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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진 말-0004

어멍 2010. 2. 27. 23:10


아무리 좋은 부모라도 훌륭한 스승이 되기는 어렵다.

-고든 리빙스턴-


 

    좋은 부모란 어떤 부모일까.

    내가 생각하는 좋은 부모, 자녀들이 생각하는 좋은 부모......

    나는 어떤 아빠가 되고 싶은가. 다영, 종서는 내가 어떤 아빠이길 원할까???


    일반적으로 부모의 사회적 역할이란 자녀에 대한 심리적, 재정적 지원자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론 부모와 자녀간의 관계, 역할을 규정하기가 많이 부족한 느낌이다.


    가끔 아이들과 놀다보면 욕심이 난다.

    부모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효심 가득한 자녀를 둔 아버지가 되고 싶은 것은 기본이고 친구같이 꾸밈없이 다정하고 싶을 때도 있고, 형이나 오빠처럼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받고 싶을 때도 있고, 스승처럼 삼가고 섬기는 모양새를 보고 싶기도 하고, 위인들처럼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되고 싶을 때도 있다.

    모든 아버지가 마찬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과욕이고 가능하지도 않다. 모든 아빠는 슈퍼맨이 아니고 모든 엄마는 원더우먼이 아니다. 그저 꼰대로 불리며 무시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존경은 아니더라도 두려워 멀리하거나 불편해하며 서먹해 하지 않고 친근하면서도 존중받는 아버지로 대접받는 것이 가장 현명하고 현실적인 희망일 수도 있지 않을까.

    스승이 받는 존경을 바란다면 친구가 받는 우정은 어느 정도 포기해야한다.


    가끔 보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묻는 장면에 청소년이든 장년이든 한결같이 자신의 부모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을 보곤 한다. 듣는 부모, 행복한 일이다.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를 머금고 좋아한다. 키운 보람이 있다. 기특한 일이다. 분명 훌륭한 부모, 화목한 가정일 것이다.

    누가 뭐래도 세상에서 가장 자신에게 사랑과 은혜를 베푼 이가 부모라는 것을 알고 감사해하는 것은 기특한 일이다. 보기 아름답고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가장 바람직한 일인가 하는 점은 의문이다.

    자신의 삶의 지표, 정신적 멘토, 닮고 싶은 모델, 이르고 싶은 경지가 자신의 부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세상 모든 부모가 ‘인물’이지는 않다. 위인은 아니다.


    간디의 자식이 간디를 존경하고 이순신의 자식이 이순신을 존경해야만 한다는 당위성과 필연성은 없다. 하물며 안중근의 자식은 대중 앞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자식에게 사죄를 청하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보여주는 이벤트 비슷한 행사를 연출해가며 그 생계와 안위를 보존하였다고도 한다. 안타까운 일이나 안중근을 아비로 둔 자식된 죄로 겪어야만 했을 온갖 고초와 간난을 생각해 볼 때 일방적으로 비난만 할 일도 아니다.

    엉뚱한 비약과 괜한 딴지의 느낌도 없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의 꿈이 좁은 가정에만 갇혀 있는 건 아닐까. 너무 작은 소아적, 세속적인 꿈만을 꾸는 소시민으로만 자라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쩌면 소박하고 현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세파에 찌든 어른들 몫이다. 철부지 어린이,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나중은 나중이고 일단 꿈은 크고 순수해야 한다. 자신의 부모들을 가장 존경하며 장래 꿈이 대통령도 의사도 불도저 운전사도 아닌 그저 ‘엄청난 부자’가 다인 우리 아이들의 꿈은 하늘에서 보면 너무 작고 소박하며 땅에서 보기엔 너무 크고 세속적이다. 엄청난 부자! 막연하면서도 가장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옛날 선비들은 덕이 높고 배움이 깊더라도 자기 자식 교육은 남에게 맡겼다. 그 사람이 존경하는 스승일 수도, 벗일 수도, 자신의 제자일 수도 있다. 단순히 자식에게 있을 수밖에 없는 사사로운 정을 염려해서가 다는 아닐 것이다. 자식의 수학공부를 직접 봐주며 느끼는 인내하기 힘든 답답함이나 아내의 운전교습을 봐줄 때 자신도 모르게 뻗히는 성질을 피하려는 이유만은 아니다. 아픈 자식의 수술을 위해 칼을 대야만 하는 의사 아빠의 피할 수 없는 떨림과 고통을 회피하려는 이유만은 아니다. 본디 부모와 스승은 다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기 때문이다.

    점점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아이들에게 일부러 시간을 내어 놀아주기도 만만치 않다.
    더욱 치열해지는 경쟁사회에서 정신적,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는 든든한 후원자가 되기에도 힘에 부친다.

    하루가 멀게 변화되는 시류와 유행에 맞추어 자라나는 자녀들과 함께 느끼고 나누며 친구가 되어준다는 생각도 나만의 생각, 나만의 욕심일 수도 있다. 노력과 정성은 가상하지만 자칫 원치 않는 꼰대의 오바, 주책에 그치는 블랙코미디가 될 수도 있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 아니라 불청불원(不請不願)일 수도 있다. 

    나의 욕심, 나의 희망, 나의 노력이 다영, 종서의 그것과 어울리고 타협하며 언젠간 그저 좋은 아빠, 책임과 도리를 다한 아빠로만 받아들여지고 기억되기만 해도 어쩌면 족할 것이다.



PS : 다영이 종서는 누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누구냐’고 묻거들랑 마음속에 비록 다른 인물이 있더라도 일단은 엄마, 아빠라고 답하거라. 그래야 하느니라. 이런 것이 하얀 거짓말, 삶의 지혜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