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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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편지, 이명박의 칼 그리고 아이들의 눈.

어멍 2009. 12. 18. 23:18

 

               

                            오늘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의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세상

                            어느 꿈은 이미 현실이 되었고
                            어느 꿈은 아직 땀을 더 쏟아야 할 것입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를 돌리지 마십시오.
                            낡은 정치를 새로운 정치로 바꾸는 힘은

                            국민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아직 지지후보를 정하지 못하셨다면
                            우리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됩니다.

                            이회창, 권영길 후보님 수고하셨습니다.
                            국민여러분 고맙습니다.
                            기호 2번 노무현입니다.

                            - 2002년 12월 18일 대선 마지막 TV 광고 -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년 전 오늘 대선을 하루 앞둔 마지막 날 “노무현의 편지”라는 타이틀로 방영됐던 노무현 후보 선거광고방송이다. 그 때는 극적이고 아름다운 경선, 아름다운 승리, 아름다운 집권의 희망에 흥분과 기쁨, 기대감으로 보았지만 그가 억울하게 떠난 지금은 슬픔과 그리움이 사무친다.(2년 전 이명박 후보의 대표적인 광고 "욕쟁이 할머니"와 비교해서 볼 만 하다. 내 포스팅 '다시 보는 2007 이명박후보 대선광고 리뷰' 참조)

    “차별 없이 모두가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세상!” 정말 불가능한 꿈일까. 한바탕 꿈에 불과했던 것일까. 그런 꿈을 꾸었고 나로 하여금 같은 꿈을 꾸게 했던 사람. 국민을 대통령으로 받들어 모셨던 사람은 이제 가고 없다. 벌써 먼 옛날 꿈속 일인 것만 같다.


                                                     눈같이 포근했던 사람. 꿈같이 아름답던 사람.



    지지후보를 결정하지 못했을 때, 무언가 판단이 서지 않을 때 우리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라.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고 물어보라.

    아이들의 순수한 영혼과 해맑은 눈동자 앞에서 자신의 결정을 밝히고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윤리적으로 떳떳해야 할 뿐만 아니라 앞으로 살아갈 세상에서 우리아이들의 현실적 유불리도 심사숙고, 깊고 철저하게 따져보아야 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아이들을 안아 올리고 함께 사진도 찍는 등 이미지 정치에 즐겨 이용하기도 하고, 실재로 효과를 보기도 한다. 이렇듯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서’ 생각하고 판단하라는 말은 강력한 호소력과 진정성이 느껴지는 멘트다. 동시에 그 강력한 진정성, 무게감으로 해서 낯 두꺼운 프로정치꾼이 아닌 일반인들이 섣불리 쓸 수 없는 멘트이기도 하다. 당신은 과연 한 표를 행사하기 전에 당신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를 그려보았는가. 모든 편견을 버리고 우리 아이들의 눈동자를 대면하고 묻고 답하여 보았는가.



(노무현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백프로 깨끗할 수 있겠어. 노무현이도 인간인데.

 

(이명박이라는) 인간이 어떻게 백프로 악독할 수 있겠어. 이명박이도 인간인데.

 

아무리 노무현이가 과거가 깨끗하고 사심이 없었더라도
일국의 대통령이었는데 권력을 지 맘대로 부리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없었겠어.

 

아무리 이명박이가 과거가 더럽고 지저분했더라도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역사와 민족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의식, 공인의식이 없겠어.

 

    며느리가 미우면 발뒤꿈치까지 밉고, 마누라가 이쁘면 처갓집 말뚝도 존경스러워 절을 한다. 같은 ‘인간’, 같은 ‘대통령’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결론이 천양지차다. 기존에 갖고 있는 정치적 편견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방어기제’가 밑바탕에 깔려있다. 일종의 알리바이 만들기, 공범 만들기와 같다. 위에 있는 노무현은 끌어내리고 밑에 있는 이명박은 끌어올려 자기주위에 도덕적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자기와 같이 별 수 없는 인간이라는 거다.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노무혀니’, ‘이명바기’로 부르는 것은 이런 심리가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코 친근한 감정에서 부르는 애칭이 아니다. 물론 호칭이야 각자 자유이고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기발하고 자유분방한 문화야 오히려 권장할 사항이다. 인터넷 세대에겐 시시콜콜 이리 불러라 저리 불러라 하는 것이 어줍잖은 꼰대짓에 불과할 수도 있다. '됐거든(요)', '예~ 예~'하고 무시하거나 흘려듣기 십상이다. 하긴 공인, 정치인에 대해 손위, 손아래, 선후배 식으로 서열을 매겨 대접해 준다는 것도 권위적이고 우스운 낡은 방식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가 막강한 유력 정치인들을 친구나 아랫사람처럼 즐겨 낮춰 부르는 것은 결코 그들보다 인격이 고매해서도 아니며 파워가 막강해서는 더더욱 아니다. 물론 여기엔 정치, 정치인이 공공의 적이 되어 업신여기는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지만 아들뻘인 직장인, 손주뻘인 중딩, 초딩까지 ‘무혀니’, ‘명바기’로 부르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우리가 친구나 친지끼리 무심코 '무혀니', '명바기'하며 웃고 떠드는 사이, 그것이 정치의 진면목을 볼 수 없게 만들고 현실과 동떨어진 술안주꺼리 농담으로 전락시켜 우리의 인식의 지평을 한정지을 수도 있다. 정치를 보는 안목을 높이고 정치인들이 일반 시민들을 깔보지 못하게 하려면 우리 시민들도 수준을 높여 형식적이나마 정치인들 흉내를 낼 필요가 있다. 원칙적으로 동년배나 어린 사람이라 하더라도 공적인 지위에 있으면 가능한 한 그 호칭은 존중해주어야 옳다.

    호칭을 뺌으로서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나 같은 일개 국민으로 강등되었다. 상대적으로 내가 신분상승한 것이다. 한낫 기분에 그치는 자기만족이겠지만 비겁하고 이기적인 무의식적 심리가 엿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아들 건호씨에게 당부했다는 '권력을 두려워하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마라'는 태도, 권력앞에 떳떳한 태도가 아니다. 노무현 지지자든 이명박 지지자든 세상은 어차피 자기를 중심으로 이기적으로 얄팍하게 돌아간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노무현 지지자 중에 노무현 대통령을 ‘노무혀니’라고 부르며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보다 이명박 지지자 중에서 이명박 대통령을 ‘이명바기’로 부르며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이 더 많다는 인상이 그것이다.

    그 이유가 단지 이명박 대통령을 너무도 열렬히 지지함으로 그에 대해 정서적으로 더 가까운 느낌을 갖게 되었기 때문일까? 이명박 지지자들이 노무현 지지자들보다 권력에 대해서 덜 두려워하는 당당한 성향의 사람들이기 때문일까? 보통 말하는 연령, 소득, 교육수준으로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실지로 그렇게 부르는 게 심리적으로 더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덜 거북하고 더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위로 향한 노무현 대통령과의 거리감보다 아래로 향한 이명박 대통령과의 거리감이 더 가깝기 때문이다. 원래 올려다보는 것보다 내려다보는 것이 더 편안한 법이다.

    도덕적, 역학적, 심리적으로 노무현에게서는 열등감과 이질감, 이명박에게는 위안과 동질감을 느낀다. 주는 것 없이 밉고, 이유 없이 믿고 싶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무현은 사랑하든가 증오하고 이명박은 친밀해하거나 경멸한다. 극과 극이 갈리는 지점이다. 이것이 정치적 성향을 떠나 타인을 바라보는, 특히 도덕적 잣대로 타인을 바라보는 보통사람들의 방식이다. 정치적,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보다 정서적, 심리적으로 편안하냐 불편하냐 하는 점이 우선이다. 조중동이야 이러한 심리를 교묘히 부추기고, 악용하고, 강화시켜, 정치적 편견으로 고착시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똑같은 심리, 똑같은 욕망을 가진 인간이다. 아무리 조심하고 아무리 경계해도 어쩔 수 없다. 조중동은 사방 1미터 접근금지인 나도, 헤드라인만 언뜻 봐도 그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도 한 1년만 구독하면 이겨낼 도리가 없다. 누구라도 그들이 쏟아내는 천 마디, 만 마디 말의 해일에 노출되면 당해낼 재간이 없다.

    노무현도 뭔가 켕기는 부도덕한 구석이 있겠지.(없다고, 몰랐다고 뻐팅기거나 있어도 정치적 반대자인 한나라당과 비교하며 역공하니 더 열 받는다.) 이명박도 뭔가 정직하고 선한 구석이 있겠지.(영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너무도 거침없고 자신있게 우겨대니 의구심은 뒤로 묻힌다.) 완전무결한 인간이 없다는 가정하에서(있다면 그게 인간인가? 신이지!) 이 추측은 맞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을 숭배하거나 신격화하는 건 아니다. 그의 높은 도덕성, 지사적 풍모, 깊은 철학 등은 내가 도달하기 어려운 범상치 않은 경지이지만 완전하지 않은 결점 많은 한 인간으로서, 모자란 것은 모자란 그대로의 한 인간으로서 그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것이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존중하면서도 불편부당하게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가 아닐까.


                                                     왠지 등신같지만 멋있어 & 멋지지만 왠지 얄미워
                                (VS가 아니라 &인 것은 대상만 다를 뿐 두 감정을 대개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

                                        사랑을 하든 증오를 하든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뵈는 게 없게 된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선 내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점이 하나 있다. 그의 정직함, 선한 구석 특히 대통령이라는 공인의식을 아무리 간절히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다는 거다. 이건 말투, 생김새, 옷차림 등의 겉모습, 스타일에 대한 단순한 호불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 이명박이 '대통령' 이명박을 총체적으로 훼손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하다못해 총칼로 국민들의 피를 뿌리며 집권하여 공포정치를 하였던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정권도 대통령이라는 최고책임자의 위치에 올라서는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는 일말의 진정성이 보이고 그러한 몇 가지의 정책을 시행하기도 했다.

    내가 반대하고 혐오하는 박정희씨만 하더라도 고교평준화, 그린벨트, 수도이전 등 내가 지지하는 굵직굵직한 정책들을 시행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정치적 유불리를 떠나 국익과 국민복리를 위해 먼 미래를 내다보고 추진한 정책이었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선 눈을 씻고 봐도 이런 정책들이 없다. 부자감세? 미디어법? 4대강? 행복시 수정?(본인 포스팅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인 막가파 이명박 정권' 참조)... 뭐 하나 대의에 맞는 것도 없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정책도 없다. 과연 나만의 일방적, 정치적 견해에 불과할 뿐일까. 과연 내 눈에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혐오의 콩깍지가 씌여있는 것일까.

    내가 지지할만한 기억나는 오직 하나의 정책은 청와대 수석실에서 주도한 제한적인 과외금지, 사교육 규제 정책이다. 이 또한 민생탐방, 오뎅 팔아주고 목도리 둘러주는 식의 포퓰리즘, 쇼로 끝나가는 분위기지만 내가 그럼에도 이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사교육만큼은 쇼를 해서라도, 무리수를 써서라도 잡아야 할 시급하고 막중한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딸, 아들을 둔 아빠로서 실지로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기도 하고...단기적으로라도 어떻게든 잡아야 하는데 완고한 학벌사회, 치열한 경쟁사회, 대입까지의 40여키로 마라톤을 쉬지않고 100미터 달리기의 속도로 뛰어가는 광적인 교육열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이 방법 말고는 브래이크를 걸고 냉각시킬 수단이 없다.


    출산율 1.22는 현 대한민국 국민들의 삶이 얼마나 팍팍한지를 웅변하고 있다. 이것은 내전국가인 보스니아의 1.21에 이어 세계 꼴찌에서 두 번째인, 내전국가나 다름없는 출산율이다. (사)교육난, 주택난, 구직난...대한민국 국민들은 삶과 생존을 위해 현재 전쟁중이다. 동물도 생존환경이 열악해지면 개체수를 줄이는 법. 이러니 누가 아기를 낳고 기르려 하겠는가.

    생명은 축복이어야 하는데 이런 식이면 날 때 각자 자신의 숟가락을 들고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깡통을 차고 태어나는 격이다. 부모의 삶도 팍팍해지지만 아이들에게도 못할 짓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정부는 저출산 대책의 하나로 낙태근절이니 외국으로의 입양 축소니 외국인 노동자 정착 지원이니 핵심은 건드리지 않고 지엽적인 캠페인성 미봉책만 남발하고 있다. '아이에게 가장 큰 선물은 동생'이라며 연일 둘째 낳으라고 공익광고를 때려대더라도 먹힐 리 없다. 춥고 배고픈 서민들 처지에서는 둘, 셋만 되더라도 '무턱대고 낳고 보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심정이다.
    탁상행정, 눈 가리고 아웅식의 무능력만으로 탓하기에는 접근방식이 특이하다. 용을 잡아오라면 지렁이에 뿔을 달아서라도 대령하는 관료들의 영혼없는 생존방식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발상 자체가 기상천외하다. 하긴 무슨 일을 하든 모두 돈인데 4대강 블랙홀 때문에 쓸 곳은 많아도 쓸 돈은 없으니 탁월한 관료들의 머리에서 나온 기발한 궁여지책이라고 봐야하나.
    이런 식이면 정책의 목표가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 최소한의 지속가능발전을 보장하는 국가의 존속과 번영이 아니고 대기업 자본가들을 위한 노동력의 안정적 공급이라고 볼 수밖에는 없다. '국민 잘 살게 하기'가 목표가 아니라 단순한 '한국인 늘리기'가 목표다. 많이 낳아 머릿수만 채울려고만 하지 행복하고 반듯하게 잘 키울 생각은 하지 않는다.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정력만 짐승인 흥부처럼 못 먹이고 못 입혀도 자식을 25명(믿기지 않지만 판소리 <흥보가>에 의하면)이나 낳아 한 이불 덮어 재우고 밥도 짓고 들일도 하게 할텐가.
    4대강 등 국가사업에 쓰이는 예산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거나 박을 타서 펑 터져나오는 것도 아니고, 흥부라면 그나마 착한 구석이라도 있지.ㅠ.ㅠ 4대강과 일제고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아깝지 않게 들이붓고 보육비와 급식비는 인색하게 삭감하고 있다. 건설회사와 학원에 막대한 목돈을 갖다 바치기 위해 아이들의 코묻은 돈을 빼앗고 있다. 먹이고 입히고 놀릴 생각은 안 하고 하루종일 뺑뺑이만 돌리고 일년내내 줄 세우려고만 한다. 흥부나라의 불행한 아이들! 국가차원에서 다음 세대에게 못할 짓 시키는 거다. 죄 짓는 거다.
    아이들을 맘껏 기르고 부족함 없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을 조성치 않는 한 신생아들은 절대 늘 수가 없다. 대학들은 문을 닫고 놀이터에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질 것이다. 사회가 덜 살벌해지고 덜 각박해지지 않는 한, 더 포근해지고 더 넉넉해지지 않는 한 한국인들은 절대 늘 수가 없다. 젊은이들은 들어오려 하지 않고 나가려고만 하고 어르신들은 어쩔 수 없이 남은 삶을 힘겹게 이어나갈 것이다. 상황이 이러함에도 수출이 몇 억 흑자니 삼성의 이익이 몇 조니 G20 유치니 헛바람, 헛배만 부르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치료는 고사하고 구워먹기에도 바쁘다.
                                                           그것도 대부분의 자식들은 따돌리고.



                                                     혹 치료해서 박씨를 얻더라도 이런 불상사가

                                                      이번엔 다행히 낼름 혼자 주워 먹는 흥부!
                            선함의 상징, 무능력의 상징, 다산과 정력의 상징을 거쳐 애국(!)의 상징까지 넘보지만
                              현실에선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었으면서도 쪼잔함을 어쩔 수 없는 못난 아빠일 뿐.



    밥은 비루하기도 하고 신성하기도 하다. 탐욕의 근원이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는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배부른 자가 더 많이, 더 맛있고 귀한 것을 탐할 때의 밥은 죄악의 씨앗이기도 하지만 배곪는 아이의 주린 배를 채우는 밥, 곰팡이 핀 피부에 뼈만 앙상히 남은 아사직전의 생명을 구하는 밥, 모두가 함께 골고루 행복하게 나누어 먹는 밥은 사랑이다.
    우리가 지난 노무현 정권과 대선을 거치면서 바랬던 것은 무엇이었나. 경제제일·성장제일이란 이름으로, '민주주의가 밥 멕여 주냐'느니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느니 하는 괴변으로 밥을 원했다. 그 밥은 사랑의 밥이 아니라 죄악의 밥, 탐욕의 밥이었다. 죄악까지는 아니더라도 어질고 밝지 않은 무지가 부른 비루한 밥이었다. 이제 탐욕과 비루함으로 밥을 부르짖던 우리가 빈곤과 배고픔에 밥을 부르짖을지도 모르는 상황에 몰리고 있다. '자유는 싫으니 빵만 더 달라'는 투정에서 '빵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절규로 바뀔 판이다. 이제 용산의 비극이 먼 남의 일이 아니다. 신성해야 할 밥을 모독한 우리모두의 자업자득이라고 하기엔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언제까지 거품경제, 차입경제, 적자재정이 가능하겠는가. 언제까지 돌려막기하며 자녀세대에게 재앙을 떠 넘기려는가. 언제까지 언론플레이, 야바위짓, 눈속임수가 통하겠는가. 언제까지 꿈으로 헛배를 채우며 주린 배를 달랠 수 있겠는가. 노무현 대통령이 '무능보다 부패가 낫다'라는 괴변론자들에게 일찍이 일갈한 적이 있다. 그러다가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 만날 거라고. 이명박 정권에겐 오만과 독선과 간교함까지, 그야말로 풀옵션이다.
    '혁명'도 더 이상 심장에 불을 지르는 격정적인 정치적 용어가 아니라 가슴팍만 간지럽히는 낭만적인 문학적 용어, 박제된 용어로 초라해졌다. 게바라의 초상마저 인테리어에 티셔츠에 상업적으로 이용되고 팔려나가는 처지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속아도 속아도 속아주는 착한 백성, 당해도 당해도 참고마는 순한 민족이라도 자기 자식이 울 힘도 없어 궹한 눈으로 '아빠~ 배고파~' 하는 가려린 신음을 듣는 처지에 몰린다면 손에 칼이라도 들고 일어서기 마련이다. 갈등과 모순이 이런 식으로 계속 누적되어 폭발하면 혁명 혹은 정변이나 폭동에 버금가는 파국을 맞을 수도 있다. 이대로라면 그 파국은 에너지가 꿈틀대고 꿈과 희망에 부푼 생산적인 혁명이 아닌 파괴와 체념, 모두의 패배만 있는 모두의 좌절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코펜하겐 기후협약 등 국제회의에 얼굴 내밀며 저탄소정책, 녹색성장으로 어필하는 거야 환경을 훼손하고 자연생태계를 파괴하는 4대강 토목공사에 비추어보면 하나의 코미디에 불과할 뿐이다. 아무리 로켓, 로봇물고기, 저탄소, 녹색성장 등으로 첨단을 달리는 스마트한 이미지를 연출하려해도 구시대적 마인드, 개발독재의 본질을 숨길 수가 없다. G20 유치만 해도 허장성세에 불과하다. G20이 뭔가. 국제금융위기, 글로벌 경제위기를 중심으로 한 전 지구적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기존 G7 경제선진국 멤버만으론 한계가 있으니 나머지 나라들까지 끌어들인 것 아닌가. 20위권 밖에 있던 국력이 이명박 대통령의 공덕에 의해서 갑자기 훌쩍 뛰어오른 것도 아니고(전체적인 순위는 이명박 정권들어 오히려 후퇴한 것으로 알고 있다.) 대회유치도 순번제에 불과할 뿐이다.
     알고보면 매사가 이런 식이다. 네이밍, 포장, 홍보에만 열을 올리며 겉만 번드르하니 호언장담만 할 뿐 정교함과 실속이 없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미래의 가장 확실한 투자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는 것이라고 하였지만 이명박 대통령은 4대강에 천문학적 세금을 꼬라박으면서도 부지런히 시장에 들려 '서민을 따뜻하게 중산층을 두텁게' 만들겠다며 사진을 찍고 손만 흔들어댈 뿐이다. 1년 365일 24시간 시장을 돌며 어려운 서민들의 국밥을 팔아주고 뻥튀기를 사 먹어줄텐가. 재산헌납으로 장학금을 주듯 사재를 털어 오뎅이라도 수매(!)해 줄텐가.
    자선 말고 정치를 하라. 자선에 기대지 말고 정책으로 도와주라. 장학금을 주려하지 말고 등록금 인하정책을 강구하라. 목도리를 둘러주며 안아주지 말고 난방비를 보조하라. 먹자골목 여기저기 쇼핑하며 팔아주지 말고 국밥집 갑돌이가 오뎅집 을돌이를 팔아주고 오뎅집 을돌이는 뻥튀기집 병돌이를 팔아주도록, 그들이 서로서로 소비하고 상생하도록 정책을 시행하라. 지금 당장 4대강에 쏟아붇는 돈을 삭감하고 공교육에 투자하라. 막대한 이득을 보고 있는 수출 대기업에 세금을 물려 자라나는 모든 아이들이 부끄러움 없이 맘껏 먹을 수 있도록 예외없는 무상급식을 제공하라.


                                                        훈훈하고 아름다운 or 안타깝고 가증스런
                                    자선과 시혜를 바라지 말고 시민을 위한 봉사와 정책을 당당히 요구하자.



    남이 하면 불륜, 내가 하면 로맨스라는 이중 잣대가 꼭 정치인들만의 잣대가 아니다.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법과 원칙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꼭 판관들만의 의무와 미덕은 아니다. 유권자들도 반드시 갖추어야할 소양이다. 더불어 이명박 정권의 언론과 검찰이 주거니 받거니 벌이고 있는, 형평성을 가장한 구색맞추기식의 거짓 잣대, 삐뚤어진 잣대를 간파해야 한다.

    한명숙 전 총리의 검찰소환과 불응에 대해 말들이 많다. 기어코 오늘 체포영장이 집행된 모양이다. 법과 형평성을 거론하며 아무리 억울해도 떳떳하다면 오히려 당당히 검찰에 자진 출두해 해명도 하고 조사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이명박 대통령과 검찰의 이제까지의 행태로 봤을 땐 참으로 무책임한 말이다. 포토라인에 세우고 언론에 정보를 흘리며 실시간으로 브리핑하며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기’만 하면 된다. 한 총리에겐 진실과 법리가 중요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검찰에겐 여론을 조작, 선동하여 정치적 사망선고를 얻어내기만 하면 목적달성이다. 강대강의 대결이다. 부드럽고 착하기만 한 인상의 한 전 총리가 아니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 하에서 남산 안기부에 끌려가 고문도 받아보고 기나긴 수형생활도 극복했던 그녀다. 그들의 의도대로 일이 흘러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아부는 확실하게 보복은 처절하게! 어차피 아부할 놈들은 쌔고 쌨다. 아부든 보복이든 멕시멈이어야 눈에 뛴다. 주인님의 심중을 모르니 갈 때까지 가야 한다. 언제까지? 주인님이 제지할 때까지! 설혹 오버했다 나무라더라도 꿀밤 한대 주며 '허허, 고 놈 참!...' 알 듯 모를 듯 흐믓해 할 뿐이다. 중국에서 부정부패척결이란 실은 정치적 숙청을 의미하듯이 대한민국 검찰도 이미 권력에 의해 정적 제거에 이용되는 사냥개, 여론을 호도하여 위기를 돌파하는 주구(走狗)가 돼버렸다. 다만 우리나라의 검찰과 언론은 진술을 끌어내고 없는 것도 조작해내는 능력만큼은 중국보다 탁월한 것이 지록위마(指鹿爲馬)의 고사성어로 비춰볼 때 청어람(靑於藍)이다. 그래서 이런 뛰어난 수사능력과 유구한 전통을 시사하는 다음과 같은 우스갯소리가 예전부터 전해오나 보다.

    산속의 멧돼지를 누가 먼저 잡나 세계의 검찰, 경찰들이 모두 모여 내기를 하였는데 한국이 1등을 먹은 사연이다. 미국은 CIS같은 과학수사로 추적하고, 중국은 인해전술로 온 산을 뒤져 멧돼지를 잡는 등 저마다 최선을 다했지만 한국은 단 몇 분 만에 잡았는데 잡은 멧돼지가 놀랍게도 토끼였지만 한국 검찰이 토끼의 옆구리를 꾹 찌르자 자신은 사실 알고 보면 멧돼지라고 강력키(!) 진술, 주장하였기에 1등을 먹었다나 뭐라나......
    형님! 역시 형님은 떡 먹는 능력도 수사능력도 세계 최고십니다!!(드라마 <미남이시네요> 고미남 버전) 웃고 넘어갈 한 편의 코미디지만 현실이 되면 야비한 폭력과 참담한 비극이 된다. 명예살인, 증삼살인(曾參殺人-증삼이 사람을 죽였다는 소문, 거짓말이 되풀이 되어 결국 사람들이 믿어버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그렇게 간지가 불과 6개월 전이다.



                                                                 돼지토끼 : 돼지냐? 토끼냐?
                                                  이런 경우 본인의 진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역사를 보면 거인, 의인이 소인, 잡배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마치 덕까지 갖춘 무림의 절대고수가 시장바닥에서 놀며 뒤통수치기 특기가 다인 동네 왈패에게 어이없게 당한 꼴이다. 그래서 더욱 기가 막히고 분하고 허망한 느낌이다. 소인, 잡배는 거인, 의인의 약점을 잘 안다. 그것을 철저히 악용한다. 거인, 의인, 고수가 소인, 잡배, 하수에게 1대 1 정면승부에서 당하는 법은 없다. 방심하다가, 믿다가 뒤통수치기 암수에 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정치인 중에 가장 강단이 있었고 국민들앞에 나와 공개적이고 자유로운 쌍방향 토론과 대화를 한 횟수가 가장 많았던 노무현 대통령! 국민앞에 서기를 꺼리며 준비된 멘트와 준비된 방청객들에 의해 연출되는 일방적인 '토론 아닌 홍보'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명박 대통령! 노무현 대통령은 토론과 기자회견이 많았다면 이명박 대통령은 연설과 담화가 많다. 이런 두 사람이 검찰수사와 혐의사실에 대해 국민앞에 나와 공개적으로 1대 1 TV 토론을 벌여 시시비비를 가렸다면 어땠을까? 결과야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한 번도 한 장소에서 공개적인 토론을 벌인 적은 없다. 노무현 대통령 입장에서는 억울한 경우이고 이명박 대통령 입장에선 다행인 경우이고 국민된 입장에선 아쉬운 대목이다. 하긴 한나라당 인물치고 노무현 대통령의 토론제의에 갖은 핑게를 대며 꽁무니 빼기 바빴던 인물이 어디 한둘이었는가. 노무현 비판자들도 노무현 대통령이 토론의 달인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 경우 그들이 말하는 토론은 나쁜 뉘앙스를 띠고 있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그들이 미리 만들어 준비해놓은 멘트가 있다. '말 많으면 공산당! 말 잘하면 빨갱이!'

    대인배는 모든 이를 선의로 대한다. 의심하기 전에 일단 믿으려 한다. 사생취의(捨生取義)! 명예와 양심을 지키기 위해 때론 목숨마저도 초개(草芥)와 같이 버린다. 소인배는 반대다. 사의취생(捨義取生)! 부귀와 영화를 지키기 위해선 명예와 양심 따윈 즐거이 헌신짝처럼 버린다. 믿기 전에 우선 의심하고 경계부터 한다. 권모술수, 호가호위, 교언영색, 표리부동은 출세와 치부를 위한 필수적이고도 정당한 처세술이요 권선징악, 인과응보, 사필귀정, 인의예지는 동화나 고사속에 나오는 낭만적이고도 영양가 없는 이야기에 그칠 뿐이다. 양심과 도덕은 고사하고 품위와 염치도 거추장스럽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당장의 일은 아니며 어차피 인생은 한 방!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모로 가나 세로 가나 서울에만 당도하면 된다. 강한 놈이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옳은 놈이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기는 놈이 옳은 것이다. 지는 놈이 욕먹고 죽은 놈만 불쌍할 따름이다.

    오호 통재라! 세상인심이 이렇다. 신의보다 이득을 밝히고 옳음보다 강함을 쫓는다. 강함에 대해 두려움에 떨며 멀리하기 보단 눈망울을 초롱초롱 빛내며 선망한다. 수동적으로 굴종하기보단 능동적으로 매료되기에 이르렀다. 강함에 대한 끌림은 성욕과도 같이 자연스런 것이라지만 생존을 위한 본능, 직관, 동물적 감각이라고 변호하기엔 너무 천박하고 야비한 지경이다. 무인도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처럼 이기는 놈이 내 편! 살아 돌아오는 놈에게 기꺼이 머리조아리며 기어들어갈 준비가 되어있다. 잔인하면서도 비굴하다. 하긴 시장에서 조폭의 보호를 받는다면 이왕이면 힘센 놈이 편하고 안심되긴 한다. 조폭에게 도덕, 의협심, 정의를 바란다는 것이 심벌즈에서 괭가리 소리나듯 난센스한 일이 아닌가. 그저 먹고 먹히는 살벌한 이 세상에서 약한 놈도 약한 놈대로 살아갈 방도를 찾는 것일 뿐이다. 어차피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개그콘서트 <나를 술푸게 하는 세상> 박성광 버전) 이기는 놈이 장땡이고 약삭빠른 놈이 살아남는다. 목적을 위해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얼마나 가벼운 인심인가! 얼마나 실용적인 세상인가!

    이 정글같이 무자비하고 각박한 세상에서 대인배로 살아가는 길은 좁고 험하며 소인배로 살아가는 길은 넓고 편하다. 제아무리 덕이 높고 배포가 큰 대인배라도 무턱대고 대책없이 선의로 대하며 믿는 것은 경솔하고 위험한 일이다. 어수룩하고 어두운 것이다. 크게 당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속고 속이고, 먹고 먹히는 세상이라지만 사람을 믿지 않고는 어떤 일도 도모할 수 없는 것이 또한 세상사 아니겠는가.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은 얼마나 어둡고 황량한가. 아무도 믿지 않는 삶은 얼마나 피곤하고 불행한가. 악수할 때 노무현 대통령은 대부분 상대의 눈을 보고, 이명박 대통령은 대부분 상대의 손을 본다. 상대의 눈빛과 진심부터 보려하고, 상대의 손놀림과 수작부터 보려하는 것의 차이다.


                                                          내 블로그 첫 화면 속에 숨어있는 힌트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로마서 2:24]
                                                       노무현과 이명박, 경기(慶忌)와 요리(要離)



    《사기》에 나오는 자객 요리(要離)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키도 작고 삐쩍 마르고 가냘픈 체형에 몰골이 형편없어 칼이나 제대로 들 수 있을지 의아하게 보였던 요리는 자신의 식솔들의 죽음을 감수하면서까지 자작극을 꾸민 후 경기(慶忌)에게 접근한다. 경기는 중국역사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세기로 이름난 인물의 대명사이기도 했는데 공자 광의 쿠데타에 의해 암살당한 오나라 왕 요의 아들로서 피신하여 숨어있었다. 경기의 신임을 얻어 잠자리와 식사를 같이 할 만큼 가까워진 요리는 기회를 노리던 중, 뱃머리에서 풍광을 구경하던 경기의 등 뒤에서 강한 강바람에 힘을 실어 그의 등에 칼을 박는다. 경기는 요리를 덥석 들어 강물 속에 처넣은 후 물에 빠뜨렸다 건졌다를 반복한다. 부하들이 달려들어 요리를 죽이려 하자 경기는 '요리가 저런 몰골로 나를 죽일 정도면 범상치 않은 인물이니 살려주라'고 한다. 등에 박힌 칼을 빼니 피가 솟구쳐 경기는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온 요리는 큰 상을 받게 되나 부끄러움과 죄책감에 스스로 세 가지 죄목을 꼽으며 죽음을 자청한다. 첫째,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처자식을 죽게 한 어질지 못한 죄. 둘째, 새왕을 위해 선왕의 아들을 살해한 의롭지 못한 죄. 셋째, 왕의 소망은 이루었지만 자신은 패가망신한 지혜롭지 못한 죄. 결국 요리는 도저히 낯을 들고 살아갈 수 없어 자살하고 만다. 요리는 경기가 죽으면서도 자신을 살려준 것에 큰 충격과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경기, 칼, 요리 그리고 노무현, 검찰, 이명박. 요리는 아마도 부귀영화를 탐하진 않았을 것이다. 대의를 향한 정의감, 거악을 척결한다는 사명감에 충만하여 자기 한 목숨 걸은 것도 물론 아닐 것이다. 그는 탐욕과 간교함으로 오나라를 망하게 한 재상 백비(伯嚭)나 후한의 어린 황제를 갖고 놀며 권력암투에 날밤을 지새웠던 십상시(十常侍-열 명의 환관, 간신의 대명사)에 비할 인물도 또한 아니다.

    그는 단지 공자 광의 칼, 경기를 암살하기 위해 공자 광이 품었던 비수에 불과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는 뒤늦게나마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부끄러움에 자결하고 만다. 그는 이승만의 칼이 되어 김구를 안심시킨 후 암살한 안두희, 암살 후에도 이승만 자유당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숨어 살다가 결국 어느 버스기사에게 몽둥이로 맞아 죽은 안두희보다는 나은 인물이었다. 그는 땅 위의 소의(小義)만 알지 하늘 아래 대의(大義)는 몰랐던 협소한 인물이었으나 본디 용기와 의리를 아는 소박한 자였다. 그는 형편없어 보이는 자신을 인정해준 고마움과 헛된 공명심에 어리석음을 범한 것이나 본디 부끄러움을 아는 순박한 자였다. 하지만 요리와 달리 엄청난 힘을 갖고 있는 검찰, 요리와 같이 범상치(?!) 않은 이명박 대통령은 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한 전 총리까지 작업하려 하는 것으로 봐서는 아직까지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것 같다.


                                  <태극기 휘날리며>-이념, 전쟁에 의해 희생되는 두 형제의 비극적 이야기



    백프로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백프로 완전한 잣대도 없을 것이다. 때론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을 피할 수 없거나 그것이 더 옳은 일이 되는 경우도 있다. 골수 한나라당 성향의 아버지라도 자식이 국민참여당 후보로 나온다면 대개 자식을 찍어주기 마련이다. 설혹 찍지 않았다 해도 대 놓고 떠벌리고 다닐 수는 없는 법이다. 죄를 면하더라도 부모의 죄를 고소고발하는 자식은 지탄의 대상이 된다.(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의 경우, 그 입장은 십분 이해하고 그녀로선 참으로 힘든 일일 것이나 일개 평범한 시민이 아닌 박정희씨의 엄청난 정치적 유산 덕에, 그것을 자산으로 성장한 거물 정치인으로서 아버지의 죄과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사과하고 속죄하는 책임있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가족을 살리기 위해선 태극기를 휘날리든 인공기를 휘날리든 국군이든 인민군이든 물불 안 가리게 될 수도 있다. 경기처럼 헛된 공명심을 위해 처자식을 죽음으로 내몰아서도 안 될 뿐더러 정의, 애국이란 미명으로 당과 국가 앞에 제 가족을 희생물로 바쳐서는 안 된다. 이념, 신념보다 앞서는 인륜, 천륜이라는 잣대가 있다.

    매우 드문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는 잣대는 통일시키는 것이 좋다.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대상을 정확히 가늠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 지금은 정확한 정보, 실상조차도 왜곡되고 차단되는 지경이니까. 정확하고 균형잡힌 잣대와 정보를 얻기가 더 힘들어졌다. 이미 언론지형이 심각하게 기울어졌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선 상처입은 짐승을 물어뜯는 하이에나처럼 달려들던 언론들이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X구녕으로 몰려드는 미꾸라지들처럼 서로 빨아주기 위해 낯 뜨거운 경쟁을 하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의 원맨쇼! 그를 위한 연출, 그를 위한 조명의 그만의 무대에서 너나없이 얼짱각도에서 그를 향해 후레쉬를 터뜨리기 바쁘다. TV에선 MB님 용안, 라디오에선 명박어천가가 울려퍼지고 있다. 당신은 어떠한가? 왜곡되지 않은 정확하고도 균형잡힌 충분한 양의 정보를 접하고 있는가. 당신의 잣대는 어떠한가? 치우침 없이 공정한가. 혹 한 쪽엔 솜방망이, 한 쪽엔 쇠뭉치 철퇴는 아닌가. 아직도 '우리가 남이가'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을 제 식구, 제 집안인양 여기며 공적 잣대를 들이댈 곳에 사적 잣대를 들이대며 감싸고 계시지는 않으신가.

    완벽할 수 없는 사람에게 완벽함의 기준을 설정해놓고 가혹하게 쇠뭉치를 휘두르지 말자.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는 상대를 향해 만면에 희열에 들뜬 미소를 머금고 목숨까지 취하려는 듯 숨을 헐떡이며 잔인한 린치를 가하진 말자. 뻔히 보이는 악독함, 코를 찌르는 부패를 애써 외면하고 관대하게 솜방망이로 토닥이지 말자. 행여 풀이라도 죽을까 봐 안쓰러워 알뜰히 살뜰히 닭살돋게 호호 불어가며 반창고까지 붙여주진 말자. 실상을 정확히 파악한 후 명확한 잣대를 확실하게 들이대자.

    권세와 이익을 놓고 정치인들이 이전투구를 벌이든 저들끼리 싸바싸바 나눠먹든 4대강 사업에 국토자연이 황폐화되고 용산에서 돈이 사람을 잡아먹든 아기들은 태어나고 어린이들은 자라고 선거와 투표는 계속된다. 그 아이들의 눈을 응시하고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하여 잣대를 옳고 정확하게 들이대자.

    우리의 잣대와 판단에 따라 그것이 우리아이들이 마음대로 뛰놀 수 있는 카펫이 될 수도 있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처참하게 파괴하는 쇠뭉치가 될 수도 있다.


    정답은 아이들의 눈 속에 있다.



이 맑은 눈동자에 슬픔과 괴로움의 눈물이 고이지 않을 세상을 그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