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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권력을 잃었으나 권력에 이기다. 이명박, 권력을 얻었으나 권력에 지다.

어멍 2011. 1. 17. 23:42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정동기 감사원장 후보자의 인사파동을 거치며 이명박 대통령의 레임덕 얘기가 무성하다. 수개월 공석이던 자리가 앞으로 몇 개월은 더 공석이 될 듯싶다. 왜인가? 사람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왜 어려운가? 능력 있고 신망 있는 인사가 없어서? 찾으면 왜 없겠는가. 하지만 그런 인사들이 고사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몇몇 유력인사가 고사했다고 들었다.

    원래부터 정동기씨를 내심 고집했던 것인지, 여의치 않은 김에 냅다 내지른 것인지 알 순 없지만 이명박 대통령 입장에선 일이 어쩌다보니 고약하게 꼬여버렸다.


    나라면? 별 매력이 없다. 이명박이란 인물과 성격이 서로 안 맞기도 하지만 이권과 금전적 매력 이외에는 별 보람이 없다. 가문의 영광, 족보의 명예로 남기보다는 오점으로 남을 가능성이 더 크다. 국가와 민족에 봉사한다기보단 부도덕한 정권에 부역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

    참여정부 인사 중 새롭게 중용된 인사는 얼마 전 국민권익위원장으로 내정된 김영란씨가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노무현 정권 핵심이지는 않았으나 그는 2004년 노 대통령에 의해 최초의 여성대법관에 임명되었던 인물로 소수약자의 권익보호에 힘써 왔다.(노무현 정권아래서 일했던 정통 관료, 무색무취한 전문 관료는 예외로 한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난리도 아니다. 이 대통령이 거침없이 내지르는 불도저 스타일이었기에 충격이 더 크다. 절제와 겸양을 모르는 정권이니 언제고 큰 사단이 나고 하드랜딩으로 갈 수밖에 없다. 외견상 정권은 아직 견고하나 여기저기 속으로 곪고 있다. 대통령 지지도 50%? 당장 조중동 보수신문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 지지도가 정확한 본색을 드러낼수록 레임덕은 더욱 파괴적으로 올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 대통령을 동정하고 가엾이 여길 정도로 내쳐지고 고통 받을지도...

    하지만 아직은 이른 감이 있다. 아직 대통령에게 남아있는 채찍과 당근이 많으니까. 밴댕이 소갈딱지인 각하께서 요번에 단단히 삐지고 화나셨다. 손을 부들부들 떠셨다던데, 한 뒤끝 하시는 각하께서 어떤 암수(暗數)라도 쓰실 지 알 수 없다.




조중동,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의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



    대선은 아직 멀지만 총선은 내년 봄이다. 대통령, 청와대 입장에선 레임덕은 너무 이르고 가당치 않은 것이지만 국회의원, 한나라당 입장에선 그리 늦은 것도 아니고 두려운 것도 아니다. 필요하다면 신한국당이 자당 출신 김영삼 대통령의 인형을 화형시킨 것과 같은 황당 잔혹극도 연출해야 한다. 이제 웬만한 사람은 이 대통령이 벌거벗은 임금임을 알아채버렸다. 그 벌거벗은 임금님이 이제 쥐고 있던 칼까지 무디어져 말을 듣지 않는다. 어쩌면 탄핵, BBK 청문회가 한나라당 입에서 먼저 나올지도 모른다.

    한나라당과 함께 정권유지의 양대 축이었던 조중동 보수언론 역시 마찬가지다. 원래가 한나라당 정치가 조중동 정치였지만 앞으로 조중동 코치, 한나라당 선수가 청와대와 대통령을 왕따시킬 것이 확실하다. 더구나 종편사업자 선정도 마쳤겠다 더 이상 대통령 심기 살필 이유가 없다. 아직 출범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주도권은 조중동으로 넘어왔다. 청와대 갑, 조중동 을에서 조중동 갑, 청와대 을로 바뀌었다. 원래 구애할 때는 여자가 갑이지만 몸을 주는 순간 남자가 갑이 되기 마련이다.


    이 대통령의 실정과 죄목도 많지만 어디 한나라당, 조중동에 미치기야 하겠는가. 그들이 없었다면 일개 허풍떠는 사업가에 머물렀을 것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들이 받쳐주지 않으면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이 정권을 탄생시킨 자궁이요 토양이다. 한나라당은 엄마요 조중동은 아빠다. 이 대통령은 밉지만 한나라당엔 정을 뗄 수 없다, 한나라당은 밉지만 박근혜 의원은 뭔가 제대로 할 것 같다는 생각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다.

    이명박 한번 겪어봤으니 박근혜도 한번 겪어봐? 박정희 한번 겪어봤으니 육영수도 한번 겪어봐? 박정희식 정치가 생각보다 시원스럽지 않고 시끄럽고 피곤하고 스트레스만 쌓이니 이제는 어머니같이 포근할 것 같은 육영수식 정치 차례인가.(근데 육영수가 정치를 하기는 했나??) 박근혜가 고집세고 흐리멍텅한 면이 있기는 해도 이명박보다 무대포는 아니지! 마침 복지를 들고 나오니 좀 편안하게 쉴 수 있게 보살펴 줄 것 같다...

    이런 식으로 개인, 이미지, 호기심에 근거해 판단하다보면 항상 거기서 거기! 현실은 한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 아무리 짝퉁이 아닌 진품명품을 갖다놔도 주워진 환경, 구조를 극복하진 못한다. 바보도 똑똑한 동네에 갖다놓으면 덩달아 똑똑해지고, 현인도 바보 동네에 갖다놓으면 덩달아 바보 된다. 죽기 전의 박정희가 타임머신을 타고 2011년으로 거슬러 올라온다면 동키호테에 불과할 뿐이다. 제 2 의 허경영 총재일 뿐이다. 시대도 그를 감당치 못하고, 그도 시대를 감당치 못한다.

    일부가 아닌 전체를 봐야 한다. 정책을 보고, 세력을 보고, 구조를 봐야 한다. 이명박, 박근혜 뒤에 숨은 한나라당과 조중동을 봐야 한다. 그들에게 더 엄중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무엇인가? 권력은 집단이란 것이다. 권력은 대통령이나 청와대가 아니다. 권력은 (친이+친박+조중동+재벌)+(관료+토호+군인+법조+종교+문화+학원)+기타 등등 알파다. 기득권의 총합이다. 이제 권력을 한 개인이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개발도상국을 벗어나 형식적 민주주의를 이룬 사회에서는 무소불위하고 영원불변한 대권이란 없다. 권력을 아쉬워하는 수명을 늘리려고 불로초를 구했던 진시황 때도 아니고 죽음으로 18년의 독재정권이 막을 내렸던 박정희 때도 아니다.

    따라서 인물 교체가 아니라 정권 교체여야 한다. 정권 교체가 아니라 세력 교체여야 한다. 권력을 소수 권력자에게서 다수 시민들 것으로 쟁취해 내어야 한다. 권력은 일인에서 소수로, 소수에서 다수로, 다수에서 전체로 확장돼야 한다. 나눠지고 쪼개져서 딱히 특권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도록 모두에게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주워져야 한다.

    따라서 표제이자 결론인 문장에서 권력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앞의 권력은 정권이다. 뒤의 권력은 기득권 체제, 권력의 총합이다. 앙시앙 레짐이다. 전자는 구체적이고 후자는 추상적이다. 노 대통령은 밖에서 와서 그것과 싸우다가 자결로서 최후의 항거를 하였지만 이 대통령은 안에서 잉태되어 그것을 부리고 휘둘렀지만 결국 내쳐지고 종국엔 비루한 최후를 맞거나 조용하고 쓸쓸히 사라져갈 것이다.


    ‘권력은 집단적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명제다. 대형(Big Brother)은 소설 속에 항상, 모든 곳에 걸려있는 큰 포스터의 존재로만 등장한다. 언제 태어났는지, 몇 살인지,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아마도 실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권력의 실재는 ‘당’이다. 집단이다. 대형은 그것의 의인화된 상징일 뿐이다.

    독재자들은 죽는다. 하지만 당은 남는다. 그것을 이루는 세력, 조직화된 집단은 개인보다 더 장구하며 체제는 계속된다. 그래서 오세아니아는 견고하고 강력하다. 1984년 이후로 꽤 긴 시간동안, 어쩌면 영원토록 유지될지도 모른다.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거대한 바다 괴물 레비아탄처럼 하나를 자르면 곧바로 다른 하나가 대체하며 어디선가 새로운 머리가 자라나기 시작한다. 영웅도 계속 나오지만 괴물 역시 계속 나온다. 이 끊임없이 얘기되는 통쾌한 혹은 힘 빠지는 우화를 끝장내려면 영웅이 아니라 또 다른 괴물, 비슷한 덩치의 호적수가 필요하다. 집단이고 세력이다.


- <조지 오웰의 “1984”와 대한민국의 “2010”> 중에서 -

 



이것이 권력이다. 빅브라더가 아닌 당, 박정희가 아닌 공화당, 이명박이 아닌 한나라당이 권력의 본체다.

    사진은 1971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공화당 대통령 후보 지명 전당대회. 이듬해인 72년에 유신헌법에 의해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박정희씨가 대통령에 선출 추대된다.(투표 2359명, 찬성 2357표, 무효 2표) 이곳에 모인 대의원들의 과거와 현재위치를 추적해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아마도 상위 5%내에 포진해 있을 듯... 일제시대의 중추원과 대표적 친일단체인 일진회,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공화당 대의원, 민정당 대의원... 현 한나라당 대의원들의 인물구성을 출신성분과 성향 등으로 분석해보면 상당부분 중복되거나 연관이 있지 않을까?!



    <1984>를 읽고 요즘은 성경 <이사야>편을 읽고 있다 보니(☞ 성경읽기 0051 참조) 새롭게 깨닫는 것, 예전에는 잘못 알고 있거나 어렴풋이 느끼고 있던 것이 명확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노무현의 죽음이 결코 패배가 아니라는 거다. 노무현은 결코 굴복하지 않고 마지막 잡고 있던 벼랑 끝 나뭇가지를 놓아버리는 용기로서 승리했다는 거다. 자결과 희생으로 결국 승리했다는 거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다.


    그는 지난날의 과오와 죄를 깨끗이 자백함으로서 세탁하고, 철저히 벌을 받음으로서 용서받기 위해 스스로 애정성으로 돌아간다. 그 곳에서 하얀 타일이 깔린 긴 복도를 걸어가고 있는 동안 그를 따르던 간수에 의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렸던 그 총알이 그의 머리를 관통한다.(당은 회개하지 않는 범죄자를 처형치 않는다. 오직 세뇌되고 회개하여 죄를 고백하고 벌을 자청하는 자만을 처형한다. 왜냐하면 신념을 지닌 채로 죽는 순교란 당에게는 용납될 수 없는 또 다른 반역이기 때문이다.)

    그는 대형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술내 나는 회한의 두 줄기 눈물이 코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렇지만 모든 것이 잘 되었다. 싸움은 끝난 것이다. 그는 대형을 사랑했다.

 

    역시 2010/10/20에 작성한 <조지 오웰~> 중의 일부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인 윈스턴이다. 초거대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 반역했던 윈스턴은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처벌을 자청함으로 당에 의해 사형당하는 은혜(!)를 입게 된다. 이것이 소설의 마지막 결말이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가장 부패한 자가 가장 청렴한 자를 욕보이고, 가장 숭고한 것을 도구로 가장 치졸한 방법으로 공격한 것에 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 노무현을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방법일 것이고 그들은 그들이 본래 갖고 있는 능력을 200% 발휘하여 보기 좋게 성공했다.

    평생 동안 생계나 집안경제, 치부에는 신경쓰지 않았던 그다. 나는 몰랐노라고, 집사람이 받았더라도 선의의 후원, 단순한 빚 혹은 생계형 범죄일 뿐이라고... 항변하면 항변할수록 더욱 구차하고 초라해지며 허우적댈수록 점점 빠져드는 수렁일 뿐이다.

    재판 이전에 노무현은 이미 자식과 아내를 팔아먹는 졸장부, 잡범, 개털, 파렴치범, 좀도둑, 회갑 선물로 박연차씨로부터 노건평씨 부인을 거쳐 받았다는 1억짜리 고가시계를 허둥지둥 논두렁에 갖다 버린 삐에로가 되었던 거다.

    이렇듯 노무현은 동지와 친구와 가족의 고통과 희생을 지켜보며 발톱이 하나씩 빠지듯, 팔다리가 하나씩 잘리듯 절대고독 속에 홀로 남아 죽음을 선택했다. 강철같은 마음도 한조각 두조각 깨지고 떨어져 나가더니 결국 몸과 뼈마저 산산조각난 채 저 세상으로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무엇이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나. 그는 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까.

 

    2009/05/28에 작성한 <내가 사랑한 사람-고 노무현 전 대통령(2)> 중의 일부다. 그들의 성공 노무현의 실패, 그들의 승리 노무현의 패배였나.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노무현은 정권에겐 패배했지만 권력에겐 패하지 않았다. 지금은 패배했지만 미래에는 승리할 것이다.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역사에서는 승리할 것이다. 최후의 승리는 노무현 것이다.

    그들은 실패했다. 노무현은 승리했다.


    궁극의 승리, 최후의 승리는 무엇인가? 오세아니아가 윈스턴에게 거둔 승리다. 전향이요 변절이요 탈색이다. 순교, 자결을 비롯한 어떠한 저항이나 거부반응도 허락지 않고 집단의 일원, 체제의 일부분으로 100% 새하얗게 탈색하고 편입하는 것이다. 완벽하게 녹아들게 하여 동화시키는 것이다. 전염시키는 것이다. 네오가 스미스가 될 것인가, 스미스가 네오가 될 것인가.

    노무현은 굴복하지 않았다. 전염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자신의 가치를 남겼다. 노무현의 가치 대(對) 이명박의 가치(또는 박정희 등등 그들의 가치) - 무엇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까. 무엇이 후세에 더 귀하게 대접받을까. 때 묻지 않은 청소년, 젊고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은 누구를 더 애틋하게 사랑하게 될까. 사람들은 누구를 더 닮기 원하고, 누구를 더 존경하게 될까. 역사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모두 같은) '스미스'가 될 것인가, (각기 다른) '네오들'이 될 것인가



    현실에서 노무현의 패배는 무엇인가? 노무현이 재판과 수감을 거쳐, 또는 그 이전의 고통의 과정 중에서 타협하고 굴복하여 자신의 신념과 가치를 버리고 용서해달라 비는 것이다. 잘못했다, 살려달라 손금이 닳도록 싹싹 비는 것이다. 겁에 질려 요리조리 피하며 꺅꺅 소리지르는 것. 두려움에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지레 넘어져 시체처럼 죽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는 것이다. 아부도 하고 가랑이 사이를 기기도 하고 헤헤거리며 발등을 핥기도 한다. 필요하다면 동료를 팔아 전향을 증거하기도 한다. 그들의 개가 되어 대중 앞에서 회개와 속죄를 광고한다. 옛 동료를 설득, 포섭하기 위해 진력을 다해 동분서주하고 여의치 않으면 옛 동료의 등에 비수를 꽂는다. 그들을 함박웃음 짓게 하고 그들이 어리둥절해 할 만큼 너무 충직하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고 그들의 가치를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실성하거나 미치지 않고 제정신 가지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상을 영위하며 호의호식하는 것이다. ‘노무현’이 ‘노무현이 아닌 것’이 되고 ‘노무현’과 우리가 혐오해마지 않는 ‘보통의 정치인들’과 구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노무현의 죽음이다. 이것이 노무현의 패배요, 그들의 승리다.

    역사에선 무엇인가?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생이 당나라 장군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선봉장이 되는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 이토 분키치에게 공개적으로 사죄하는 행사를 여는 것이다. 모두 당사자가 아닌 후손들의 변절이고 굴복이지만 당사자인 경우 역시 비일비재하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은 변절하여 친일글쟁이가 된다. 모두가 당나라의 위대한 승리, 일제의 완벽한 승리다.

    자유당, 공화당, 민정당, 민자당, 신한국당, 한나라당으로 이어져오는 계보를 갖고 있는 이 땅의 기득권, 수구보수세력의 위대한 승리, 성공케이스는 무엇인가? 김영삼과 그 측근인물들, 이재오 김문수 심재철 등이다. 그들 입장에서는 전향자요, 민주진보세력 입장에서는 변절자들이다. 모두 한 때는 민주투쟁의 상징, 학생운동 등 진보사회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비중있는 인물들이었다. 현재는 한나라당의 중진, 수구보수의 대표 얼굴들이기도 하다. 잘 자라준 영애(令愛) 박근혜 의원도 대견하지만 이들이야말로 수구보수세력의 위대한 승리, 한나라당의 자랑거리다.


    선과 정의의 완벽한 승리는 무엇인가? 마찬가지다. 악인들을 제거하고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인으로 거듭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회개하고 반성하게 하여 그들을 유순하고 곧게 만들고, 그들로 하여금 정의를 행하는 일에 고통과 손해를 무릅쓰고 앞장서 나서도록 하는 것이다. 이토 분키치가 안준생에게 사과하고 히로히또가 빌리 브란트가 했던 것처럼 독립열사의 무덤 앞에서 무릎 굻게 만드는 것이다. 미리엘 신부가 장발장에게 했던 것처럼 도둑을 자선가로, 완악한 사내를 의로운 신사로 만드는 것이다.

    민주진보진영의 완벽한 승리는 무엇인가? 한나라당 인사들을 정계에서 내쫓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100명, 200명 집단으로 전향시키는 것이다. 전두환씨를 재판에 세우거나 사형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회개하여 머리 깎고 백담사로 들어가 여생을 마치게 하는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자신의 변절과 배신을 반성하여 평생토록 묵언수행토록 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을 입당시켜 평당원으로 봉사하게 하고, 박근혜 의원을 전향시켜 유세장을 돌아다니며 박정희씨의 죄와 실정을 그 피해자들과 국민들에게 사과하게 하는 것이다. 조중동 사주가 지분을 내놓고 스스로 물러나고 신문은 정론직필을 휘갈기는 진보신문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은 어떠한 위협이나 폭력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강제가 아닌, 속에서 우러나오는 능동태여야 한다. 모두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구가 멸망하면 멸망했지, 영원히 불가능한 기적일 수도 있다. 거대보수정당인 한나라당, 거대보수신문인 조중동이 득세하는 현실을 볼 때 안드로메다행 허무맹랑한 판타지 소설이다. 하지만 현실을 떠나서도 원래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기는 쉬워도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것은 어렵다. 너무 이쪽 저쪽, 선과 악의 이분법, 이기고 지는 승부로만 봐서 듣는 입장에선 거북할 수도 있다. 너무 분명하고 노골적으로 말해서 동의하지 않는 입장에선 불쾌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솔직한 내 생각이다.




미리엘 신부에게서 은촛대를 건네받는 장발장



    <이사야> 53장에는 메시아 예수님이 오실 것과 예수님이 겪을 고난을 예언하고 있다. 예수님은 이적보다 고난을 통하여 그 영광을 드러내시고 이루셨다. 이 땅위의 인간의 삶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씀하신 후 고개를 아래로 떨구시고 운명하셨다.[요한 19:30]

    노무현의 삶과 죽음은 어떠하였나. 그의 부재는 큰 손실이고 슬픔이고 비극적 역사이지만 그의 죽음은 많은 것을 남겼다. 역사에서 가정은 덧없는 것이라지만 그의 생존이 그의 죽음보다 더 많은 것을 남겼으리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 두고두고 시민민주주의, 참여민주주의의 영감과 비전을 제시하는 죽음,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의 가슴을 울리는 전설을 완성한 죽음이라 부를 수도 있다. 잔인하지만 값진 종결일 수도 있다.

    잔인한 지지자, 매정한 동지인가. 값진 종결과 비루한 삶. 나는 노무현에게 무엇을 바랬던가. 내가 사랑했던 사람 노무현! 그는 손도 잡아보기 전에 떠나가버린 연인처럼 그렇게 허망하게 갔다. 너무도 아프고 비극적으로 갔다. 그의 고통과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면 굴복하여 전향했더라도, 그저그런 평범하고 비루한 인간으로 늙어갔더라도 나는 그의 생존을 바랬을 것 같다. 의인에서 악인으로, 영웅에서 범인(凡人)으로 변절하고 추락했더라도 그것이 나을만큼 그의 고통과 죽음은 안타깝고 가엾은 것이었다. 불쌍하고 불쌍하다!


    역사는 전설을 만들기 위해 위대한 패배자가 필요한 것인가. 사람들은 영웅을 만들기 위해 고난과 희생의 스토리가 필요한 것인가. 그가 깔끔히(!) 갔기에 내가 더 그를 그리워하고 칭송하는 것일 수도 있다. 변절하고 추락했더라면 누구보다 더 비판하고 험한 욕을 했을 수도 있다. 죽은 후에 영웅난다고 사람들은 뒤늦게 깨닫는다. 깨닫고도 금새 잊어버리며 양처럼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 각기 왔던 길을 그대로 다시 간다. 이 모든 것을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심장이 있어도 깨닫지 못하는 이도 있다. 노무현도 그리될 것인가. 결국 잊혀지고 묻혀질 것인가.

    그러기엔 그의 죽음이 너무 극적이고 충격이 크다. 그의 삶과 죽음이 너무 드라마틱하여 우리의 가슴을 부풀게도 하고 우리를 눈물짓게 하기도 한다. 쉽게 잊혀지고 묻혀지기엔 그가 남긴 가치가 너무 크다. 속된 말로 앞으로 100년, 200년 우려먹고도 남을 만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와 구원의 복음을 전하셨다. '하나님 나라'라는 비전을 제시하셨다. 노무현은 '상식과 원칙'이란 가치를 남겼다. '사람사는 세상'이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 어떤 가치보다 귀중한 가치요, 그 어떤 비전보다 아름다운 비전이다.

    노무현은 그의 극적인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충격을 줬다. 그의 가치와 그 가치를 이어가는 사람들, 그가 제시한 비전을 흠모하고 성취하려는 사람들을 남겼다. 이것이 그의 가장 커다란 유산, 위대한 업적이다. 그는 그의 삶보다 그의 죽음에서 더 많은 것을 이룰 것이다.




흠 있는 인간이지만 예수의 품성을 닮은 인간, 노무현



    최후의 승리자는 노무현이다.
    궁극의 승리자는 노무현이다.
    그는 죽음을 통해 이미 모든 것을 다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