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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의 “1984”와 대한민국의 “2010”

어멍 2010. 10. 20. 00:27
 

조지 오웰의 “1984”와 대한민국의 “2010”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1]


    “1984”는 조지 오웰이 1948년 탈고한 미래소설이자 정치소설이자 풍자소설이다. 1948에서 숫자만을 바꿔 당시에는 결코 멀지않은 미래인 1984년 인류의 가상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지금 시점에서 1984년은 까마득한 옛날이지만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는 여전히 퇴색되지 않고 있다. 소설은 여러 비약과 과장에도 불구하고 인간성(특히 호모 폴리티쿠스)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날카로운 관찰, 깊은 통찰, 번뜩이는 시사점을 제시해주고 있다.

    어둡다! 어둡다란 표현만으론 부족할 만큼 절망적이다. 전율이 일어날 만큼 무시무시한 악몽이다. 소름이 쫙 끼치며 털이 솟는다. 썩어 문드러진 환부를 들춰보는 것처럼 진저리가 나고 습기 찬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는 듯 오싹하다. 곧 질식할 듯 숨이 턱턱 막혀 과연 그런 사회에서 일분일초라도 살아갈 수 있을까 싶다.


- 초간단 내용 요약 -


    세계는 국지적 핵전쟁을 포함한 오랜 전쟁 끝에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이스트아시아라는 3개의 거대 전체주의 국가로 나뉜다. 소설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영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국가로 영사(INGSOO, ‘영국사회주의’의 약자)라는 전체주의 사상을 그 정치철학으로 하고 있으며 ’당‘을 의인화한 ’대형‘(Big Brother)이 지배하고 있다. 영사는 ’사상통제‘와 ’과거통제‘라는 주요 수단으로 유지되며 선거도 정당들도 물론 없다. 언론, 출판의 자유 역시 없다.

    침실, 화장실까지 설치된 송수신을 겸한 텔레스크린이라는 선전선동 겸 감시기구, 이단자들을 발본색원하는 사상경찰, 분노와 공포를 끊임없이 자극시키는 군중대회, 철저히 관료화된 공조직에 의한 사조직 파괴 등 전통과 첨단의 각종 수단들이 동원되어 사회는 철통같이 통제된다. 구성계급은 극소수의 내부당원, 소수의 외부당원, 절대 다수의 무산계급이다.

    텔레스크린에 비친 불신의 표정 때문에 느닷없이 잡혀가기도 하고(일명 ‘표정죄’다) 잠꼬대를 어린 자녀가 당국에 신고하여 한밤중에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기도 하는 등 자고나면 주위사람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해 있다. 순수한 사랑은 물론 성적 오르가즘도 죄며 결혼과 성교는 오직 사회구성원의 재생산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주인공인 윈스턴은 외부당원이다. 내심 오세아니아와 영사에 대해 의심과 반감을 품고 있던 그는 우연히 줄리아라는 여자를 만나 위험한 사랑을 이어간다. 그들은 반역을 결심하지만 내부당원인 오브리언의 속임수에 속아 결국 함정에 빠지고... 체포되어 애정성에서(사상경찰에 의해 범죄자들이 수감되어 취조 받는 곳) 가공할 고문의 고통 끝에 결국 서로가 서로를 배반한다. 배반을 넘어 전향하고 세뇌된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석방된 윈스턴은 어느 날 허름한 술집에서 텔레스크린으로 오세아니아의 대대적인 승전소식을 듣게 된다.(사실, 상대가 유라시아인지 이스트아시아인지는 중요치 않다. 어쩌면 승리 혹은 패배의 진실여부도 중요치 않다. 언론과 뉴스는 철저히 통제, 날조되니까. 오세아니아가 지구에서 사라지기 전까진 진실과 거짓을 구별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는 지난날의 과오와 죄를 깨끗이 자백함으로서 세탁하고, 철저히 벌을 받음으로서 용서받기 위해 스스로 애정성으로 돌아간다. 그 곳에서 하얀 타일이 깔린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동안 그를 따르던 간수에 의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한다.(당은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처형치 않는다. 오직 세뇌되고 회개하여 죄를 고백하고 벌을 자청하는 자만을 처형한다. 왜냐하면 신념을 지닌 채로 죽는 순교란 당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또 다른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술내 나는 회한의 두 줄기 눈물이 코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난 것이다. 그는 대형을 사랑했다.

 

    쓰고 보니 초간단이 아니네.. -.-:;



[2]


    소설에는 빅브라더, 텔레스크린, 과거통제(곧 현실통제다), 이중사고, 신어(新語) 등 새롭고 흥미로운 개념들이 많이 등장한다. 소설속의 인상 깊은 문장, 세세한 에피소드들을 소개하는 것은 말이 너무 길어지므로 상기한 몇 가지 개념들을 중심으로 해서 독후감을 풀어가 보자.(이것만 해도 만만치 않다.)


    먼저 과거통제. “과거를 지배하는 자는 미래를 지배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당의 슬로건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과거통제→역사통제→정보통제→사상통제로 이어지는 방식이다. 그것은 현재의 필요와 요구에 의해 과거를 재구성하는 것이므로 ‘현실통제’이기도 하다. 그럼으로써 미래의 행로까지 결정지으려 하는 것이다. 결국 그 슬로건의 핵심은 이것이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모든 것을 지배한다.”

    있던 것을 없는 것으로 하기도 하고 없던 것을 있는 것으로 하기도 한다. 당지도급 인사가 반역을 꾀해 숙청, 제거됐다면 그와 관련된 모든 자료가 삭제된다. 신문기사, 연설문, 서적 심지어 출생과 사망에 관한 기록까지 삭제돼 그의 존재는 완전히 증발되는 것이다. 또는 현재 사건을 예견한 과거의 예언까지 날조해 없던 것을 있는 것으로 만들기도 한다. '당은 일찍이 알고 있었다', '미래를 포함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거다.

    이것은 왜곡, 은폐 수준이 아닌 무화(無化), 창조다. 조중동이 아무리 뻔뻔하고 교활해도 이렇게는 못한다. 과거 행정수도 찬성 기사를 감추고 생깔 수는 있어도 시점을 소급해 있던 기사를 없애거나 행정수도 반대 기사를 새로 쓸 순 없다. 이것은 신문철에 있는 옛 신문을 불태우고 지금 발행한 새 신문을 그 자리에 끼워 넣는 수준이다. 이 작업은 윈스턴이 속한 진리성에 의해 끊임없이 업데이트된다. 큰 정변이 일어나면 이제까지의 모든 자료를 그에 맞게 재구성하느라고 진리성에 난리가 난다. 몇 날 몇 밤을 꼬박 새운다.


    소설은 <신어의 원리>편이 끝에 부록으로 따로 붙어있고 소설 안에도 또 다른 책인 <책(The Book)>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다. <책>은 세계와 영사의 작동원리, 정치사상체계를 설명한 본질적인 내용인데 영사에선 절대금서다.

    ‘신어’란 사람들의 사고 영역을 줄이기 위해 영사가 정권차원에서 구축하고 있는 언어체계로 어휘와 의미의 최소화를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예를 들면 ‘민주’(Democracy)란 단어는 없어진 지 오래고 ‘Free’는 ‘자유’보다 ‘없다’로만 쓰인다든지(This dog is free from lice-이 개는 이가 없다)... ‘Equal’은 ‘평등’보다 ‘같다’로만 쓰인다든지(A yard is equal to three feet-1야드는 3피트와 같다)... 식이다. <신어의 원리>편은 언어학자, 심리학자에게 무척 흥미로운 내용이다. 언어의 축소를 통해 사람의 의식까지도 축소시키고 단순기계화시키는 거다.


    소설 속에 나오는 <책>은 ‘무지는 힘’, ‘자유는 예속’, ‘전쟁은 평화’의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의 세 가지 목표, 케츠플레이기도 하다. 신어는 이런 식으로 역설적으로 쓰이기도 하는데 언듯 삼류 말장난 개그 같기도 하지만 이 역설에 진의가 숨어있다. 그 진의를 이해하려면 ‘이중사고’라는 소설 속 핵심 키워드를 이해해야 한다. 오세아니아의 4개 중요 정부기관의 이름 역시 마찬가지다. 진리와 문화를 조작하는 조직은 진리성(眞理省), 사찰과 고문을 담당하는 조직은 애정성(愛情省), 인민의 궁핍함을 위한 계획경제를 다루는 풍부성(豊富省), 전쟁을 관장하는 평화성(平和省)이 그것이다.


    ‘이중사고’란 무엇인가?..........어렵다. 설명하기도 어렵고 실행하기는 더더욱 어렵다. 이 소설은 <동물농장>과 함께 그의 대표작이자 공히 발간 당시에 전 세계적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으로 '대형' 곧 'Big Brother'란 말을 일반 명사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개인적인 생각에 이 작품의 핵심 키워드는 이미 현대 어휘가 되어버린 바로 이 ‘이중사고’다.

    때론 2+2=4가 진리고 때론 2+2=5가 진리가 되는, 진리로 믿는 사고방식이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 두 개의 상반되는 신념을 동시에 소유하고 둘 다 받아들이는 능력을 의미한다. 소설 속 ‘이중사고’의 의미는 단순히 ‘내가 하면 로맨스 니가 하면 불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 ‘어제는 4고 오늘은 5인 단기기억상실증’을 의미한진 않는다. 그것은 모든 것을 보며 거의 실시간으로 동시에 이루어지는 사고다.

    이스트아시아를 적국, 유라시아를 동맹국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연설로 시작해 일말의 동요도 없이 낯빛하나 변치 않고 이스트아시아를 동맹국, 유라시아를 적국으로 규탄하는 연설로 끝마치는 것이다. 집회장에 걸려있는 그림, 표어 등 각종 선전광고물들은 그 사이 당의 일꾼들에 의해 신속하고도 전격적으로 교체되고 군중은 분노의 대상만 바뀌었을 뿐 여전히 광적으로 열정적이다.


    이 과정은 의식적으로 행해져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중사고’가 정확히, 만족스럽게 실행되었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동시에 무의식적으로도 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어 동요하고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스스로 정신을 분열하면서도 그것을 인지하고 통합하는 능력, 그러면서도 정신이 멀쩡할 수 있는 능력...... 과연 인간이란 존재에게 가능한 능력일까??

    실지로 소설에서도 ‘이중사고’는 오브리언 같은 최고위급 내부당원만이 완벽히 이해, 구사할 수 있다. 지금도 일반시민은 소위 정치꾼보다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하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말을 더듬거나 머뭇머뭇 동작이 굼뜨거나 꼭 표시가 난다. 혹 정파적 편견에 들떠 노무현은 경제파탄 이명박은 세계경제불황이라 거품을 물더라도 겸연쩍게 헛기침 한 번씩은 꼭 한다. ‘이중사고’는 이런 아마추어 소박한 수준이 아니다. 자신까지도 완벽히 속이는 것이다. 의식적이면서도 무의식적으로!




뫼비우스의 띠 : 겉에서 안으로 안에서 겉으로, 겉이 안이고 안이 겉인 하나의 구조물
이중사고 : 백에서 흑으로 흑에서 백으로, 백이 흑이고 흑이 백인 하나의 사고체계



    이명박 대통령은 이 경지까지 이르렀을까?... 대중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거침없이 연신 들이대는 언행불일치와 괴변, 말폭탄을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중사고’를 하신다 해도 포스는 오브리언에 미치진 못한다. 그는 신중하면서도 거침이 없고 잔인하면서도 이해심이 탁월하며, 열정과 행동력에 높은 학식과 철학, 거기다 품위까지 있으니까. 이론과 실재를 완벽히 겸비한 최고수다.





어설픈 거짓말 or 싸구려 이중사고 or 초단기 기억상실증

(이 대통령의 입을 잘 보라!) (고개를 끄덕이며) 아~ 논의했구나.



     윈스턴이 오브리언에게 고문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그를 의지하고 심지어 존경하고 결국은 설득당한 이유도 자신에게 열등감을 주는 이런 그의 학식과 풍모 때문이었다. 또한 오세아니아의 현실에서는 굳이 ‘이중사고’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수긍할 만한 어두운 역설, 진실의 조각, 강력하고도 치명적인 괴변과 부조리가 숨어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지는 힘’


    윈스턴은 오세아니아를 전복시킬 희망을 무산계급에서 찾는다. 배우지 못하고 아는 것 없는 자만이 기존체제에서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들이 깨어나 눈을 뜰 수만 있다면 빅브라더는 거대한 파도 앞의 모래성에 불과할 것이다.

    빅브라더에게 대중의 무지는 곧 당의 힘이다. 권력이 나오는 원천이며 필요조건이다. 대중이 권력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관심 갖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정보를 날조하고 내외부의 적을 가공하고 분노와 공포를 조장한다.

 

    ‘자유는 예속’


    오세아니아 사람들에게 자유는 예속이고 예속은 곧 자유다. 오직 당의 보호와 영도 하에 복종과 예속을 통하여서만 일상을 영위하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것을 벗어난다면 고통과 번민뿐이다. 종국엔 파멸만이 기다리고 있다.

    혼자있는 인간, 자유로운 인간은 언제나 패배하고 무의미하다. 당에 속하여 자신을 버리고 철저히 복종할 때에만 인간은 불멸의 전능한 존재가 된다. 윈스턴 역시 스스로의 오해와 고집으로 비롯된 기나긴 유형(流刑)을 회개하며 대형의 품안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전쟁은 평화’


    세계는 3개의 다리로 지탱하는 무쇠솥인 정(鼎)처럼 3개 거대국가 중 하나가 멸망하면 나머지도 쓰러지는 형국이다. 3개의 거대국가는 한편으로 서로를 의존하고 한편으론 서로를 증오하며 끊임없이 국지전을 한다. 그것은 괴멸적 원자전쟁은 모두가 암묵적으로 회피하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외의 크고 작은 전쟁은 그 자체로 계속 서로 간에 필요하기 때문이다.

    왜 전쟁은 쭈~욱 계속되어야만 하는가? 버트란트 러셀은 인간의 충동 때문이라고 했다지만 이건 좀 싱거운 결론이고... 소설 속 설명에 의하면 다소 의외고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영토확장, 자원약탈 등의 재래식 전쟁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영토는 충분히 넓고 자원은 스스로 자급자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하다. 전쟁의 목적은 그 반대. 자원소진, 잉여의 부의 파괴에 있다. 단지 재고무기 소비를 통한 군산복합체의 이익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과 체제유지에 그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전쟁의 전통적인 정치적 목적, 즉 내부의 위기를 외부의 적을 통해 해결하려는 동기 역시 작용함은 물론이다. 딱히 위기가 없어도 잉여의 부만큼 잉여의 인간성, 여가 역시 전쟁을 통해 소비할 필요가 생긴다. 오세아니아는 오락, 예술, 문화, 스포츠 등 마땅한 놀이거리가 없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해소해야 한다. 최소한의 숨통은 튀어줘야 한다. 그래서 증오주간을 따로 정해 소단위로 집회와 각종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하고 처형과 연설 등으로 대중의 광란을 유도하는 대규모 군중집회를 수시로 열기도 한다.

    뭔가는 해야한다. 멈추면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쓰러지지 않으려면 인민도 권력도 뭔가는 해야한다. 인간은 폐허 속에서도 불탄 나뭇가지를 들고 전쟁놀이를 하는 존재다. 권태보다 전쟁을 택할 수도 있는 존재다. 3개의 거대 전체주의 국가에서 전통적, 창조적, 긍정적 의미의 유희적 인간, 호모 루덴스는 설 자리가 없다.


    잉여의 부의 파괴가 어떻게 전체주의 권력의 유지와 연결되는가. 그것은 전체 인류의 부가 증진, 확장하여 사람들의 삶이 윤택해지면 육체가 편안해지고 사고도 따라서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전반적인 생활수준은 향상시키지 않으면서 재화 특히 기계제품을 완전히 소모시키면 사람은 머리를 쓸 일이 줄어들고 육체를 쓸 일은 늘어나며 항상 궁핍한 일상에 찌들어 권력을 올려다 볼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육, 경제수준이 낮은 사람들이 사회정치적 이슈에 더 둔감하고 무관심한 것은 일반적 현상이다.

    ‘전쟁은 평화’란 말은 일상화된 전쟁, 또는 계속적인 재래식 국지전쟁이 종말적인 원자전쟁을 막음으로서 빅브라더에 의해 통치되는 일상을 담보하는 아이러니를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상대와 통합할 수도 상대를 제거할 수도 없는 천하삼분된 3개의 초거대 전체주의 국가에서는 필연이다. 체제생존을 위한 그들 사이의 미필적(어쩌면 고의적) 협잡이다. 전쟁의 목적은 승리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영원히 지속되는 전쟁 그 자체에 있다.

    전쟁이 계속되는 한 어쨌든 평화는 계속된다. 전쟁의 종말이 곧 평화의 종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빅브라더의 종말, 모든 권력의 종말이기도 하다.

 


    권력이 무엇이관데 인류에게 이런 악행과 횡포를 저지르는가. 무슨 동기로, 무슨 보람으로 지옥의 마귀처럼 인간의 머리채를 틀어잡고 발가벗겨진 몸뚱이를 암흑의 심연으로 질질 끌고 가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것은 권력자가 아닌 권력 스스로를 위해서다. 절대반지를 낀 자는 그 누구든지 반지의 노예가 되는 것처럼 권력이란 인간 위에 있어 스스로의 의지와 인격을 획득했다. 잘못 불러낸 흑마술사처럼 인간이 만들어냈으나 인간 위에 군림한다.

    오세아니아 인민의 생활은 지난 몇십년에 비해 열악해졌다. 평균적으로 열악해졌을 뿐만 아니라 상류층, 심지어 최고위층 내부당원의 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권력은 더욱 집중됐지만 생활은 예전보다 덜 윤택하다. 더 불편하다. 왜인가. 권력은 인간의 평범한 행복, 윤택한 삶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력이 추구하는 본질은 불평등과 독점이다. 권력은 소설에 의하면 고통을 통하여 가장 극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강력한 권력일수록 강력한 고통을 준다.

    (미친) 권력은 권력의 이익과 인민의 불이익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후자를 선택한다. 나의 행복보다 남의 불행을 통해 권력을 과시한다. 내가 10을 갖고 다른 이가 8을 갖는 것보다 내가 5를 갖고 다른 이가 1을 갖는 것을 선호하다. 안락한 마이카로 대로를 싱싱 달리는 21C 소시민보다 딱딱한 의자에 장정 수십명이 걸쳐 맨 가마를 타고 도성길을 흔들흔들 굽어보는 18C 군왕이 권력자다. 권력에겐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전우익 저>가 아니라 <다같이 잘 살믄 무슨 재민겨>다. 모두에게 주워진 동등한 권리는 따로 권력이라 부르지 않는다.

    윈스턴은 체포 당시 이미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권력은 그를 죽이지 않는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세뇌를 통해 회개케 한 후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죽음을 청하게 한다. 기존의 독재권력, 전체주의 권력은 이에 비하면 아마추어 수준이다. 왜인가? 반역자를 보이는 족족 처형하면 될 것을 왜 이리 무의미한 헛힘을 쓰는 걸까? 마찬가지다. 마음으로부터의 반역, 그 어떤 형태의 반역도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권력 자체의 의지 때문이다. 권력은 살아있다.

    권력은 오만하다. 위대하다. 영원불멸해야 하며 완벽해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악한 권력, 전체주의 권력의 최대의 적은 자유와 평등이다. 궁극적으론 인간의 가장 숭고한 본성인 사랑이다. 오세아니아는 그런 단어들을 대놓고 없애버리든지 뜻을 축소시킨다. 측은지심 박애정신으로서의 사랑뿐 아니라 남녀간의 육체적 사랑까지 금지한다. 역사에서 보아왔던 수많은 재래식(!) 전체주의 독재정권도 본질 면에선 통한다. 겉으론 자유, 평등, 민주, 사랑, 정의를 외쳤지만 말 뿐! 그들은 단지 덜 용감했고 덜 솔직했을 뿐이다. 권력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했을 뿐이다.

    박정희씨의 ‘한국식 민주주의’ 전두환씨의 ‘정의사회구현’이 그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공정사회’ 역시 비슷한 부류다. 한결같이 ‘자유민주주의’를 내걸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자유는 자유(Freedom)가 아니다. 민주는 민주(Democracy)가 아니다. 그들은 정통적, 적극적 자유와 민주를 꺼려했고 불편해했다. 아무리 가리고 꾸며도 어쩔 수 없는, 정통보수 아닌 권위적 꼰대들! 민주를 외치면 곤봉이 날아들고 자유를 외치면 혀를 끌끌 찬다. 그들이 수호한다는 자유와 민주는 공산진영의 대립항으로서만 의미있을 뿐이다. 오히려 ‘통제민주주의’, ‘자본자유주의’라는 표현이 훨씬 정확하다.

    오세아니아는... 차원이 틀리다. 그들은 굳이 수고스럽게 대중을 혼란시키지 않는다. 속이지 않는다. ‘전쟁은 평화’는 단순한 말장난도 아니고 위장술도 아니고 이중사고에 의하면 반드시 틀린 말도 아니다. ‘한국식 민주주의’, ‘과거를 묻지 않는 공정성’과 같이 자체모순이 있거나 ‘검은 하얀’, ‘네모난 세모’처럼 형용모순의 차원이 아니다. 과연 스탈린, 히틀러, 김일성, 박정희... 역사상 온갖 독재자들이 형님하며 넙죽 절할 정도다! 이명박 대통령으로선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신세계다.




독재자 이명박?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부조화!
독재인 것도 아니고 독재가 아닌 것도 아닌 같기도 정권!!
“그렇게 생긴 독재자가 어디 있느냐. 히틀러나 스탈린 같은 사람은 관상이 독재하게 생겼는데~”
늙은 총각 김동길씨의 말에 공감이 갈 줄이야!!!



Break Music Time!

글이 너무 길고 어두우므로 깜찍하게 잠깐 쉬었다 가자.






    ‘권력은 집단적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명제다. 대형(Big Brother)은 소설 속에 항상, 모든 곳에 걸려있는 큰 포스터의 존재로만 등장한다. 언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아마도 실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실재는 ‘당’이다. 집단이다. 대형은 그것의 의인화된 상징일 뿐이다.

    독재자들은 죽는다. 하지만 당은 남는다. 그것을 이루는 세력, 조직화된 집단은 개인보다 더 장구하며 체제는 계속된다. 그래서 오세아니아는 견고하고 강력하다. 1984년 이후로 꽤 긴 시간동안, 어쩌면 영원토록 유지될지도 모른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바다 괴물 레비아탄처럼 하나를 자르면 곧바로 다른 하나가 대체하며 어디선가 새로운 머리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영웅도 계속 나오지만 괴물 역시 계속 나온다. 이 끊임없이 얘기되는 통쾌한 혹은 힘 빠지는 우화를 끝장내려면 영웅이 아니라 또 다른 괴물, 비슷한 덩치의 호적수가 필요하다. 집단이고 세력이다.

    어떻게 대중을 조직화하여 시민세력을 형성할 수 있을까. 태풍을 형성하려면 눈(目)이 있어야 한다. 대중에게도 구심력을 유지하고 행로를 결정짓는 눈이 있어야 한다. 굳이 명명하자면 '깨어있는 시민'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민의 1%만 깨어서 조직화할 수 있다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10월 현재 5000만 명이 넘어섰다고 하니 50만 명이다. 그러기 위해선 대중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높아져야 한다. 높은 산은 높은 산중에 있다. 대중이라는 히말라야에 시민세력이라는 에베레스트를 올려야 한다. 최고수준의 도덕성과 실력으로 무장하고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50만 명! 가히 두려울 게 없다!


    박정희씨의 유신정권은 군인집단을 중심으로 한 안보우파다. 이명박 정권은 자산가 집단을 중심으로 한 경제우파다. 군 면제자가 유독 많고 재벌을 위해 군 비행장 활주로를 튼다. 군에 대해서는 듣기 좋은 립서비스 뿐이고 실지로 돈이 들어가는 국방력 강화에는 인색하다. 재벌을 위시해서 동산, 부동산 대자산가들은 열에 열 이명박 대통령 지지세력이고 시세차익을 노리고 모델하우스 앞에서 날밤을 지세며 긴 줄을 늘어선 고만고만한 투기세력들은 열에 여덟아홉은 한나라당 지지자라고 보면 틀림없다.

    오세아니아는? 권력의 중심세력,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한 세력은 군인들도 아니고 자산가들도 아니다. 그들은 관료들이다. 관료화된 정치인, 정치화된 관료들이다. 그것은 자유, 평등, 인간애 등 인간성의 긍정적인 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무력화, 파괴시킬 수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거대한 기계에 속한 하나의 작은 부속처럼 맹목적으로 명령에 따르고 체제에 순응하는 관료화야말로 체제유지에 필수적이다.

    권력은 토호에서 군벌로 군벌에서 왕족, 군인집단을 거쳐 자본가와 거대기업으로 넘어왔다.(조중동 등 언론(사들) 역시 특수자본, 특수기업집단으로 본다.) 때때로 시민계급이 그 정점에 서기도 했지만 극히 짧은 순간이었다. 현재까지 이 자본가 집단을 뛰어넘을 권력집단은 없다. 있다면 미래에는 관료들이 될 것이다. 지금은 떡값을 받아먹는 심부름꾼 신세지만 그때는 삥 뜯듯 떡값을 상납받고, 떡시루를 빼앗거나 부순 후(오세아니아는 부수는 쪽에 가깝다) 자본가들을 내쫓을지도 모른다.

    역사는 자유, 평등, 박애의 가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권력투쟁이다. 단순화하면 선한 권력인 민주주의 정권과 악한 권력인 과두정권(군주제, 독재, 과두집단에 의한 전체주의를 포괄)과의 투쟁이다. 민주주의를 추동하는 중심세력은 시민이다. 과두정권의 중심세력은 군대가 될 수도 있고 자산가가 될 수도 있고 고급공무원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관료주의와의 싸움이 주전선이 될 것이다.

    시민세력의 적은 과두집단이다. 자유, 평등, 박애의 적은 관료화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이다.”(노무현)



[3]


    소설은 디스토피아를 그린 여느 작품처럼 어둡다. 하지만 그 어둠은 과학의 폐해를 다룬 보통의 SF 미래소설과는 다르다. 정치와 인간성에 의한 디스토피아이기에 유독 어두운 것이다. 인간본성의 악마성, 나약함을 너무 신랄하고 부정적, 비관적으로 그리고 있어 은근히 불편하고 화가 치밀 정도다. 악몽과도 같아 눈을 감고 잠들기가 두려울 정도다. 작품은 작가의 자식인 셈인데 조지 오웰이 그토록 비관적인 사람이었을까.

    소설이다. 그것도 공상정치 미래소설이다. 그럼에도, 과장과 비약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근원적인 의문이 인다. 인간의 선악, 강약을 떠나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란 거다. 먹고 마시고 싶을 뿐만 아니라 웃고 울고 싶다. 느끼고 싶다. 움직이는 역동적인 생명이다. 다이너미즘(Dynamism)이다. 그토록 무기력할 수 있을까. 통나무나 상자처럼 그토록 수동적이고 순응적일 수 있을까.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살아있으면서도 죽어있는 시체처럼 미동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갑자기 눈물이 난다. 눈 앞에 아기를 안은 여자, 연인의 손을 잡은 남자들이 벌거벗은 채 절뚝거리며 가스실로 줄지어 들어가고 있는 영상이 떠오른다. 사람을 죽여 비누를 만들던 아우슈비츠! 그들은 느리고 조용하게 걸어 들어가고 있다. 그들의 눈동자는 풀어져 있고 얼굴엔 표정이 없다. 웃지도 울지도 않고 슬픔도 기쁨도, 눈물도 분노도 없다. 내 뺨에 흐르는 이 눈물은 무엇인가?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이것은 슬픔의 눈물이기도 하고 기쁨의 눈물이기도 하다. 절망의 눈물이기도 하고 희망의 눈물이기도 하다.


    물론 오세아니아는 보통의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다.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전혀 새로운 형태의 전체주의 정치제제다. 완벽히 감시, 통제되는 철통같은 사회다. 자그마한 불씨에도 물폭탄을 퍼부어 수장시키는 사회, 반역의 기운을 거대한 강철 프레스로 압착시켜 증발시키는 사회다. 하지만 어린 새싹은 연약하지만 얼음과 강철마저도 뚫고 나온다. 윈스턴이 반역을 꿈꾼 것, 고문의 고통에 진실을 무기로 대항한 것은 그 자체로 어떤 희망, 인간 생명력의 긍정을 역설적으로 의미한다. 조지 오웰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건져 올리고 비관 속에서 낙관을 놓지 않고 있다.

    과연 인간은 존귀하고 강한 존재인가. 과연 빅브라더에게 반기를 들 수 있을까. 그의 감시와 억압을 뚫고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을까. 인류는 파멸에 이르지 않도록 스스로 괘도를 수정할 수 있을까.




BIG BROTHER IS WATCHING



    소설에선 언어를 통제하고 생활을 열악하게 해서 사람들이 딴맘 먹지 않고 체제에 순응하게 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 혹은 인간집단의 사고력이란 게 생각보다 견고하지 않아서 자유롭게 방임되면 중구난방 어지러워져 스스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획일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는 거다. 다양성과 민주적 시스템을 스스로 허물수도 있다.

    반면에 강제와 억압, 삶의 고난과 비루함 앞에선 오히려 저항력 뿐 아니라 사고력, 판단력마저 약화, 소멸된다. 간혹 진흙 속에 핀 연꽃처럼 고난과 역경으로 인해 더욱 위대한 인간정신이 탄생하여 불꽃을 튀기며 빛나기도 하지만 이건 드물게 일어나는 예외적인 경우다.

    우리 역시 경제사정, 삶의 질의 격차는 지금이 더 나빠지고 벌어졌지만 사람들은 더 온순해지고 덜 비판적이 됐다. 권력이 이것을 노리고 일부러 이런 방향으로 유도하기도 한다. 그래서 역사상 독재, 전체주의가 끝 간 데 없이 폭주하여 결국은 비극적 종말을 보고야 만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환경, 상황은 세상이 뒤집혔다고 표현할 만큼 극과 극이다. 노 대통령 개인에겐 겨울이었지만 시민들에겐 봄이었다. 이 대통령에겐 봄이지만 시민들에겐 겨울이다. 겨울에 움츠러들기 마련이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시민들의 반응, 행태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다. 왜 자신을 존중하는 자에겐 함부로 하고 자신을 능멸하는 자에겐 고개를 조아리는가. 섬기려 하는 자를 짓밟고 짓밟으려 하는 자를 섬기는가. 왜 스스로 굴종하기 위해서 투쟁하는가. 단지 권력에 향한 열병과도 같은 선망, 권위에 대한 비겁한 의탁 때문에??... 원래 인간이란 나약하고 간사한 존재라고 변명하기엔 환멸과 자괴감이 들 정도다.

    사람들의 단기 기억상실증, 이중 잣대, 정파적 편견이 너무 심하다. 예상컨대 이런 것이다. ---- 세상은 공정해야 한다. 깨끗해야 한다. 하지만 공정할 수 없고 더러운 것이다. 얼마간은 필요악이다. 따라서 다른 놈들도 분명 별 수 없이 다 마찬가지다. 내가 더러우니 너도 기필코 더러울 것이다. 나의 반칙과 부패는 대를 이루기 위한 권도고 상대의 그것은 깨끗한 척 했던 가증스런 위선이다. 죄 자체의 경중보다 주관적 증오와 괘씸함이 우선이다. 정직한 더러움보다 위선적 깨끗함이 마땅히 가중처벌, 심지어 선택적으로 박멸돼야 한다.

    ‘성자(聖者)는 눈같이 하얀 그 결백이 증명될 때까진 언제나 유죄’(조지 오웰)이며 가중처벌되어야 한다. 악한(惡漢)은 끝 간 데 없는 그 악마성이 까발려지지 않는 한 언제나 무죄이며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다. ----

    ‘필요악’이더라도 나에겐 ‘필요’가, 너에겐 ‘악’이 강조된다. 내편에겐 필요악이고 네편에겐 단지 악일뿐이다. 편을 가르지 않더라도 부조리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철히 인정하는 것과 적극적으로 승인하는 것, 심지어 긍정적으로 권하는 것은 분명 다르다.

    아무리 선보다 악이 친근하다고 한다지만 이건 뭐... 공범 만들기, 물귀신 심보, 적반하장, 정파적 편견이라고 하기엔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정신세계다. 이건 설득의 대상이라기 보다 정신병리학적 치료의 대상에 가깝다.

    노무현과 이명박. 누가 더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가. 그때의 우리들이 더 자유롭게 사고하는가, 지금의 우리들이 더 자유롭게 사고하는가. 누가 더 무기력하고 비겁한가. 하다못해 자유를 반납한 대가로 살림살이라도 나아졌는가...... 물으나 마나한 우문인가!


    독재로 정치적 자유가 질식하거나 전쟁, 가난으로 삶이 피폐해질수록 사람들의 저항력, 사고력은 오히려 줄어든다. 모두 먹고 살기 빠듯하고 자기 앞가림하기 바쁘다. TV 데모장면에 어르신들이 혀를 끌끌 차며 '저 짓(!)도 다 먹고 살만 해서 하는 짓'이라고 꾸짖는 것도 일면 맞는 구석이 있다. 생계에 급급해지면 광장에 모일 의욕도 시간도 없다. 독방에 갇힌 죄수는 결코 폭동을 일으킬 수 없다. 나뉜 물방울은 결코 계란 하나라도 깨뜨릴 수 없다.

    아무리 불만이 팽배하고 객관적 사정이 비참하더라도 여론과 무력을 완전히 장악할 수만 있다면 천인공노할 잔악한 정권도 천년만년 유지할 수 있다. 바로 신문, 방송, 인터넷, 경찰, 검찰, 군대다. 사람의 생각과 육체를 통제하여 심리적, 물리적으로 대중을 철저히 파편화하고 격리시키는 거다. 그래서 독재정권일수록 광장을 싫어하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정은 계속 악화된다. 파국에 이르러 반전될 때까지. 그 계기는 자발적인 인간이성의 해방이 아니라 생명까지 위협하는 물질적 한계나 정치적 폭주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면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다던가, 입을 게 없어 얼어 죽는다던가, 불평 한마디 했는데 처자식이 끌려가 실종 혹은 사망한다던가... 죽지 못해 살아가다가 살기 위해 죽음을 기꺼이 감수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죽은 거나 살은 거나 별반 다를 바 없을 때 사람들이 모이고 혁명의 기운이 슬슬 움트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국면에서도 하나의 사건, 도화선은 필요했다. 그것이 민중 속에 내재된 힘인지 역사 속에 내재된 섭리인지는 모르지만...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서 대로변에서 유혈이 낭자하기 전까지 독재 권력은 절대로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는 법이 없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걸 개인의 영역, 책임으로 돌리는 우리사회에서는 더하다. 채소 값이 살인적으로 폭등하면 날씨 탓, 좋은 대학 나오지 못해 출세하지 못한 것은 머리 나쁜 탓, 가난한 것은 게으르고 제 못난 탓이다.(얼마 전까지는 모두 노무현 탓이었나?) 이 대통령 말대로 믿음이 부족하여 부정적이고 남 탓만 해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뭥미? 그래서 그렇게 노무현 탓을 하셨나?) 유럽이라면 이미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내 놓으라고 들고 일어났을 것이다.


    “대중의 이해력은 아주 작으며 잊어버리는 능력은 엄청나다.”(히틀러)라고 했던가. 소설 속에도 비슷한 취지의 문장이 나온다. “어느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납득이 되었다. 그들은 무지의 덕분으로 정신이 정상적이었다.” - 세상이 일그러지고 미치게 되면 원래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 힘든 법이다. 똑똑한 머리와 바른 심장 중에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오웰은 이런 대중을 원망하고 질타한 것일까. 그는 철인정치론자, 국개론자(국민 개XX론)였나. 그건 아닌 것 같다.

    대중에 대한 오웰의 시선은 숭배는 아니더라도 안타까움과 연민 쪽에 가깝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 왜 다수의 선한 대중은 약한가. 왜 소수의 악한 권력은 강한가. 왜 약한 것은 무지하고 강한 것은 똑똑한가. 또는 무지한 것은 선하고 똑똑한 것은 악한가. 인간은 똑똑해질수록, 배울수록 악해지는 것일까. 대중은 과연 스스로 각성하고 조직하여 전체주의를 뒤엎을 수 있을까.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건전한 정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지속가능한 유능한 권력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

    소설 속 고문과 세뇌의 장면에서 오브리언과 윈스턴이 대립하는 주요지점도 이곳이다. 윈스턴은 무산계급에 의한 민중혁명이 가능하리라는 한 가닥 희망이 있다. 오브리언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다. 윈스턴은 결국 오브리언에게 설득당하고 굴복한다. 그곳은 특수한 미래세계, 암흑의 정치체제였다. 하지만 낙담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긍정의 신호들도 있다. 다행이 역사를 보면 악한 권력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계속 확장, 진보해왔다. 더구나 우리에겐 선거와 투표라는 무기가 있다.

    나 역시 대중을 무한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민주주의자다. 별의별 인간도 많고 인간에 대한 불신과 더불어 인간이성, 심성에 대한 믿음도 동시에 갖고 있지만 개별적 인간보다 집단으로서의 대중을 더 신뢰하는 편이다. 완전치 않지만 인류가 개발한 제도 중 아직 이보다 더 합리적이고 가능성 있는 제도를 발견하지 못했다. 인터넷 등 도구가 발전하고 집단지성의 축적이 본 궤도에 올라 직접참여민주주의가 혁명적으로 확장되면 또 다른 신기원을 이룰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날같은 희망, 혹은 막연한 믿음이 있다. 도구의 힘이 커지는 것은 그 자체로 선악이 아니고 혹 악용되면 텔레스크린처럼 더 숨막힐 듯한 세상이 되리라는 위험도 있지만 그건 차후의 문제다.


    이명박 정권의 한국은 오세아니아보다 밝다. 심지어 북한도 오세아니아보다 낫다. 하지만 민주주의와 인권, 인간의 행복은 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다. 대상에 비해 나쁘다 좋다 보다 나빠지고 있느냐 좋아지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과도한 인권, 적당한 민주주의는 존재치 않는다.

    일방적 통치, 민간인 사찰, 언론통제, 관료화 등 오세아니아와 유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급기야 정두언 한나라당 의원의 입에서 정권에 의한 정치인 사찰을 두고 빅브라더라는 발언까지 나왔다. 그가 지칭한 게 이명박 대통령의 큰형(Big Brother) 이상득 의원을 가리킨 것이라면 분명 엄밀한 의미에서의 소설속의 대형(Big Brother)과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과장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발언이다. 간단치 않은 상황이다. 지금도 충분히 좋지 않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경계할 일이다.


    소설은 어두운 역설과 괴변으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메시지 역시 역설이며 그래서 더욱 강력하다. 윈스턴은 대형에게 굴복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 최후의 무기는 진실이란 것을 역설하고 있다. 소설 속 미래는 끝없는 어둠의 심연으로 진입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인류와 미래에 대한 저주가 아니라 가장 강력한 경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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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1 : 정두언 의원은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를 말하고 이명박 대통령은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말하고... 이거 원 수준들이 까마득히 높으셔서 국민들이 올려다보기에도 송구할 지경이다.

    하지만 정 의원이 ‘1984’를 읽지 않았다는 거에 10원 건다. 읽었더라도 정독하고 감명받지 않았다는 데 100원 건다. 이 대통령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으시지 않았다는 거에는 10,000원 건다. 그저 여기저기 회자되며 유행이니까... 어디서 주워들었으니까... 참모들이 한 번 써먹자 하니까...

    단지 지적 수준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이 대통령이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었다면 그의 언행이 이럴 리가 없다. 정 의원이 ‘1984’를 읽고 뭔가 깊이 깨닫는 바가 있었다면 한나라당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PS2 : ‘전쟁은 평화’ & ‘4대강은 녹색성장’


    차이점 : 전자는 오세아니아의 현실, 이중사고에 의하면 절반의 진실이 담겨있는 고차원적인 명제. 후자는 단순 속임수. 공해를 주도하는 에너지 기업들이 내세우는 대표색이 그린(Green)인 것처럼 이미지 조작에 불과.


    공통점 : ① 납득가능, 수용가능한 방법으로 자원과 재화를 투입, 소비, 파괴한다는 것. ② 전쟁과 4대강(공사)의 목적은 그 자체에 있다는 것.


    잉여재화를 소진할 필요가 있을 때 전쟁은 가장 효율적이고도 수용가능한 방법이다. 즉 생산된 재화를 단순히 소각, 매몰, 분해하는 것보다 우주로 날려 보내고 지상에서 폭파시키고 깊은 바다로 가라앉히는 것이 대중이 더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이다.

    4대강 역시 마찬가지다. 돈을 토건족 등 자기세력에게 나눠줘야 하는데 그냥 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대한 구덩이를 팠다가 다시 메울 수도 없다. 그랬다간 당장 미친 놈 소리 듣고 국민들에게 쫓겨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물 자원 확보다, 홍수 예방이다, 녹색성장이다, 심지어 생명살리기다 별의별 명분을 갖다 붙이는 거다. 돈이 들어갔으면 뭔가를 내놔야 한다. 연구비가 들어갔으면 깡통로봇이든 짜깁기 논문이든 결과물을 보여줘야 한다.

    적극적으로 찬성하지 않는 이라도 ‘아~ 그래도 뭔가 부지런히 하려고는 하는구나’ 한다. 20여조가 넘는 세금?? 국민들은 배추값 몇천원엔 민감해도 가늠할 수 없는 조 단위에는 둔감하다.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납득가능, 수용가능하다. 하지만 구덩이를 팠다가 메우는 것과 같다는 거! 오히려 그것이 자연파괴는 덜하고 이후 예상되는 유지비, 재자연화 비용은 덜 드니 더 낫다는 거! 차라리 10조 그냥 지들끼리 먹고 떨어지는 것이 국민들에겐 이익이라는 거다.


    연말이면 멀쩡한 보도블럭을 드러내고 새 블럭을 돈 들여서 깐다. 공무원과 업자가 협잡하여 세금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결국 '보도블럭을 까는 것'은 '보도블럭을 깔기 위해서'다. 4대강은 거대한 보도블럭이다. 오세아니아에서 '전쟁'의 목적은 '전쟁' 그 자체에 있다. '4대강 공사'의 목적은 '4대강 공사' 그 자체에 있다.


    ‘전쟁은 평화’는 논파하기가 만만치 않은 강력한 역설이고 괴변이다. ‘4대강은 녹색성장’은... 그냥 억지다. 우격다짐이다. ‘4대강은 삽질’이다. 그것도 아주 해로운 - 인간의 삶과 생명까지 위협하는 치명적인 삽질이다.

 

 

    ※ 관련포스팅 ☞ <우리들> <멋진 신세계> <1984> 그리고 <죽도록 즐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