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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성경읽기 0058 : 에스겔 23장

어멍 2011. 2. 23. 00:10

    성경읽기 0058 : 에스겔 23장



23장 40절

그들은 멀리 사람을 보내어 남자들을 불러들였다. 두 자매는 그들을 맞으려고 목욕을 하고 눈 화장을 하고 보석으로 몸을 치장했다.

41절

그리고 그들은 화려한 소파에 걸터앉아 그 앞에 상을 차려 놓았는데 그 상 위에는 내가 준 향과 기름을 올려놓았다.

42절

성 안에서 떠들썩한 소리가 들리니, 광야 쪽에서 사람들이 술에 취한 채 몰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두 자매의 팔에 팔찌를 끼워 주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관을 씌워 주었다.

43절

그 때에 내가 간음으로 닳아빠진 여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 저 여자를 창녀처럼 데리고 놀아 보아라. 저 여자는 창녀와 다를 바가 없다.’

44절

그들은 그녀들과 잠자리를 같이했다. 마치 창녀와 잠을 자듯, 그들은 그렇게 음란한 오홀라와 오홀리바와 잠을 잤던 것이다.


23장 25절

그들은 잔인하게 너를 다룰 것이다. 네 코와 귀를 베어 버리고, 네 아들딸들을 잡아가며, 남은 자들은 불에 태우고,

26절

네 옷과 보석들을 빼앗아 갈 것이다.

27절

이렇게 해서 나는 네가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온 음란한 생활을 그치게 하겠다.

 

    순서를 바꾼 것은 40~44절은 원인, 죄이고 25~27절은 결과, 심판이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그들’을 스스로 불러들여 간음하였다. ‘그녀들’은 한 부모에서 난 자매인 오홀라와 오홀리바다. ‘그들’은 이집트이고 앗시리아이고 바빌로니아다. 언니 오홀라는 사마리아로 대표되는 (북)이스라엘을 상징하고 동생 오홀리바는 예루살렘으로 대표되는 (남)유다를 상징한다. 언니 오홀라(이스라엘)의 간음의 죄와 그 멸망을 지켜본 동생 오홀리바(유다) 역시 깨닫고 회개치 못하고 언니가 걸어갔던 죄의 길을 똑같이 따라간다. 그 결과 역시 멸망뿐이다.

    성경에선 주(主) 하나님과 이스라엘(백성)과의 관계를 여러 모습으로 비유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부모(주)와 자녀(백성)다. 특히 아버지(주)와 딸들(백성)의 모습으로 많이 그리고 있다. 또 하나가 목자(주)와 양떼(백성)다. 보살피고 보살핌을 받는 관계로 말하면 부모자녀의 관계와 상통한다. 나머지 하나가 남편(주)과 아내(백성)의 부부, 남녀관계다. 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관계다. (왕, 제사장, 지도자들과 백성과의 관계는 이 중 주로 목자와 양떼와의 관계로만 그리고 있다.) 간음이란 이런 사랑과 신뢰, 충성과 믿음의 파탄이다. 배신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과 유다가 차례대로 심판을 받아 멸망한다.


    창녀는 불결하다. 부도덕하다. 그러나 동시에 약하다. 팔 수 있는 것이 몸뚱아리밖에 없는 약자다. 누가 사는가? 돈 많은 부자, 힘센 권력자가 산다. 이스라엘은 약소국이다. 반면 이집트, 앗시리아, 바빌로니아는 강대국이다. 이집트와 바빌로니아 사이에서 눈치를 보며 생존을 도모하다가 결국 멸망하게 되는 유다의 마지막 시기인 여호야긴, 여호야김, 시드기야 왕들의 이야기를 보면 이스라엘과 유다가 생각보다 외세에 휘둘리는 처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 시작해서 지금까지 해온 음란한 생활이었다.(27절) 이집트는 출애굽 시대로부터 면면이 이어져온 전통의 강호다. 반면 앗시리아와 바빌로니아는 무서운 속도로 새롭게 일어선 신흥강대국이다. 아마도 문화, 풍습, 정치, 종교 등 다방면에서 이 나라들의 영향이 심대하였지 않았을까? 아마도 자고 나면 세력판도가 바뀌는 격동의 시대였으리라. 왜 이것이 음란한 죄인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을 받들고, 제 민족을 버리고 외세에 빌붙어 권력을 향유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것, 무도하고 강한 욕보이려는 자와 어리석게도 불감청고소원, 그것을 원하는 음란하고 탐욕스런 자의 관계는 바로 지금, 여기서 무엇인가. 국가와 국가와의 관계, 한 국가 안에서의 제 세력들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의 세 측면에서 살펴보자.


    영은문(迎恩門), 모화관(慕華館) - 독립문 네거리에 있었던 중국 사신을 맞아들였던 문과 숙소 이름이다. ‘은혜를 맞이하는 문’, ‘중국을 사모하는 집’이라는 의미다. 1895년 독립협회에 의해 영은문은 헐리고 그 옆자리에 독립문이 세워지고, 모화관은 독립관으로 개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독립협회를 구성한 개화파에 속한 주요인물이 이완용이었듯이 이는 친미, 친일파의 후원 하에 청나라로부터의 조선의 독립(이라 쓰고 떼어놓는 것을 의미한다.)을 의미했다. 사실상 지금의 독립문은 조선반도 내에서 일제가 청국에 거둔 승리의 상징물인 것이다. 이렇듯 일제의 대한제국 침탈은 치밀하게 계획되어 야금야금 빼앗는 과정이었다.

    이완용은 정통 유학을 공부해 조정에 출사한 후 미국통 외교 관리를 거쳐 아관파천 당시 친러파로, 갑오경장 이후 친일파로 기운다. 친미에서 친러로 친러에서 친일로 변신하면서 나라를 팔아먹는다. 친청한 자는 친미도, 친러도, 친일도 할 수 있다. 이집트에 몸을 판 자는 앗시리아에도, 바빌로니아에도 몸을 팔 수 있다.

    구한말, 대한제국 이래 이 땅은 친청, 친러, 친미, 친일, 다시 친미의 외세의존적인 세력들이 득세해왔다. 물론 원교근공, 평등호혜, 균형외교 등의 지혜롭고 능숙한 외교술은 필요하다. 하지만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세력들이 단 한 번도 단죄되지 못하고 지금에 이른 것은 사실이다. 현재도 미국과 일본에 너무 과도하게 의존하고 있다. 중국, 러시아까지 가까이 두고 남북으로 분단된 한민족의 정치지형학적 현실에선 위험한 올인정책이다.

    ‘미국과 일본은 나쁘고 중국과 러시아는 좋다’라는 말이 아니다. 그런 식의 감정과 인상에 근거한 유치하고 한가한 접근 방식이야말로 아마추어식 난센스다. 그들 모두는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다. 서로 존중하며 우의를 다지고, 떳떳한 자주독립국의 입장에서 국민의 복리를 위해 협상도 하고 선의의 경쟁을 하면 된다.

    닫힌 민족주의, 국수주의로 흘러서도 안 되지만 근본을 잊고 사대주의로 흘러서는 안 된다. 그 근본은 국민의 복리, 민족의 번영이다. 국익이요, 민족이다. 이 모두가 성경의 말씀, 하나님의 가르침이다.




영은문과 독립문



    외교, 국제정치 뿐 아니라 한 국가내의 제 세력들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현대 민주주의국가의 세 요소인 국토, 주권, 국민 중에서 국민이 가장 중요하다. 국토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인, 주권의 주인은 국민이다. 하지만 위정자, 지도자들은 부귀영화를 위해 국민이 아닌 권력(자)에 줄서는 간음을 저지르기도 한다.

    국민의 공복인 검찰, 경찰, 법원, 공무원, 국회의원들이 국민보다 권력(자)의 눈치를 본다. 국민을 위해 봉사하기 보단 권력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 입법부는 통법부가 되었고 법원은 권력의 시녀, 검경은 권력의 창녀가 되었다.

    참여정부 때 수사권 독립을 주장하며 검찰과 갈등했던 경찰은 그것을 지지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을 욕보인 인물이 수장에 앉아 권력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으며 검찰의 하부기관에 안주하고 있다. 검찰 역시 마찬가지다. 검찰의 자율과 중립을 보장해주었던 노 대통령에는 도사견처럼 그렇게 대들며 물어뜯고, 결국 죽음으로 내몰더니 이명박 정권아래서는 순한 애완견이 되었다. 몇 덩이 던져진 고깃덩이에 정신없이 꼬리를 흔들어댄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국민들의 지탄과 권력에 의한 공조직의 파괴다.

    경찰조직은 이미 청렴한 인물들이 밀려난 채 부패와 안일로 만신창이고 검찰 역시 옳고 강직한 검사들이 미움 받고 쫓겨나 권위를 잃은 지 오래다. 공익을 위해 견제와 균형을 이루며 독립성을 발휘해야할 공공기관들이 청와대 밑에 법무부, 법무부 밑에 검찰청, 검찰청 밑에 경찰청의 순으로 수직 계열화되어 경직되고 썩어가며 독립성을 잃었다.

    강희락 전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수뇌부들이 비리로 수사 받고 있고 남기춘 지검장 등 올곧은 검사들은 정당한 수사에 정권의 압력을 받아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검찰을 떠났다. 경찰도 검찰도 정권에 아부했던 몇몇 고위인물은 출세가도를 달려도 조직은 민심을 잃고 망가진다. 기능은 상실되고 시스템은 허물어졌다. 쓴웃음을 자아내는 블랙코미디, 엉망진창 난장판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정권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검찰, 경찰의 잔혹사다.

    경찰은 국민을 믿고, 국민에게 호소하는 방식으로 수사권 독립을 주장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과 검찰의 반대를 뚫을 수 있다. 검찰은 국민을 바라보고 수사에 임해야 한다. 그래야 정권의 외압을 벗어나 조직이 바로설 수 있다.


    인간관계, 남녀관계에선 어떨까? 인심이 가벼워서 옳고 그름보단 호불호요, 호불호보단 유불리인 경우가 많다. 이익으로 맺어진 관계는 이익이 바뀌거나 소멸되면 언제고 바뀌는 불완전한 관계이다. 호불호, 취향, 감각은 그보단 오래간다. 하지만 진실로 오래갈 수 있는 것은 옳고 그름이다. 신념, 가치관, 삶의 양식이다.

    사람마다 가치관도 다르고, 호불호도 다르고, 유불리도 다르다. 남녀 간엔 궁합이라는 것도 있고, 누군 속 깊진 않아도 여우 같은 마누라를 좋아하고 누군 좀 답답해도 곰 같은 마누라를 좋아한다. 여자라면 누군 좀 믿음직스럽진 않아도 친구 같고 동생 같은 정답고 재미난 남편을 원하고, 누군 좀 재미없어도 스승 같고 아빠 같은 존경할 만한 믿음직한 남편을 원한다. 하지만 정답은? 하나마나한 싱거운 결론이지만 남편은 남편 같고, 아내는 아내 같아야 한다.

    밤에는 요부, 낮에는 양처라도 근본은 착하고 지혜로운 아내다. 밤에는 짐승남, 낮에는 능력남이라도 근본은 사랑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는 믿음직한 남편이다. 목욕을 하고 눈 화장을 하고 보석으로 몸을 치장하고 향수를 뿌리며 교태를 부리는 것에 그친다면 오홀라와 오홀리바와 다르지 않다. 술에 취해 그녀의 팔에 팔찌를 끼워 주고 머리에는 아름다운 관을 씌워 주는 것에 그친다면 이집트와 앗시리아의 사내들과 다르지 않다.

    욕정에 그치는 관계의 결말은 비참하다. 성욕이 채워지거나 싫증이 나면 잔인하게 돌변할 것이다. 교태의 눈웃음은 표독하게 변할 것이고 매력적인 강한 팔뚝은 내려치는 몽둥이로 변할 것이다.


    사랑과 신뢰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부부간에 특히 그러하지만 모든 인간관계에서 서로 간에 행복한 관계를 맺기 위해선 먼저 생존해야 한다. 먹고 살고 숨 쉬게는 해주어야 한다. 다음에 서로 존중해야 한다. 스스로 의미 있고 귀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런 다음에야 진정한 행복이란 것을 맛볼 수 있다.

    생존→존엄→행복 순이다. 존중 없는 사랑은 거짓사랑이다. 욕심이요, 아집이요, 집착일 뿐이다. 완악한 사내가 갖고 노는 일방적인 노리개, 탐욕에 찬 요부의 욕정의 대상일 수도 있다. 밝지만 순간 사그라지는 불꽃이다.

    지속되는 진정한 행복은 존중을 갖춘 사랑으로서만 가능하다. 아무리 산해진미를 갖다 바치고 물질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해 준대도 상대를 존중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잠깐 아부도 하고 아양을 떨며 미쳐 좋아 죽는대도 일상에서 사사건건 반대하고 트집 잡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행복할 수 없다.


    아내와 함께 성경을 읽는 시간은 밤 10시 이후, 아이들이 누운 침대 옆이다. 그러다보니 이 같은 구절을 읽을 때는 난처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아내도 나도 웅얼웅얼 얼버무린다.

    간혹 성경에는 전쟁, 기아, 질병에 관련된 잔혹한 구절과 노골적인 성적인 언급이 나올 때가 있다. 19금 잔혹극, 약탈, 살인, 폭력, 성적 문란 등의 표현이 보인다. 적나라한 표현이긴 하지만 사실 과장은 아니다. 아마도 실제 모습은 더했으리라.

    현실은 언제나 드라마보다 리얼한 법이다. 아마도 “회칠한 무덤”(직역하면 사기꾼), “독사의 자식”(직역하면 뱀새끼나 우리식으론 개새끼) 같은 예수님의 말씀도 문맥상 순화된 것일 수 있다. 적어도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예수님의 실제 행동에 비해선 과격하고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란 영화가 있다. 예수님의 고난에 대한 잔혹한 표현으로 많은 충격을 준 영화다. 누구는 너무 잔인하여 기독교도조차 보기 꺼려하지만 실제 모습은 그 이상이었으리라. 어쩌면 그 참상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우리의 죄악상이 상상을 초월하는 만큼 예수님의 고통의 참상 역시 상상을 초월한 것이리라.




영화 <The Passion of The Christ> - 우리의 죄가 크니, 예수님의 고통 역시 크다.



    현실은 냉혹하고 인간은 잔인하다. 인간은 한없이 선할 수도, 한없이 악할 수도 있는 존재다. 한없이 성스러울 수도 한없이 비루할 수도, 한없이 아름다울 수도 한없이 추할 수도, 한없이 명철할 수도 한없이 어리석을 수도 있는 존재다. 나사렛 예수도 인간이었고, 예수를 잔인하게 죽인 사람도 인간이었다. 별의별 사람이 많으니 사람과 사람이 다 다를 수 있지만 한 개인 안에서도 마찬가지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그의 소설 <1984>에서 “인간의 (놀라운) 신축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주인공인 윈스턴이 극한 고문을 받으며 생존하고 적응하고 변해가는 과정 중에 나오는 언급이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이 얼마나 고통을 감내하는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환경에 적응하고 어디까지 변화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을 통렬히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탄력 좋은 고무줄이 놀라울 만치 줄어들고 늘어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웬만해선 죽지 않는다. 웬만해선 그럭저럭 적응해간다. 그 (명)줄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이것은 웬만하면 인간이 죄를 돌이킬 수 없음을 설명하기도 하고(죄의 속성에 적응하며 무감각해진다.) 아무리 악독한 죄인도 회개의 가능성이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인간은 끝없이 추락할 수도 있는 존재요, 한없이 상승할 수도 있는 존재다. 하지만 거기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끝없는 추락은 하나님 없이도 가능하지만 한없는 상승은 하나님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

    하나님의 은총의 상승기류, 그 기적 같은 도움 없이는 한없이 날아오를 수 없다. 우리의 잔혹한 죄를 사하신 것은 예수님의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것을 감내하신 예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 한없는 사랑이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내시고 우리의 유한한 능력을 고양시켜 하늘로 이끌어 올리시는 것은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