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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청계천 조형물 선정-김정란,서프라이즈 펌

어멍 2008. 3. 11. 23:28

 

  도시 공간을 장식하는 미술 조형물의 존재의미는 무엇일까? 인간은 왜 거대한 조형물을 도시 공간에 세우는 것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매우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수준에서부터, 그 조형물이 세워지는 구체적 공간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수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조형물이 단순한 눈요기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엄청난 공적 예산을 들여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의미에 관해 철저한 질문을 던져야 마땅하다.


  서울시는 최근에 팝 아트의 거장인 클라에스 올덴버그의 조형물 <스프링>을 복원된 청계천 들머리인 동아일보사 앞 광장에 세우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34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비용을 들여 제작되는 이 조형물은 꽈배기 모양의 인도양 조개를 지름 6m, 높이 20m가 넘는 나선형으로 재현한다고 하며, 내년 3월에서 6월 사이에 세워질 것이라고 한다. 우리 땅에 세워지는(그것도 관의 주도로) 거대한 조형물이 하필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는 것도 납득할 수 없거니와, 그것이 청계천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인도양 조개>라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도대체 왜 우리가 서울시 한 복판에서 외국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태평양 조개도 아닌 인도양 조개를 보아야 하는 걸까? 게다가 일반적인 가격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가격까지 지불해 가면서? <인도양 조개>가 대체 복원된 청계천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일까?

  이 조형물의 황당한 선정은 원칙이나 철학은 물론, 문화적 고려도 없이 후다닥 졸속으로 해치운 콩크리트 청계천 복원을 마감하는 그야말로 반문화적 마인드의 집적체처럼 느껴진다. 공간과 시간의 맥락에 대한 고려도, 역사적 고뇌도 문화적 성찰도 없다. 있는 것은 오로지 천박한 과시욕 뿐이다. 그 과시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국내 작가의 작품으로는 안된다. 반드시 <유명한> <세계적> 외국 작가의 작품이라야 한다. 그리고 돈을 엄청나게 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조형물이 비로소 <위대해지기> 때문이다. 돈의 과시야 말로, 자기 나라 작가를 자기 나라 거리를 장식하는 조형물 작가로 선택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문화적 열등감을 보상해 줄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이거 뉴욕이나 파리에 세워진 무엇무엇보다 더 비싼 값을 준 거요. 그러니 우리 게 더 나은 거요.
  클라에스 올덴버그는 복원된 청계천은 물론이고, 한국을 한번도 방문해 보지 않는 작가라고 한다. 그는 한국에 관해 완전히 무지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단지 책상머리에 앉아서 디자인을 해서 보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조형물이 한국 공간의 역사와 의미를 담고 있을 리가 만무하다. 작가는 아무 고뇌 없이, 한국이라는 특정한 공간 속의 더욱 특정한 공간인 청계천에 대한 아무런 미적/철학적/역사적 성찰 없이 작품을 디자인한 것이다. 서울시는 그런 작품을 몇 백만 달러씩 들여서 서울 한복판에 세우겠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작가는 설계도만 보냈을 뿐, 제작 자체는 국내의 공방에서 맡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서울시는 제작비를 제외하면, 설계도 한 장에 무려 몇 백 만 불을 지불하는 셈이다. 이런 결정을 보고  세계 미술계는 예술을 사랑하는 관대한 한국인이라고 칭송할까? 아니면, 무수한 자기 나라 작가들 다 놓아두고, 자국 공간에 대한 문화적 고려 없이 세계적 유명세만 쫓아다니는 문화적 후진국이라고 생각할까?

  물론, 모든 조형물이 다 그렇게 엄숙하고 진지할 필요는 없다. 때로는 생의 무거움을 걷어내며 맥락을 뒤트는 발랄한 해체적 조형물도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맥락이다. 어떤 맥락 위에 그 해체적 조형물이 놓이는가 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해체할 맥락이 구성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복원된 청계천에 대한 분명한 역사적 해석의 틀이 완성되어 있지도 않는 상태에서 들머리에 전시용으로 세우겠다고 하는 외국 작가의 <스프링>은 아무리 생각해도 뜬끔없기 짝이 없다. 그것은 아무것도 구성하지고 못하고(처음부터 구체적 공간에 대한 완전한 무지에서 출발했으므로), 아무것도 해체하지도 못한다. 그것은 그냥 텅빈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말해 주는 것은 우리의 문화적 열등감, 문화적 무지, 부끄러운 과시욕 뿐이다. 그것은 그야말로 <스프링>이 될 듯하다. 모든 의미가 빙빙 돌며 자기 자신으로부터 이탈하여 달아난다. 한국인들을 스스로를 소외시키기 위해서 돈을 참 많이도 쓴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며, 그것은 청계천을 인도양으로 끌고 가서 던져버릴 것이다. 그 스프링 사이로 무의미가, 문화적 열등감이, 세계인의 조롱이 풍풍 솟아나올 것이다. 우리는 돈을 들여서 우리의 문화적 소외를 세계 만방에 광고하게 될 것이다.

  도시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은, 그 안에 신기한 물건들을 맥락 없이 주르르 늘어놓는 일이  아니다. 모든 공간 안에 배치된 사물은 그 공간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문화적 의미, 그리고 생태적 의미와 함께 어울어지면서 드디어 그 미적 의미를 획득한다. 따라서 공적 장소에 놓이는 조형물은 그것이 놓이는 공간의 적절한 문화적 해석을 동반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는 텅빈 물건에 불과해진다. 공간을 공간이게 만드는 것은 시간이다. 인간의 공간은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적으로, 역사적으로 존재한다. 프랑스 혁명이 없는 바스티유는 없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이 없었다면 골고다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서울시의 문화적 무지는 걱정스러운 수준을 넘어서 분노하게 만든다. 언제나 되어야 우리는 불도저 시장이 아니라, 진정으로 문화를 이해하는 섬세한 시장을 가져 보게 될까. 언제나 되어야 문화란 돈 들여서 거창한 물건을 들여놓는 일이 아니라, 삶에 대한 철학을 완성하고 그것을 가시화하는 일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시장을 가지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