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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급식 - 밥 먹이고 합시다

어멍 2010. 4. 5. 23:29


    서해상에서 한미합동작전 중이던 초계함인 천안함의 침몰로 정국이 어수선하다. 사고 후 열흘이 지났는데도 구조는 고사하고 원인규명도 못하는 것인지 안하는 것인지...... 무능력한 엉터리 정권의 실체가 참담하다. 갈팡질팡, 우왕좌왕, 중구난방...... 끝없이 이어지는 땜질식 해명과 거짓말로 국민들을 질리게 하고 있다. 희생된 장병들을 생각하면 화병이 날 것만 같다. 가슴이 답답하고 벌써부터 지쳐간다. 들에 나가 꽃밭에 눕거나 언덕에 올라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다.

    ‘자체사고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북한에 의한 공격징후는 발견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조만간 목이 날아가고 정권이 위기에 처할 상황, 지 코가 석자인데도 국민들의 뇌 속에 북풍, 반공의 스크레치를 내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이것이 국민들 혼을 빼고 지쳐 나가떨어뜨리기 위한 의도된 교란작전이라면 그 능력만큼은 탁월하다. 프로다.

    이제는 억울한 죽음보다 고귀한 희생에 초점을 맞춰 엄숙주의, 애국주의로 몰아가려는 혐의마저 보인다. 훈장을 수여하고 장례를 거창하게 치르며 일단 고마워하고 슬퍼해야 한다. 예기치 않은 (누구의 책임도 아닌) 불가항력적인 엄청난 비극에 의연히 맞서 가족애와 국가를 위한 희생정신을 발휘하는 한 편의 할리우드 영웅 재난영화다.

    덕분에 김우룡 MBC 방문진 회장의 큰집 조인트 발언,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좌파스님 발언, 최시중 방통위원장의 현모양처 발언,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관련 ‘지금은 곤란하다. 기다려 달라’ 발언과 한명숙 전 총리의 재판 등 중요한 이슈가 모두 묻히고 있다. 6월 선거에 대한 관심도 밀려나고 핵심이슈로 떠오르던 무상급식 논란도 조용해졌다. 김우룡, 안상수, 한명숙, 무상급식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바로 좌우논쟁이 그 배경에 있다는 것이다. 좌빨, 빨갱이, 사회주의... 집권 한나라당이 남김없이 청소하고 몰아내고 박멸하고픈 것들에 붙이려 하는 딱지다. 일찍이 메카시즘 광풍이 불었던 큰 형님 미국을 따라 이제 건강보험도 사회주의라고 폐지할 기세다. 미운 며느리는 좌파며느리요, 길가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면 좌파돌부리다. 자신의 왼쪽 눈도 파내고 왼쪽 팔도 잘라낼 기세다.



1917년 (10월 공산혁명) 이래 레닌, 스탈린, 김정일, 오바마로 이어지는
Spreading the Wealth(부의 확산, 분배)를 성토하는 팻말을 들고
건강보험 개혁법안을 반대하는 미국판 ‘어버이 연합’
-충분히 한국 우파의 사랑과 존경을 받을 만하다-



    서론이 길어졌다. 이제 이 이야기, 밥 이야기를 해보자. 세상만사 다 먹자고 하는 일 아니겠는가. 구조를 하더라도 먹고 해야 하고, 통곡을 하더라도 배는 고파 오니까.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을 건 먹어야. (고병규 원작)


    밥! 밥은 숭고하면서도 비루하다. 좁게는 입에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넓게는 경제를 돌아가게 하고 인간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모든 재화와 부를 상징하기도 한다. 탐욕의 근원이기도 하고 사랑을 나누는 숭고한 것이기도 하다. 배부른 자가 더 많이, 더 맛있고 귀한 것을 탐할 때의 밥은 죄악의 씨앗이기도 하지만 배곪는 아이의 주린 배를 채우는 밥, 곰팡이 핀 피부에 뼈만 앙상히 남은 아사직전의 생명을 구하는 밥, 모두가 함께 골고루 행복하게 나누어 먹는 밥은 사랑이다.

    생명을 잇는 밥부터 우선 주어야 한다. 그 다음이 사랑과 행복과 감동이 있는 밥을 주어야 한다. 그 이외의 밥은 엄밀히 얘기해서 밥이 아니다. 탐욕과 욕망을 위한 밥, 고상한 미각만을 위한 밥, 심지어 과시를 위한 밥은 잉여다. (들어는 봤나? 난 먹어도 봤다!)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 없어도 그리 불행하지 않다.

    똥구멍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 동네 친구인 갑과 을은 사시사철, 삼시세끼 보리개떡만 먹었다. 갑은 이후에도 사정이 별반 나아지지 않아 지금도 라면으로 식사를 때우기 일쑤다. 반면 을은 얼마 안 있어 큰 성공을 거둬 스테이크가 주식이요 냉장고엔 산해진미가 썩어가기 일쑤다. 갑은 개떡만 보면 구역질이 나고 을은 지금은 구하기도 힘든 개떡을 일부러 만들어 먹으며 옛 맛을 되새긴다. 똑같은 개떡을 먹어도 누구는 신물이 나오고 누구는 향수에 젖는다. 누구에겐 별미요, 누구에겐 쓰레기다. 밥에도 역시 인간의 주관적인 가치관, 각각의 취향과 개인적인 경험이 작용한다.



밥풀데기는 이렇게 먹어야 제맛! (고병규 원작)

삼시세끼 갈비를 뜯게 된 흥부도 그 때 그 맛은 잊을 수 없다는.


    먹거리(食)도 입는 것(衣), 사는 것(住)과 마찬가지로 베블런이 말한 귀족시장, 명품시장이 존재한다. 바로 가격에 따라 수요와 공급이 결정되는 시장이 아닌 유한계급을 소비층으로 하여 돌아가는 비쌀수록 잘 팔리는 시장이다. 이 시장에선 재화의 본래 용도는 그리 중요치 않다. 바로 상표와 가격, 평판이 더 중요하다. ‘싸고 질 좋은 명품’이란 그 자체로 형용모순이다. 다만 먹거리가 입는 것, 걸치는 것 등 잡화보다 명품시장이 좁은 것은 그 용도 자체가 생명유지와 직결된, 가장 원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부자든 빈자든 밥통의 크기는 거기서 거기다. 필요한 영양소는 같다. 그래서 차이를 가르는 것은 준평화적인 보통의 시장에서는 맛과 값이다. 여기서 나누어진다. 하지만 시장이 과도하게 기울어 난폭해지면 간혹 상놈 목구멍이 양반 똥구멍보다 못할 수도 있고(드라마 <추노> 대사 중에서) 대중이 기아에 허덕여도 농장주들은 오렌지를 구덩이에 모아 넣고 석유를 뿌려 폐기처분하기도 한다.(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중 한 장면)

    세상은 요지경! 잘난 사람 잘난 데로 살고 못난 사람 못난 데로 사는 법인가. 무상급식과 관련한 모 방송 토론프로에서 한나라당 패널이 요새 굶는 아이가 어디에 있느냐며 열변을 토했다던데 이런걸 보면 참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누구냐 넌? 이 별에 온 목적이 뭐냐?) 오늘 저녁은 고기를 먹을까 회를 먹을까 고민하는 사람은 수돗물로 주린 배를 달래야 하는 사람의 심정은 죽었다 깨나도 알 수 없는 법이다.

    루이뷔통, 롤렉스를 쌈싸 먹는 듣도 보도 못한 고가의 명품(듣보잡이 아닌 듣보명!)과는 달리 먹거리는 이러한 베블런제(製)와는 거리가 멀다. 드러내어 과시하기도 쉽지 않고 반면에 누구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최소한의 양 이상이 필요하며 누구도 최대한의 양 이상을 먹을 수 없다. 탈난다.

    양과 질을 떠나 먹는 것 갖고 자랑질하는 것만큼 우둔한 것은 없다. 하기야 우둔한 것을 넘어 엽기적인 일이 얼마 전에 있었으니 온갖 고기로 옷 비슷하게 만들어 걸치고 나와 충격을 준 엽기 TV 프로(스타킹)가 그것이다.(먹어는 봤나? 난 입어도 봤다!) 쇼다! 보여주기 위해선 옷으로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시를 위해 갈비를 입고 염통을 걸치고 바깥나들이를 할 수는 없다. 금의야행(錦衣夜行-비단옷을 입고 밤길을 거닐음)이야 보람만 없지만 이건 당장에 미친 놈 소리 나온다. 먹거리는 기껏해야 창문을 열어놓고 등심 굽는 냄새를 피우는 것이 가장 적극적인 과시방법이다.



    무릇 밥, 모든 먹는 것은 신성한 것이다.



    그럼 무상급식. 우리 아이들에게 먹이는 밥에 대해선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구체적으로 몇 가지 추려보면 ①도덕, 당위론 ②교육적 효과 ③일의 효율, 비용 면으로 접근할 수 있겠다.


    ①도덕, 당위로 접근하면 반대자들이 수세에 몰릴 수밖에 없다. 애들 하루 밥 한 끼 먹이자는 데 뭐가 그리 복잡한가. 있는 집 자식 없는 집 자식 가리지 말고 우리 아이들 눈칫밥 먹이지 말자는 데 뭐가 그리 시비인가. 할 말이 없다. 그래서 포퓰리즘이니 뭐니 하면서도 한나라당도 무상보육 운운 뒤쫓아 가고 맞불을 놓을 수밖에 없다. 포퓰리즘 하면 또 한나라당 특기 아닌가. 어쩌면 반값등록금 공약처럼 대학구내식당까지 무상급식하자고 오바할지도 모른다.

    행복시 공약(公約)을 뒤집은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어떤 공약을 한들 먹혀들 힘이 급감하였지만 사실 무상보육부터가 조만간 실행하기엔 불가능한 공약(空約)이다. 무상급식과 무상보육은 우선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급식은 무상보육의 기본이다. 소요경비로 따져도 무상급식이 배꼽이라면 무상보육은 배다. 무상보육이 급하니 먼저 하자는 말은 말장난이다. 보육(保育), 보호하여 기르는 데 먹이는 것이 빠질 수가 있는가. 무상급식은 이미 무상보육에 포함된 개념으로 봐야 옳다.

    하여튼 여론이 어떻게든 아이들 굶기지 말고 먹이자는 데까지 합의에 이른 것, 한나라당을 여기까지 견인해 온 것만도 커다란 진전이다. 못 먹었던 설음, 먹는 것이 그만큼 중요했던 우리의 가난의 역사, 설음의 역사 그리고 어른들은 몰라도 자라나는 아이들만큼은 굶기지 말자는 유교적 미덕 등 모두 도덕과 당위에서 어쩔 수 없이 한나라당이 밀릴 수밖에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②아이들에게 미치는 교육적 효과로 봐도 무상급식이 좋다. 어른들의 정책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비췰지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바라봐야 한다. 무엇이 아름다운 그림인가. 인간적인 정책인가. 한나라당 왈 무상급식은 부자급식이며 부자 자식들에게까지 공짜밥 줄 정도로 국가가 한가하지 않다고? 결과적으로 서민에게 돌아갈 몫이 줄어든다고? 놀부가 흥부를, 이건희씨가 노동자를, 이명박 대통령이 철거민들 걱정해주는 것도 아니고...고마와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효율과 비용을 떠나 일단 아이들에게 교육적이지 않은 언사, 아름답지 못한 모습이다. 아이들까지 빈부를 나누고 좌우를 나눠서야 쓰겠는가.

    아이들은 일단 세상의 복잡한 것, 어두운 것과 떨어져 우선은 서로서로 어울리며 먹고 놀며 자라야 한다. 자신이 가난한 것을 증명해야만 먹을 수 있는 눈칫밥은 감수성 예민한 자라나는 아이들에겐 교육적으로 최악이다. 자라나는 새순에 제초제를 뿌려대는 것처럼 치명적이다. 아무리 남들이 모르게 한다고 해도 해당 학생 본인마저 모르게 할 수는 없다. 그 자체로 상처다. 선의로 위장한 폭력이다.

    가난한 서민에게만 복지의 혜택을 소낙비처럼 퍼붓고 싶은가? 부자인 자신의 자식마저 공짜밥을 먹는 것이 부담스럽고 미안한가? 간단하고 좋은 방법이 있다. 서민에게만 차별적으로 무상급식을 할 것이 아니라 부자들에게만 차별적으로 유상급식을 하는 것이다. 굳이 세금, 급식비 등 강제적이지 않아도 좋다. 일단 국가에서 세금으로 예외 없는 무상급식을 실시하고 그래도 정 미안하고 내 아이의 가난한 친구들의 더 좋은 먹거리를 위해 금액을 추가 부담하고 싶은 학부모라면 부자이건 아니건 정해진 기금에 십시일반 자발적으로 송금하면 된다. 기금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흐르면 일정 수준 이상의 부자들로 그 자격을 제한하면 된다.

    어차피 선택적 급식, 효율적 재정을 써야한다면 빈자들이 자신의 가난함을 증명할 것이 아니라 부자들이 자신의 부유함을 증명하게 하는 것이 더 교육적이다. 이런 게 부자들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노블리스오블리제 교육이다. 부자 자식이 얼마나 부모를 자랑스러워하겠는가. 얼마나 세상을 아름답게 보겠는가. 너무 허황된 정책인가? 유토피아적 환상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나라당과 한나라당의 급식정책을 지지하는 이들의 서민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있으면 충분히 가능하다.


    ③도덕적으로 옳지만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는 떨어지는가? 4대강 사업, 경기활성화를 위한 재정지출 등 가뜩이나 빠듯한 재정에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문제다. 하지만 효율 면에서도 결코 낭비가 아니다. 일단 세금을 거둔데도 아이들 먹이는 것만큼은 합의에 이르렀으니 조세저항의 사회적 비용이 적다. 그리고 무조건적 무차별 급식이 행정면에서도 더 효과적이다.

    무상급식을 선별급식과 비교한다면 대상자를 선별 심사하여 결정하는데 들어가는 행정력, 행정비용만 놓고 보면 제로다. 선별과정상의 착오와 불합리로 많든 적든 피할 수 없는 재정의 낭비, 누수(꼭 필요한 곳에 가지 못하는 경우 역시 넓은 의미에선 재정의 누수다) 역시 제로다. 광활한 들판에 있는 농작물에 헬기로 비료를 뿌리느냐 일일이 손수 비료를 뿌리느냐만 생각해도 답이 나온다. 그래도 지출되는 재정의 절대치는 늘어날 것 아니냐고 따진다면 그 말은 맞다. 하지만 공동체의 먼 장래를 보고 인적자원에 투자한다는 측면에선 결코 아깝지 않은 지출이다.

    줄이더라도 다른 곳에서 줄이는 게 맞다. 필요하다면 강당을 팔고 책상을 팔 각오로 예산배정의 최우선 순위를 급식에 두어야 한다. 교육의 최우선 순위를 무상급식을 통한 육체적, 정서적 건강의 성장에 두어야 한다. 기성세대가 자녀세대에게 해줘야 할 최소한의 도리, 국가가 학생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의무교육의 마지노선은 먹이는 것이라야 한다. 뭐를 가르치든 일단 먹이고 시작하잔 얘기다. 비용이야 건물 하나 덜 짓고 도로 몇 키로 덜 깔아도 충분하다. 4대강 예산에 비하면......껌값이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미래를 위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아이들에게 우유를 먹이는 것이라고 했다. 배가 고픈데 영어, 수학이 머리에 들어갈 리 없다.

    효율에 대한 나의 거칠은 주장, 감정적 선동이 아닌 객관적인 수치와 자료에 근거한 보다 논리적이고 정교한 주장은 바이커님 블로그 ‘무상급식이 선별급식 보다 효율적인 이유’를 참조할 만하다. 그의 글 ‘선별급식이 복지병 키운다’를 보면 보수적인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즐겨 걱정하는 복지병(과도한 복지에만 의존하여 생산성이 떨어지는 현상)의 가능성이 선별급식 때 더 커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정책의 문제가 아니다. 찬반이 나뉘는 것이 위에 열거한 세 가지 측면의 접근이 아니다. 이념의 문제, 정파적 편견, 계급적 유불리와 정치적 헤게모니 장악이 수면아래 도사리고 있다. 부자급식이니, 재정효율이 떨어지니,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다 핑계일 뿐이다. 차라리 내 자식이 남과 똑같이 취급받아서 불쾌하다는 말이 더 설득력이 있다. 마음 같아선 내 자식은 집안 요리사가 만든 특제 바비큐 먹이지 친구들이 먹는 오뎅은 안 먹이고 싶다는 거다. 양반 상놈 겸상하기 싫다는 것밖에 안 된다.

    이건희씨 손자야 줄을 서서 밥을 타 먹는 것이 자존심 상하는 일일 것이다. 그들의 사전엔 급식이란 단어가 없을 수도 있다. 하다못해 천원짜리 햄버거라도 지돈 내고 사먹을지언정 공짜로 준다해도 보통사람들과 섞여 줄서서 기다려 받아먹는 것은 참을 수 없다. (보통과) 섞이기 싫어하는 취향이랄까. 귀족의식, 특권의식이랄수도 있지만 취향에까지 이르른 것이기 때문에 더욱 강력하고 완고하다.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과 문화의 차이다. 나는 이건희 회장님이 잠바떼기 입고 사원들과 함께 어울려 구내식당에서 줄서서 밥을 타 먹는 것을 본 적이 없다. 필요에 의해 연출해야 한다면 회장님께옵선 이만저만 고역이 아닐 것이다. 훠이~ 물렀거라. 회장님 나가신다. 자신의 앞길에 개미새끼 한마리 얼쩡거리는 것이 불편하실 것이다.

    교육 역시 다를 것 없다. 과목마다 전문 과외선생님을 둘 수도 있고 아예 1인만을 위한 맞춤형 사립학교를 통째로 세운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갑부들이 몇몇이나 되겠는가. 이런 부자집 도련님, 소황제(少皇帝)에게도 예외없이 무상급식의 혜택(!)을 주어야 한다. 같은 식판에 같은 반찬을 담아주어야 한다. 집에서는 꽃등심으로 쌈을 싸 먹든 캐비어로 밥을 비벼 먹든 내 알 바 아니다. 등심 위에 쌈을 얹어 먹든 쌈 위에 등심을 얹어 먹든, 밥을 캐비어로 비벼 먹든 케비어를 밥으로 비벼 먹든 내 알 바 아니다. 일단 학교에 보냈으면 똑같이 먹이고 똑같이 공부시켜야 한다. 공공의 통제아래 두어야 한다. 그들이 커서 막대한 금력과 특권을 누릴 것을 생각한다면 어려서부터 함께 먹고 함께 생활하는, 더불어 함께 사는 공공성에 대한 교육은 더욱 중요하고 필요하다. 교육적으로 무상급식이 옳은 이유는 없는 집 자식, 있는 집 자식 가리지 않는다. 있는 집 자식의 특권의식을 없애려면 오히려 교육적으로 더욱 필요하다. 보편적 교육은 보편적 대우, 보편적 복지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눈치밥이 주는 상처와 서민들의 급식비 부담 VS 빈민뿐 아니라 서민들의 밥상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과 또 그들과 똑같이 먹어야 한다는 불편함. 어느 한쪽이 양보해야 한다면 당연 후자가 양보해야 한다. 강자가 약자에게 양보해야 한다. 소수가 다수에게 양보해야 한다. 전면적이고도 예외없는 무상급식이 옳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주인인 국민이(民主) 나서서 다 함께 밥을 먹는(共和) 제도 한번 만들어 보자. 생활보호대상자든 재벌이든 우리아이들 차별하지 말고 다함께 똑같이, 민주주의해서 밥 한 번 먹여보자. 다른 건 몰라도 먹는 것 같고 인색하게는 굴지 말자. 아이들 보기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 화면을 Click!

불끄러 온 줄 알아야지!
깨깽할 그(들)이 아니다. 그들에게도 전가의 보도, 궁극의 필살기가 있다!
민주주의가 밥 멕여주냐? 배고픈 줄을 알아야지!



    내 말이 그 말!!

    굳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배고픈 줄 안다면, 그 고통과 설음을 안다면,

    우리 인간적으로 아이들 밥은 먹이고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