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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 리뷰

어멍 2023. 9. 1. 20:50

 

≪프랑스 혁명사≫ 3권 <진정한 혁명의 시작> 리뷰

 

<진정한 혁명의 시작>

부제 :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

 

    표지그림에서 농민 네 명이 귀족의 표식인 모자, 갑옷 등을 도리깨로 때려 부수고 있다. 부제 역시 ‘신분제 국가에서 국민국가로’로 절대왕권이 무너진 후 혁명이 본격화되면서 자유에서 평등으로까지 나아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자유와 평등은 대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개념으로 봐야한다. 무제한의 방임적 자유를 주장하는 특권층 강자들은 너나 없는 평등은 신의 뜻에 맞지 않으며 자신들의 자유(권리)를 축소한다고 여기겠지만 평등이 확장될수록 모두가 누리는 자유의 총량은 증가한다. 이것이 다양성(자유)과 평등이 공존하는 화이부동, 대동세상의 이상이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이 이상은 언제나 멀고 아무리 혁명이라지만 모든 것이 일순간 변할 수는 없다. 반혁명(앙시앵레짐)은 혁명보다 오래된 것이다. 저항과 진통이 없을 수 없다. 왕족, 귀족과 (고위) 성직자들이 가만있을 리 없다. 절대왕권의 둑은 이미 무너졌지만 이제 혁명의 초입으로 아직 갈 길이 멀다.

    칼로 무 자르듯 나눌 수 없어도 왕권은 정치적 앙시앵레짐, 귀족(신분)사회는 사회적 앙시앵레짐, (가톨릭) 종교는 문화적 앙시앵레짐과 관련이 깊다. 그리고 정치, 사회, 문화로 갈수록 그 뿌리가 깊고 넓기 때문에 그 저항도 은근하면서도 더 끈질기다. 경우에 따라선 혁명의 수혜자일 수밖에 없는 민중이 가장 완고한 구체제의 옹호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허망한 작위를 무효화합시다. 자만심과 허영의 경박한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덕이 만들어내는 차이만 인정합시다. 누가 프랭클린 후작, 워싱턴 백작, 폭스 남작이라고 말합니까? 그저 벤저민 프랭클린, 폭스, 워싱턴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름을 부를 때 따로 장식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름만 불러도 존경심이 우러납니다. - 274p

 

    신분제를 폐지하면서 귀족의 호칭, 표식, 문양, 의복 등의 차별도 금지한다. 대부분의 귀족들이 고위성직자들과 더불어 보수적 입장에서 반대하지만 대세를 막기엔 역부족이다.

    찬성하는 소수의 귀족도 있었는데 이들은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았거나 별 볼일 없는 귀족인 경우였다. 우리 역시 서얼출신 양반들은 신분사회에서 겉돌거나 보다 진보적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와 비슷한 경우일 것이다.

 

    옛날 옛적에 사람을 무엇으로 구별하고 알아보았나? 대개가 지역과 혈통이었다. 이름 없는 사람도 있었고, 개똥이 소똥이 이름 같지 않은 이름도 많았다. 어엿한 이름이 있다 해도 그 효용가치는 크지 않다. 직접 대면하고 말을 나눠보지 않는 한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개 ‘어디 출신의 누구 자식’으로 구별되고 인식된다. 예수님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불리기 전에 ‘다윗의 자손 나사렛 예수’로 먼저 불렸다. 지금도 시골에선 ‘뱀사골 춘삼이 첫째 아들’ 식이다.

    당시 전국에서 선출되어 국회에 모인 의원들도 ‘어디 출신 누구 자제 ** 백작’ 식으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결국 귀족의 호칭, 표식, 문양, 의복 등은 모두 피(혈통)와 관계된 것으로 이제 사회는 혈통보다 개개인의 능력, 덕성이 더욱 높게 평가받는 사회로 나갈 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사회는 어떤가? 많이 좋아졌지만 만족스럽지 않다. 여전히 ‘니 아버지 뭐 하시노?’란 질문이 낯설지 않다. 정치인도, 기업인도, 교회목사도 아버지의 후광 아래 세습된다. 무엇보다도 정치인 같은 공인도, 친구, 애인 같은 사인도 개인의 능력, 덕성을 알려면 일정시간 검증이 필요한데 그 과정을 소홀히 하고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간혹가다 우리는 풍문으로만 알던 사람을 직접 만나 몇마디 나눠보고 크게 실망하거나 크게 탄복하는 경우를 겪기도 한다.

    조금만 늦춰지면 손해볼 것 같이 사회가 너무 바삐 돌아가고 경쟁이 치열하다. 스펙 쌓기도 모자라 혈연, 지연, 학연 모든 것을 동원하고자 한다. 수양이나 공부보다는 스펙 쌓기가 손쉽고 스펙 쌓기보다 연줄이 빠르다. 한마디로 내실보다 외양에 치우쳐 있다. 정직하고 우직하게 이름 석 자만 내걸고 승부를 보려하는 용감하지만 무모한 자는 없다.

    가뜩이나 체면이나 평판에 민감하고 자의식이 강한 한국인이 지지 않으려고, 무시당하기 싫어서 무리하고 오바한다. 호칭부터 옷, 가방, 시계까지 겉을 꾸미는 쓸데없는 수식의 인플레다. 옆집에서 대형차를 사면 땡빚을 내서라도 똑같거나 더 큰 차를 산다. 그래서 한국은 명품(사치품)시장, 대형차 시장이 강세다.

 

    어려서부터 자식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가르친다. 심지어 차라리 때리더라도 맞고 들어오지는 말라고 한다. 가뜩이나 하나나 둘을 낳는데 모두가 ‘우리 공주님’ ‘우리 왕자님’이다.

    계산에는 밝지만 공동체 의식이 약한 MZ 세대의 문화를 비롯하여 최근 우리사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교실붕괴, 관종출몰, 엽기적 묻지마 범죄 등도 이런 경향과 어느 정도 연관이 있다고 보여 진다.

    이렇게 과열된 경쟁사회를 완화하기 위해서 우리에겐 좀 더 성숙하고 겸허한 철학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북유럽에 정착된 얀테의 법칙(얀테의 십계명) 같은 것이다. ‘나는 특별하지 않다’로 대표되는 이 사상 덕분에 북유럽은 평등과 존중의 문화가 정착돼 있다.

 

얀테의 십계명

1. 당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마라.

2. 당신이 남들만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마라.

3. 당신이 남들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하지마라.

4. 당신이 남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마라.

5. 당신이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하지마라.

6. 당신이 남들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마라.

7. 당신이 모든 일을 잘한다고 생각하지마라.

8. 다른 사람들을 비웃지마라.

9. 당신에게 남들이 관심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마라.

10. 당신이 남들에게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마라.

 

    이러한 사회는 스스로 남들보다 특별하거나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고, 사익만을 추구하는 개인주의, 능력주의를 경계하고 공공선을 지향함으로서 사회적 연대감과 행복지수가 높다.

    대신 단점은 특별함을 경계하여 사회의 활력이 떨어질 수는 있다. 평균의 삶이 보장된 사회이기는 하지만 튀지 않아야 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개성과 표현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는 좀 단조롭고 답답하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이에 비한다면 한국은? 화도 나고 힘들고 지치기는 하지만 적어도 심심하지는 않다. ^.ㅠ

 

  법관들은 사회적으로 뿌리 깊은 귀족 출신이며 재력과 금력, 게다가 지력까지 두루 갖추었다. (...) 고등법원은 왕과 대신들의 정치를 전제정이라고 공격하면서 여론을 자기편으로 만들고 “왕국의 기본법 수호자”라는 깊은 인상을 남기면서 인기를 끌었다. - 162p

 

    혁명 전의 사법체계는 왕의 명령을 고등법원이 등기함으로서 효력이 발생하는 시스템이었다. 즉 왕이 입법권, 법원이 심사권을 가졌는데 법원이 등기를 않거나 차일피일 미루는 방식으로 왕권을 견제하였다. 그럼 왕은 법관들을 한지로 발령내거나 파면하는 식이었는데 항상 최후에는 법원이 굴복하였으므로 고등법원에 거부권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형편이었다.

    혁명 후에는 국회가 입법하고 왕이 승인하는 방식이었는데 왕에게는 제한적, 한시적 거부권이 부여되었다. 이 혁명의 격변기에 고등법원은 자연스럽게 정치의 한구석으로 밀리면서 존재자체가 유명무실해지고 결국 폐지되는 것으로 결정난다. 당연 고등법원 법관들의 심한 반대와 저항이 있게 된다.

 

    당시의 고등법원과 현재 한국의 법조계, 특히 검찰을 비교하면 많은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원래 법조계가 전통적으로 보수적 집단이라는 것도 공통점이지만 당시 고등법원 법관들이 집단적으로 보여준 노골적으로 불쾌한 감정과 행동들이 지난 문재인 정권의 검찰개혁 때 검사들이 보여준 양상과 판박이기 때문이다.

    차이점이라면 영장청구권, 수사권, 기소권 등을 갖고 있는 현재의 검찰이 당시 고등법원보다 실질적으로 더 권력이 세다는 것, 그리고 당시 고등법원은 완전히 문 닫고 찌그러졌고 검찰은 윤석열 검사가 대통령이 되면서 완전 활개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전두환 군인들이 사람 몸에 구멍을 낼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현재 한국의 검사들은 사람을 산채로 몇 년 동안 지옥에서 살게 하는 힘을 가졌다. 고등법원은 국회의 경고에 바짝 엎드려 꼬리를 내리고 결국 패배하였지만 현재의 검찰은 상대의 힘마저 제 것으로 빨아들이는 흑마술사처럼 더욱 힘을 키웠다.

    고등법원은 앙시앵레짐에서 왕권을 견제하여 여론의 지지와 응원을 받았고 검찰은 거대권력, 살아있는 권력을 수사, 처벌하여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진실은 살아있는 권력이 아닌 이미 죽은 권력, 곧 죽을 권력, (자신을 위협하는) 반드시 죽여야 할 권력을 죽였을 뿐이다. 검찰은 정의로운 사자가 아닌 기회주의적 하이에나였다.

    그때와 지금은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하지만 본질에서는 같다. 민주주의와 공공의 이익에 복무한 것이 아닌 자기 집단, 자기 권력의 사사로운 이익에 따라 움직였을 뿐이다.

 

    지금은 공화국의 검찰이 아니라 검찰공화국이 되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정치인마저 겁을 먹고 침묵하거나 용비어천가 부르기 바쁘다. 아직 민주당이 다수인 입법부의 견제를 받고 있고 내년 총선도 남아있어 최종 승부가 나진 않았지만 현재는 엄혹한 검찰의 시간이다.

    내년 총선 기간은 시민의 시간, 국민주권의 시간이다. 날뛰는 검찰을 확실히 제압하여 그 이후로도 시민주권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 제 욕심에 본분을 잊고 주인을 문 미친 도사견의 이빨을 뽑고 재갈을 물려 충성스런 반려견으로 만들거나 그도 안 되면 고등법원처럼 안락사시켜야 된다.

 

  1790년 7월 12일 성직자시민헌법 최종안이 나왔다. 새 체제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교회를 국가 밑에 두어 주교나 대주교의 수를 줄이는 동시에 로마 교황청과 관계를 끊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리하여 종교인의 사법적, 정치적 간섭을 배제하고 오로지 종교적인 일만 하도록 했다. - 201p

 

    혁명의 폭풍은 종교에도 불어 닥쳤다. 제1신분인 가톨릭 성직자는 그 수도 줄고 권력과 재산도 졸아들었다. 수도원이 폐쇄되는 등 물리적, 정신적 지위를 잃었으며 법과 제도와 관습의 모든 면에서 이전의 영광을 더 이상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당시 교회는 해마다 십일조로 8,000만 리브르, 부동산 수입으로 7,000만 리브르를 거둬들였는데 십일조는 폐지되고 교회재산은 국유화되었다. 그 밖에 결혼, 장례 때 받는 성식사례비도 금지되어 모든 종교행사와 의식은 무료로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대신 성직자의 첫해 수입을 교황에게 납부하는 의무를 폐지하고 국가가 매월 일정금액을 직급에 따라 지급하는 것으로 하였다. 공무원이 된 것이다.

 

    쨉, 스트레이트, 어퍼컷...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이러한 변화에 고위성직자들은 큰 충격을 받는다. 이들은 귀족들과 함께 반혁명, 왕당파를 이루어 혁명에 저항하게 된다. 여기에 기존 가톨릭 신자들이 동원, 가담하여 소요가 일어난다.

    귀족주의자와 가톨릭교도들이 한편, 국민방위군(부르주아가 질서유지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창설한 군대)과 개신교도들이 다른 한편이 되어 여기저기서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몽토방(Montauban)에서 벌어진

왕당파 가톨릭교도와 혁명파 개신교도간의 무력충돌

 

    귀족과 가톨릭이 정치와 종교 면에서 서로 이해가 일치하여 밀착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민중, 평민들은 새롭게 변화되고 있는 정치체제는 물론 종교체제 역시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종교를 바꾸는 것과 정치성향, 지지정당을 바꾸는 것 중 무엇이 더 어려울까? 둘 다 아주 힘들다. 대개 평생 그대로 간다. 1593년 부르봉 왕조를 연 앙리 4세는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다시 프랑스 왕이 되기 위해 개신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지만 평민에게 그럴 일은 없다.

 

    당시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가톨릭 신자들이 훨씬 더 많았다. 이들은 여전히 기존 앙시앵레짐에 익숙했다. 평민이지만 귀족과 고위성직자의 기득권 편에 가담한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신분에 대해선 배반이지만 자신의 종교적, 문화적 정체성에 대해선 배반이 아니다.

    혁명기, 격변기는 이렇게 혼란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뒤섞여 뭐가 옳고 그른지, 누가 내편이고 네편인지 헷갈린다. 유불리와 사상에 따라 일찌감치 갈 길을 정하고 적극적으로 혁명의 편에 서든지, 저항의 편에 서는 사람들도 있고 기회를 보아가며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사람들도 있고 최후의 승자가 정해질 때까지 관망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소요를 일으킨 가톨릭교도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기회주의자도, 방관자들도 아니다. 종교적 신념이 투철한 무적의 몸빵부대다. 수고로이 광장에 나와 총칼을 든 확신자들이다. 이들 없이 인구의 2%에 불과한 성직자와 귀족만으론 소요를 일으킬 수 없다. 광장은커녕 집 안마당도 채울 수 없다.

    이는 현재도 마찬가지다.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아스팔트 우파의 집회에 나온 사람들 중 다수는 개신교 신도들이다. 이들은 전광훈 목사 등 극소수의 종교인, 정치인들의 지휘를 받고 있다.

 

    역사를 보면 종교인, 성직자들은 대개 기존 질서에 녹아들어 보수우파를 형성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기의 가톨릭이 그랬고 스페인 내전 때의 가톨릭이 그랬다. 혁명기 개신교는 가톨릭에 비해 진보 쪽에 가까웠으나 지금의 한국에선 가톨릭보다 더 보수 쪽에 가까운 느낌이다.

    정확한 통계자료가 있는지 모르지만 각 집단마다 여론조사를 한다면 재밌는 결과가 나오리라 예상된다. 아마도 개신교 신자들은 6:4 정도로 보수인 국민의힘 지지가 강하고 신천지 등 사이비는 그 비율이 8:2나 그 이상일 것으로 생각된다.

 

  누구도 혁명을 계획한 대로 이끌어나갈 수 없었으며 (...) 10월 초에 왕이 ‘파리의 포로’가 되었을 때, 그 누구도 1,000년간 뿌리내린 왕정을 폐지하는 날이 3년 안에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 7p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앞에 놓인 하루하루의 과제를 해결하는 일에 매달려 산다. 앞날을 예상하고 계획하고 개척하며 만들어나가는 사람은 극소수다. 하물며 역사는 말해무엇하겠는가!

    역사는 목적지를 향해 직진하는 것이 아닌 전후좌우로 진동하며 나선형으로 나간다. 역사를 의도한 대로 만들어 나가는 것은 기름칠한 물풍선을 농구골대에 던져 골인시키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위정자는 교만치 않고 겸손해야 한다. 시민들은 조급해 말고 욕심을 줄여야 한다.

    시대의 풍운아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퇴임 후 아쉬움을 토로하며 ‘결국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고 했다. 나라를 바꿔보겠다고 출사표를 던지고 대통령으로 5년을 보냈지만 허무 비슷한 진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이다. 최고 권력자로서도 역사와 개혁이 버거웠던 것이다.

 

    역사도 정치도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공히 섭리라 부를 정도로 반전과 역설이 작용한다. 최종적이며 완벽한 정답도 없고 전지전능한 해결사도 없다. 역사의 무대에 데우스 엑스 마키나(고대 그리스연극에서 기계장치로 무대로 내려오는 신)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역사의 최전선에 있는 자들은 겸허한 자세로 경거망동 말아야 한다. 쌓아올려진 탑에 돌 하나를 얹는 심정, 눈을 가리고 암흑 속을 전진하는 자세여야 한다. 무슨 돌을 얹고 어디로 향할 것인가? 시대에 맞는 정확한 방향과 비전만 제시해도 절반은 성공이다.

 

    역사와 민중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잔머리 굴리지 말고 우직하게, 일희일비 말고 의연하게 전진해야 한다. 그 믿음은 역사는 언제나 전진하고 민중은 항상 현명하고 옳다는 믿음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결국은, 그리 된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그것은 인간의 지성과 선함에 대한 믿음과도 상통한다.

    역사의 맥박과 함께, 민중의 호흡과 함께 전진하라! 민중 속에 속한 강경파와 온건파를 동시에 품고 지지자와 반대자를 동시에 사랑하라! 개딸이든 태극기부대든 거칠고 과격한 민중을 두려워하고 저어하는 자는 진보든, 보수든 정치할 자격이 없다. 물을 무서워하는 수영선수, 칼을 다루지 못하는 요리사와 같이 자격미달이다.

 

    - 3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