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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선언과 정세 그리고 지식인의 초상 ( 부제 : 군바리 장사치 먹물, 무서운 놈 웃긴 놈 속좁은 놈 )

어멍 2009. 6. 12. 18:02
 [1]


    엊그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맞물려 서울광장 등 전국각지에서 6.10 항쟁 기념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대규모 집회가 있었다. 그리고 시국선언에 참여한 교수들도 이미 3000명이 넘어섰다고 한다. 그 밖에 학생,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작가, 법률가 등의 시국선언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국내외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한편에선 뉴라이트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 교수 128명과 한국교회원로회 33명은 6월 9일 혼란과 분열, 대한민국 정체성 훼손이 걱정된다며 시국선언을 하지 말라는 시국선언(?)을 하였고 이명박 정권은 검찰과 경찰을 앞세워 엄정한 법집행이니 불관용의 원칙이니 하며 그들의 본색을 드러내고 있다.(빛과 소금을 자처해야 할 한국교회, 한국기독교주류가 기득권에 안주하고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하나님의 공의, 정의를 배반하고 불의와 반민주에 봉사하고 있는 점은 참으로 안타깝다.)

    권력을 위임하였으되 지배받지 않으려는 시민들과 권력을 위임받았으되 지배하려는 권력의 충돌은 당분간 계속될 듯싶다.


                                   6월 10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6월항쟁 계승, 민주회복 범국민대회'


 나는 당신의 의견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 볼테르 

    
    본색이 확연해진 권력과 시국선언을 반대하는 시국선언을 보며 볼테르의 경구나 ‘관용’에 대해 새삼 생각해보게 된다. 관용의 역설, 관용의 딜레마다. 우리는 어디까지 관용해야 할까. 무엇을 용서하고 무엇을 심판해야 할까. 그것은 누가 무엇을 기준으로 정하고 나눌 것인가. 오직 신만이 할 수 있다면 인간이 갖고 있는 사법을 포함한 정치, 행정 등 모든 제도와 법률, 규칙들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3000여명의 시국선언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가져온 419 혁명과 전두환씨의 항복을 받아낸 6월 항쟁의 그것을 뛰어넘는 역대 최대의 엄청난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과 한나라당은 꿈쩍도 하지 않고 이 의미를 깍아내리기 바쁘다. 왜 그럴까? 아직 배부르기 때문이다. 아직 위협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고 어영부영 시간이 지나면 제 풀에 지쳐 가라앉고 잊혀지고 사태가 호전될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경험으로만 보면 그럴 듯한 시나리오다. 두고 볼 일이지만 이번엔 간단치 않은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긴 상처가, 쉽게 치유되고 잊혀지기엔 너무 깊고 넓다.

    아마도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지지율격차가 벌어지고 한나라당의 정치적 본거지이자 어떤 곤경에서도 부활을 보장하는 자궁역할을 했던 대구경북지역에서도 지지율이 역전되고 크고 작은 정권반대집회가 열린다면 그때서야 비로소 국정쇄신의 제스처라도 취할 것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정치적 생존이 경각에 달려서야 너도 나도 이명박 대통령과 맞짱을 뜨고 그를 물어뜯으려 할 것이다.

    시국선언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전두환씨가 항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화염병과 최루탄이 날아들고 총알에 죽고 고문에 죽고, 측근들이 제 살 길을 찾고 권력기관들에 영이 서지 않아 국정이 마비될 지경에 이르고 결국 군중에 의해 경무대와 청와대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양보한 것이 아니라 항복한 것이요, 물러난 것이 아니라 쫓겨난 것이다. 권력이란 그 속성상 부모자식간에도 나누거나 양보할 수 없는 것이다. 더우기 그 권력을 쥔 자가 탐욕스런 소인배거나 독재자라면 더욱 그렇다.

    결국 정권을 바꾸는 것은 혁명 아니면 투표다. 이명박 정권이 무리한 위력을 가해 억압하고 자극하여 피와 죽음을 부르지 않는다면 다음 대선까지는 지루한 국지전, 공방전이 이어질 것이다.

    하는 꼴을 봐선 레임덕이 조기에 올 것 같지만 해가 아직 중천을 지난 것은 아니다. 해가 뜨기 전의 새벽이 가장 어둡기도 하지만 해가 중천에서 기울어지기 전이 가장 밝기도 한 법이다. 정두언 의원이 친박측을 비난하며 대통령을 고사시켜 한나라당을 땡처리 접수하려 한다고 한 것처럼 시간은 친박측의 편이기도 하지만 또한 범민주세력의 편이기도 하다.

    대선이 가까워지고 레임덕이 심해지면 박근혜 의원뿐 아니라 보수진영의 대선후보가 누가 될지라도 이명박 대통령과 차별화하기 위해 그를 격하시키고 심지어 정치적으로 보복, 매장시키려 할지도 모른다. 전두환씨는 친구인 노태우씨도 지켜주지 못했다. 초록은 동색이지만 차별화하기 위해선 명도라도 더욱 차이나게 드러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최악(or 최선)의 경우엔 임기내에 민중이 아니라 국회의원들에 의해 쫓겨날 수도 있다. 이명박 정권을 위해 부역했고 그와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주홍글씨같은 저주의 딱지가 붙여져 자신들의 정치생명을 위협한다면 너도나도 탄핵에 앞장서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친박과의 갈등의 양상, 특히 다가올 각종 선거결과에 따라 정도,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이명박 대통령의 몰락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다.

    그러나 이명박의 몰락이 곧바로 노무현의 복권을 의미하진 않는다. 보수가 이명박 대통령을 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와 죽음에 관련된 불법과 내막을 밝히는 것을 계기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죄목은 중요치 않다. 아마 이명박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했던 것처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몰아내려했던 탄핵사유처럼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한나라당을 포함해 이명박 대통령의 적은 많고 그의 죄는 널려 있다. 그의 힘이 빠지고 그에게 더 이상 빨아먹을 국물이 없어지면 이 모든 것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자살골을 넣으며 바닥을 드러내고 한나라당은 지리멸렬하여 시간은 범민주세력의 편이니 전망이 낙관적이기는 하지만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단기적으로는 미디어법, 공기업 사유화, 4대강 정비 등 제도적 후퇴, 특히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 후퇴를 막는 것이 급하고 정권교체를 위해 멀리 보고 차근차근 준비해야 한다.

    조중동, 한나라당을 위시한 기득권 체제를 과소평가해선 안 된다. 저들은 막강한 돈과 정보와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독재자 박정희씨의 유지를 받들어 전두환씨가 집권했고 전두환씨를 디딤돌 삼아 노태우씨가 집권했고 노태우씨를 짓밟고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집권했다.

    박근혜 의원이 이명박 대통령을 철저히 짓밟고 집권할 수도, 서로가 연정, 정치적 타협을 통해서 집권할 수도, 제 3의 인물이 반성, 쇄신, 환골탈퇴를 내걸고 짜잔 하고 나타나 집권할 수도, 아니면 아예 내각제 개헌을 거쳐 보수대연합을 통해 집권할 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대선에 맞추어 돈, 정보, 공권력을 쏟아 붓고 조중동이 몇 개월간 북치고 장구치면 못해낼 일도 아니다.

    실력을 키워야 한다. 스스로의 힘으로 당당히 권력을 쟁취해야 한다. 이명박의 퇴장이 박근혜의 등장으로 이어지게끔 해서는 안 된다. 적어도 무주공산에 떨어진 보검을 엄한 놈이 낼름 주워가게 해서는 안 된다.



[2]


    어떻게 3000여명이 넘는 많은 교수들이 시국선언에 참여했을까. 시국이 엄중하기도 해서지만 지식인 특유의 심리가 작용하였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심리는 어찌 보면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것이다. 사회 어느 부문이든 종족보존, 조직의 생리라는 것이 작용하여 배타성을 띄지만 지식인 사회가 유독 군인, 장사치에 강하게 갖고 있는, 소위 무식에 대한 경멸이 어느 정도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박정희씨는 시시콜콜 따지고 걸고넘어지는 지식인들을 탁상공론이나 일삼는 방해물, 심지어 무능력자, 무위도식자로 보기도 했고 지식인들 역시 군바리 출신 박정희씨에 대해 경멸의 정서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공화당 성향의 먹물들까지도 예외가 아니었다.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두려움에 대놓고 나서지 못했을 뿐이다. 지금이야 밥통을 걸어야 하지만 그때는 목숨을 걸어야 했으니까.



천상 군바리, 천상 장사치 - 박정희씨는 공포! 이명박 대통령은 코미디!

                                                      (주위의 표정을 봐도 삼엄하고 명랑하다)


    이명박 대통령과 지식인들의 관계도 대동소이하다. 기본은 (당~연히) 있을 CEO라고 봤는데 기본도 없는 장사치, 장돌뱅이임이 드러났다. 맞춤법, 문법은 고사하고 사고와 품행의 수준이 좌충우돌, 가관이다. 반대의 차원을 넘어 부끄럽다는 거다.

    하지만 지식인들은 이런 깡통도 경멸하지만 속이 꽉 찬 묵직한 납덩이도 불편해한다. 특히 그가 교수, 지식인 계급, 조직이 아니라면 따돌리고 조롱하고 괴롭히기까지 한다. 그런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었다. 노무현과 지식인들의 관계는 박정희와 지식인, 이명박과 지식인들의 관계보다 나쁘면 나빳지 좋지 않았다. 그는 어떤 분야, 어느 교수와도 토론이 가능하고 한시간 이상 대화를 이끌 수 있으며 상대에게 이견과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상대의 오류를 지적해 낼 수 있는 유일무이한 정치인이었다. 그런 그였기에, 고졸 출신에 변변한 학위도 없는 그였기에 교수, 지식인들은 그를 더욱 싫어했다. 그들에겐 지식에 대한 열정, 진실에 대한 겸허함보다 어디 출신, 어떤 학위인지가 더 중요했다.


    언젠간 출사하고 등용되기를 바라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잠재적 폴리페서들이 박근혜 의원을 비롯한 고만고만한 정치인 주변에 몰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YS가 읽은 책보다 DJ가 쓴 책이 더 많다'라는 전설의 주인공, '건강은 빌릴 수 없어도 머리는 빌릴 수 있다'고 강.역.키(!) 주장하셨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주위에도 교수, 언론 장학생 등 먹물들이 꽤나 많이 모여들었썼다. 너무 무식해서도, 너무 똑똑해서도 안 된다. 내 말을 이해는 하되, 내 말에 이의를 제기할 수준이 돼서는 안 된다. 다만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내 의견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거기까지가 속 좁은 지식인들이 바라는 정치인, 주군의 모습이고 수준이다.

    하기야 역할도 없고 쓸모도 없고 인정받지도 못한다면은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비워야 채울 수 있고 대현(大賢)은 대우(大愚)라고도 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춘추전국시대에도 수많은 책사, 사상가들이 저마다의 꿈과 이상을 실현하고자 유방과 유비 같은 인물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소양이 부족하면 머리를 빌리더라도 한계가 있다. 또한 진짜 어리석은 것과 어리석은 현명함은 다르고, 몰라서 못하는 것과 알고도 안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다.

    지식인들은 노무현을 불편해하였지만 그렇다고 노무현이 적나라한 권력이나 자기만의 얕은 꾀만 믿고 독단적으로 밀어붙이는 폭군이나 헛똑똑이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가 임명하였지만 그를 배신했던 검찰의 임채진 전 총장, 국세청의 한상률 전 청장 같이 용인술에 철저하지 못했고 권력기관을 풀어주었으되 개혁하진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의 주위에는 끝까지 의리와 신의를 지키는 훌륭하고 유능하고 강직한 인물들이 여전히 많다.


                                                천상 사상가 - “나를 설득하시오. 그럼 따르겠소.”

    그는 항상 참모와 각료들과 토론하고 의견을 모아 결론을 이끌어냈다. 그는 사고의 깊이와 폭은 물론이고 새로운 관점, 반짝이는 아이디어에도 항상 개방적이고 겸손하였고 새로운 지식에 대한 열정과 탐욕이 끊이지 않았던 천상 지식인, 사상가였다.

    하지만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지식인들은 그가 의제나 의견을 제시하고 말을 건네면 함께 토론하고 의견을 나눌 생각은 안하고 문제를 받아든 학생처럼, 공안을 받아든 동자승처럼 혼자 끙끙 앓고 씨름하다가 대안제시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반대하고 문제지를 쓰레기통에 처박기 일쑤였다. 그러면 조중동은 때론 앞장서 부추기고, 때론 뒤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증폭하기만 하면 된다. 결국은 모든 분란의 근원으로 여기고 모두가 귀찮아하고 회피하고 혐오하기에 이른다. 시끄럽다는 거다. 피곤하다는 거다. 이것이 그의 반대자들이 불편해하며 비판했던 카오스정치의 실체, 국민스포츠가 된 '이게 다 노무현때문이다'라는 조건반사식 푸념의 밑바닥에 흐르는 심리의 정체다. 지지자인 나까지 때론 피곤하고 혼란스러웠으니 반대자들이야 오죽 했겠는가. 선거제도 개혁을 목적으로 한 대연정과 87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개헌론 등을 둘러싼 정치권, 지식인 계층의 벌떼 같은 반대와 원천봉쇄와 같은 외면에서 이러한 상황은 여실히 드러났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국민들, 특히 진보진영의 조급증을 질타했지만 그 스스로 조급해 한 면이 있다. 그가 질타한 조급증은 작고 소소한 것을 당장에 손에 많이 쥐고 싶어하는 조급증이었고, 내가 지적하는 조급증은 크고 굵직한 것에 대해 빅딜을 하고 적어도 문제제기라도 해보자는 그의 조급증이다. 지지자도 반대자도 당장 따먹을 수 있는 열매를 원했지만 그는 여기저기 파헤치고 밭을 갈고 땅힘을 키우는 데에 오히려 더 힘을 쏟았으니 조급하기로는 매한가지였다고 봐야 하나. 넓고 멀리 볼 수 있는 국정의 최고자리에서 당연히 보일 수밖에 없었던 대한민국의 현재, 미래에 걸친 갖가지 문제점을 외면할 수야 없었겠지만 전술적으로는 패착이다. 내 기억으로는 대한민국의 중요한 과제와 문제점치고 안 건드린 것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국민들도 피곤할 밖에. 이룬 것도 있고 접은 것도 있고. 실패하더라도 자신이 이 시점에서 한번쯤은 제기하고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역사에 대한 의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는 선천적으로 문제를 설렁설렁 건너뛰며 풀 수 없었던 결벽증을 갖고 있는 학생이었다. 결국 접고야 말았지만 열린우리당까지 들고 일어나 반대하는 개헌론을 국회계단 앞에서 혼자라도 발의하려는 시도는 이를 잘 말해준다. 로드맵이란 용어를 유독 중요시했고 결국 퇴임을 앞두고도 비전 2030이라는 미래보고서를 후임정권에 남겨준다.

    지지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자면 선천적인 이상주의, 결벽주의자였던 그는 조급했고 또한 순수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지식인들과의 토론을 통한 합의, 정치세력과의 빅딜을 통한 거래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결국 동상이몽처럼 남자는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고, 여자는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누가 죽음으로 내몰았나. 이명박 대통령? 조중동? 한나라당? 그 방식의 치졸함, 잔인함이 원통하고 분하지만 정치생리적인 측면에선 충분히 추측가능한 일이었다.

    수양대군은 왜 폐위시켜 유배중인 단종에게 구지 사약까지 내려보냈을까. 수양대군이 단순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삼촌이었기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단종을 옹립하려는 세력이 있었고 언제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권력에겐 실질적인 위협이었다.

    퇴임 전부터 한나라당에서는 퇴임 후 노무현에 대해 걱정이 많았다. 거의 알레르기 반응이라 할 정도로 정치활동을 하네 마네, 총선에 출마하네 마네 먼저 북치고 장구치고 머리굴리기 바빴다. 그리고 이명박 대통령 취임 후 현 대통령의 인기는 급전직하, 낙향한 전 대통령의 인기는 올라가는 우려스런 상황이 벌어졌다. 이제는 단순한 시기, 질투, 열등감의 차원을 벗어났다. 잠재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것이다. 더욱이 한나라당, 조중동, 검찰은 지난 5년간 와신상담, 이를 갈만한 구원(舊怨)이 있어왔던 바다.


    가치와 이념을 떠나 정치생리가 그렇다. 왕조시대에도 혁명이나 반정이 아닌 환국만 하더라도 어김없이 피가 난무하는 정치보복이 있어왔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싹을 자르고 씨까지 말리려는 처절한 것이었다.

    ‘아부는 화끈하게, 보복은 처절하게‘

    권력이 생존하고 권력에 줄서는 법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21C 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조선시대에나 있을 법한 삼족을 멸하고 부관참시하는 정치보복이 4800만 국민들이 지켜보는 대명천지에, 속옷까지 홀딱 벗고 화끈하게 충성하는 검찰의 주도하에 신문과 방송을 총동원하여 공공연하게 자행된 것이다.

    정치생리상 이명박 대통령, 조중동, 한나라당의 동기와 행태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정치가 서로 배신하고 보복하고 속여먹고 이합집산 옮겨다니고 하는 것이 각자 다 제 살길을 도모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뜻있는 정치인, 지식인, 시민사회, 종교계, 문화계 등이 들고나서 막아야겠지만 결국은 유권자인 시민이 이것을 얼마나 제대로 간파하고 제어하고 심판하느냐에 달려있다.

 

    지식인이란 무언가. 잠수함 속의 토끼, 새벽에도 깨어있는 보초병,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가들이다.

    선비란 무언가. 아무리 배곯아도 땅에 떨어진 음식은 먹지 않고, 아무리 추워도 곁불은 쬐지 않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하는 것이 선비다.

    어찌 보면 지난 대선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지식인도 없었고, 선비도 없었다. 이명박 후보 캠프에는 군인, 관료, 기업가 등의 직종보다 교수의 직업군이 예전보다 월등히 그 비중이 높았었다. 지식인들이 썩었고 교수들은 지난 5년간 ‘노무현 때문이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한국노총은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와 정책연대를 하고 일부 대학생 단체는 이명박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 일부이지만 진보의 마지막 저지선까지 돌파당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전경련 회장단이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를 지지선언하고 타워팰리스 부녀회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선언한 것과 같다.
    사회의 마지막 보루는 지성이다. 대학이 썩었고, 지식인들이 썩었고, 사법부가 썩었으면 볼 짱 다 본 사회다.


    역사의 법정에서 이명박 대통령, 조중동, 한나라당, 검찰이 앉은 피고석 옆에 마련된 또 한명의 공범의 자리는 지식인의 자리다.

    그리고 그는 임무를 방기한 죄로 그들보다 가중처벌될 것이다.

    이것이 결론이다.




PS : 쓰고 보니 너무 정치공학적인 것 같아 좀 그렇다.

정치에는 꿈과 이상의 향기, 부푼 희망이 있어야 하는데...

정당에도 이것이 없다면 단순이익집단, 패거리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가 정치, 정치인에 감동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 보여주는 꿈과 이상, 희망 때문이지 않은가.

정책과 이익을 말하면 각자 이해에 따라 수백, 수천명을 움직일 수 있지만 꿈과 이상과 비전을 제시하고 시민들을 감동시키면 수십만, 수백만명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