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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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고도 소중한 두 가지 꿈 이야기

어멍 2009. 8. 2. 00:16

[1]

 

    아버지는 세찬 바람이 부는 벌판에서 홀로 연을 날리고 계셨다. 그 곳은 산도 나무도 풀도 없는 적막하고 황량한 허허벌판이었다.

    머리엔 몇 올 남지 않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고 야위신 몸으로 얼레도 없이 한 가닥 가느다란 연줄을 작아진 한 손으로 부여잡고 계셨다.

    방패연은 왜 그리도 큰지....회색빛 하늘을 절반이나 가리고 있다. 금세 끊어질 듯, 딸려갈 듯 불안하다.

    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이다. 고통도 슬픔도 힘겨움도 없이 단지 지치고 쓸쓸한 기색만이 언뜻 스칠 뿐이었다.

    나는 그 곳에 없었다. 손을 뻗치면 잡힐 듯한 거리였지만 나는 그림책을 보듯 바로 옆에서 지켜볼 뿐 그 연을, 그 손을 잡아드릴 수 없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이상하게도, 슬펐지만 나는 꿈속에서 울지 않았다.

 

 

    1996년에 꾸었던 꿈이다. 당시 아버지는 오랜 투병 끝에 거동을 못 하시고 극도로 허약해진 상태셨고 어머니와 나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24시간 교대로 간병을 하고 있었다. 이 꿈은 어머니와 교대한 후 잠시 건넌방에서 잠이 들었을 때 꾸었던 꿈이다. 그리고 2,3일 후에 아버지는 운명하셨다.

    꿈속에서 나는 울지 않았지만 꿈을 깨면서 나는 울었다. 그리고 깨고 나니 베갯잇이 흠뻑 눈물에 젖어 있었다.

 

 

[2]

 

    누군가 칠판에 무언가를 쓰며 가르치고 있다. 그는 노무현이다. 교수인 것도 같고 선생님인 것도 같고...하지만 수수한 차림이 대통령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교탁 바로 앞자리에서 그의 수업을 경청하고 있다.

    수업의 주제는 정치인 혹은 사상가나 철학자의 발언, 원문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거다. 정확한 번역은 무엇인지, 그 발언의 함의와 의도는 무엇인지 그는 원문과 번역문을 나란히 쓰며 설명하고 있다.

    그는 불쑥 자신은 ‘묻지 않는 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나에게도 갑자기 슬픈 각성이 든다. ‘저 분은 얼마 있으면 죽을 분이다. 자결을 예약해 놓은 분이다. 내가 말려야지. 어떻게든 막아야지’ 하지만 다음 순간 더 큰 슬픔이 엄습한다. ‘어? 저 분은 이미 죽었는데! 내 앞에 서 계신 저 분은 죽은 사람이구나!... 아~~ 꿈이로구나!’ 나는 꿈속에서 이것이 꿈임을 알아버렸다.

    나는 북받치는 슬픔에 머리를 책상에 파묻고 수업에 방해가 될까 봐, 이 소중한 꿈이 깨질까 봐 입을 틀어막고 조용히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이윽고 모두들 슬픔을 못 이겨 너도 나도 흐느낌이 통곡이 되고 만다.

    노무현 선생님은 별 반응이 없다. 슬퍼하지도 위로하지도 않는다. 얼굴이 보여지진 않지만 표정에 변함이 없다는 것은 안다. 그 분은 그저 묵묵히 수업을 이어갈 뿐이었다.

 

 

    며칠 전 꾸었던 꿈이다. 살아생전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결국 꿈속에서 처음 만나 뵙게 될 줄이야.

    꿈속에서 나는 눈물에 콧물에 서럽게 흐느끼고, 소리내어 통곡까지 하였지만 잠에서 깨어보니 나는 울고 있지 않았고 베갯잇도 젖어 있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노제때 서울광장 위로 드리운 오색채운

님이시여. 힘들고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이제 훨훨 날아가 편히 쉬소서.

 

 

 

[3]

 

    아버지의 꿈속의 모습, 표정은 10여년이 지났어도 생생하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의 꿈은 며칠 전 것인데도 그 모습이 모호하다. 얼굴도 볼 수 없었고 특유의 육성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노무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하긴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아버지의 꿈속의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나는 단순한 관찰자, 객체였다. 그 곳에 없었다. 나는 단지 안타까워할 뿐 아버지를 도와드릴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꿈속의 주인공은 나였다. 스스로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며 그 곳에 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지 슬퍼할 뿐 역시 노무현 대통령을 도와드릴 수 없었다. 도와드릴 것이 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나는 꿈을 깨며 울지 않았다. 이미 많이 슬펐고 울었고 노무현의 죽음은 되돌릴 수 없이 이미 일단락된 것이니까. 하지만 아버지의 꿈에서 깰 때 나는 많이 울었다. 아버지가 바로 옆방에 누워계시니까. 아직 감내해야할 슬픔과 안타까움이 남아있으니까. 아직도 힘겨운 싸움을 하고 계시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왜 선생님(혹은 교수님)으로 나타나셨을까. 내가 그를 권력자, 대통령으로 보지 않고 선생님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나를 가르치는 사람, 내가 배울 만한 사람, 단순한 지식이나 기술의 전수가 아닌, 고지식하고 권위적인 선생이 아닌, 일생을 걸고 닮고 싶은 사람, 존경과 사랑과 우정을 함께 하는 흠모하는 삶의 스승이요 다정한 친구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꿈속에서 가르쳤던 것은 무슨 과목이었나. 정치학, 영문학, 언론학, 철학, 번역학?? 영어든 국어든, 정치인의 발언이든 사상가의 발언이든 그는 원문의 풀 텍스트(Full Text)를 정확히 옮기고 해석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었다. 조중동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배웠다는 지식인들까지 파편화된 얕은 지식과 정보로 그를 왜곡하고 헐뜯기 바빴다. 혹은 무지해서 혹은 의도적으로 한글도 온전히 옮기지 못하고 엉터리 번역과 해석을 자행했다. 그 결과 많은 국민들이 그를 오해하고 외면하고 저주했다. 그가 가장 억울해하는 바고 내가 가장 억울해하는 바다.

 

    그는 느닷없이 ‘묻지 않는 자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꿈속에서 그의 생각이 혹은 나의 생각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었다.

    ‘누군가 계속 당신을 응시하고 있다면 당신은 그가 누구인지, 무슨 이유때문인지 당연히 의문이 생길 것이다. 당신은 그에게 다가가 물어야 한다. 그것이 정상이고 자연스럽다. 묻지 않고 자리를 뜨거나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하는 것은 비정상이다. 그것은 무기력이요 가장 원초적 비겁함이다.’

    그는 갈수록 자기자신만 챙기고 자기자신 속으로 도피하려는 나약하고 비겁한 우리들을 질타한 것이다. 궁금해도 묻지 않고 외면하고, 빼앗겨도 빼앗긴지 깨닫지 못하고, 알고서도 분노하지 않거나 오히려 불의한 강자의 아량과 은혜에 의존하는 굴욕을 기꺼이 감수하려는 우리들을 질타한 것이다. 조롱과 무시를 당하고도 화내지 않고 경멸과 능욕을 당하면서도 몸부림치지 않는 것은 노예나 가축의 삶이다.
    묻지 않으면 대답도 없다. 소통도 없다. 신문에 TV에, 보여주는 대로 보고 들려주는 대로 듣고 주는 대로 먹고 하라는 대로 하는 사회. 수동적인 감각의 소비만 있고 능동적인 사고의 각성은 없는 사회. 들리는 것(聽)만 있고 듣는 것(聞)은 없는 사회. 보이는 것(視)만 있고 보는 것(見)은 없는 사회. 묻고(問) 답하는(答) 소통(疏通)이 없는 사회. 빅브라더에 의해 조종되고 사육되는 사회, 결국은 길들여져 존엄을 반납하고 쾌락만을 쫓는 사회다.

    오직 일방적인 폭주와 폭력, 교묘한 통제와 거짓 평화, 굴종적인 침묵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은 점점 도전하고 저항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결국에는 생각하고 의문을 품고 물을 수 있는 능력마저도 거세당하고 있다. 시민 위에 군림하여 통치하려는 지배자들이 꿈꾸는 이상향, 즐겁게 뛰놀다가 조용히 죽어가는 온순한 양떼들만 사는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다.

 

    꿈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현실의 그림자, 무의식의 반영이라고도 한다. 꿈을 불가사의한 초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것도 곤란하고 시시콜콜 의미를 부여하고 억지로 해석하려는 태도도 주관에 주관을 더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어 곤란하다. 하지만 꿈에는 나름대로의 어떤 의미, 상징이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꿈과 현실.

    나쁜 꿈, 불행한 꿈만 생산해내는 현실, 제발 꿈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비극적 현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현실로 이루어질까 두려운 슬픈 꿈은 싫다.

    좋은 꿈, 행복한 꿈만 꿀 수 있는 현실이었으면 싶다. 현실로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즐거운 꿈만 꾸고 싶다. 아름답고 깜찍하고 재미있는 신나는 꿈만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