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문학, 책읽기

<여행> - 보들레르 지음, 황현산 옮김, 어멍 재옮김

어멍 2024. 5. 2. 21:36

 

           여   행

                - 샤를 보들레르가 짓고 황현산이 옮긴 것을 어멍이 재옮김

 

 

 

   막심 뒤캉에게

 

   Ⅰ

 

   지도와 판화를 사랑하는 아이에게

   우주는 그의 광활한 식욕과 맞먹는다.

   아! 등불 아래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큰가!

   아! 추억의 눈에 비치는 세계는 얼마나 작은가!

 

   어느 아침 우리는 떠난다, 뇌수(腦髓)는 불꽃으로 가득하고,

   원한과 쓰라린 욕망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우리는 간다, 물결의 선율을 따라,

   유한한 바다 위에 무한한 우리의 마음을 흔들어 달래며.

 

   더러는 수치스러운 조국을 벗어나는 것이 즐겁고,

   더러는 제 요람의 공포를, 또 몇몇 사람들은,

   한 여자의 눈에 빠진 점성가들은, 위험한 향기 낭자한

   포악한 마녀 키르케를 피해 달아나는 것이 즐겁다.

 

   짐승으로 둔갑하진 않으려고, 허공과 빛살에,

   불타오르는 하늘에 그들은 심취하니,

   살을 물어뜯는 얼음과 피부를 구릿빛으로 태우는 태양이

   입맞춤의 자국들을 천천히 지운다.

 

   그러나 참다운 여행자는 오직 떠나기 위해

   떠나는 자들. 마음 가볍게, 기구(氣球)와 같이,

   제 몫의 숙명에서 결코 비켜가지 못하건만,

   까닭도 모르고 노상 말한다, 가자!

 

   그들의 욕망은 구름의 모습,

   대포를 꿈꾸는 신병과 같이, 그들이 꿈꾸는 것은,

   어느 인간의 정신도 여태 그 정체를 알지 못한,

   저 변덕스러운, 미지의 광막한 쾌락!

 

   Ⅱ

 

   아! 무섭도다! 우리가 흉내내는 것은 춤추는 팽이와

   튀어오르는 공, 심지어 잠자고 있을 때조차

   호기심은 우리를 들볶고 우리를 굴려대니,

   태양을 채찍질하는 잔인한 천사와 같구나.

 

   얄궂은 운명, 목적지가 이리저리 움직이니

   아무데도 아닌가 하면, 어디라도 될 수 있네!

   희망은 결코 지칠 줄을 모르니, 인간은

   휴식을 찾아 노상 미친놈처럼 달리네!

 

   우리의 넋은 이카리아를 찾아가는 세 돛대 범선,

   목소리 하나가 갑판 위에 울린다, “눈을 떠라!”

   망대 위에서 열에 들떠 미친 듯 외친다,

   “사랑이다!ㆍㆍㆍ 영광이다!ㆍㆍㆍ 행복이다!” 아뿔싸! 그것은

                암초!

 

   망보는 사내가 가리키는 섬은 하나같이

   운명이 약속했던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

   그러나 흥청망청 잔치판을 차리는 상상력이

   아침 햇빛에 발견하는 건 숨은 바위일 따름.

 

   오 환상의 나라를 사랑하는 가엾은 사내!

   저 인간을 사슬에 묶어 바다에 던져야만 할까,

   그 눈의 신기루가 심연을 더욱 쓰라리게 만드는

   저 주정뱅이 선원을, 아메리카의 발견자를?

 

   늙은 방랑자도 매한가지, 진창을 밟으면서도,

   코끝을 하늘로 쳐들고, 빛나는 낙원을 꿈꾼다.

   촛불이 움집을 비춰주는 곳 어디에서나,

   그의 홀린 눈은 카푸아를 하나씩 발견해낸다.

 

   Ⅲ

 

   놀라운 여행자들이여! 얼마나 고결한 이야기를

   우리는 바다처럼 깊은 당신들의 눈에서 읽는가!

   당신들의 풍요로운 기억의 상자를 우리에게 보여주게,

   별과 에테르로 만들어진 그 신기한 보석들을.

 

   증기도 돛도 없이 여행하고 싶은 우리!

   캔버스처럼 팽팽하게 당겨진 정신 위에,

   수평선을 그림틀 삼아 당신들의 추억을 펼쳐놓게나,

   우리네 감옥의 권태를 한번 흥겹게 하도록.

 

   말하게, 당신들이 본 것은 무엇인지?

 

   Ⅳ

 

                                   “우리는 보았네,

   별과 물결을, 우리는 보았네, 모래밭도,

   숱한 충격과 예기치 못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주 권태로웠네, 여기서처럼.

 

   보랏빛 바다 위 태양의 광휘가,

   저무는 햇빛 속 도시의 광휘가,

   우리의 가슴속 불안한 열정에 불을 붙여,

   매혹적인 석양빛 하늘에 잠겨들고만 싶었네.

 

   그지없이 호화로운 도시도, 그지없이 웅장한 풍경도,

   우연이 구름으로 만들어내는 풍경의

   저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지는 못했고,

   욕망은 줄기차게 우리를 안달하게 하였지!

 

   ㅡㅡㅡ 향락은 욕망에 힘을 덧붙여주기 마련이라.

   욕망아, 쾌락을 거름 삼아 자라는 늙은 나무야,

   네 껍질은 두꺼워지고 단단해지건만,

   네 가지들은 태양을 더 가까이서 보려 하는구나!

 

   너는 사뭇 커지기만 하는가, 사이프러스보다

   더 검질긴 거목아! ㅡㅡㅡ 그러나 우리는 정성을 바쳐,

   그대들의 게걸스러운 앨범을 위해 크로키 몇 장을 채집했다네,

   먼 데서 온 것이라면 무엇이고 아름답다 여기는 형제들이여!

 

   코끼리 코가 달린 우상에,

   찬란한 보석 아로새긴 옥좌에 우리는 절을 올렸지,

   그 으리으리한 마경(魔境)으로 자네들 금융가들에게

   파산의 꿈을 안길 저 공들여 세운 궁전에도.

 

   보는 눈에 도취를 하나씩 안겨주는 의상들,

   이빨과 손톱을 물들인 여인들,

   뱀의 애무를 받는 공교로운 마술사들.”

 

   Ⅴ

 

   그리고, 그리고 또?

 

   Ⅵ

 

                  “오 어린아이 같은 이들이여!

   가장 중요한 일을 잊기 전에 말하자면,

   우리는 도처에서 보았다네, 애써 찾은 것도 아니지만,

   숙명의 사다리 맨 꼭대기에서부터 바닥까지,

   불멸의 죄악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그 지루한 광경들을.

 

   여자, 비루하고, 교만하고 어리석은 노예,

   웃지도 않고 저를 숭배하고, 혐오감도 없이 저를 사랑하는,

   남자, 게걸스럽고, 방탕하고, 가혹하고, 욕심 많은 폭군,

   노예 중의 노예이자 수채 속의 구정물,

 

   즐기는 망나니, 흐느끼는 순교자,

   피가 양념을 치고 향을 뿌리는 잔치,

   전제군주를 흥분시키는 권력의 독약과

   우둔하게 만드는 채찍에 기꺼워하는 백성들,

 

   우리네 종교와 매한가지로

   저마다 하늘로 기어오르는 이런저런 종교들,

   괴팍한 사내 깃털 이불에서 뒹굴 듯,

   못과 말총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성덕(聖德),

 

   수다스럽고, 제 재간에 취한 인류,

   옛날에 어리석었듯 지금도 어리석어,

   그 노기등등한 단말마(斷末魔)에 빠져서 신에게 외치는 말이,

   ‘! 내 동류, 내 주여, 나는 그대를 저주하노라!’

 

   그리고 덜 어리석은 자들, 광우(狂愚)를 사랑한 대담한 자들은,

   운명의 울에 갇힌 큰 무리 양떼를 피해,

   그지없는 아편 속으로 도피하였더라!

   ㅡㅡㅡ 이상이 온 지구의 변함없는 보고서라네.”

 

   Ⅶ

 

   쓰디쓴 지식, 여행에서 끌어내는 지식이 이렇구나!

   단조롭고 조그만 이 세계는, 오늘도, 어제도,

   내일도, 언제나, 우리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루한 사막에 파인 끔찍한 오아시스 하나를!

 

   떠나야 하나? 머물러야 하나? 머무를 수 있으면 머물러라.

   떠나야 한다면 떠나라, 누구는 달리고 누구는 웅크리니,

   이 모든 것은 눈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저 불길한 적, 시간을 속이기 위함이라!

   딱하다! 저 방랑의 유태인처럼, 저 사도들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달리는 사람들이 있건만,

   이 야비한 투망꾼을 벗어나기에는 수레도 배도,

   어느 것도 충분치 않은데, 제 요람을 떠나지 않고도

   그 자를 죽일 줄 아는 사람들이 있구나.

 

   마침내 그가 우리 등뼈 위에 발을 디디면,

   우리는 희망을 품고 외칠 수 있으리라, 앞으로!

   옛날에 우리가 중국을 향해 떠났던 것처럼,

   눈은 먼 바다를 응시하고, 머리카락은 바람에 휘날리며,

 

   우리는 어둠의 바다를 향해 돛을 올리리라,

   젊은 나그네의 환희에 찬 마음으로.

   저 목소리 들리는가? 매혹적이면서도 불길한

   그 소리 노래한다, “이리로 오라! 향기로운 로터스가

 

   먹고 싶은 사람들아! 그대들의 마음이 굶주려 찾는

   그 기적의 열매를 거둬들이는 곳이 바로 여기,

   어서 오라, 언제까지나 끝나지 않는 이 오후의

   이상한 감미로움에 취하라.”

 

   그 귀에 익은 목소리에 우리는 망령을 알아챈다.

   우리의 필라데스들이 저기서 우리에게 팔을 내민다.

   “당신 가슴의 불을 식히려면 당신의 엘렉트라에게 헤엄쳐 오시라!”

   지난날 우리가 그 무릎에 입맞추던 여인이 말한다.

 

   Ⅷ

 

   오 죽음아, 늙은 선장아, 때가 되었다! 닻을 올리자!

   우리는 이 나라가 지겹다, 오 죽음아! 출항을 서둘러라!

   하늘과 바다가 비록 잉크처럼 검더라도,

   네가 아는 우리 가슴은 빛살로 가득차 있다!

 

   네 독을 우리에게 부어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라!

   이 불꽃이 이토록 우리의 뇌수를 불태우니우리는 원한다.

   저 심연의 밑바닥으로 빠져들기에 지옥이건 천국이건 무슨 상관이냐?

   모르는 것의 심연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 ∞        

 

   막심 뒤캉 : 보들레르의 친구. 초기 사진작가이자 자유기고가

   키르케 :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이자 여신. 사람들을 유혹해 짐승으로 만들어 부렸다.

   이카리아 : 동쪽에 있는 그리스 섬

   흥청망청 잔치판 : 난교, 통음난무, 주지육림의 카니발

   카푸아 : 이탈리아 중부 캄파니아에 있는, 로마시대 가장 부유했던 도시

   에테르 : 위쪽 하늘의 공기, 대기, 정기

   사이프러스 : 원추형의 상록 침엽수. 죽음에 대한 슬픔과 두려움을 뛰어넘는 강인함을 상징.

   못과 말총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 수난과 고행에서 쾌락, 관능에 가까운 기쁨을 찾으려는... 말총은 말의 갈기나 꼬리의 털

   단말마(斷末魔) : 숨이 끊어지는 순간의 마지막 고통

   로터스 : 그리스 신화에서 황홀경을 가져다준다고 알려진 상상의 열매

   필라데스 : 그리스 신화에서 아가멤논의 아들 오레스테스의 둘도 없는 친구. 오레스테스가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복수의 여신들에게 쫓길 때 충실하고 헌신적인 동반자가 되어 준다.

   엘렉트라 : 필라데스와 결혼한 오레스테스의 누나

 

 

 

      <여행>은 대화 형식을 빌은 8편으로 구성된 긴 시다. 시 안에는 머무는 자(듣는 자)와 여행자(들려주는 자), 삶의 여정과 죽음(으로)의 여정, 화려함과 어두움, 향락과 고통, 뜨거움(태양, 열정)과 차가움(얼음, 냉소), 분주함과 한가로움 등 많은 대비되는 것들이 혼재하는데 처음 등불 아래 지도를 보며 꿈에 젖은 어린아이로 시작해 마지막 모든 세상을 둘러보고 돌아와 죽음을 맞으려는 늙은 방랑자로 끝나고 있다. 독자는 시를 읽으면서 긴 시간 온 세상을 둘러본 듯한 느낌을 갖게 된다.

 

      보들레르(1821~1867)는 대학생 때인 1994년에 세계 명시만을 묶어 펴낸 책에서 두 편의 시 알바트로스,취하라를 읽은 기억이 있다. (알바트로스에 대한 단상) 그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상징주의 시인으로서 시집 악의 꽃으로 유명한데 최근 유튜브에서 여행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고 이참에 아예 시집을 사서 번역된 원문 전체를 읽어보기로 했다.

      인터넷 서점을 둘러본 후 이효숙 번역본과 황현산 번역본 중 무얼 살까 고민했다. 표지디자인은 이효숙 본이 훨씬 아름다워 욕심이 났지만 프로필로 미루어 황현산 본이 더 내용이 나을 것 같아 황현산 본으로 결정했다. 황현산은 고려대 불문과 교수를 역임하고 2018년에 작고한 작가이자 비평가로서 악의 꽃외에 많은 프랑스 문학을 번역, 출판하였다고 한다.

 

《악의 꽃》 이효숙 번역본과 황현산 번역본

 

      읽어보니 황현산 번역본은 깊이와 정확성은 괜찮은듯한데 좀 무겁고 어렵게 느껴진다. 구어체보다 문어체에 가까워 좀 옛스러운 느낌으로 요즘의 빠르고 가볍고 말랑말랑한 젊은 현대인의 감성과는 맞지 않는 면이 있다.

      그래서 인터넷에 올라와있는 번역본 몇 개를 참고하여 좀 더 쉽고 가볍고 직감적으로 바꿔봤다. 원뜻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황현산 번역본을 기본으로 내 나름대로 수정, 편집하여 다시 옮겨본다.

 

황현산 번역을 옮겨 써본 후 내 나름대로 수정, 퇴고함

 

      그런데 이 과정이 간단치 않다! 쉽고 평이하게만 옮기다 보면, 시간과 공간의 순서대로만 단순 나열하다 보면, 이해하긴 쉽지만 너무 쉬운 여인은 매력이 없듯이 시 특유의 간지나는 멋과 맛을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칫 운율, 호흡, 고풍스런 고매한 심상을 잃고 운문이 산문이 되고 흔하디흔한 설명문이 되곤 한다.

      그래서 어느 지점에서는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더구나 문화와 풍속이 다른 외국시의 경우에는 직역과 의역, 내용과 형식, 심상과 실체 사이 조화의 균형을 맞추기가 어렵다. 폐부를 찌르며 훅 들어오는 보들레르의 시니컬한 언어들, 그가 말하고 전하고자 했던 뜻과 느낌들을 온전히 옮겼는지는 자신할 수도, 만족할 수도 없다!

 

      ※ 아래는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관련 동영상이다.

      ☞ 조승연 작가의 인생을 변화시킨 시 <여행 - 샤를 보들레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