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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25 : 역대상 4장~29장

어멍 2010. 9. 15. 00:17

    성경읽기 0025 : 역대상 4장~29장


    역대상, 하 = 歷代上, 下 = Ⅰ(Ⅱ) Chronicles

    유대민족의 역대 왕들과 그 계보에 대한 이야기로 영어로 Chronicle은 기록, 연대기란 의미다. 상은 다윗까지의 역사, 하는 솔로몬 왕부터 유대 왕국이 멸망하기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사무엘(특히 사무엘하), 열왕기와 많은 부분에서 그 내용이 겹친다.

    역대상의 주요 인물은 사울, 다윗, 유다의 여러 왕들, 이스라엘 지파의 주요 인물들이다. 핵심어는 ‘왕가의 계보’와 ‘헌신’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 왕권에 이르게 되는 유다 지파인 다윗 왕가의 계보를 특별히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4장 9절

야베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더 존경을 받았습니다. 야베스의 어머니는 ‘고통 중에 아들을 낳았다’는 뜻으로 그의 이름을 야베스라고 지었습니다.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 그 어미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수고로이 낳았다 함이더라.

10절

야베스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기도드렸습니다. “나에게 복을 주십시오. 나에게 땅을 더 많이 주십시오. 나와 함께 계셔 주시고,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내가 누구한테도 고통을 당하지 않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야베스의 기도를 들어 주셨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기도(Prayer of Jabez)>다. 찬양의 곡명도 있고 2001년에 나온 브루스 윌킨슨(Bruce Wilkinson)의 동명 베스트셀러 이름이기도 하다. ‘야베스’는 히브리어로 ‘재앙’ 혹은 ‘고통’을 의미한다고 한다.

    책의 주요 내용은 10절 말씀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에 대한 묵상이다. 책이 출간된 이후 이 구절이 주기도문마냥 하나의 기도의 샘플, 전범으로 많이 암송되고 묵상되어진 듯하다. 검색을 해보니 책에 대한 평가, 구절에 대한 의견이 극과 극은 아니나 많이 상이하고 대비된다. 요점만 간략하게 저자의 말을 들어보고 또 다른 의견을 들어보자.


역대상은 지루하고 어렵다. 4장 1절부터 베레스, 헤스론... 등등 44명의 이름이 쭉 나오다가 갑자기 이야기 하나가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다. 9절과 10절의 야베스 이야기다. 그리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다 지파의 이름이 다시 이어지고 있다. 글룹, 수하...

“참, 잠깐만요!”라고 불쑥 말을 내뱉고는, “이 야베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하고 달랐거든요!”라고 설명을 덧붙이는 듯하다. 실지로 그는 다른 형제들보다 존귀한 자였다. 하지만 성경에는 이 짧은 두 구절 외에는 더 이상 그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는 왜 다른 사람과 달랐고 더 존귀했는가. 지극히 평범하였지만 지극히 신실했기 때문이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 재앙과 고통의 야베스! 그는 자신은 복을 받을 수 있는 후보자가 아니라고 느꼈을 수도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얼마나 많은 이가 불우하고, 좌절하고 자포자기하는가. 하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본성은 너무나 풍성해서 아무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그 선하심을 흘러넘치게 하신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은 하나님의 자원이나 능력이나 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 때문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자신 때문에 제한을 받고 있다.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넓혀주셔서 하나님을 위해 더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다.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 우리를 이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의 손은 ‘위대한 접촉’이라고 부를 수 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던 일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권능으로 가능해지며 그럼으로 하나님께서 위대해지시는 것이다.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 죄와 전쟁을 가장 효과적으로 다루는 방법은 유혹에 맞서 불필요하게 싸우는 일이 없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야베스는 신실한 마음으로 최선의 것을 온 마음을 다해 구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 그럼으로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해졌다. 하나님이 존귀한 자로 그 명부에 올리셨다.

- 브루스 윌킨슨 <야베스의 기도> 요약 -

 

    또 다른 의견, 해석이다.


이 책은 야베스가 했던 기도의 내용을 가지고 동일하게 구체적으로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복에 복을 더 해주시고, 지경이 넓어지고, 걱정과 근심이 떠나가고, 환란과 근심이 찾아오지 않는다는 기도의 샘플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각 영역에서 다양한 비판들이 꾸준하게 제기되어 왔다.


김홍만 박사는 <야베스의 기도>에서 간과하고 있던 역대기서의 역사적 배경과 야베스의 정황을 지적한다. 야베스가 개인의 영토, 땅을 확장하는 이기적인 목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원수인 가나안 백성을 쫓아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일은 실로 중하고 힘들며 위험한 어려운 일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주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하나님을 향하여 목숨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여 절박하게 부르짖었던 것이다. 야베스는 이런 진실되고 열정적인 경건함 때문에 그 형제보다 존귀함을 얻었던 것이다.

환난과 근심이 없게 해달라는 기도는 가나안과의 전투 속에 목숨이 경각간에 달리는 위험한 상황들 속에서 하는 기도의 내용이라는 것을 분명히 생각해야 한다. 단순히 걱정과 근심없는 안락한 삶을 구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야베스의 기도는 자기 성취와 성공을 위해서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서 주문처럼 읊조리는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의 포커스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자신의 이기적인 성공을 위한 기도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명령을 위한 자신의 피흘림이 있는 가운데 살아 숨 쉬는 기도인가 하는 부분이다. 김홍만 박사는 윌킨슨의 이 책이 경건에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성경적이지도 않은 기도에 대한 책이고, 성경적이지 않은 신학을 근거로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말한다.


기도는 우리가 필요할 때 동전을 넣으면 자동으로 나오는 자판기가 아니다. 우리의 문제가 해결되기 위한 기계적인 공식이 기도가 아니다. 한국의 모든 종교들은 ‘비나이다. 비나이다.’ 종교인 샤머니즘과 융합되지 않은 종교가 없다. 한국기독교 역시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만일 문제를 해결하고 복을 빌기 위한 도구로서의 기도라면 부처나 성황당이나 무당에게 비는 다른 종교와 다른 점이 무엇인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서 4:6,7]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리하면’ 이하에 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문제를 해결하시고 복을 주시는가?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낙망치 않고 붙들어 주시는 것에 집중하고 계신 것이다. 여기에 놀라운 기도의 원리가 있다.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은 문제 해결과 세속적인 복에 있지 않다. 우리가 진정 바라보고 앙망해야 할 것은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에 동행하시는 그 하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 출처 : 낮은 울타리 -

 

    두 견해가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 이게 정통이고 저게 사이비라고 무 자르듯 판단할 순 없다. 하지만 두 번째 견해는 음미할 만하다. 유독 야베스 이야기가 특이하게 언급된 것이 야베스가 큰 부를 이루었거나 많은 땅을 소유한 세속적 성공스토리의 주인공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전쟁, 기아, 질병 등 비극적이고 절망적인 상황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불굴의 용기로 드라마틱하게 극복해낸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을 법도 하다. 기도문이 범상치 않은 게 간결하면서도 비장하고 절제되었으면서도 자못 슬프기까지 하다.

    개역한글판이 자연스러우면서도 깊은 맛이 있다. 본래 뜻을 더 잘 드러낸다고 보여진다. 반면 <쉬운 성경>은... “땅을 더 많이 주십시오.” “나를 해치지 못하게 해 주십시오.” 왠지 어색하고 부자연스럽다. 존귀한 야베스가 갑자기 경박하고 비루해진 느낌이다. 돌연 두 번째 견해로 마음이 기운다.

    가장 놀라운 기도의 응답은 바로 하나님이 내게로 다가와 나와 함께 계시는 것, 항상 우리 곁에 계시는 그 분을 만나고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21장 1절

사탄이 이스라엘을 괴롭히려고 일어났습니다. 사탄이 다윗의 마음속에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세어 보고 싶은 욕심을 주었습니다.

7절

하나님께서 이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다윗의 인구조사와 그에 따른 하나님의 벌이다. 이미 사무엘하 24장에서 언급된 바 있다.(성경읽기 0021) 새롭게 드는 의문은 왜 그것, 인구조사가 죄가 되는가이다. 왜 그것이 욕심이고 왜 하나님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을까.

    오늘날 인구조사는 몇 년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시행되며 요긴하게 쓰인다. 언뜻 인간에게 유용한 행위이고 적어도 가치중립적인 행위라 여겨진다. 그런데 왜??... 아마도 단서는 ‘욕심’에 있으리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닌 다윗 본인의 왕국의 영광과 권력 강화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리라.

    때는 바야흐로 사울의 추적과 핍박에 도망자 신세였다가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끝에 왕이 되어 안정적으로 권력의 맛을 보면서 전쟁에서 잇따라 승리하던 다윗이었다. 자신의 왕권과 더불어 여전히 불안하고 허약한 국가를 더욱 안정되고 부강하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왕의 당연한 책무, 소명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문제는 그 전에 그의 욕심이 먼저였다는 거다.

    고래로(현재도 마찬가지지만 특히) 인구조사의 주목적은 세금징수와 군대편성에 있다. 곧 인두세와 징병제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악한 권력자들은 채 익지도 않은 낱알을 세는 것처럼 가혹하게 조사하여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매기고 20세 이하 어린이들까지 군대로 끌고 가기도 했다. 가렴주구(苛斂誅求), 학정맹어호(虐政猛於虎)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서 이런 불순한 의도와 욕심을 보신 것이다.


    중요한 건 의도이다. 마음이다. 땅의 법률로는 행위, 결과가 중요하겠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시기엔 이것이 더 중요하다. 민수기에서 백성의 수를 계수한 것은 권력 강화나 사익추구의 목적이 아니었다. 왕과 장교들의 권력 강화, 자리보전을 위함이 아니었다. 당연히 하나님의 노하심과 벌하심도 없었다.

    무릇 믿음 깊은 자, 특히 신실한 지도자라면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하고 개인의 영광을 쫓으며 권력만을 탐하고 만끽하려 해서는 안 된다. 교만에 빠져 권력을 사유화하고 개인의 욕심만을 채우려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더 큰 죄는 없다.

    일찍이 하나님은 왕을 세우려 하는 백성들을 책망하시며 그들이 세운 왕으로 인해 그들 자신이 고통받고 박해받을 것이라고 예언하셨다.(사무엘상 8장, 성경읽기 0018) 스스로 교만하고 하나님보다 자신들이 세운 지상의 왕-그것이 권력이 될 수도 있고 돈이 될 수도 있다-만을 따르려는 것이 죄의 시작이다.

    권력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백성을 편안하고 윤택하기 위해서만 있어야 한다. 하늘엔 영광 땅엔 평화다. 국태민안(國泰民安)이다. 겸손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기독교 장로인 이명박 대통령 뿐 아니라 비기독교도라도 모든 크고 작은 권력자, 권세가들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29장 14절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나왔습니다. 우리는 주께서 주신 것을 돌려 드린 것뿐입니다.

15절

우리는 주 앞에서 우리 조상들처럼 외국인이나 나그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시간은 그림자와 같아서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19절

내가 준비한 성전을 그(솔로몬)가 지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다윗이 여호와를 찬양하며 드리는 기도다. 다윗은 신실한 사람이었다. 비록 밧세바와의 간음, 인구조사 등의 죄를 짓기도 하고 밧세바 사이에서 나은 첫째 아기의 죽음과 아들 압살롬의 반란과 죽음에 슬퍼하고 울부짖었던 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이었으나 본디 악하고 고집 센 사람은 아니었다. 잠시 하나님을 떠나더라도 결코 멀리, 오래 가진 않았다. 그런 그가 아들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을 유훈으로 하고 죽는다.

    성전은 솔로몬이 본격적으로 건축하고 완성하였지만 사실 아버지 다윗의 공이 더 컸다고 봐야한다. 그가 설계도에서 자재와 인력까지, 성전건축에 필요한 제반 조건들을 모두 준비해놓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다윗은 솔로몬이 성전건축에 전념할 수 있도록 왕국을 안정시켜 솔로몬의 평화시대를 열었다. 개인적 생각에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은 다윗이다.

    다윗은 죄를 지었지만 알고서도 일부러 지은 것은 아니다. 죄를 감추지도 않았고 핑계를 대거나 남에게 덮어씌우지도 않았고 아는 즉시 회개하고 남들이 요구하는 것보다 더욱 더 자신에게 엄격히 책임을 묻고 회개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백성을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윗이 더욱 위대한 이유이다.


    허물은 자신에게 영광은 하나님에게, 복은 백성에게 벌은 자신에게 돌리는 자만이 위대한 지도자이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이 땅에 그 분의 뜻을 세울 수 있다. 교회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을 하나님보다 교만하게 내세우지 말며 자신을 이웃보다 관대하게 대하지 말라.

    많은 사람과 복잡하게 얽혀 사는 현대사회, 자유민주주의라는 현대 정치체제 하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겐 매 순간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유의 노동을 멈출 수 있는 여유를 갖기도 만만치 않다. 그것은 생존술이기도 하고 권리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하지만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여서는 안 된다. 항상 사랑과 애정의 시선이 밑바탕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죄 받지 않으려면 정죄하지 말라’는 성경말씀의 교훈이리라.

    (궁극적인) 정죄와 심판은 하나님의 몫이다. 아무리 정의에 부합하더라도 인간이 하는 정죄가 사람을 변화시키지는 못한다. 다만 일정시간 강제하고 통제할 뿐이다. 사람을 두려움에 떨게 할 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복, 본디 갖고 있는 선한 인간성의 고양, 거듭 태어나는 근원적인 변화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은쟁반을 훔쳐갔으면 은촛대에 은수저까지 주어라. 장발장은 감동, 감화하여 거듭 태어났다. 만약 고발하였다면 은쟁반은 되찾을지언정 장발장은 한낱 죄 많은 대도(大盜)가 되었을 것이다. 사랑만이 비수를 품고 숨어들어 눈물을 흘리며 입 맞추게 할 수 있다.




미리엘 신부에게서 은촛대를 건네받는 장발장



    역대상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