그빌>
                                     성찰없이 무지하고 편협한 독선은 허위이며 그 자체로 악이다.
                 사과(선악과?!)상자 속에 숨어 탈출하려는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분)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마을 사람들은 Grace(은총, 우아한)에게 도망치지 못하도록 개목걸이를 채운다.
                  평범한 작은 마을 도그빌의 평범한 청교도 주민들이 연약한 이방인 그레이스를 유린하기 위해
                                                      담합하여 악과 타협하는 장소는 교회이다.
                                           하지만 그들 앞엔 그레이스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데......



    진리는 하나다. 신도 하나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듯이‘[마태 6:24, 누가 16:13] 다른 신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유일신 하나님의 가르침으로 볼 때 역설적으로 선은 편협하다. 세상에 관용적이면서도 관용을 허용치 않는 (절대)악에 대해서는 관용하거나 흥정하지 않는다는 ‘관용의 역설‘과 상통하는 ’선의 역설‘로서 선의 편협성이란 말은 부정적으로도 쓰일 수 있고 긍정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 긍정적이라기보단 때론 편협한 선만이 선일 수 있고, 때론 편협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이 지상의 선이라는 묵시론적 숙명이랄까. 세계는 선하지 않고 인간은 원죄를 지닌 구원받아야 할 존재로 보는 한 옳은 길은 좁고 험난하며 현실 역시 대개 그러하다. 선은 소수고 때론 외로이 혼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리, 정의, 거룩한 종교의 이름으로, 흑백론과 이분법을 수단삼아 인간은 얼마나 많은 오류와 죄악을 저질렀나! 학살, 이념전쟁, 종교전쟁, 인종청소 등의 죄악은 무지한 확신과 편협한 독선의 위험성을 웅변하고 있다. 극단적 근본주의는 때론 현실을 도피하여 산으로 강으로 자신 안으로 숨어들기도 하지만 대개 독선으로 흘러 타자를 적대시하고 분리, 배격, 제거하여 결국에는 폭력, 독재, 전체주의에 이르곤 했다. 성속과 선악을 분별하고 사물을 분류하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축복인 동시에 죄악을 잉태한 씨앗이기도 하다.

    겉모습의 허상이 아니라 본질을 봐야한다. 도그마와 율법이 아닌 예수님의 마음을 봐야 한다. 모욕을 위해 예수님에게 씌워진 가시왕관, 그레이스에게 채워진 개목걸이는 가장 성스러운 것에 대한 가장 세속적인 조롱의 상징이다. 거룩함과 비루함의 판단기준은 옷차림이나 장식이나 외모에 있지 않다. 아무리 빛나는 금빛 법의를 걸치고 있다하더라도 심중에는 물질과 쾌락을 향한 탐욕만이 가득 차 있다면 그것만큼 비루한 것이 없다. 진정 무엇이 고귀하고 무엇이 천박한가? 무엇이 거룩하고 무엇이 비루한가? 지극한 거룩함은 가장 성스러우면서 가장 남루한 것과 함께하고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스스로 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있다.


    세상은 복잡하다. 속된 유혹은 끊임이 없고 도그마, 독선의 함정은 널려있다. 흑백만 있는 것이 아니라 회색도 있고 빨주노초파남보 총천연색 무지개다. 순백의 환희와 거룩함, 자줏빛 달콤한 유혹과 쾌락, 잿빛 절망, 노랑색의 가벼움과 명랑함도 있다. 점, 선, 면이 아니라 다면체이고 결국은 무한대의 접점을 가진 완전한 하나의 구(球)다.

    먼저 옳게 분별해야 한다. 분별한 것에 대해서 관용의 태도를 견지해야 하며 내가 동의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관용할 것과 불관용할 것을 다시 분류해야 한다. 되도록 관용은 최대, 불관용은 최소로 해야 함은 물론이다.

    오직 그리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모든 것이 각자 합당한 이름을 갖고 합당한 자리에 임하기를 기도할 뿐이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태 22:21]



13장 40절

누구든지 머리털이 빠지면, 그는 대머리다. 그러나 그는 깨끗하다.

41절

앞머리의 털이 빠지면, 이마 대머리다. 그러나 그는 깨끗하다.

42절

하지만 대머리가 된 정수리나 이마에 불그스레한 얼룩이 있으면, 그것은 정수리 대머리나 이마 대머리에 생긴 위험한 피부병이다.

45절

위험한 피부병에 걸린 사람은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를 풀어라. 그리고 그는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소리쳐야 한다.

46절

그 사람은 병에 걸려 있는 동안 부정한 상태에 있다. 그는 부정하다. 그는 진 바깥에서 혼자 살아야 한다.

 

    성경이 이렇게 웃길 수도 있다니! 아내와 함께 읽으며 배꼽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웃었다.(신이시여! 모든 대머리에 자비를!)

    웃음의 포인트는 반전이다. 목사님을 모시고 십여 명이 둘러앉아 경건히 기도를 드리던 중 어디선가 들려오는 고음의 가늘고 긴 트럼펫 소리(뽀~~~~옹)나 짧고 불규칙적으로 안타깝게 이어지는 고장 난 기적소리(뽀옹. 뽕. 폭. 폭.)에 우리는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참는 것이 고문이다. 분명 말할 수 없는 고통과 번민과 투쟁-점증하는 가스의 압력과 괄약근의 수축력과의 투쟁이 있었으리라.(하나님! 죄 많은 어린 양을 용서해 주옵소서!)

    한글 개역판에는 ‘위험한 피부병’이 ‘문둥병’으로 나오므로 분명 웃고 넘길 가벼운 상황은 아니다. 하여튼 나도 피부관리 좀 해야겠다. 작은 뾰루지라도 난다면 독수리의 눈을 가진 안방마님의 불같은 심판을 받아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윗입술을 가린 채 ‘나는 부정하다! 나는 부정하다!’ 두 번 외친 후 건넌방으로 쫓겨나 혼자 살아야 할지도 모르니까.


    하나님! 이 불쌍한 어린 양을 굽어 살피소서!


※ <도그빌> 결말 : 노예처럼 학대받고 짐승처럼 천대받고 결국은 겁탈까지 당했던 나약하고 온순했던 여인 그레이스. 그녀의 정체는 마피아 보스인 아버지를 피해 외진 마을로 숨어들었던 도망자였다.(아마도 아버지와의 갈등에 기인한 듯) 결국 그녀를 찾아 아버지와 마피아 일당은 마을에 들어서고 그레이스는 아버지의 차에 탄 후 차 안에서 마피아 일당들에게 아버지의 권력을 빌어 명령한다. 마을 사람들은 기관단총에 몰살당하고 마을은 불탄다.

악과 폭력을 상징하는 마피아 보스, 그  딸의 이름은 그레이스(Grace, 은총, 우아한)다. 성결과 청빈을 상징하는 청교도 마을의 이름은 도그빌(Dogville)이다. 선과 악이 혼재되고 거짓과 위선과 평범한 일상속에 가려진 악, 위악과 나약함 그리고 거칠고 혼탁한 이 세상의 풍파속에 가려진 선에 대해 많은 상징을 담고 있어 여운이 길었던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