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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大望)》 28, 29권 <사무라이> 리뷰

어멍 2026. 1. 27. 22:43

《대망(大望)》28, 29권 <사무라이> 리뷰

 

 

    《대망(大望)》 28권 238p부터 29권 426p까지는 한차례 영화로도 제작된 바 있는 시바 료타로의 소설 <사무라이>다. 원제는 <峠>, 곧 ‘고개’로 2022년 개봉된 영화의 제목 역시 ‘峠(고개)’ 부제는 ‘最後のサムライ(마지막 사무라이)’다.

    시대적 배경은 막부가 종말을 고하는 1858~1868년으로 앞선 <사카모토 료마>와 겹치고 주인공은 료마와는 반대로 막부 편에서 싸운 에치고의 나가오카번 수석중신인 가와이 쓰기노스케다. 작가는 대정봉환 이후 벌어진 내전인 보신전쟁에서 신정부군에 패할 줄 알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치열한 저항 끝에 죽게 되는 쓰기노스케를 마지막 사무라이의 전형으로 그리고 있다.

 

    왜 제목이 고개인지? 실재 지명에서 따온 건지?(작품 속에는 주요전투지인 고개 하나, 쓰기노스케가 중상을 입고 도피하는 도중의 고개 하나의 이름이 나온다.) 아니면 어떤 상징이 있는 건지? 궁금하여 챗GPT에게 물어보았다. 묻다보니 그 외에 자꾸 추가되어 꽤 길어졌다. 다음은 그 문답이다. 편집하여 간략히 요점만 옮겨본다.

 

    시바 료타로 소설 峠(고개)에서 제목인 고개가 의미하는 것은? →

  제목인 ‘고개’는 단순한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상징이에요. 핵심 의미를 나눠서 보면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시대의 ‘고개’ — 막부에서 메이지로

  주인공 가와이 쓰구노스케가 살아간 시기는 에도 막부 체제의 끝과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입니다. ‘고개’는 한 시대가 끝나고 다른 시대로 넘어가는 경계로 올라가는 쪽이 끝나면 반드시 내려오는 쪽이 있음 → 막부의 쇠퇴는 피할 수 없는 흐름 즉, 일본 전체가 이미 “넘어가고 있는 고개” 위에 서 있는 상황을 뜻합니다.

  2. 개인의 ‘고개’ — 가와이 쓰구노스케의 운명

  가와이는 뛰어난 능력과 이상을 가진 인물이지만, 그 능력은 이미 내리막으로 향하는 체제(막부)를 위해 쓰입니다. 그의 인생에서 ‘고개’는 가장 높이 도달한 순간이자, 동시에 몰락이 시작되는 지점. 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넘는 순간 되돌릴 수 없는 길. 그래서 이 ‘고개’는 영광과 비극이 겹쳐지는 지점이에요.

  3. 선택과 한계의 상징

  고개는 늘 결단을 요구하는 장소입니다. 넘을 것인가, 돌아설 것인가? 그러나 가와이는 알고도 선택합니다. “이 길이 패배로 끝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 이 점에서 ‘고개’는 인간이 자신의 신념으로 끝까지 가보는 한계점을 상징합니다.

  ##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고개’는 시대가 바뀌는 경계이자, 한 인간이 자신의 신념으로 오를 수 있는 마지막 정점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순한 역사소설이 아니라, “지는 쪽에 서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작품이 되죠.

  원하시면 《료마가 간다》와의 시바 료타로식 역사관 비교, 왜 시바가 ‘승자’보다 ‘지는 쪽 인물’을 좋아했는지도 이어서 설명해드릴게요.

 

    설명해 봐 →

  좋아요, 그럼 자연스럽게 이어갈게요. 핵심은 이 두 가지입니다.

  ① 《峠》와 《료마가 간다》의 대비 ② 왜 시바 료타로는 ‘지는 쪽 인간’을 반복해서 그렸는가.

  1. 《峠》 vs 《료마가 간다》 — 같은 시대, 정반대 위치

  두 작품은 같은 막부 말기를 다루지만, 주인공이 서 있는 자리 자체가 정반대입니다.

  《료마가 간다》사카모토 료마 = 새 시대를 여는 인물. 막부·번의 틀을 벗어나 미래를 향해 움직임. “넘어야 할 고개를 가볍게 뛰어넘는 사람” 결과적으로 역사의 승자 ➡ 시바가 보여주는 이상적인 일본인상에 가깝죠.

  《峠》가와이 쓰구노스케 = 사라질 체제를 가장 세련되게 지키려 한 인물. 세계를 알고, 현실도 정확히 파악함. 그럼에도 막부 편에 남는 선택을 함. 결과는 패배와 죽음 ➡ 여기서 시바는 묻습니다.

  “패배가 확실한 쪽에 서는 선택도, 인간의 존엄이 될 수 있는가?”

  2. 왜 시바 료타로는 ‘지는 쪽’을 좋아했을까?

  이건 시바의 역사관과 직접 연결됩니다.

  ① 승자는 설명이 필요 없다. - 시바는 자주 이런 태도를 보입니다. 승자는 결과가 모든 것을 정당화. 하지만 패자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가”를 설명해야 함. 그래서 패자의 이야기가 인간의 내면을 더 깊이 드러낸다고 본 거죠.

  ② 일본 근대에 대한 불신 - 시바는 메이지 이후 일본을 무조건 긍정하지 않았습니다. 효율·국가·집단을 앞세운 근대 일본이 개인의 판단보다 “시대의 흐름”을 강요. 《峠》의 가와이는 근대 일본이 밀어내 버린 인간형입니다. 능력도 있고, 합리적이고, 국제 감각도 있지만 “이기는 쪽으로 갈 줄 알면서도 가지 않은 인간”

  ③ ‘끝까지 가본 인간’에 대한 존중 - 시바가 정말로 존중한 건 이것이에요.시대가 틀렸다는 걸 알면서도 자기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가본 인간. 가와이는 바보가 아닙니다. 막부가 진다는 걸 압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는 가보겠다”고 선택합니다. 그래서 《峠》의 비극은 무능의 비극이 아니라 각성된 인간의 선택이 낳은 비극입니다.

  3. 그래서 《峠》는 어떤 소설인가

  이 작품은 말해줍니다. 역사는 늘 승자의 이야기로 정리되지만 인간의 가치는 승패로만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고개는 넘지 못해서 의미 있는 경우도 있다. 한 줄로 정리하면 《료마가 간다》가 “어떻게 새 시대를 여는가”의 이야기라면, 《峠》는 “사라질 시대에 어떻게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의 이야기다.

  이 두 작품을 함께 읽으면 시바 료타로가 단순한 역사소설가가 아니라 ‘역사를 빌려 인간을 묻는 작가’라는 게 또렷해져요.

  다음으로는 《坂の上の雲》까지 포함해서 ‘고개·언덕·구름’ 지형 은유로 이어서 설명해줄까요?

 

    지껄여 봐! →

  좋아요. 그럼 시바 료타로의 ‘지형 은유’를 끝까지 한 번에 정리해볼게요. 이걸 알고 나면 그의 대표작들이 하나의 사상 지도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

  1. 시바 료타로는 왜 지형을 제목으로 썼을까?

  시바의 제목을 보면 이상하리만큼 땅의 형태가 많습니다. 《峠(고개)》《坂の上の雲(언덕 위의 구름)》《街道をゆく(길을 가다)》 이건 우연이 아니고, 역사를 ‘진보’가 아니라 ‘이동’으로 본 시각 때문입니다.

  시바에게 역사는 직선도 아니고 필연도 아니며 반드시 올라가기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인간은 지금, 어디쯤에 서 있었는가?”

  2. 《峠》 —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지점

  고개의 위치 - 고개는 정점. 동시에 내리막이 시작되는 곳. 뒤를 돌아보면 온 길이 보이고, 앞을 보면 어디로 떨어질지 모름

  가와이 쓰구노스케의 위치 - 막부 체제에서 최고 수준의 합리성과 국제 감각, 이미 “이 체제는 끝난다”는 인식 보유. 하지만 선택은 끝까지 막부.

  그는 과거에 매달린 인간이 아니라 끝을 알고도 거기까지 가본 인간입니다. 그래서 《峠》는 “패배 직전의 인간이 어디까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이에요.

  3. 《坂の上の雲》 — 아직 보이지 않는 정상

  이제 방향이 완전히 반대입니다. 언덕 위의 구름이란? 아직 닿을 수 없음. 형태도 불분명. 하지만 분명 위에 있음.

  메이지 초기 일본은 가난하고 뒤처져 있고 제국주의 열강 사이에서 불안정. 하지만 주인공들(아키야마 형제, 마사오카 시키 등)은 “저기까지는 가보자”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峠》: 이미 끝이 보이는 고개. 《언덕 위의 구름》: 끝이 보이지 않는 오르막. 그래서 이 작품은 낙관적이면서도 동시에 불안합니다.

  시바는 여기서도 경고합니다. “너무 빨리 올라가면, 내려오는 속도도 빨라진다.” (이건 훗날 일본의 군국주의로 이어지죠)

  4. 결국 시바가 말하고 싶은 것

  시바 료타로의 핵심 질문은 늘 같습니다. “인간은 시대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자세를 선택하는가?”

  료마는 길을 바꾼 사람, 가와이는 자리를 지킨 사람, 《언덕 위의 구름》의 인물들은 앞만 보고 오른 사람들, 시바는 이 중 하나만 옳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5. 그래서 《峠》가 가장 씁쓸한 작품인 이유

  《峠》에는 구름도, 희망도 없습니다. 이미 내려가야 할 길. 돌아갈 수도 없음. 다만 어떻게 내려갈 것인가만 남아 있음. 그래서 이 작품은 가장 조용하고 가장 냉정하며 가장 어른스러운 소설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 《峠》는 “역사에 패배해도, 인간에게 패배하지 않을 수 있는가”를 묻는 소설이다.

  여기까지 오면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이 떠올라요. “그렇다면 시바 자신은 어느 지점에 서 있었을까?”

  원하시면 시바 료타로의 전후 일본 인식, 혹은 《街道をゆく》가 왜 말년에 집필된 결정판인지 그 지점까지 같이 가볼까요.

 

    예스. 고! →

  ㅋㅋ 좋아요, 그럼 끝까지 갑니다. 이제 마지막 퍼즐이에요.

  1. “시바 료타로 자신은 어디에 서 있었는가?”

  시바 료타로는 ‘언덕 위’에도, ‘고개 위’에도 없었다. 시바는 스스로를 이렇게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도, 거기에 몸을 던진 사람도 아니다.” 그의 실제 위치는 어디냐면 — 이미 다 지나온 길 위, 옆에서 걷는 사람. 그래서 말년에 나온 작품이 바로 《街道をゆく(길을 가다)》입니다. 오르지 않음. 넘지 않음. 싸우지 않음. 그냥 걷고, 보고, 기록

  2. 《街道をゆく》가 왜 ‘결론’인가

  이 작품에서 시바는 더 이상 승자/패자, 근대/전근대, 개혁/보수, 이런 이분법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가 보는 건 이것뿐이에요.

  “사람은 그 땅에서 어떻게 살아왔는가” 왜 이 길이 생겼는가. 왜 이 도시는 이렇게 생겼는가. 왜 이 나라는 이런 선택을 반복하는가. 즉, 역사를 ‘사건’이 아니라 ‘생활의 축적’으로 봅니다.

  3. 그래서 시바의 시선은 점점 낮아진다.

  작품과 시선으로 정리해보면 시바의 궤적은 이래요.

  《료마가 간다》는 미래를 여는 인물, 《峠》은 사라질 체제의 정점, 《坂の上の雲》은 집단이 오르는 과정, 《街道をゆく》는 그 모든 것이 지나간 뒤의 땅 - 입니다.

  영웅 → 인간 → 사회 → 문명, 이 흐름이에요.

  4. 시바가 끝내 도달한 결론

  시바는 전쟁을 겪은 세대입니다. 그래서 “역사의 대의”를 믿지 않게 됐어요 그가 말하고 싶은 건 아주 단순합니다. 너무 빨리 올라가려 하지 말 것. 반드시 이긴다고 믿지 말 것. 졌다고 해서 인간이 사라지는 건 아님.

  그래서 그는 료마를 찬미하면서도 가와이를 버리지 않고 결국 길 위의 이름 없는 사람들로 시선을 내립니다.

  5. 다시 《峠》로 돌아가면

  그래서 《峠》는 시바의 작품 중에서도 가장 ‘윤리적인 질문’에 가까운 소설이에요. - “너는 이길 것인가?” “너는 옳은가?” “너는 끝까지 너였는가?”

  가와이 쓰구노스케는 시대에는 졌고 정치에도 졌지만 자기 논리에는 지지 않았습니다. 시바는 그 지점을 ‘고개’라는 단어 하나로 봉인해둔 거죠.

  마지막 문장, 진짜로 시바 료타로의 역사소설은 역사를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너라면 어디에 설 것인가”를 묻는 질문지다.

  여기까지 같이 온 거면, 솔직히 말해 독자 레벨 상당히 깊어요.

  다음으로는 《峠》에서 가와이가 끝내 넘지 않은 ‘한 가지 선’이 무엇인지 더 파볼까요?

 

    가와이가 끝내 넘지 않은 ‘한 가지 선’? →

  아… 이 질문까지 오면 진짜 핵심이에요. 결론부터 말하면, 가와이 쓰구노스케가 끝내 넘지 않은 ‘한 가지 선’은 바로 이겁니다. - “패배를 알면서도, 수단을 더럽히는 선”

  그는 냉혹할 만큼 현실을 알고 있었고 필요하다면 잔인한 선택도 계산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딱 한 가지는 끝내 하지 않습니다.

  1. 가와이는 ‘무능해서’ 패한 인물이 아니다.

  이게 중요해요. 가와이는 서양 군사·재정 감각을 이해했고 최신 무기를 도입했고 국제 정세도 정확히 읽었고 심지어 “막부는 진다”는 판단도 이미 끝낸 상태였습니다. 즉, 그는 끝까지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는 쪽으로 가지 않아요.

  2. 그가 넘지 않은 구체적인 ‘선’

  ① 민중을 소모품으로 쓰지 않는다. : 가와이는 전쟁에서 농민을 무리하게 동원하거나 무의미한 총알받이로 쓰는 걸 극도로 꺼립니다. 이길 가능성이 없는 싸움에서 백성을 갈아 넣는 건 통치가 아니라 범죄다. — 소설 전반에 깔린 그의 태도예요.

  ② 공포 정치로 체제를 연명하지 않는다. : 막부 말기의 다른 세력들은 숙청, 밀고, 내부 탄압으로 시간을 벌려 합니다. 가와이는 이걸 알면서도 선택하지 않아요. “연명은 가능해질지 몰라도, 그 순간 이 체제는 이미 죽는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③ ‘이기기 위한 변절’을 하지 않는다. : 가장 결정적인 선입니다. 그는 신정부 쪽으로 가면 살 수 있었고 능력상 요직도 충분히 가능했으며 실제로 그런 제안을 받을 여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그의 기준은 이거예요. “살기 위해 옮기는 건 이해할 수 있어도, 옳다고 믿던 논리를 버리며 옮길 수는 없다.”

  3. 그래서 가와이의 패배는 ‘도덕적 선택’이다.

  《峠》의 비극은 무지의 비극, 시대착오의 비극이 아니고 윤리적 자제의 비극입니다. 그는 끝까지 전술가였지만 학살자가 되지 않았고 정치가였지만 선동가가 되지 않았고 패자가 되었지만 변절자는 아니었습니다.

  4. 시바 료타로가 이 선을 그은 이유

  시바는 전후 일본을 보며 “이기기 위해 넘지 말았어야 할 선”이 얼마나 쉽게 무너졌는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와이를 통해 묻습니다. “만약 이기기 위해서 인간을 버려야 한다면, 그 승리는 과연 필요한가?”

  마지막, 한 문장으로 가와이 쓰구노스케가 넘지 않은 선은 ‘패배를 피하기 위해 인간을 포기하는 선’이었다. 그래서 그는 역사의 패자가 되었지만, 시바의 세계에서는 가장 조용한 존엄을 가진 인물로 남아요.

 

야쿠쇼 코지 주연 영화 〈峠 ― 마지막 사무라이〉

 

    중간에 은근히 화가 나서 챗GPT에게 (그래 한번 니맘대로) ‘지껄여 봐!’라고 지시했지만 부지불식간 순응하며 따라가고 있다. (음~~ 그렇군!) 대화?의 주도권은 AI에게 있다. (독자 레벨이 높다는 칭찬까지 듣고! ^.^) 나는 어느새 ‘그래, 예스, 설명해 줘’다.

    인간보다 똑똑하고 스마트하여 대답이 만족스럽다. 더하고 뺄 것 없는 모범답안이다. 더 이상의 독후감, 작품해설은 필요치 않고 작품 속 두 대목만 언급하는 것으로 마무리하자.

 

  (서구)열강으로서는, 청국이라는 광대한 국토와 인구를 가진 거대한 대륙이 거기 있는데, 그 옆의 조그마한 일본 열도 따위에 입맛을 다실 까닭이 없다는 것이다. - 28권 588p

 

    쓰기노스케와 거래하는 서양인 무기상 스넬의 발언이다. 이는 원칙적, 최종적으로는 틀린 의견이다. 당장은 먹을 것 많은 청나라 먹기에 정신없겠지만 시간이 흘러 여유가 생기면 얘기가 다르다. 미식가는 전식, 중식, 후식을 막론하고 가장 큰 것에서 가장 작은 것까지 독특한 진미를 찾기 마련이다. 일단 대외확장이라는 발동이 걸리면 식민제국들의 탐욕과 먹성은 한이 없다.

    막부말기에서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지는 1860년대 말의 동아시아 정세는 청나라는 서구열강에 국권, 국익이 유린되고 왕조는 통치력을 잃어가고 있었고 조선은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있었다. 열강으로서는 우선은 청나라고 다음이 일본이고 조선은 아직 관심에서 먼 형편이었다.

 

    그런 면에서 일본은 운이 좋았다. 아무 준비 없이 너무 일찍 개국한 청나라나 버티다 버티다 기진맥진 힘을 잃고 너무 늦게 개국하게 되는 조선과는 다르게 적당한 시기에 극한 갈등과 내전을 포함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개국개화를 통한 근대화에 성공한 것이다.

    대외적으로도 유럽은 지역내 사정이 복잡하였고 미국은 남북전쟁이었으므로 열강들은 일본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막부는 프랑스, 사쓰마와 조슈의 신정부는 영국이 지지하였지만 영국과 프랑스를 포함한 어느 열강도 일본에 배타적, 독점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형세였다.

 

    서구열강의 거친 파도가 남중국해를 거쳐 동중국해로 밀려온다면 처음이 상해고 다음이 일본의 서남부 규슈다. 그래서 본래 웅번이기도 했지만 사쓰마와 조슈가 가장 서양화에 앞서 국력을 길렀다. 그 힘을 바탕으로 천황이 있는 교토에서 막부와 크게 대립하며 암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에도 이북의 토호쿠와 홋카이도는 여전히 조용했다. 마치 당시의 조선과도 비슷하여 멀리 서남쪽 교토에서의 천둥우뢰는 뒤늦게 그것도 아득하게 들릴 뿐이었다. 에도에서 멀지 않은 북쪽에 위치한 쓰기노스케의 고향 에치고의 나가오카번 역시 마찬가지다.

 

    교토의 도바 후시미 싸움으로 시작해 그 전화(戰禍)의 태풍전선이 북상했다. 친황 친막간의 내전인 보신전쟁이다. 전통적으로 친막에 가까운 나가오카의 수석중신인 쓰기노스케는 중립을 취하며 독자생존을 모색한다. 의리로 보면 막부편이어야 하고 현실로 보면 신정부측에 붙어야 한다.

    쓰기노스케의 개인적 역량은 당대에 보기 드물게 출중하였지만 번이 너무 작다. 태풍 앞의 일엽편주다. 신정부군과 담판을 시도하지만 결렬되고 결국 반정부 친막부인 오우동맹군에 들어 전투를 개시한다. 담판 전 번내의 반대세력과 친막의 맹주인 아이즈번의 방해공작이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번이 가지는 교섭력의 한계가 결정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나가오카번은 패하고 쓰기노스케도 죽게 된다. 쓰기노스케로선 나가오카라는 작은 번에 태어난 일이 불행이었고, 나가오카라는 작은 번으로서는 쓰기노스케를 낳은 일이 불행이었다. - 29권 377p

 

  지금 곧 관을 준비해라. 화장하기 위한 장작을 쌓아 올려라. 명령이다. 내가 여기서 보고 있겠다. - 29권 425p

 

    쓰기노스케가 왼쪽 다리에 입은 총상이 악화되어 죽음을 목전에 두고 하인에게 하는 명령이다. 그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극도의 고통을 조용히 관조하며 의연히 생을 마감했다. 과연 마당위로 자신의 관이 만들어지고 자신을 불태울 장작이 쌓아올려지는 것을 보며 죽음을 기다리는 심정은 어떠할까?

    작가는 이 같은 최후 역시 사라져가는 마지막 사무라이로서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듯하다. 이제 막부도 사라지고, 번도, 영주도, 가신도, 무사 사족들도 사라진다. 모두 역사의 불길 속에 한묶음이 되어 차례차례 관속에 넣어져 타서 없어진다. 작가, 그리고 쓰기노스케가 말하고자 하는 사무라이 정신, 무사도란 무엇이었을까?

 

    쓰기노스케의 사상의 뿌리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유학 그 중에서도 양명학이었다. 양명학은 명나라의 왕양명이 세운 학문으로 지행합일(知行合一), 곧 지식은 행동과 일치해야만 한다는 다소 과격한 사상으로서, 왕양명 자신이 관리, 정치가, 군인 따위를 지내면서 몸소 그 사상을 실천에 옮겼다. (28권 250p)

    이는 이론이나 덕성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서의 실무능력까지 겸비한 완성형 인간을 추구하는 것으로 서재 안의 교양인에 머무르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 지금으로 치면 현실참여의 행동형 지성인, 나아가 거의 완벽한 인간형을 추구하는 사상이랄 수 있다. 실재로 쓰기노스케는 이것을 추구했고 그것에 근접한 인간형이었다.

 

    일본유교에서 양명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인지는 모르나 이는 내가 생각하는 무사도와는 사뭇 다르다. 사무라이란 윤리적인 동시에 미적인 인간이지만 일반적으로 나 같은 보통의 한국인이 이해하는 무사도, 사무라이 정신은 ‘죽는 것’이다. 깨끗이, 미련 없이, 기꺼이 죽는 것이다.

    이것 외에 용맹성, (협객으로서의) 약자에 대한 연민 등이 무사도의 핵심이라지만 받는 인상의 대부분은 ‘죽는 것’이다. 그것이 깨끗함이고 아름다움이다. 그 반대인 더럽고 추한 것은 미련을 갖고, 구차하고, 아쉬운 소리 하고, 비겁 비루하고, 비위를 맞추려 맘에 없는 소리하고... 등이다.

 

    그밖에 <사무라이>를 포함해 이제까지의 소설들에서 내가 받은 무사정신, 무사다움의 인상은 다음과 같다. 이상적인 무사는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철저한 공익적 인간으로 가장 경계하는 것은 나를 사랑하는 마음과 남을 원망하는 마음이다. 이외의 이미지로는 의리, 단순, 소박, 결연, 담백, 온화, 대범, 호쾌 등이다. 여기서의 의리는 주군에 대한 충성, 동료에 대한 신의, 남아(男兒)로서 자신이 세운 원칙을 지킨다는 의리다. 일단 내뱉은 말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킨다.

    이 의리는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정절, 순결을 남녀간의 의리라고 한다면 이는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가치다. 심하게 말하면 남자는 바람피워도 되지만 여자는 바람피워선 안 된다. 이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전근대사회에서는 공통되는 가치관으로 딱히 새삼스러울 것은 없다. 애초 무사에는 여성이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무사의 단순, 소박한 삶은 일체의 자질구레함은 사양하는 삶이다. 옷은 깨끗하고 단정하게 몸만 가리면 된다. 음식은 뱃속을 채워 에너지만 공급하면 된다. 당연히 값비싸고 화려한 옷, 산해진미를 추구하는 것을 무사답지 않다고 여겼다. 가치판단에 있어서도 세상에는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은 없고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만 있다. 좋다 싫다, 맛있다 맛없다 하며 개인의 호불호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배운다.

    이는 개성, 다양성, 개인주의를 소홀히 하는 것으로 남녀차별과 마찬가지로 전근대적인 면이 다분하다. 동시에 현대의 화려한 자본주의 물질문명에는 전혀 어울리는 않는 재미없고 삭막하기까지 한 삶이다. LOVE YOURSELF를 노래하는 자본주의 연예사업의 꽃인 남성 아이돌에 비춰보자면 가장 반대편에 위치한 남성상일 것이다. 지금 시대에는 인기도 경쟁력도 없는 극히 드문 인간형이지만 드문 만큼 반대로 신선하기도 하고 일면 고결하기까지한 인물형일 수도 있다.

 

    다시 본래의 '죽는 것' 곧 깨끗함, 아름다움으로 돌아와서... 무사도를 지키면 떳떳하고 자랑스러우며 무사도를 지키지 못하면 추하고 부끄럽다. 남이 비웃는 바, 놀림감이 된다. 무사로서의 일본인이 가장 치욕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체면, 평판과 연결된다.

    이것이 왜곡되면 좀 이상하게 된다. 도둑질 자체보다 그것을 들킨 것이 더 부끄럽고, 들킨 것보다 들킨 후 깨끗하게 할복하지 않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 된다. 이 경우 집단, 국가 차원이라면 더 큰 비극, 참극이 된다. 대규모 희생, 죽음을 부른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시작과 과정이 아무리 추악하더라도 끝(죽음)이 한없이 담백하거나 아름답고 화려하다면 모든 게 양해된다. 어느새 처음 시작과 중간 과정은 없어지고 마지막 결과만 남는다.

 

    다른 한 편으로 왜곡되면 극단적으로 ‘사의 찬미’가 되고 강압, 폭력이 된다. - 죽기도 하는데 못할 게 없다. 또는 죽을 정신이면 못 해낼 일이 없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하면 된다!’ 심지어 ‘안 되면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되게 하라!’ 엉덩이로 밤송이를 까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해라! - 가 된다.

    세상에는 해도 해도 안 되는 일도 있고, 해서는 절대 안 되는 일도 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알고 절제하며 도리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것이 예(禮)이고 겸양이다. 그것이 사람과 사람을 서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 덕목이다.

 

    물론 쓰기노스케의 사무라이 정신은 이런 왜곡된 변종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사무라이 정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마지막 사무라이’라는 말은 검술도, 충성도 아니고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아는 인간”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은 지키는 인간이다.

    쓰기노스케는 패배를 알면서도 그 길을 갔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지 않고 자신만의 원칙과 신념을 지켰다. 그것은 죽기를 각오하는 용기보다 더한 것이다.

 

    사상이든 물건이든 처음 것이 낡아진다. 좋은 것이 나빠진다. 처음엔 용을 그려 놓았는데 중간에 뱀이 되고 나중에 지렁이가 된다. 일본인들이 추구하는 사무라이 정신도, 유교가 추구하는 성인군자상도 마찬가지다.

    신세대들이 고루하게 생각하는 유교, 유학은 많이 오해되고 왜곡된 것이다. 마치 사어(死語)처럼 잊혀진 사상이고 학문이다. 하지만 본래는 좋은 것, 훌륭한 것이다. 왜곡, 퇴행될수록 처음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대망(大望)》28,29권 <사무라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