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풀기 힘든 난제, 딜레마
기독교의 풀기 힘든 난제, 딜레마
이것은 어느 시골 성당이나 교회 문을 나서는 평범한 농부나 아낙네 그리고 조숙한 소년소녀들의 머리 위로 언뜻 스치고 지나갔던 생각들일 것이다. 혹은 배움 깊은 신학자, 철학자들이 오랜 시간 씨름하였던 주제이거나 교황청 고위성직자들 간에 치열하게 다루어져왔던 남모를 화두였을 것이다. 지난 2000여 년간 그래왔고 지금도 주일학교 초딩들의 머릿속에 막연하게 때로는 너무도 명확하게 떠오르는 의문이자 수십 년 동안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는 물론이고 매주 강단에서 주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연로한 목사님조차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질문들이다.
이것은 불경이다. 신성모독이고 하나님(신)에 대한 도전이다. 어이없고 황당한 질문일 수도 있고 그래서 더욱 본질적인 질문일 수도 있다. 이 모든 말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드리는 기도나 믿음의 고백이 아닌 ‘평범한 인간, 고뇌하고 회의하는 한 기독교인의 이름으로’ 묻는 질문들이다. 아무튼 불순종을 넘어 당돌하고 위험하고 교만한 질문들인 것만은 사실이다. 심지어 악마의 유혹이자 사탄마귀의 역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왕 생각이 미치고 글을 시작하였으니 폭주는 아니더라도 끝까지 가보자. 당장 답을 찾진 못하더라도(문제의 성격상 단기간에, 어쩌면 끝끝내 풀기를 기대할 수 없는 문제들이다.) 일단 질문을 제기라도 해놓자.
1. 하나님(신)은 있는가? 없는가? Is there or Is not?
2. 영혼은 있는가? 없는가? Is there or Is not?
3. 아브라함과 이삭의 딜레마 (& 욥의 해피엔딩 딜레마)
4.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딜레마 - 고통이냐 권태냐
5. 쾌락주의(세속주의)와 천국의 소망 딜레마
6. 예수님의 재림 딜레마
7. 사탄, 악마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의미한가?
8. 하나님과 사탄(악마)과의 관계는?
9. 예수(님)은 신인가? 인간인가?
10.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자유의지냐 예정론이냐?
11. 성경의 기적은 사실인가 비유인가? 역사인가 설화인가?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는 무상으로 주어진 햇빛과 공기 같아서 주는 대로 감사히 받아먹으면 될 것을 무얼 그리 꼬치꼬치 따지는가? 되바라져 건방지고 버릇없는 사춘기 소년처럼 무얼 그리 삐딱한가? 왜 평화와 안식을 마다하고 스스로 고뇌와 시험에 들려 하는가?
무조건적 믿음, 전적인 믿음도 좋다. 순백의 영혼에 순백의 믿음이 깃드는 것도 가치 있고 신성한 것이다. 성경에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가 10:15] 하셨듯이 교만보단 순종, 의심보단 믿음이 먼저다. (여기서의 '받들지'는 '받아들이지'의 준말로 봄이 자연스럽다. 즉 '떠받들다', '숭배하다'보단 '맞아들이다', '수용하다' 쪽에 가깝다. 영어로는 KJV, NIV 공히 receive다.)
하지만 미성숙한 맹신이 성숙한 믿음으로 거듭나려면 회의라는 뜨거운 용광로, 고뇌라는 깊은 골짜기를 거쳐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믿습니다! 믿습니다!, 오소서! 오소서!, 주소서! 주소서!’가 습관적인 관용구가 되지 않으려면, 자기만의 소아적이고 이기적인 믿음에 머무르지 않으려면 보다 치열하고 진지한 자세가 요구된다.
지금은 랩퍼조차도 신의 가장 위대하고 자비로운 선물은 자유(의지)라고 노래하는 시대다. 조차도란 말이 무색하게 그들의 노랫말 속에서 가끔 여느 고결한 성직자의 설교 못지않은 차원 높은 생각들과 육중한 메시지들을 발견할 수 있는 시대다. 더욱 발전하고 정교해지며 대중화 되어가는 인문, 사회,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랩퍼들의 도전까지도 받아 안으려면 우리의 믿음과 신학도 그에 못지않게 더욱 성숙되고 발전해야만 한다.
개인적으로 기독교 서적이나 간행물들을 보면 뭔가 아쉬움이 크다. 읽고 나서도 풀리지 않는 갈증을 느낀다. 모두 아름답고 소중한 이야기들이지만 가슴을 깊게 후벼 파고, 머리를 강하게 얻어맞은 뜻한, 그런 진리가 주는 충격, 감동, 감화가 아쉬울 때가 많다. 어떤 때는 ‘종교 냄새를 가미한 세속 이야기들이 너무도 세상일을 모르고 쓴 것 같아서 진리의 증명을 기대하고 있던 나를 부지불식간에 진리에서 멀어지게 만들기도’(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중에서) 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류의 이런 짧고 가볍고, 아름답고 흐뭇하고 때로는 기적에 버금가는 놀라운 이야기들은 술술 읽히고 감동도 주지만 ‘그렇다!’ ‘바로 이거다!’라는 느낌은 덜하다. 비유하자면 패스트푸드나 간편식 같은 느낌이랄까!
굳이 논리, 이성, 합리성 등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본 글이 신학이랄 수도 없는 엉터리 감상문, 논문이랄 수도 없는 허접한 넋두리에 불과하지만 솔까말 이런 글들은 수준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종교와 과학은 양립할 수 없다’라는 화두는 차치하고 <총 균 쇠> <코스모스> <사피엔스> <이기적 유전자> 등을 읽고 이런 류의 글을 읽다보면 좀 간지러운 느낌마저 든다. (이런 과학, 인문서적을 안 읽어야 하나?! ㅠ.ㅠ)
논리의 정교함은 차치하고 스케일부터 다르다. 하나님은 해와 달과 별들을 창조했다지만 이런 빅 히스토리, 빅 사이언스를 다룬 책들은 우주의 기원, 시간과 공간과 생명의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므로 이런 짧은 이야기들은 물론이고 성경의 신구약 시대까지 왜소화되는 느낌이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지만 인걸보다 산천이 오래갈 뿐 영원한 건 아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예술 역시 그리 긴 것은 아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그 이름도 결국 헛되고 헛된 것이다.
부싯돌에 불꽃이 튀기는 시간, 눈이 깜박이는 시간, 하루살이의 시간, 매미의 시간, 인간의 시간, 역사의 시간, 자연과 지구의 시간,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우주의 시간 - 원자와 분자, 앞뜰과 뒷동산, 강과 바다, 땅과 하늘, 별빛 너머 적막한 어둠의 공간 -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종교를 포함한 인간세상의 모든 것들이 한없이 짧고 작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더욱더 종교를 찾게 되고 신(하나님)을 갈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회의하고 고뇌하고 방황하는 이유이자 이 글을 쓰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1. 하나님(신)은 있는가? 없는가? Is there or Is not?
이 질문은 모든 질문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드는 가장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이다. 이것은 영원, 불멸의 존재의 유무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영원, 불멸이란 것이 있고 그것이 하나의 인격체로서, 의지를 가진 독립적이고 통일된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느냐이다.
하나님은 이 곳 저 곳 모든 곳에 내재되어 있는 신이 아니며 맹목적인 신이 아니다. 기독교는 다신교적인 만유내재신론(萬有內在神論)이 아니며 이 세계는 천지자연(天地自然)하지 않다고 본다. 곧 우주는 스스로 그러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이다. 어디까지? 모든 것을? 시시콜콜?
하나님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셨지만 현상으로 보면 이 세계와 인간에게 얼마간의 재량권을 주신 것은 분명하다. 창조한 이후엔 간섭하지 않으시고(혹은 간섭을 줄이시고) 자유(의지)를 허락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모든 것을? 피조물의 자유(의지)에 맡기시고 허락하신 것일까?
모든 것을 자유에 맡기셨다면 하나님의 간섭, 역할은 창조 곧 낳음에서 그치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만 낳은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낳으셨으니 기르고 돌보고 양육하는 것, 심지어 변신하고 기쁘게 뛰노는 것에까지 미치는 것인가? (이런 맥락에선 지적설계론, 예정론도 설명가능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길인가 피조물들 간의 자체적인 상호작용인가?
어느 선까지 맡기셨다면 그 선은 어디이고 그 기준은 무엇일까? 그 선은 시간적으론 죽음 이전, 공간적으론 현세인가? (사후에도 자유의지가 허락될까?) 아니면 현세의 어느 순간, 어느 상황까지인가? 만약 신의 의지와 인간의 (자유)의지가 충돌, 대립한다면 하나님은 어느 선까지 그것을 용납하실까? 그 기준은 의지가 있고 목적이 있는 하나님, 시기하고 분노하고 복수하고 심판하고 위로하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면 변덕에 따라 움직일 때도 있고 결과가 안 좋으면 간혹 후회하실 때도 있지 않을까?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세계의 불평등한 길흉화복으로 볼 때 당연히 갖게 되는 의문이다.)
또 영원, 불멸이란 무엇인가? 1000조 킬로를 걸으며 손목에 찬 시계가 원소단위로 완전히 분해되는 289억년도 영원은 아니다.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중에서) 빅뱅이론에 의해 우주가 탄생했다는 137억년 전도 영원은 아니며 앞으로 이어질 수백, 수천억년도 영원은 아니다. 과연 영원이란 것이 있고, 그 영원 동안 한시도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고 불멸하는 것이 있고, 그 불멸의 존재가 의식과 의지를 갖추었다는 이 세 가지 전제를 통과해야만 하나님(신)은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긍정할 수 있는 것이다.
몇백만분의 1초에서 몇천억년까지, 끝을 알 수 없는 우주공간에서 역시 그 끝을 알 수 없는 원자, 전자, 미립자의 공간까지 - 과연 이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이 모든 것을 목적과 의지를 지닌 채 공평무사하게 관장할 수 있는 전지전능한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신)이란 존재가 가능하긴 한 걸까?
혹시 하나님(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닐까? 완전한 원, 완전한 직각은 이론상으로만 가능할 뿐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듯이 하나님도 인간들 사이에 있다고 약속한, 그리고 이러이러하고 마땅히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약속한 하나의 개념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여기엔 한편으론 커다란 공허와 결핍과 의문이 있다.
현실에 없다고,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다고 없는 것은 아니다. 신(하나님), 사랑, 정의, 희생 등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고 초월적인 것은 더욱 그러하다. 어찌보면 이 모든 세계를 만드신 존재가 없다는 것, 이 세상이 아무 의미나 목적이나 가치가 없다는 것은 난센스이지 않은가!? 이것은 (영혼의) 본능이 자연스레 느끼는 의문이고 생각이다. 어떻게 그런 존재 곧 신(하나님)이 없을 수 있겠는가.
2. 영혼은 있는가? 없는가? Is there or Is not?
여기서의 영혼은 불멸의 존재로서의 인간의 영혼, 내 영혼이다. 넋, 혼백 등도 비슷한 개념일 것이다. 만화영화 <코코>를 보면 이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 저 세상에 간 사람의 기억이 사라지면 그 영혼은 소멸되는 것으로 나온다. 곧 마지막 죽음(Final Death)이다. 그것을 보면서 그럴 듯 하여 재밌단 생각을 했다. 영혼의 개별성, 연속성 내지 영속성의 단서를 기억에 둔 착상이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내가 아니며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너는 너가 아니다.
과연 내 영혼은 있고, 있다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만화영화 <COCO> - 죽은 영혼들이 해골의 모습을 하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무엇인가? 생물학적으로 나는 뇌다. 사고, 추리, 기억 등의 총합인 의식이 거하는 곳이다. 의식과 영혼은 무엇이 다른가? 내 몸이 늙고 내 뇌도 늙어 몸도 쇠약해지고 기억력, 정신력도 감퇴되는 것같이 내 의식과 영혼도 닳고 헤지고 노화되는 것인가?
만약 뇌에 심각한 병변이 생긴다면? 치매나 뇌사에 빠졌다면? 그것은 여전히 나인가? 의식은 내 몸 안에 있고 영혼은 떠나간 것인가? 아니면 영혼은 남아있고 의식이 떠나간 것인가? 아니면 영혼도 의식도 없는 좀비, 헛껍데기인가? 내 의식과 영혼은 여전히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나님(신)이 있다 해도 하나님을 인식할 내 의식과 영혼이 없다면, 내가 소멸한다면, 신의 존재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나는 뇌다. 더 깊숙이 들어가면 나는 유전자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동시에 맹목적 유전자, 불멸의 유전자다. 내가 죽고 내 뇌가 정지해도 내 유전자는 내 자손에게서, 다른 인간에게서 영원히 이어지며 존재한다.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영원불멸은 아니다. 유전자도 단지 물질이며 처음, 태초부터 있던 것이 아닌 어느 순간 나타난 것이다. (새로) 생긴 것은 없어질 수도 있다. 반드시 없어질 때가 있다. 개체로서의 인간도, 종으로서의 인류도, 그것의 최소구성단위인 유전자도 언젠가는 소멸할 수 있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불멸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있는 것이다. 처음이 있다면 끝이 있다는 것이니 영원이란 개념에는 처음도 끝도 없다. 따라서 불멸은 없던 적이 없는 존재, 항상 있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신)이다. 바로 하나님만이 태초부터 있는 자, 스스로 있는 자라는 의미다. 즉 (말장난 같지만) 영원부터 영원까지 영원토록 영원하신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
(당연히!) 나와 인간(의 영혼)은 그렇지 않다. ‘앞으로’ 영원토록 불멸할지도 장담할 수 없고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처음, 태초부터 있었던 불멸인 존재는 아니었다. 물론 우리의 영혼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창조되었든 자연발생되었든 새로 생겨난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의 영혼 역시 (새로) 생겨났던 것과 같이 (새로) 없어질 수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하나님이 영원하신 것같이 우리의 영혼도 영원할 것인가?
3. 아브라함과 이삭의 딜레마 (& 욥의 해피엔딩 딜레마)
아브라함이 늘그막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번제물로 바치기 위해 죽이려던 이야기다. 천사의 제지로 사랑스런 외아들 이삭은 살아나고 대신 하나님이 마련하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창세기 22:1~13]
이 이야기의 교훈은? 하나님은 각자에게 감당할만한 시험, 극복할만한 시련만 주신다? 무조건 믿고 충성하면 해피엔딩은 보장한다? 이것은 결과론적인 교훈이다. 만약 천사가 제지하지 않았다면 아브라함은? 분명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외아들, 할 수만 있다면 대신 죽기를 소원했을 외아들을 칼로 죽이고 불에 태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쇼킹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하고 유명하기도 하다. 문명화된 현대인의 시각으로 보면 참 이해난망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러고도 남을 믿음이다. 하나님 역시 아브라함을 떠보려는, 시험하려는 의도가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를 통해서 믿음의 절대성을 말씀하시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기엔 장차 오게 될 그리스도의 희생, 바로 하나님의 외아들 독생자 예수님을 우리를 사랑하사 내어주신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를 위하여 내주신 분이,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거저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마서 8:32]
렘브란트 <아브라함과 이삭> - 아브라함의 손은 단호하고 눈은 슬프다.
이것이 이야기의 전말이고 내가 말하고자 하는 딜레마는 따로 있다. 첫째가 실재로 지금 여기 2019년 한국에서 죽여야 하는가 죽이지 말아야 하는가다. 뜨악! 갑자기 엽기 공포물이 되는 느낌!! 분명 미친놈이라며 만인의 지탄을 받을뿐더러 엄연한 범죄(비속살인죄)로 당장 법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간혹 이 세상의 논리와 하나님의 말씀, 상식과 믿음이 충돌되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둘째가 아브라함은 아브라함이라지만 이삭은 뭔가? 제 자식이라고 제 맘대로 해도 된다는 말인가? 비슷한 맥락에서 <욥기>도 마찬가지다. 애꿎은 이삭과 욥의 자식들이 아무 죄 없이 희생물이 된 것이다. (욥의 자식들은 실재로도 죽는다.) 이것 역시 문명사회의 상식과 종교적 믿음이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것은 매우 가깝고도 현실적인 문제다. 종교의 자유가 헌법에 명시된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 자식에게 제 종교를 강요할 수 있을까?
셋째가 아브라함이 마지막 순간에 하나님이 결국은 명령을 되돌리시리라는 것(또는 이삭을 죽이더라도 다시 벌떡 일으켜 부활시키실 것)을 알고 있었느냐다. 알고 있었다면,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쇼를 한 것이다. (하나님이 말은 저렇게 하시지만 그럴 분이 아니시지! 암! 우리 하나님은 절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야!) 알지 못했다면 아브라함이 믿는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 아니라 죽음의 하나님인가? 기독교는 마교(魔敎)인가?
아브라함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명령을 곧이곧대로 듣고 준행하려 했다. 그리고 숫양으로 대신하긴 했지만 어쨌든 번제는 이루어졌다. 아브라함은 분명 쇼를 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도 그저 보여주기 위해 쇼를 연출하신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고뇌와 번민의 대목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되고 끝난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대들고 반역하는 마음, 이삭에 대한 절절하고 애끓는 사랑의 마음은 단지 미루어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하나님의 명령이(그것이 성경말씀일 수도 있고 개인적인 계시일수도 있고) 자신의 가치관, 양심에 도저히 납득이 안 될 때, 받아들일 수 없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넷째는 이야기가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할 것이냐다. 이삭이 실재로 죽었다면 이후에 남는 것은 무엇인가? 아브라함 자신의 믿음의 증명? 이삭이 예수님은 아니니까 모든 이의 죄가 사해진 것도 아닐 테고... 이삭의 천국에서의 복락? 아브라함에게 이삭 대신 딸 다섯, 아들 열, 손주 백을 더 주시는 보상의 해피엔딩?
실재로 <욥기>에서는 욥에게 환난 이전보다 더 많은 자식, 더 많은 재산, 더 많은 영화를 주신다. 하지만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인가? 아무리 열배 백배의 보상을 주시더라도 과정에서의 고통이 없던 것이 되진 않는다. 아브라함의 고뇌, 욥의 고통과 절망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드러내고 믿음의 교훈을 주기 위함이기엔 너무 잔인하다.
과연 이삭의 죽음으로 디 엔딩! 끝이라면? 아브라함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미치면 정상인이고 미치지 않으면 사이코패스 괴물이다. 욥 역시 병든 개처럼 길거리에 처참하게 널브러져 죽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난다면? 너무 과격하고 흉한 상상인가? 하지만 이 세상의 현실에 비하면 전혀 상상 못할 바는 아니다. 악인의 형통, 의인의 고난, 부모 같지 않은 부모, 자식 같지 않은 자식이 심심치 않은 세상인 것이다.
세상은 단순하지 않고 복잡하다. 마냥 밝고 해피하지 않다. 드라마, 영화, 동화에서는 대부분 선이 승리하고 악이 패배하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에서는 사필귀정보다는 인과응보, 인과응보보다는 작용반작용의 법칙이 더 일반적인 듯하다. 악도 선도 현실에서는 패배하기도 하고 승리하기도 한다. 선은 보상받되 악은 처벌되지 않기도 하고, 악이 처벌받되 선이 보상받지 못하기도 한다.
그래선지 사람들은, 기독교는, 자연스레 죽음 이후를 얘기하고 있다. 미루어졌던 보상과 형벌이 드디어 천국과 지옥에서 최종적으로 완성되리라는 것을 약속하고 있다. (죽음 이전 이 지상에서 이것을 극복하려는 시도, 생각은 <성경읽기 0034>에 써놓은 바 있다.)
4.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딜레마 - 고통이냐 권태냐
정리하자면 천국엔 선인, 믿는 자 – 지옥엔 악인, 불신자,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지었거나 회개하지 아니한 자 – 연옥엔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자, 소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가 없었던 자, 예를 들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들이나 소크라테스, 플라톤, 단군, 주몽 등 옛 조상들이 천국에 오르기 전까지 머무는 곳.
개신교에선 연옥을 인정치 않고 있는데 내 믿음이 부족해선지 과문해선지 개신교가 어떻게 이 빈칸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처음 교회에 나가 새신도라 해서 예배 후 목사님을 따로 뵙고 얘기를 나누는 자리가 있었다. 목사님이 죽어서 천국 문 앞에서 입장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어찌할 거냐고 묻기에 담 넘어 가면 된다고 답하여 목사님을 황당하게 만든 기억이 있다. 딱히 심술궂은 악의가 있다거나 웃기려고 농담조로 답한 건 아닌데 30대 초반의 다 큰 어른이 초딩 수준의 답을 하니 참 말문이 막혀 어안이 벙벙하셨을 거다. ^.^
그때와 같지는 않지만 지금도 비슷한 의문이 있다. 바로 시간적, 공간적으로 천국, 지옥, 연옥은 어디에 어떤 형태로 존재하며 언제까지 머물러야, 혹은 머물 수 있느냐다. 기한을 채우면 출소할 수 있는 감옥처럼 지옥에서 일정기한을 채우면, 혹은 공을 세우거나 모범수로 선정되면 연옥으로, 연옥에서 다시 천국으로, 천국에서도 좀 더 하나님에게 가까운 곳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그 역방향 역시 마찬가지)
그곳에도 산이 있고 강과 계곡이 있고 바람이 있고 건물이 있고 먹거리가 있고 동식물이 있고 내 엄마, 아빠, 가족, 조상들이 있을까? 동물들도 영혼이 있어 심판을 받고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가? 몇해 전 떠나보낸 귀여운 흰둥이를 거기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경계는 무엇으로 나누어지는가? 거대한 벽? 끝없는 바다? 암흑의 공간?
그곳의 영혼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코코>에서처럼 해골의 모습일까? 자신의 리즈시절의 모습일까? 죽을 당시의 모습일까? 처음의 죄 없던 아담과 하와처럼 발가벗고 있을까? 옷을 입고 있을까? 입는다면 무슨 옷? 아니면 아예 형체 자체가 없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누가 갑돌이고 갑순이 영혼인지 식별할 수 있을까? 날라다닐까 걸어다닐까 아니면 차 같은 것을 타고 다닐까?
천국에도 가끔의 소소한 불행이 있고 지옥에도 가끔의 소소한 행복이 있고 연옥에도 가끔의 아기자기한 오락과 여가가 있지는 않을까? 무엇보다도 하나님(신)은 이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신다든데 아무리 심판이고 징벌이라곤 하지만 인간에게 오직 고통을 주기 위해 지옥불로 시작되는 갖가지 잔인하고 끔찍하고 적극적인 고문이 가당키나 한 것일까?...... 궁금한 것을 들자면 한도 끝도 없다.
중세의 기독교적 내세관을 반영한 단테의 <신곡>은 지옥, 연옥, 천국을 각각 지하, 예루살렘의 지구반대편, 천상에 위치하며 다시 여러 개의 영역으로 나눠지는(각각 9층, 7층, 10층) 구조적 공간으로 그리고 있다. 천국조차도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들로 급이 나눠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상승과 추락이 가능하다. 사후에도 2차전, 패자부활전의 가능성이 열려있는 것이다.(적어도 연옥에서는 그러하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일단 천국이든 지옥이든, 제1구역이든 2구역이든 결정된 이후엔 영원토록 벗어날 수 없다면? 영원한 행복이야 그렇다 치고 영원한 고통에 과연 무슨 의미와 유익이 있겠는가? 신은 사디스트인가? 아니면 천국의 의인만 영생하고 지옥의 죄인은 어느 시점까지만 고통 받다가 소멸하는 것인가? 차라리 죽여달라며 울부짖는 지옥의 죄인들을 자비롭게 다시 죽여준다면(완전 소멸시킨다면) 애당초 처음부터 소멸시키지 왜 굳이 아름답지 않게 고통을 주었는가? 단지 하늘의 법도를 세우고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경고와 교훈을 주기 위해서?
소멸치 않고 지옥을 벗어나든 벗어날 수 없든 죄인도 영원불멸한다면 이것 역시 의인과 마찬가지인 영생이 아닌가? 이 경우 ‘신, 불멸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악마적 논리가 역설적으로 ‘신, 불멸이 있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더한층 비열한 악마적 논리로 비약할 수도 있지 않을까? -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어차피 불멸이라면 분명히 만회할 기회가 있을 테니. 어차피 자비로우신 신의 용서를 받아 죄가 사해질 기회가 있을 테니.
문제는 '어차피'다. 악마가 유혹할 때, 궤변론자들이 요설을 늘어놓을 때 즐겨 사용하는 낱말이다. - 어차피 기록이란 어느 정도 편견이 개입되고 부정확할 수밖에 없으니 큰 거짓이 사소한 거짓보다 나쁠 게 없다. 어차피 지고지순한 선에는 도달할 수 없으니 큰 죄가 작은 죄보다 나쁠 게 없다. 어차피 인간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하나님(신) 자신이 될 순 없으니 차라리 인간답게 겸손하게 본능대로, 욕망대로 인간의 죄를 짓고 사는 것도 나쁠 건 없다.
미켈리노의 <단테와 신곡>
천국에서의 영원한 복락이란 무엇일까? 고통도 배고픔도 없이 눈부신 광명과 아름다운 음악 속에 아무 불만도 불편함도 없는 평화로운 삶의 영원한 지속, 무한루프? 그렇담 따분하지 않을까? 심심하고 권태롭지 않을까? 그것(무료함)마저 못 느낀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물론이고 의식, 감각마저 없다는 건데... 그런 나란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그런 존재가 존재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할까? 가능하다면 무슨 의미,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일까?
지옥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이 고통이라면 천국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은 무료함일 것이다. (인간이 지어낸 상상일지라도) 지옥 프로그램은 많고 다채롭지만 천국은 딱히 별 게 없다. 몇 백억 년 동안 지옥 가장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와 천국에 당도했더라도 단지 심심하다는 이유만으로 천국에서 다시 지옥으로 탈출하려는 이가 없지 말란 법이 없다.
실지로 악마의 유혹이 공략하는 지점 중 하나도 바로 이 권태, 따분함이다. 악마는 하나님의 은총과 존엄, 즐거움과 정의가 함께하는 눈물나게 벅찬 행복도 싫어하지만 나른하고 심심한 평화 역시 싫어한다. 견디질 못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평화 평화...... 1분전과 똑같은 1분후가 또 다른 1분으로 영원히 이어지는 시간은 과연 행복인가 불행인가? 천국인가 지옥인가?
천국에서도 자유의지가 허용된다면 하나님의 신민(神民)들은 나름대로 놀거리를 만들 것이다. 볕 좋은 바다 위에 한가로이 둥둥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눈부신 천공에서 끝없이 평화롭게 하늘거리는 일상의 반복은 생활(生活)이 아니다. 심심해 죽는다!
솔직히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천상의 성스러운 것보다 지상의 재미진 것이다. 그것은 고통보다 쾌락, 무료함보다 흥미진진함을 선호하는 것과도 같은 본능 비슷한 자연스런 것이다. 확실히 천상의 것보다 지상의 것, 선보다 죄가 더 달콤한 면이 있다. 선도 뿌듯한 맛이 있어 매력적이지만 죄는 두근두근 조마조마 쫄깃쫄깃 그 맛이 더 다채롭다. 더 자극적이고 더 풍성한 맛이 혀에 착착 감긴다. 좀 위험한 주장 같지만 그만큼 악마의 유혹이 치명적이고 (속세의) 죄의 맛이 매혹적이라는 거다. 우리가 성인(聖人)에 대해 은연중에 갖고 있는 부정적인 시각도 이와 관련이 있다.
성인과의 거리감, 그 사이 쳐진 높은 장벽에 의한 이질감의 심리적 근거로는 다음 세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나와 다르고 달라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은 물론이고 감히 예수님, 성인되기를 바라는 것은 불경이고 언감생심 상상해서도 안된다는 거다. 이는 언뜻 종교적 순종, 경건함, 겸손함으로 비췰 수도 있지만 비겁한 자의 우매한(혹은 교활한) 자기변명에 가깝다.
두번째로는 성인되기는 현실적으로 너무 어렵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입장으로 변명없이 액면 그대로의 현실적인 이유는 된다. 세번째는 우리 자신이 사실 성인되기를 원치 않을 뿐더러 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다는 거다. 세속적 쾌락이나 재미가 없는 인생을 넘어 고생을 사서 하는 피곤하고 괴로운 인생이다.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맛없는 스프를 넘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하고 싶은 독배다. 셋중에 가장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이런 이유들이 가장 극적으로, 가장 고약하게 결합되면 성인을 존경하지도 흠모하지도 않게 된다. 도리어 반대하고 증오하기도 한다. 자신의 능력으로는 가능하지도 않고, 마음(양심)으로도 담아낼 수 없는 불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바로 시기, 질투, 열등감이다. 그래서 어떠한 진지한 시도나 노력도 평가절하하고 부정한다. 옳은 것, 위대한 것, 성스러운 것들을 그른 것, 위선적인 것, 허황된 것으로 매도한다.
평생 가시밭길만 걷다가 초라하고 비극적인 죽음으로 종말을 고했던 의인, 순교자, 자발적 희생자, 독립운동가, 의사, 열사, 성인들을 모조리 바보 혹은 사이비 가짜라고 낄낄대며 비웃는다. 이들에게 이 세상에 진짜란 없다. 진짜는 저 세상의 범접할 수 없는 초월적 존재뿐이다.(하긴 아무리 위대한 영웅, 성인이라도 인간인 이상 약간의 잘못과 약점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니까) 스스로 진짜가 아닐 뿐더러 진짜가 되고 싶지도 않기에 진짜를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이 싫은 것, 거북한 것이 곧 나쁜 것이다. 슬프지만 이것이 보통 사람의 보통 심리, 못난 사람의 못난 심리다.
간혹, 정말로 흔치 않게 성인이 되려 노력하고 실지로 성인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중엔 삶의 고통과 이 지상의 인연과 사랑으로부터(인간 사이의 사랑은 성적인 것이든 아니든 힘겨운 일이다)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즉 하나님의 은총, 예수님의 매력에 순수하게 이끌렸다기보단 이 지상의 온갖 고통과 고단함으로부터의 일종의 도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보통은 세상 것이 주는 재미를 욕망하거나 그것이 주는 고단함으로부터 도피하거나다. 순전한 주의 종이 되려면 이런 차원을 뛰어넘어야 한다. 주님이 마련하신 작은 고깃배를 타고 높은 파도와 폭풍우가 몰아치는 거친 바다를 향해 닻을 올리는 거다. 평범하고 소심한 인간들에겐 실로 가혹한 주문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출석하는 기독교인 다수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성인을 존경하지만 성인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예수님을 찬송찬미하지만 예수님 되기, 예수님 닮기는 꺼려한다. 나서 죽기까지 예수님의 일생에 무슨 세속적 영화와 안락과 행복이 있었나! 부와 명예와 권력과 먼 고생길, 순례길만 걷다가 고통스런 비극적 최후로서 길지 않은 일생을 마쳤을 뿐이다. 우리의 속마음은 기도와 찬양, 숭배의 대상으로서의 영광과 권능의 예수님만 필요로 할 뿐 십자가 고난의 길을 가셨던 예수님을 닮기, 예수님이 되기는 싫다. 그 옆에 다가가기조차 꺼린다. 괜히 얼쩡거리다가 억지로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될까 두렵다.
진실을 말하자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천국이 아니라 (지상)낙원이다. 그 낙원 역시 아담과 하와가 살던 한적한 에덴동산의 모습보다는 일 걱정 돈 걱정 없이, 미래에 대한 일말의 불안 없이, 즐길거리가 넘쳐나는 거대한 리조트나 초호화 유람선의 모습에 가깝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쩌면 재미를 더하기 위해 번지점프, 귀신의 방은 물론이고 다양하고도 생생한 지옥체험 코스도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유황불과 칼날이 난무하는 지옥의 놀이동산, 공포와 스릴이 넘치는 지옥테마파크다. 무료함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못할 것이 없다.
만화영화 <은하철도 999>에 등장하는 영생을 얻은 기계인간들 중 일부는 헤롱헤롱 술에 취하고 향락과 쾌락에 지쳐 무력하게 널부러져 있다.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고 급기야 자신의 몸(기계)을 던져 스스로를 파괴시킨다. 아무 보람도 변화도 없는 똑같은 일상, 끝없이 이어지는 무미건조한 평화가 그들에게 과연 축복인가 저주인가? 요점은 쾌락도 고통도 끝없이 이어지다보면 지루해진다는 거다. 천국, 지옥, 연옥, 낙원, 에덴, 리조트, 유람선... 그 곳이 어디든간에 오래 머물다 보면 언젠간 지겨워진다는 거다.
인간은 지속되는 고통보다는 잠시 쉬었다가, 혹은 잠시 즐거움을 주었다가 주는 고통이 더 고통스럽다. 지속되는 행복보다 잠시 쉬었다가, 혹은 잠시 불행을 주었다가 주는 행복이 더 행복하다. 인간은 변덕이 많으면서도 적응하는 존재라서 더 행복했다가 덜 행복하면 불행하다고 느끼며 더 고통스럽다가 덜 고통스러우면 그럭저럭 견딜만하고 심지어 행복하다고 느낄 수도 있는 존재다. 하지만 행복도 불행도 어느 한계 이상 지속된다면 적응을 넘어서 무료해짐을 벗어날 순 없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관건은 변화다. 변하지 않는 것에 천국과 지옥을 넘어선 무(無)가 있고 종말이 있다.
5. 쾌락주의(세속주의)와 천국의 소망 딜레마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도 내세가 있다고 믿고 모두가 천국에 들기를 소망한다. 이것은 내세(의 불확실성), 지옥, 고통에 대한 두려움을 반영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두려워하는 실체는 고통과 지옥이라기보단 존재의 종말, 곧 사라짐이다. 자기의식, 자기존재의 소멸이다. 인간뿐 아니라 신(하나님)에게도 잊혀진 존재로서 완전한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반면 쾌락주의는 허무주의다. 무신론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것은 저승도 없고 신도 없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먹고 즐기는 게 남는 거다. 무조건 좋은 게 좋은 거다. 좋게 말하면 삶을 긍정하고 현재를 감사히 즐기라는 거다. 긍정적인 면에선 삶에 충실할 수 있고 겸허해질 수도 있다. 부정적으로는 천박한 속물근성에 머물거나 방종과 타락으로 폭주하거나 허무로 방황하고 삶이 무력해질 수 있다.
천국은 소망이고 쾌락은 욕망이다. 하지만 무엇이 더 큰 욕심인가? 이 세상에서 선행도 쌓고 자선, 기부, 헌금도 하여 천국의 치부책에 이름을 올리려는 것이 하나님 곁에서의 영원한 복락을 위한 것이라면 예수님 옆자리를 서로 탐하였던 제자들의 욕심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천국에 들기를 소망하는 것이 무슨무슨 캐슬, 펠리스, 킹덤 류의 럭셔리하고 차별화된 고급주택단지에서 살고 싶은 욕망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무려 영생(永生)이다! 길어야 칠팔십의 믿음, 약간의 절제와 공명심이 발휘된 선행과 자선으로 영원한 복락, 행복, 쾌락을 사려는 것은 껌 값으로 코스요리를 먹으려는 뻔뻔한 심보는 아닌가? 펀드 투자금이 천배, 만배의 대박을 터뜨리길 바라는 터무니없는 마음이 아닌가? 욕심으로 치자면 영생보다 더한 욕심이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평범한 인간에게 처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베드로의 순교를 기대하거나 요구할 순 없으니 이같은 추궁은 사실 너무 엄격하고 깐깐한 것이다. 개인적 욕심이 다소 섞여있더라도 선을 쌓다 보면 재미와 보람도 느끼고 믿음도 커져서 예수님의 진의에 다가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진의는 결코 '예수 믿고 천국가서 영생의 복락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거다. 말하려는 요점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말씀이 그리 간단치가 않다는 것, 거듭 말하지만 인간이 감당하기엔 진실로 너무 가혹한 말씀이고 주문이란 거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마태 5:39] 정도로는 부족하다. 오른편에 이어 왼편이 더 세게 맞았다면 다시 오른편, 왼편, 오른편... 어떤 상황에서도 두 뺨을 때리기 좋게 나란히 항상 대주어야 한다는 거다. 아무리 두 뺨이 시뻘겋게 부어올라도 원망하기 없기다. 아무리 두 눈에 불꽃이 튀고 눈물이 철철 흘러내려도 중간에 그만두기 없기다.
주려면 다 주고 버리려면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 원한다면 줘버리되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해지려고 하지는 말라. 행복을 얻지 못할 수도 있다. 남을 위해서 살 것이면 '남을 위해서만' 살아야 한다. 우회적으로 자신을 위하는 수단이어서는 안 된다. (조지 오웰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중에서) 딱히 얻는 것 없이 정신적 만족감에 머문다해도 섣부른 이타심, 공명심, 허영심 심지어 의무감, 인내, 노력, 체면 등은 남을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위험하다. 일체의 불순한 것들은 버려야 한다. 거기에 진정한 만족과 평안이 있다.
천국의 소망에도 세속적인 욕망이 섞여있다는 말이다. 겸손하고 소박한 바람일 수도 있지만 거대하고 얼토당토않은 자기욕심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아마도 천국행 티켓이 있다면 베드로와 바울도 제치고 새치기를 하든 수백억 딸라빚을 내어 암표를 사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본질에선 이 지상에서 죽지 않고 영원히 살려는 생명연장, 불로장생의 꿈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내 소망이 십일조로 1억을 내는 거야’라는 말은 곧 ‘내 수입이 10억이 되는 것이 바람이야’라는 말일 수도 있다. '나는 죽어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고 싶어'라는 말은 곧 '나는 죽어서도 영원히 살고 싶어'라는 말일 수도 있다. 무엇이 더 진심(스스로 알지 못하고 알아채더라도 인정하기 싫은 진심)에 가까울까? 전자일까 후자일까?
천국의 소망이 죽어서도 몸이 살아있을 때처럼 오감이 주는 행복과 영화를 누리려는 차원이라면 진시황의 불로초와 딱히 다른 점이 없다. 속세의 감각적 재미도 천국의 성스런 복락도, 물질적 욕구도 정신적 만족도 이 세상(현세) 저 세상(내세) 가릴 것 없이 모두 취하려는 것이라면 케이크를 먹고도 싶고 갖고도 싶은 과한 욕심이다. 더없이 교만, 교활하지만 사실은 어리석고 못나고 유한한 인간이 숙명적으로 갖고 있는, 하지만 이루기 난망한 슬픈 욕심이다. 이 같은 '천국의 소망'이라는 욕심이야말로 궁극적으로 최후의 쾌락주의고 최대의 이기주의다.
지옥의 비명, 지상의 슬픈 곡조를 뒤로 하고 지 혼자서 위로만 올라가 (더구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지상의 것들을 주렁주렁 달고서) 하나님 곁에 딱 붙어 영원한 복락을 누리려는 것은 너무 무정하고 이기적인 경우가 아닌가? 진실로 선하고 의롭고 성스런 자라면 스카이 캐슬 안에서만 편안히 있지 말고 마땅히 지옥의 죄인, 지상의 범인(凡人)들과 함께하여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이지 않을까?
6. 예수님의 재림 딜레마
예수님의 재림을 원해야 하는가 원치 말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재림할 것인가? 한다면 언제 어떻게 오실 것인가? 그 때 우리는 예수님을 환영할 것인가, 문전박대할 것인가? 아니, 알아나 볼 수 있을까? 재림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늘로 들려 올려진다는 휴거란 게 있을까? 있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새롭게 재편될 것인가, 완전히 버려져 소멸될 것인가?
예수님이 재림하더라도 휴거란 게 없다면 성인(聖人)들이 세상을 다스리는 ‘성인의 지배(Rule of the Saints)’ 시대가 도래할 것인가, 아니면 그 전과 아무런 변함없이 예전과 똑같이 세상은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뒤섞여 아웅다웅하며 다시 돌기를 시작할 것인가?
이 (현실)세계가 디 엔드! 완전한 종말을 고한다면 오직 저 세상의 지옥과 천국(과 연옥)만 남을 것인가? 더 이상의 후손, 더 이상의 인류는 생산되지 않게 되는 것인가? 거기에 무슨 의미가 있고 보람이 있겠는가? 과연 이것이 우리가 그토록 바라고 원하던 것인가?
이것은 세기말적이고 묵시론적인 위험한 질문들이다. 누구도 알 수 없고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예수님 자신조차 알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고 했다.
역사상 인간은 언제 가장 예수님의 재림을 갈구하였나. 이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 메시아에 대한 갈망은 이 세상이 어두울수록, 비참할수록 강했다. 통증이 강할수록 진통제를 더 강하게 요구하듯 현실이 비참할수록 메시아만 기다리며 현실을 버텼다.
세계의 타락, 예수의 재림, 세상의 종말, 천국의 도래가 한 세트로 온다면 우리는 하루빨리 예수님을 뵙고 천국을 보기 위해 세상을 개선하려는 헛된 도덕적 노력을 접어야 하는가? 인간의 노력, 행위는 종말론적 관점에선 어차피 헛된 것이지 않은가? 어차피 이 모든 것이 예정된 하나님의 계획이지 않은가?
현실이 아무리 비참해도 자포자기하거나 종말을 앞당기기 위해 일부러 악을 쌓고 타락할 수는 없는 노릇! 단지 에세네파처럼 세상에 관여치 않고 은둔하거나 정적주의(靜寂主義 Quietism)처럼 세속적 의지와 노력을 모두 거두고 조용히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며 명상에만 힘써야 하는가? 아니면 더욱더 우리의 노력을 경주하여 그 시점을 최대한 늦추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미약하나마 우리손으로 흉내내어 세워봐야 하는가?
다 떠나서 최후의 심판을 면하고 천국에 들 자신이 있는가? 재림예수를 눈물로 감격하며 만세로 환영한다고 무사통과하는 것은 아니다. 세계인구를 76억으로 추산할 때 천국에 들 자가 14만 4천명이든 14억 4천만명이든 어차피 소수, 몇 명이 될 지 알 순 없지만 거기에 든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거기에 든다 해도 이 지상의 것들, 그것이 개똥밭에 구르면서도 그나마 맛봤던 세속적이고 소소한 행복이더라도 미련없이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설 자신이 있는가?
도스또예프스끼의 ‘대심문관’은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 대심문관 참조) 제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아예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마태 16:22]) 정작 예수가 나타나자 그 후예들은 예수를 부정하고 내쫓은 것이다. 필요할 땐 가지 마시라 하고 필요없을 땐 오지 말라 한다.
아마도 대심문관으로 대표되는 교계의 지도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이들이 많은 이유를 들어 재림예수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더라도 이 지상의 것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질 못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오소서! 오소서!’ 바라고 원하는 것과는 다르게 이후의 전개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을 원해야 하는가 원치 말아야 하는가?
7. 사탄, 악마를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은 유의미한가?
하나님은 이 세상을 왜 만드셨나?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셔서! 그렇담 이왕 지으시는 거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만 지으시지 그러셨나? 잘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는 냅두시지 왜 뱀으로 하여금 유혹하셨나? 왜 애초에 선악과란 것을 만드셨나? 의로운 욥을 그냥 냅두시지 왜 환란과 고통을 주셨는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게 과연 맞는가? 왜 나쁜 것, 흉한 것, 악한 것이 공존하며 고난 받는 의인과 형통하는 악인이 함께하는 부조리한 이 세계를 지으셔서 인간을 힘들게 하고 괴롭게 하시는가? 왜 천사, 성령만 만드시지 악마, 악령, 사탄을 허락하셔서 인간을 유혹하고 죄와 위험에 빠뜨리시는가?
소년기 때 가졌던 의문이다. 하지만 더 큰 의문은 따로 있었다. 나쁘지도 좋지도 않은 것,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것,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은 것들은 왜 존재하느냐다. 어둡고 깊은 땅 속에 박혀 있는 돌멩이,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 우주 저편 암흑 속에 기약 없이 떠다니는 먼지, 아침에 태어나 저녁에 가는 하루살이, 인간을 포함해 태어나지도 못하고 태 속에서 죽는 숱한 생명들은 무슨 의미, 무슨 가치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이것들은 언뜻 보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 존재의미로 보면 불행하거나 악한 존재보다 있으나 마나한, 존재가치 제로인 뜻한 이런 존재들이 더 의문이다. 하지만 어렴풋이 느끼는 바는 세상에 존재가치가 없는 존재는 없다는 거다. 잡초란 없다. 다만 우리가 그 이름을 모를 뿐이다. 0의 발견으로 수학의 지평이 넓어졌듯이 무용한 것들은 모든 유용한 것들의 토대다. 무용지용(無用之用)이다. 쓸모없는 것, 쓰임없는 것은 없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거나 그 가치를 무시할 뿐 분명 저마다 존재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숨결과 뜻이 숨어있을 것이라는 거다.
8. 하나님과 사탄(악마)과의 관계는?
사탄(악마)도 하나님의 창조물인가? 아니면 비슷한 대적(라이벌)인가? 대적이라면 하나님의 힘은 사탄과 호각세인가 능히 사탄을 압도하고도 남는가? 창조물이라면 7번과 비슷한 맥락으로 사탄에게도 나름대로의 존재이유와 그 가치가 있는 걸까?
성경 <욥기> 1장 6절 ‘천사들과 사탄이 여호와 앞에 섰습니다.’를 보면 하나님과 사탄, 사탄과 천사들의 관계, 위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절대주권자, 절대주재자이시다. 사탄과 천사들은 그 앞에 (그 아래) 나란히 선다. 사탄은 단수, 천사들은 복수로 적혀있는 것이 특이하다.
하나님은 사탄에게 먼저 말을 걸며 욥이라는 인물의 믿음을 칭찬, 자랑하고(자랑치 않았다면 애꿎은 욥의 고통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사탄은 욥이 고통과 환란의 시험을 당하면 얘기가 달라질 거라며 반론을 제기한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득한 후 욥을 시험하게 되는데 여기서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묘하다.
하나님과 사탄은 우호적이라고 할 순 없어도 결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적대적 분위기가 아니다. 사무실이나 관청에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지시하는 분위기, 또는 포커판에 마주앉은 동료와 게임을 즐기는 분위기랄까?! 어찌 보면 역할 분담을 하는 한 팀, 또는 반드시 이기고 꺽어야 하지만 없으면 재미없는 게임 상대로 보이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한 뱀(사탄)도 마찬가지다. 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나? 방관하셨나? 예수님을 박해한 모든 이들도 마찬가지다. 바리새파, 헤롯당, 빌라도, 유다까지... 어찌 보면 하나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 한 극단에 속한 배우들처럼 모두가 합심하여 제 역할을 해냈다고도 볼 수 있다. 어쩌면 예수님의 체포와 골고다의 십자가도 하나님의 허락 하에 예수와 유다가 공모한 것이지 않을까?
욥의 믿음을 증명하기 위해선 사탄의 시험, 사탄과 하나님 사이의 내기가 필요했던 것처럼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선 유다(혹은 유다 아닌 누군가)의 배신의 문을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것이다.
조토의 <유다의 입맞춤> 중에서
유다가 예수에게 입 맞추는 것을 신호로 군병들은 예수를 체포한다.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 [마태 26:50]
이것은 궤변이고 억지다. 유다에게 면죄부를 주는 악마의 논리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빌었으니 유다와 공모하거나 유다를 사주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예수님은 유다가 배반할 거라는 걸 이미 알고 계셨다.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으셨다.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예정된, 뜻하시는 역사가 이루어지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다.
반면교사라는 말도 있고 불교에서는 역행보살이란 말도 있다. 사탄, 악마, 악인들이 악을 통하여 선을 드러내고 이루려는 의도가 없음도 명백하다.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이들로 하여금 이런 식으로 주님의 뜻과 예수님의 말씀을 더욱 분명하고 극적으로 드러나게 하곤 한다.
9. 예수(님)은 신인가? 인간인가?
아니면 반신반인인가? 반신반인이라면 어디까지가 신이고 어디까지가 인간인가? - 이 질문은 곧 예수님은 창조주(하나님)인가 피조물(인간)인가라는 것으로 역사상 오랜 기간 동안 지루하고도 치열하게 전개되어온 논쟁이기도 하다. 그에 따라 종파가 나누어지고 이단으로 파문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니케아 공의회에서의 아리우스파, 에페소 공의회에서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파문) 너무 어렵고 복잡한 논쟁이기도 해서 위격, 신성, 인성, 단성설, 양성설 등의 신학, 철학적 용어와 개념들은 제외하고 단순하고 소박하게 보기로 한다.
이 논쟁은 자연히 예수님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을 수 없다. 성령으로 잉태하셨으니 예수님의 아버지는 하나님, 예수님의 어머니는 성모 마리아다. 아버지는 신이고 어머니는 인간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이지만 몸은 인간의 몸이다.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보통의 인간과 다르게 예수님 안에서 서로 갈등하지 않는다.
어머니 마리아에겐 인간의 육신을 받았고 아버지 하나님에겐 신의 성령을 받았다면 예수님은 엄마(인간)를 더 닮았을까 아빠(신)을 더 닮았을까? 예수님의 몸에 마리아의 유전자가 전해졌다면 예수님의 몸과 생김새는 마리아를 어느 정도 닮았었을 것이다. 외모가 아니더라도 예수님의 성품, 성령에는 마리아와 하나님의 그것이 담겨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의 하나뿐인 아들이라지만 곧 하나님은 아니다. 인간도 한 치 걸러 두 치라고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1세대와 2세대가 완전히 동일한 유전자의 동일한 개체는 아닌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를 닮았다한들 아버지는 아니다. 아무리 하나님(신)을 닮았다한들 하나님(신)은 아니다. '(완전한) 신도 아니고 (완전한) 인간도 아니지만 신이면서 동시에 인간이다.' '신으로 오신 인간, 인간의 몸을 갖고 태어난 신' - 이 모순과 딜레마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인간의) 몸은 본능과 욕구, 생리와 병리를 갖고 있다. 신성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인성으로서의 나사렛 예수의 몸은 내 몸과 완전히 똑같은 것이다. 예수의 탄생 이후 영아기, 유아기, 청소년기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석가모니는 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고 설파했다지만 예수는 그저 첫울음을 울었던 갓난아기였을 뿐이었다. 예수가 과연 나면서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자각했는지 아니면 보통의 인간과 같이 평범하게 성장하다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본격적으로 자각하기 시작하셨는지도 의문이다.
오줌싸개였을 수도 있고 소년 때는 몽정도 했을 것이다. 큰 키에 미소년 킹카였을까? 작은 키에 들창코 추남이었을까? 인싸였을까 아싸였을까? 오지랖 넓게 입바른 소리만 해댄다고 친구들에게 핀잔이나 듣는 왕따는 아니었을까? - 오지랖 넓고 잘난 척하고 위선 떤다고, 남들 다 먹고 살기 바쁜데 지 혼자 유유자적 한가한 소리나 해댄다고(맙소사! 원수를 사랑하라니!) 미움 받기는 예수를 따라갈 케릭터가 없다.
한번은 유대교 회당에서 나이 지긋한 종교지도자들과 토론도 했다던데 지능과 언변은 어떠했을까? 지금으로치면 수능 만점은 소년 예수에게 누워 떡먹기였을까? 바둑을 배우지도 않고 알파고를 상대로 만방으로 이길 수 있을까? 당연히 먹고 마셨으니 배변도 했을 테고 첫사랑, 애인, 연애를 거쳐 관계까지 했을 수도 있다.
댄 브라운 소설 <다 빈치 코드>에선 예수님의 ‘사랑스런 제자’인 요한이 여자인 것으로 되어 있다. 곧 사라진 성배(聖杯)는 여기로부터 시작된 예수의 혈통, 자손을 의미한다는 도발적인 설정인 것이다. 예수,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 세계 4대 성인 중 예수만이 결혼을 안 했고 자녀가 없었지만 예수의 몸이 정상이었다면 충분히 있음직한 일이니 황당하긴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상상은 아니다.
십자가의 고난 역시 예수님의 몸이 인간의 몸과 완전히 똑같다는 가정하에서만 성립한다. 예수님은 연극이나 쇼를 한 게 아니다. 그 피는 고통 없는 피가 아니다. 내 피와 똑같고 내 상처와 똑같고 내 고통과 똑같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께 할 수만 있다면 제발 살려달라고 빈 것도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땀을 흘린 것도 그런 극심한 고뇌와 번민에 몸이 반응한 것이다. 예수님도 살고 싶은 생의 본능과 욕구가 있고 그것에 반응하는 인간의 몸을 가지신 것이다.
예수님이 인간의 육신을 빌어 이 땅에 오셨다는 말, 예수님에게 인성이 있다는 말은 인간의 몸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정하고서 말하여야 한다.
너무 깨끗한 혹은 너무 처참한, 다소 인간 같은 혹은 완벽히 인간 같은 예수님
카라바조 <이 사람을 보라> 중에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어느 쪽이 보다 사실에 가까울까? 사정을 살피자면 오른쪽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이다. ‘에케 호모(Ecce Homo)’ 즉 ‘이 사람을 보라’이지 ‘이 신을 보라’가 아니다. 리얼리티를 말하려함이 아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오셨고 우리는 그 모습이 불편하지만 그 모습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여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고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가형은 사람(나사렛 예수)이라면 무참히 죽임 당한 것이고 신(그리스도 예수)이라면 기꺼이 죽어주신 것, 죽음을 극복하고 초월하신 것이다. 전자라면 무력하고 순수한 어린 양이 간악하고 무자비한 강자에게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고 후자라면 자비로운 목자가 자신의 어리석은 양떼를 위해 스스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하신 것이다. 전자라면 인간의 사악함과 잔인함이, 후자라면 인간의 비루함과 어리석음이 강조된다. 전자라면 예수의 고뇌와 순수함이, 후자라면 예수님의 권능과 사랑이 강조된다.
이것 역시 이거다, 저거다 나누기가 애매하다. 단순하지 않다. 예수님은 사랑이 넘치고 사명감이 투철한 양치기인 동시에 스스로 무력하고 순수한 어린 희생양이었다. 충분히 고통과 죽음을 피할 수도 있었고 마음만 먹으면 인간들을 모조리 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어떠한 저항의 몸짓도 하지 않으셨다. 이것은 최고 수준의 권능이고 사랑이다. 나사렛 예수는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았고 그리스도 예수는 능히 불벼락을 내리칠 수 있었지만 내리치지 않으셨다. 능히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보다 더한 권능은 없다. 심판 대신 용서, 저주 대신 구원을 주신 것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인간의 손에 의해 매달린 신, 예수 그리스도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중에서
주먹과 채찍에 맞고 대못에 박힌 이 같은 상처에서 우리가 받는 느낌은 무엇인가? 눈물, 가엾음, 죄의식? 아니면 진저리, 혐오감, 실망감? 그것이 무엇이든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다. 새까맣게 쪼그라든 불타버린 희생양 같은 만신창이된 예수님의 모습은 믿든 안 믿든 보기 불편하다.
깨끗한 것은 거룩한 것이다. 더러운 것은 비천한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전율이 이는 상처에서 우리가 1차적으로 받는 무의식적 인상이다. 더럽고 비천한 것을 떠나 똑바로 올려다보기가 괴롭다. 영광, 축복, 은총, 거룩, 평화...... 좋은 것들은 끼어들 겨를이 없다. 인간에겐 감각과 인식체계, 종교적 감수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예수의 외모는 기록되고 증명된 바 없지만 일단 기품이 있고 단정하며 온화하면서도 빛나는 서글서글한 눈매를 하고 있는 미남형이어야 한다. 어떤 장소, 어떤 상황에서도 온화하고 인자한 태도와 표정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아야야야 경망스럽게 앓는 소리를 하거나 쉴 새 없이 떠나갈 듯 비명을 질러대선 안 된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 많은 성화와 성상에서 그려지고 있는 예수님의 구체적 모습이다.
성경에도 이것 이상의 예수의 인간적인 면모가 엿보이는 대목이 있다. 바로 성전정화의 분노, 독사의 자식이라며 거짓 제사장들을 저주한 사건, 겟세마네의 고뇌와 고독, 십자가의 적나라한 고통 등 갈등과 고통의 한복판에서 보여진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걸음 더 인간계로 내려온다면 예수님의 존재, 기독교의 역사, 현재의 기독교 신앙의 모습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변모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신과 구별되는 유일신이듯이 예수님은 여타 성인(聖人)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과 구별되는 오직 한 명의 그리스도다. 만약 예수도 다른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두었다면? 골고다의 슬픔과 고통의 현장을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처자식까지 목도하였다면? 특정인의 남편과 아버지가 되어 사랑을 독점하고 독점당하는 인연으로 묶였더라면? 예수님은 인간계의 가장 밑바닥, 가장 완전한 인간의 신분으로 죽음을 맞으신 게 된다.
그렇다면 인간 예수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처자식을 뒤로 하고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 저 혼자 득도하자고 어느 날 갑자기 처자식에게 말도 없이 가출해버린 석가모니와 별 차이가 없게 된다. 보기에 따라선 부모님에겐 불효요, 아내에겐 나쁜 남편, 자식에겐 무책임한 아빠다. 즉 예수는 형식적이나마 인간의 길을 걸었던 나머지 성인들과 확연히 구별된다. 몸은 완전한 인간이되 신분은 완전한 인간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신인 동시에 인간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신(완전한 신, 곧 하나님 자신)도 아니고 인간(완전한 인간, 곧 보편적 인간족속)도 아닌 존재라는 말도 성립가능하다.
세속적으로 봐도 인간 예수의 삶은 보통의 평범한 삶이 아니다.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보면 인간 예수는 철저한 아웃사이더 심지어 외톨이었다. 예루살렘에 비하면 변방인 갈릴리 나사렛 출신의 시골뜨기로 일정한 주거 없이 떠돌던 비주류, 국외자에 가깝다. 종교 지도자로서는 스승도 없고 동문도 없는, 가방끈 짧은 재야의 고수쯤 된다. 재산, 직업, 학벌, 지역 등 예수님에겐 어떠한 백그라운드도 없었다.
출세에는 별 도움 안 되지만 대신 자유롭다. 예수는 기존의 어떠한 세력, 종파, 집단에도 속하지 않았으며 인간적 삶으로는 요즘의 취학, 취업, 병역, 납세, 연애, 결혼, 출산, 육아로부터도 자유로웠다. 이것은 예수가 그토록 기존 제도권, 기득권으로부터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던 연유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나와 같은가 다른가, 내 편인가 아닌가를 따진다. 차별로서 존재를 증명하려 든다. 나이가 어려도 상투를 틀면 에헴하고 군대갔다온 남자는 군 면제자를 은근히 무시, 경멸한다.
속된 말로 남자는 군대 갔다 와야 인간된다는 말도 있듯이 이유야 어찌됐든 예수는 인간으로서 져야 할 굴레를 져본 적이 없다. (추측컨대 죽음을 앞둔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내려다보며 그 비슷한 것을 느끼시지 않았을까?)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태 6:31] 하셨지만 어쩔 수 없이 그런 걸로 항상 고민하고 수고하는 '인간' 즉 생활인이지는 않으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보이더라도 집에 돌아와 인간 여자를 만족시키는 것은 그런 기적으로도 간단치가 않다. 산상에서 수많은 대중에게 진리를 설파하고 은혜를 베풀더라도 집에 돌아와 중고딩 자녀를 앉혀 놓고 뭔가 도움 될 말을 할라 치면 지루함을 참지 못해 몸을 베베 꼬거나 대놓고 반항하는 아이들을 어쩌지 못해 쩔쩔 맨다.
이것이 땅 위에서 얼키설키 섞여 살아가고 있는 인간들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인간에겐 인간에게 요구하는 행복,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자식에 부모에게,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행복이 따로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자식으로서, 생활인으로서 인간들이 지고 있는 삶의 십자가도 결코 가볍지 않다.
예수님의 산상수훈(山上垂訓) - 칼 하인리히 블로흐
하늘은 멀지만 성스럽고, 땅은 친근하지만 수고스럽다.
확실히 기독교인으로서 예수님의 인성을 말할 때면 왠지 불편하다. 4대 성인 중 (단지) 한 명이라고 말하는 것이 거북하다. 왠지 신에서 인간으로 격하되는 느낌이다. 신은 나와 달라야 하고 멀어야 하고 뭔가 불가지, 불가해한 특별함이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고향 나사렛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인정받지 못했다. 코흘리개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공자도 고향에서 인정받지 못했고 소크라테스도 자기아내에게 인정받지 못했다. - 아무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인류의 스승, 성인이라도 못생긴데다 생활력 없이 철학하는 남자(소크라테스)는 여자, 특히 아내(크산티페)에게는 인기 빵점이다.
그렇다면 아주 멀고, 아주 특별하면? 이해할 수 없다. 공감할 수 없고 정이 갈 수 없다. 하나님은 너무 막막하고 손에 잡히지 않는다. 때론 두렵고 무섭고 어려워서 말도 붙일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예수님이 만만하다. 정이 간다. 비유하자면 하나님은 무섭고 엄한 할아버지고 예수님은 정답고 친근한 아빠다. 어리광도 부리고 떼를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진보지지층이라면) 존경하는 김대중 대통령보다 사랑하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더 애틋한 마음이고 정이 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굳이 나눌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 두 존재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 거리감이 확연하여 자연스레 나누어진다. 예수님이 곧 살아계신 하나님이고 성삼위 일체라고도 하지만 이름이 나누어진 이상 존재도 나누어지고 그 존재를 받아들이는 우리의 인식, 감각 역시 나누어질 수밖에 없다. 하나(로 남을 거)라면 나누어질 이유가 없고, 어쨌든 나누어졌다면 분명 다른 둘인 것이다. 또한 분명 나누어진 이유 - 독생자를 주신 이유, 인간의 육신으로 오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우리 곁에 우리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 복음이요 축복이지만 어리석은 인간, 평범한 인간들은 혼란스럽다. 인성을 강조하거나 긍정하면 신성이 희미해지거나 부정된다. 신성 인성 순서를 바꾸어도 마찬가지다. 인성은 더 가깝고 정답지만 숭배할 수 없고 도리어 업신여겨지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신성은 성스럽고 순종을 이끌어내지만 너무 멀고 막막해서 형식에 머물거나 우리의 삶과 유리되는 빌미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과 다르면(신성) 경외하거나 질시하고, 자신과 같으면(인성) 친근해하거나 경멸한다. 어떻게 이 둘을 조화롭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어떻게 친근해하면서도 경외하고 경외하면서도 친근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라'고 하지만 두려워하는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기란 심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나의 대상에 대해 두려움과 사랑이라는 감정이 공존할 수 없듯이 하나님과 예수님이라는 두 존재가 완벽한 하나인 같은 존재라고 인식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의 자연스런 본능과 감각이 하나를 둘로, 둘을 하나로 인식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완전한 동일체로 인식할 수 없을 뿐더러 때론 하나님과 예수님 자체도 동일체, 통일체로 인식하기 힘들 때가 있다. (이 하나님이 그 하나님, 이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맞나??)
코흘리개 예수(인성)와 그리스도 예수님(신성)을 하나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죽은 사람을 살리신 기적의 예수님과 십자가에 매달린 체 무력하고 처참하게 죽어간 예수의 모습에서 심한 모순, 심지어 배신감을 느낀다. 불편부당하고 의지와 감정을 초월하신 하나님(비인격신)과 시기하고 질투하며 의지와 목적을 갖는 하나님(인격신)을 하나로 받아들이는 것이 뭔가 부자연스럽고 용서하실 때의 하나님과 심판하실 때의 하나님의 모습에서 혼란스런 당혹감을 느낀다. 이랬다 저랬다 변덕이 심한 것,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것, 울고 웃고 시기질투하고 후회하는 것은 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유일신, 신중의 신으로 태초부터 있는 존재, 스스로 그러한 존재, 존재하는 모든 것을 존재케 하는 존재로 설명되어진다. 그 이름부터가 오직 하나뿐인 존재라서 하나님이지 않은가. 그 이름은 역사적으로 야훼, 엘로힘, 여호와 등으로 불려졌으며 야훼(성스러운 네 글자인 YHWH)는 구약시대에는 너무 거룩하여 발언할 수 없는 이름으로 간주되었다. 그 이름과 존재가 나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포함한 일체의 것들과 구별되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들로 인해 개인적으로 하나님보다는 예수님이, 구약보다는 신약이 더 공감이 가고 더 내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준다.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안 된다. 너무 순종이어도 너무 뒤섞여서도 안 된다. 난류와 한류가 만나는 바다에 어족이 풍부하고 문명과 문명이 만나는 땅에 더 화려하고 수준 높은 문명이 꽃피듯이 신과 인간의 혼혈,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위격(존재)에서 갈등 없이 교류하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더 없이 높은 신(하나님)에게 인도할 수 있다. 우리의 세속에 머무는 인성을 드높이 고양시킬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하고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우리를 더욱 감동, 감화시킬 수 있다.
10.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자유의지냐 예정론이냐?
진화론, 자유의지는 땅의 것, 인간의 것이다. 창조론, 예정론은 하늘의 것, 하나님의 것이다. 과학으로는 진화론이 공인되고 있지만 진화론 자체가 최초에 창조된 대로 진화해가는 과정이라고도 주장할 수 있다. 곧 창조 이후 진화의 매 과정마다 피조물 안에 이미 내재된, 혹은 매순간 개입하는 신의 섭리와 간섭이 작용한다고 본다면 창조론이나 지적설계론, 나아가 예정론까지도 말이 되는 것이다. 곧 최초의 창조부터 중간단계의 변신(진화)을 거쳐 최종단계의 결과까지 미리 설계, 예정되어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몫, 이 지상의 몫은 소멸되거나 급격히 줄어든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언 16:33]와 같이 사람이 아무리 짓고 까불어도 모든 일은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는 것, 어차피 이리가든 저리가든 최종목적지, 최종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좁게는 인간의 구원, 넓게는 세상만사가 모두 인간 및 피조물들의 자유의지나 노력, 행위에 영향 받지 않고 하나님이 예정하신 계획 안에 이미 정해져 있다면 인간 및 피조물들의 권한과 함께 그 책임도 없어지거나 줄어든다. 권한, 권능이 있는 곳에 책임이 있다는 원칙으로 보자면 모든 사태의 최종책임은 결국 전지전능(全知全能)하신 하나님(신)께 있게 되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면 인간은 (상대적으로) 무지무능하다. 전능은 전지까지도 포함할 수 있는 개념이지만 전지만 따로 놓고 보자면 전지가 곧 예정론이다. 하나님은 이미 지나간 과거뿐만이 아니라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까지도 다 알고 계신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무지무능한 피조물에 불과한 인간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 하나님! 이 세상을 만드셨으면 책임을 지쇼! 아버지, 어머니! 날 낳았으면 책임을 지쇼!
인도에서 한 청년이 ‘왜 동의 없이 날 태어나게 했냐’며 부모에게 소송을 건다고 했다는데 이 같은 뉴스도 비슷한 맥락이다. 창조주가 권리도 독점했으니 책임도 독점하라는 피조물의 항변이다. 그 청년이 관종이 아니라면 욥처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할는지도 모른다. ‘잠은 좋고 죽음은 더 좋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아예 태어나지 않는 것이다’는 이 같은 반출생주의(Antinatalism)는 세상은 고통과 수고와 부조리로 가득 차 있다는 극단적 염세주의로 원죄의 개념을 제외하고는 주님의 축복과 사랑을 근거로 하는 기독교와는 정반대다.
부모가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에게 의향을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신)이시라면 혹시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동식물과 생명들 심지어 이 지구와 해와 달과 별들에게 태어나게 해도 괜찮겠냐고, 이렇게 만들어도 괜찮겠냐고 물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별들에게 물어 봐~♬ ^.^) 왜 내 의사도 묻지 않고, 내 자유의지를 무시하고 하나님(신)은 나와 세계를 이렇게 창조하셨을까?
이것은 철없는 인간의 투정이나 생떼인가? 돼먹지 못한 자식의 패륜인가? 하지만 심심찮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 받는 부조리한 세상, 뛰어난 사람이 가난하고 못난 사람이 부유한 불평등한 세상을 보노라면 이것도 하나님이 계획한 것인가, 예정하신 것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이 세상은 완벽히 아름답지도, 완벽히 정의롭지도 않고 그 안에 담긴 모든 피조물들 역시 완벽히 완성되지 않고 결점 투성인듯 하다.
혹시...? 일부러 이렇게 만드신 것일까? 2% 부족해야 재밌으니까. 너무 완벽하면 변화의 여지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말장난 같지만 조금 부족한 것이 진실로 완벽한 것이란 말인가? 세계는 수많은 불완전한 것들로 구성된 완전체인가? 부분적으론 불완전하지만 총합으로선 (어쨌든) 완전한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권능 아래 있고 예정하신 계획 안에 있는 것인가? 그렇담 하나님은 냉혹하리만치 엄정한 집행관인가 얄미우리만치 짖꿎은 장난꾸러기인가?
선한 사람, 악한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구별치 않고 무차별적으로 떨어지는 돈벼락, 날벼락, 난데 없는 행운과 자연재해 등을 보면 인간의 미약함, 무력함을 절감하는 동시에 하나님께 지으신 이 모든 것, 개체의 불완전성과 개체간에 벌어지는 불합리성을 보시기에 정말로 심히 좋으셨는지 묻고 싶을 때가 있다.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놓으시곤) 잘 된 것은 모두 주님의 축복이고 못 된 것은 모두 내 기도부족, 노력부족이라는 말을 접할 때면 억울한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해와 달과 별들의 창조> 중에서
하나님도 여느 인간, 여느 예술가가 매번 그러하듯이
자신이 만드신 것에서 흡족함과 아쉬움을 동시에 느끼셨을까?
11. 성경의 기적은 사실인가 비유인가? 역사인가 설화인가?
성경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특별히 말씀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신 계시로 기독교의 근본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질문과 난제, 딜레마들을 푸는 기준, 열쇠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쉽지 않다. 한번 통독으로 많은 소득이 있었지만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하나의 답을 얻으면 열 개의 의문이 생겨나곤 했다.
성경에 기록된 해와 달과 별의 탄생부터 노아의 방주, 이집트의 7대 재앙, 천둥과 번개의 심판, 요나가 물고기 배속에서 다시 살아나온 것,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이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장님을 눈뜨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이 모든 이적, 기적은 모두 사실인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하는가?
(넓게는 명시적으로 ‘환상’을 보았다고 기록된 사건들도 포함한)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는 비유적 요소, 설화적 요소가 적지 않다. 또한 성경을 읽다보면 이런 기적, 이적이 구약에서 신약으로 넘어올수록 그 수가 적어지고 그 스케일이 작아지는 것도 살펴볼 수 있다. 현대 교회에서는 더욱 그 같은 보고가 적어짐은 물론이다. 간혹 놀라운 간증이 들려오기도 하지만 예전처럼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성격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많은 이적을 보이셨지만 그 말씀은 매우 쉽고 간결한 비유적 화법을 쓰셨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가 10:25]는 말씀은 문장 자체로만 봐도 그렇고, 당시 이 말씀이 있게 된 상황으로 봐도 그렇고, 확실히 과장을 통한 비유적 표현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행하신 사람을 살리신 이적 같은 것들에 비하면 바늘구멍에 낙타 넣기는 너무 쉬운 미션이다. 누워서 떡먹기다. (순식간에 바늘구멍을 낙타보다 크게 만들거나 낙타를 바늘구멍보다 작게 만들면 된다.)
그만큼 성경에 기록된 이적들이 우리의 과학, 상식으로 받아들이기엔 믿기 힘든 성격의 것들이다. 이곳에서는 사실로 언급되고 저곳에서는 비유로 언급되니 읽기 어려운 것이다.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기적, 이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꼬치꼬치 파고들고 고민하지 않았다. 답을 구하기 불가능하다 여겨 지레 회피한 면도 있고 공자가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에 대한 관심은 그 자체로 불성실, 불경건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자불어괴력난신(子不語怪力亂神) <논어 술이(論語 述而)>) 괴이한 것, 엄청난 힘, 어지러운 것, 귀신에 대한 관심은 이적, 기적에 대한 관심과 통하고 가깝게는 기묘하고 신기한 이야기, 점술, 운세, 팔자 같은 재미삼아 심심풀이로 하는 세속적인 값싼 호기심과도 통한다.
하지만 의식적으로 이런 주제들을 회피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이런 기적이 기독교의 핵심, 정수가 아니라 여겼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빵과 행복으로 유혹함도 없이, 힘과 권력으로 겁박함도 없이, 어떠한 기적의 힘도 빌리지 않고,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로 자신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를 사실, 역사로 보고 어디까지를 비유, 설화로 봐야하는지는 여전히 풀지 못하고 있는 숙제다.
불신자들이 공격하고 논박하고 심지어 비웃는 주요대목도 이거다. 도대체 말이 안 된다는 거다. 기독교인의 대답은? -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행하지 못할 바가 없다. 성경에 그렇게 써져있으니 당연히 그러하다. - 이것은 하나님(신) 앞에 아닥하라는 말이다. 성경무오설이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동어반복, 순환논법이다. 소통불가다. 대화자체가 의미 없다.
아무리 성경이 하나님의 성령, 영감으로 써졌다 해도 역사적으로 성경이 정경과 외경으로 나눠지면서 편집된 흔적이 있고 하늘로부터 온 팩스도, 우주로부터 온 운석이 아닌 인간(저자)의 손을 거친 것이므로 성경무오설을 주장하기란 난감한 대목이 많다. 인문, 사회, 과학, 역사 등을 접하고 읽으면서 세상과 섞여 살 수밖에 없는 평범한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세상과 소통, 대화, 화해하기가 만만치가 않다. 내 안의 내 생각과도 갈등하지 않고 합일되기가 간단치가 않다.
이러한 생각들이 믿음을 배반하는 반종교적, 반기독교적 이기심의 한 형태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믿음과 함께 지적인 정직성 또한 쉽게 포기할 순 없다. 다만 교만에 찬 지적 허영심으로 흐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11-1. (이와 관련하여) 기적, 이적은 하나님(신)의 뜻이자 하나님이 바라시는 바인가? 아닌가?
기적, 이적은 확실히 평범하지 않다. 평범하지 않은 것을 넘어 상식을 뛰어넘고 초월적, 초자연적이다. 뭐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증거하고 나타내려 (극히 예외적으로) 하셨다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과연 자연의 순리에 맞느냐는 의문은 남는다. 대표적으로 예수께서 죽은 나사로를 되살리신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시간을 되돌려 날이 갈수록 젊어지는 것, 물이 역류하여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것만큼이나 경천동지할 기적 중의 기적, 특A급 기적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 것(생로병사)이 순리고 자연적이다. 늙지 않는 인간, 병들지 않는 인간, 죽지 않는 인간은 모두가 욕망하는 바지만 허무맹랑한 욕심이자 신에 대한 반역이다.
왜 굳이 죽은 것을 되살리는가? 죽은 것은 죽은 것대로 보내주는 것이 옳은 것이 아닐까? 아무리 합당하고도 기막힌 연유가 있다한들 이것은 자연의 순리, 섭리, 곧 신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 최대한 늙지 않고 병들지 않고 죽지 않으려 하는 욕망과 노력은 긍정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되돌려 역행하려 하는 것은 탐욕이자 교만이자 하나님(신)의 뜻을 거역하는 인간의 죄이지 않을까?!
곧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기적, 이적이 과연 하나님 혹은 예수님이 바라셨던 바일까? 예수님 역시 자연의 이치로 진리를 설파하지 않으셨던가! -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 12:24]
◈
이어지는 크고 작은 질문들이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자. 나머지 것들은 장차 숙제로 남겨놓자.
따로 결론은 없다. 질문만 있고 정답은 없다. ???????만 있고 !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질문에서 시작되니 전혀 의미 없는 글은 아닐 것이다. 한편으론 이 모든 질문과 고민들이 내 생각보다 그리 값진 것은 아닐는지도 모른다. 질문보단 기도, 논리보단 체험이 지금의 내겐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일 테니까. 무엇보다도 인간의 논리와 언어로 하나님(신)을 궁구한다는 자체가 난센스한 일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안다. 나는 수십 제곱 곱하기 수십 제곱의 우연과 필연이 겹친 엄청난 존재라는 것. 나면서부터 존엄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동시에 나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 하나님에 비하면 너무도 불완전하고 미미한 존재라는 것이다. 예수님만 생각하면 내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난다는 거다.
고개도 들지 않고 땅위를 박박 기어서도 안 되고, 정신이 황홀하게 구름 위로만 훨훨 날아다녀서도 안 된다. 다소 황당하고 엉뚱하고, 현실과 동떨어진 형이상학적인 고민들이었으니 다시 좀 낮게 내려와야겠다.
낮은 곳에 임하라. 현실에 충실하라. 네 하나님을 사랑하듯 네 자신과 네 이웃을 사랑하라. - 이것 역시 하나님(신)이 바라시는 바, 예수님이 주문하신 바다.
※ 이하는 2019/05/29 추가함.
단테의 <신곡>을 하도 오래 전에 읽어서 기억이 완전치 않은 관계로 본문 중 <4. 천국과 지옥(과 연옥)의 딜레마> 부분과 관련하여 오류가 있어 바로잡는다.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자, 소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기회가 없었던 자, 예를 들면 태어나자마자 죽은 아기들이나 소크라테스, 플라톤, 단군, 주몽 등 옛 조상들” 중 앞의 “착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자, 소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자”는 연옥으로 가지만 나머지는 단테에 의하면 연옥이 아닌 9개 층으로 이루어진 지옥의 제1층인 림보(Limbo)로 가게 된다. 즉 아기들이나 고대인들의 영혼(주로 시인, 철학자, 수학자 등 서양의 성현들)은 연옥이 아닌 지옥 중 제1옥에 있는 것으로 이곳은 어떠한 형벌도 받지 않으나 대신 신(하나님)을 볼 수 없다.
정리하자면 선량하지만 세례를 받지 못한 아기들이나 저명한 고대인들은 지옥(비록 가장 얕은 지옥일지라도)에, 크게 착하지도 크게 악하지도 않아서 지상의 갖가지 소소한 죄를 짓고 살지만 세례를 받았던 평범한 사람들은 연옥에 있게 되는 것이다. (곧,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세례의 유무)
연옥은 불로서 자신의 죄를 정화하고 최종적으로 천국에 갈 수 있는 중간단계의 공간으로 대죄가 아닌 교만, 질투, 분노, 음욕, 탐식, 탐욕, 나태(칠죄종) 등 갖가지 소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속인들에겐 희망의 공간인 셈이다.
이상은 중세 가톨릭신앙에 근거한 단테의 종교관, 세계관으로 절대적 진리도 아니며 본 글의 전개와 맥락상 크게 문제될 오류도 아니지만 팩트체크 차원에서 바로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