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89 : 요한복음 11장

어멍 2011. 8. 11. 21:29
 

    성경읽기 0089 : 요한복음 11장



11장 48절

만일 우리가 이 사람이 하는 대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모두 빼앗아 버릴 것입니다.

50절

민족 전체가 멸망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이 사람’, ‘한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표적을 행하시자 사람들은 더욱더 예수님 주위로 구름처럼 몰려든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산헤드린을 열어 대책을 논의한다.

    예수님을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결국은 무리를 지어 큰 세력을 이루게 될 것임을 염려한다. 각지에 흩어진 유대민족을 규합해서 로마의 반식민지인 조국을 구하려 로마에 대항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유대 땅에 세 명의 분봉왕을 세워 분할 통치하던 로마제국도 통일되어 강성해지는 유대왕국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 당했던 것처럼 민족은 전쟁의 참화 속에 멸망의 길을 걸을 것이다. 민족 전체가 멸망당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더 낫다. 백성과 민족을 위해 그(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자.

 

    만일 우리가 이 사람(광해군)이 하는 대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우리는 은혜의 나라(명)를 배반하고 오랑캐(후금, 청의 전신)와 화친하는 불의를 저지르고 어머니(인목왕후)를 폐위시키는 패륜을 용납하는 것이 됩니다.

    나라 전체가 불의한 것보다는 비록 왕이라도 한 사람을 끌어내리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십니까?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들어앉힌 쿠데타인 인조반정을 전후해 이를 주동한 서인들이 했을 법한 말을 내 나름대로 적은 것이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 최고의 못나고 비겁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선조의 서자였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후금과 명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통해 안보를 확보하고 안으로는 여러 개혁정책을 시행함으로서 내정과 외교에서 비범한 정치적 역량을 발휘했다. 그러나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동복형(同腹兄)인 임해군과 유일한 적자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친모인 인목왕후를 유폐시킨다.

    이는 성리학을 공부한 양반사대부에게 패륜으로 비춰졌고 후금을 중시한 외교정책 역시 왜란을 도와준 나라, 천자의 나라인 명을 배신한 것으로 비춰졌다. 당시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서인들이 사류(士類)들의 이 같은 불만을 이용하여 광해군의 폭정과 패륜을 바로잡는다며 무력을 동원해 왕을 몰아낸 사건이 인조반정이다.

     이후의 역사는 모두가 알다시피 후금의 뒤를 이은 청나라의 침입, 곧 병자호란과 인조의 삼전도 굴욕이다.


    무엇인가? 예수님의 죽음과 인조반정 모두 정치적 이유에서 벌어진 사건이란 것이다. 인간사 대부분이 정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이 거의 없다. 대의명분이란 행위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한 것일 뿐,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행위의 목적은 대부분 권력을 획득, 유지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이다. 나라가 식민지배하에서 신음하든, 전란의 고통 속에서 신음하든 기존체제를 뒤흔드는 어떠한 변화도 내켜하지 않는다. 자신이 누리는 권력이 줄어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유대민족의 종교적, 문화적 전통에 과도하게 충실하여 이제 편협이 미덕의 단계에 이른 국수주의자들이었다. 서인들은 성리학에 과도하게 충실하여 명을 떠받들고 오랑캐를 멸시하는 사대주의자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안만 보는 국수주의자들은 전쟁도 불사한다. 밖을 보는 사대주의자들은 국제정세에 밝다. 밝아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전쟁을 두려워하였다. 국제정세에 밝지 않았다. 바리새인들은 전쟁이 일어나 민족이 멸망할 것을 염려한다. 서인들은 국제정세를 무시하고 청을 배척함으로서 조선을 전란에 휩싸이게 한다.

    하지만 그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명분도 틀리고, 상황도 틀리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정치적으로 움직였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종교인이라기보다 정치인이었다. 서인들은 성리학자 이전에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각자 대의명분을 앞세우지만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따라 움직인다.

    무엇인가? 온갖 주의주장이 있지만 결국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느냐, 이웃을 위하느냐. 당파를 위하느냐, 모두를 위하느냐. 세속의 이익을 따르느냐, 하나님의 공의를 따르느냐가 핵심이다. 대의명분 뒤에 숨겨진 속살을 봐야 한다. 거짓 명분을 꿰뚫어 봐야 한다. 매국노에게도 그럴듯한 핑계가 있고, 비겁자에게도 나름대로 변명이 있다.




양의 탈을 쓴 늑대
에봇 입은 독사의 자식, 법복 입은 승냥이, 양복 입은 사기꾼들을 간파해야 한다.



    그 날 이후, 유대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요한 11:53] 그 계획은 성공을 거둔다.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매달린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은 그들이 옳았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생명을 내어주신 것이다. 그들이 고난의 잔을 내린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고난의 잔을 드신 것이다. 그들이 내민 고난의 잔은 정치적 독배였지만 예수님이 마신 고난의 잔은 종교적 독배였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해 그 고난의 잔을 드시고 하나님께 우리의 죄 사함을 받으셨다. 우리를 구원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이 한없다. 예수님의 희생이 위대하다.

 


PS : 30년경의 예수님...... 1623년의 광해군...... 2009년의 노무현......


    만일 우리가 이 사람(노무현)이 하는 대로 계속 내버려 둔다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르며 그 주위로 몰려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은혜의 나라(미국)를 배반하고 북한과 붙어먹는 불의와 불손을 용인하는 것이 되고 이 나라는 빨갱이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나라 전체가 붉게 물드는 것보다는 비록 대통령이(었더)라도 한 사람을 끌어내리(어 죽게 하)는 것이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