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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4학년 제 아이 찬이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 노무현 대통령 미공개 유고 & 후기)

어멍 2009. 7. 20. 16:55

4학년 제 아이 찬이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
(서프라이즈 / 찬이아빠다 / 2009-07-16)
 

제목 : 나도 하고 싶었는데...


오늘은 과학 올림피아드 책을 샀다.
서예 학원에서 수묵화를 그리고, 오랜만에 **문고에 들렀다.


막 책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과학 올림피아드'가 눈에 띄었다.
그래서 한번 보았더니 생명, 지구, 에너지, 물질 편이 있었다.
난 꿈이 해부학자이니 생명편을 먼저 봤다.
분열, 번식, 콩나물과 식물의 굴광성, 곤충의 한살이 등 재미있는 게 많았다.
하지만 어려운 단어가 있어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지만
완벽히 이해를 못한거지 거의 이해가 돼 걱정이 없다.


집에 가서 내 지갑을 봤더니 5000원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5000원을 더 주셔서 **문고에서 생명편을 샀다.


집에 와서 설명을 읽고, 문제를 풀고 있으니 과학.수학 올림피아드
시험 생각이 났다. '내가 올림피아드에 나갔으면 이 책을 보고 공부했겠지...'
하는 생각 말이다. 올림피아드 공지를 보고 난 엄청 들떴었다.


'아싸!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재미있을 것 같아!'하고 공지사항을 봤는데
소년조선일보가 주최했다는 걸 보고 모든 기대를 버렸다. 나도 조중동을
싫어하지만 아빠는 나의 몇백 배는 넘게 온 몸이 치가 떨리시도록 미워하시고,
싫어하신다. 그러니 온 기대를 버릴 수밖에... 엄마가 말씀하셨는데 역시나
안됀다고 하셨다. 왜 이 올림피아든 조선일보가 주최해서! 왜!? 왜!?


대신 아빠가 더 좋은 올림피아드를 나가게 해준다고 하셨다.
그것만으로도 난 아주 고맙다. 결국, 난 못 나가고 우*이, 세*이가 나가기로 했다.


너희들이 내 몫까지 잘하거라!!


크하하 아빠가 좋은 올림피아드를 알아보면 그땐 열심히 공부해서 상을 받을 것이다.


                                                                                                      (cL) 찬이, 찬이아빠다

원문 주소는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72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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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 <진보의 미래> 미공개 유고 중 일부

“한국은 아직도 보수의 나라”


“지역주의, 색깔공세를 넘어서려면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개인적 노력은 중요하다. 경쟁도 불가피하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국가의 역할이 중요하다. 무엇을 할 것인가? 나라를 바꾸자? 그것이 안 되면 정권을 바꾸자? 정권을 바꾸면 세상이 달라지는가? 정책을 바꾸자. 문제는 정책이다.”


“정권이 바뀌어서 세상이 달라질 것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을 먼저 바꾸어서 정권을 바꾸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맞다”


“(봉하마을로)아이들을 데리고 온다. 사인, 사진, 그리고 좋아한다. 덩달아 마음이 따뜻해진다. 아이들에게 한마디 해달란다. 무슨 말을 할까? 아이 키우는 부모들 그리고 우리 아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세상이 달라졌다. 출세한 사람이 아니라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키우자.' 말을 하고 돌아서면 마음이 답답하다. 정말 세상은 그런 세상이 되는 것일까?”

 

-  후기 - 


    <진보의 미래> 노무현 대통령이 미래를 얘기하려 하는 것은 과거를 성찰하고 거기서부터 미래를 기약하려 함일 것이다. 역사의식이 그 누구보다도 투철했던 분이 아니셨던가. 진보개혁세력의 과거는 어떠했나. 가까이는 그를 포함한 여운형, 김구, 조봉암, 장준하가 있었고 멀게는 신라의 장보고, 고려의 만적, 묘청, 신돈, 조선의 정도전, 조광조, 홍경래, 최제우, 전봉준, 김옥균 등이 있었다. 모두 참살되거나 자살하였다. 완고하고 잔인한 보수의 칼날 앞에서 제 명에 죽은 이는 하나도 없었다. 노무현은 죽기 전부터 자신의 집권성과에 대해 실패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성공은 아니라고 평가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아직 젊었고 그의 여정은 끝나지 않았었다.

    그가 이루려 했던 진보의 미래는 국민의 삶을 실질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 진보, 현실에서도 능력 있고 성공하는 진보의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 전략으로는 시민을 각성시키고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시민대중의 학습을 통한 각성만이 전체적인 수준과 실력을 향상시킬 수가 있고 조직화한 힘만이 세력을 형성하여 현실에서의 성공을 담보할 수 있다. 적어도 그렇게 형성된 세력은 진보개혁가를 탄압과 핍박, 죽음으로부터 보호해 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는 청와대를 떠나 봉하마을을 향하면서 권력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권력, 진정한 권력인 시민 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라 했다. 하지만 시민 속으로 돌아온 그를 시민들은 지켜주지 못했다. 아직 시민세력은 미약하다. 능력도 힘도 모자라다. 이것이 노무현의 죽음이 웅변하는 현실이다.

    그의 목표, 전략을 실행하는 구체적 실행방법은 언제나 강제, 동원, 반칙, 변칙, 권도가 아닌 참여, 봉사, 상식, 원칙, 정도였다. 누군가는 노무현 대통령이 수구보수세력인 조중동, 한나라당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검찰 등의 권력기관들을 틀어쥐고 권력을 휘둘렀어야 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의 죽음 앞에서 복수심을 부르는 슬픔과 분노의 한탄일 수도 있다. 권력기관을 놓아주었으되 개혁하진 못했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수구꼴통들이 ‘전두환 각하께서 다른 건 다 잘했는데 김대중이를 죽이지 못한 것은 천추의 한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본질에서는 동일하다. 물론 ‘덕을 심을 때에는 자비로움이 중요하지만 악을 없앨 때는 근본까지 제거하는 게 중요하다’<書經> 단, 법과 원칙에 의해 공명정대하고도 추상같이 벌해야 한다.

    괴물과 싸운다고 인간이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천사가 악마의 무기와 악마의 수법으로 싸운다면 악마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 악과는 어떤 조건하에서도 거래해서는 안 된다. 노무현이 꿈꾸는 세상은 괴물의 강력하고도 흉악한 무기 없이도, 요행수나 갑작스런 득템의 횡재에 의지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사회, 정도를 지키면서도 성공할 수 있는 사회, 반칙을 쓸 줄도, 알지도 못하는 순한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사회였다. "과거의 썩은 다리로 미래의 강을 건널 수는 없다"(노무현)

    얼마나 많은 천사들이 타락하였나. 얼마나 많은 정의와 민주주의에 피 끓던 사람들이 이권에, 권력에 자신의 양심과 신념을 악마에게 팔아치우며 변절하였나. 타락한 천사, 저주받은 영웅처럼 그것은 원래의 악마, 선천적인 악당보다 그 피해가 크다. 친일파로 변신한 독립군은 있어도 독립군으로 변신한 친일파는 없다. 군사독재와 수구보수에 투항한 민주인사는 있어도 민주진보개혁진영에 투항한 보수인사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비가역적이었고 항상 좌절과 실패의 큰 충격과 패배주의, 체념을 불러왔다. 악의 유혹과 전염성은 생각보다 강하고 인간은 생각보다 나약하다. 항상 경계해야 할 일이다.

    아무리 작더라도 자신의 허물에 부끄러워하지 않는 노무현, 권력을 휘두르고 반칙과 권도로서 반대자들의 인권까지 짓밟으며 싹쓸이하는 노무현은 더 이상 노무현이 아니다. 그러한 노무현은 더 이상 우리의 상징, 우리의 모범이 될 수 없다. 단지 우리가 극복해야 될 노무현일 뿐이다.


    한국은 보수의 나라다. 절대적 기준으로 규정하든지, 상대적 기준으로 규정하든지 아니면 수구, 기득권, 극우로 표현하든지 편의상 한국은 여전히 변함없는 (범)보수의 나라다. 정치, 경제, 사법, 교육, 문화, 관료, 군대 그리고 서울이나 지방이나 뭔가 결정하고 집행하는 실질적 권한은 온통 보수가 장악하고 있다.

    보수든 수구기득권이든 간단히 말하면 지키자는 거다. 그러면 현 한국사회가 바꿔야할 것보다 지켜야 할 것이 훨씬 많은 이상적인 사회인가. 행복한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는가. 왜 사람들은 정치를 욕하고 사회에 불만이며 행복지수는 왜 그렇게 낮게 나오는가. 바꾸기를 원하면서도 현 상황을 지키고 더욱 고착화, 강화하려는 보수를 지지하는 것은 무지하기 때문이다. 보수의 선전선동에 휘둘리고 속아 넘어가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는 첫째 주류를 쫓고 선망하는 대세추종주의, 둘째 지역주의, 셋째 반공이데올로기 때문이다.

    공화당, 민정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경상도에 뿌리를 둔 수구보수세력은 그 지역주의로서 해당 지역을 기본으로 먹고 들어가고, 여타 지역을 반공이데올로기로 쓸어 담고, 나머지는 대세추종주의로 주워 담으면 언제나 손바닥 뒤집듯 쉬운 게임이다. 구조상 백전백승이다. 예전엔 색깔론 공격이 더 강력했으나 요즘은 지역주의로 패를 가르는 것이 그들에겐 더욱 강력한 전략, 더욱 믿는 구석이 되었다. 세월이 지나 문명이 발달되고 정보가 개방되며 625 구세대가 물러남에 따라 색깔론의 반공이데올로기 공격의 효과가 예전보다 많이 약해진 까닭이다.


    진보주의자에게 진보는 보수의 반대말이지만 보수주의자에겐 진보는 빨갱이 비스무레한 것이다. 그리고 진보주의자라고 자처하는 이들 중에도 실지로는 보수주의자인 경우도 많다. 그래도 물어보면 진보라고 답하는 것은 단지 있어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실지로 설문조사에서는 보수보다 진보가 많지만 선거에서는 대부분 보수인 한나라당의 승리이다. 좌파운동권, 노동운동가 중에서도 가부장적, 남성적 권위의식이 골수까지 박힌 꼴통을 심심찮게 보기도 한다.

    기득권이라고 뭐 대단하거나 거창한 게 아니다. 단지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다. 재벌이 노동자에 비해 기득권을 갖고 있는 강자이지만, 부장은 과장에 대해 기득권이 있고, 정규직은 비정규직에 대해 기득권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려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런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과도하고 부당하고 독점적인 이득을 제어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적 선택의 근거가 되는 경제적 계급의 기준점을 정하기란 쉽지 않다. 몇 평 이상이면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게 유리할까, 얼마이상의 소득과 자산이 있어야만 한나라당이 내 편일까. 무척 어려운 질문이지만 그 기준점이 어마어마하게 하향되어 작동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공시지가 9억, 6억은 고사하고 변변한 자기 집 한 채만 마련하면, 좀 먹고 살만 하다 하기만 하면 부동산 시세에 민감해하며 보수에 편입된 양 한나라당이요, 먹고 살기 힘들어도 무지해서 역시 한나라당이다. 거기에 많은 쪽수를 자랑하는 대구경북, 부산경남까지 ‘우리가 남이가’ 하니 한나라당을 누가 당할 소냐. 정말 축복받은 정당이다.

    우리의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정책이다. 정책을 통한 법과 제도의 변화만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정책을 가리고 패거리싸움만 보여주고 있다. 법과 제도는 제쳐두고 과도하고 왜곡된 이념공세만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계급이익에 대한 자각, 가치관에 대한 자각을 무력화시켜 합리적인 정치세력의 재편을 방해하고 왜곡하는 배후에는 끊임없이 정치적 선전선동을 일삼는 언론이 있다.

 

                                              라디오를 켜보고 있는 나치 선전상 괴벨스(Goebbels)

한 때 기자, 작가 지망생이었고 나치핵심멤버 중 가장 지적인 인물이었던 괴벨스는 국가보조금 정책을 시행하여 당시 세계에서 가장 싼 가격으로 ‘괴벨스의 입’으로 불렸던 라디오를 전 국민에게 보급한다. 매일 아침 문 앞에 어김없이 배달되는 ‘보수의 스피커’인 조중동은 신문시장의 대략 60%를 장악하고 있다고 한다.



    ‘대중을 지배하는 자가 권력을 장악한다’(괴벨스) 대중의 행동은 총구로서 강제할 수 있지만 대중의 생각까지 강제하진 못한다. 그래서 괴벨스는 당시의 첨단 미디어인 라디오-21세기 이미 구시대 미디어가 된 라디오를 지금도 청와대 그 분께서는 정치적으로 애용하고 있다-를 통해 대중을 지배하려 했다. 사람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면 사사건건 강제하고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정치적 열정에 들뜨게 하여 차고 넘치는 복종을 이끌어 낼 수도 있다. 일찌기 스피노자가 탄식한 것처럼 인간을 자유가 아닌 예속을 위해 투쟁하게 할 수도 있다. 훨씬 경제적이고 영구적인 제어방법이다. 사람의 생각을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문화고 교육이고 언론이다.

    불량식품은 육체를 병들게 하지만 불량언론은 정신을 병들게 한다. 불량식품이 달고 맛있듯이 조중동은 교묘하고 중독성이 강하다. 조중동에 딸려오는 소년조선, 소년동아 등의 어린이 신문은 그런 면에서 아이들 교육에 유해하다. 학교현장에서 반강제적으로 구독되고 이뤄지는 어린이 신문을 이용한 교육은 언론이 교육현장까지 침투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생각까지 오염시키고 있다는 측면에서 더욱 심각하다.

    찬이의 경우처럼 자본과 영향력을 이용하여 어린 마음에 좌절과 슬픔을 맛보게 할 수도 있다. 별 것 아니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곳에서부터 영향력을 확대하고 어린이들을 친근하게 적응시키는 거다. 잠재적 고객인 미래독자들을 위해 사탕에 독을 묻혀 권하는 거다. 남는 장사다.

    조숙한 아이라면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거실에 널려있는 신문에 눈길을 주고 읽기 시작한다. TV 편성표를 보기도 하고 연예면, 문화면을 보기도 하면서 차츰차츰 사회, 정치면도 보게 된다. 그러면서 부지불식간에 적응되고 생각과 사고, 가치관을 형성하게 된다.

    조중동 어린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갖게 될까. 경쟁, 효율, 약육강식, 적자생존, 신자유주의,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 보이지 않는 손 등을 긍정하고 협력, 연대, 평등, 박애, 관용, 양보, 희생, 인간의 정의감과 이성 등에 무관심해지며 결국에는 자본주의, 재벌 등을 옹호하고 사회주의, 노조 등을 혐오하는 보수적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언젠가 노무현과 관련하여 지역주의 폐해에 대해 비판적으로 다룬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연이은 부산에서의 낙선으로 지역민들도 뭔가 찔렸던지 초기여론은 호의적이었으나 결국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 그 프로에서 칠, 팔십대로 보이는 어느 평범한 할머니를 인터뷰한 것이 있었는데 그 대답이 걸작이다.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를 살린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나도 이번에는 노무현이 찍으려고 했지. 안됐잖아! 그런데 투표소를 나와 보니 한나라당에 투표했더라고.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손이 거기로 가 있는 거여. 거 참 신기하지!’

    이런 분,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의 유세에 박정희씨의 액자를 들고 나와 울며불며 큰 절하는 할머니들은 답이 없다. 투표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한나라당을 찍게 되는 것은, 키스를 하면 슴가에 손이 가는 것처럼 당연하고 자연스런 수순이다. 이것은 머리로 하는 사고, 가치관, 생각의 차원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습관과 본능의 차원이다.
    젊은 연인들이 그러한 기회를 오매불망, 호시탐탐 노리며 학수고대하듯 나이든 어르신들에게 선거와 투표란 짧게는 몇 개월, 길게는 몇 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의미 있고 뿌듯(!)한 행사요, 일종의 경건한 의식이다. 그것은 정책의 유불리를 떠나 지역이나 이념 같은 자기 존재의 근거, 정체성에 대한 확인이요, 보상이다. 한나라당은 자신의 표에 대한 권리가 있고, 자신은 한나라당을 찍어야 할 부채가 있다. 한나라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고, 자신은 그럴만한 의무가 있다. 그것을 확인하고 뿌듯하고, 그것을 갚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런 분들은 2009년을 사는 민주주의 ‘시민’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70년대에 정지해 있는 너무도 순박하고 착한 이 나라의 ‘백성’이고 우리들의 평범한 이웃이다. 그리고 동시에 한나라당의 영원한 호구, 마르지 않는 샘물이다. 학습을 할 수도 없고, 설득하기에도 이미 늦었다. 때론 불의에 분노도 하고, 의인의 좌절에 동정도 하고, 남들보다 눈물도 더 많이 흘리겠지만 그 때뿐이다. 한나라당, 보수의 부패와 일탈은 아무리 폭주해도 자기집안에서 일어난 잠시잠깐의 외도일 뿐이고, 진보의 비극은 아무리 애달퍼도 담장 너머 남의 집 곡소리일 뿐이다. 이것은 노무현의 죽음으로도 돌려세울 수 없다. 달라진 것은 없다.

    하지만 젊은 우리들, 특히 자라나는 어린 학생들은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소통과 설득은 감성적으로 쉽게 접근하는 것으로 시작해야겠지만, 종국에 각성은 철저히 내면화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마음착한 백성의 눈물이 아닙니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석 받침돌에 새겨진 신영복 선생의 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