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망(大望)》 3권 리뷰
《대망(大望)》 3권 리뷰
“한 가문이 멸망해 가는 옛이야기를 나는 지금 눈앞에 보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드는군.” (265p)
-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의 멸망을 획책하여 자신의 부귀영화를 꾀하려는 오가 야시로의 회심의 발언
오가 야시로는 경제적으로 넉넉하거나 뼈대 있는 가문 출신이 아닌 오직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에야스의 가신으로 등용되어 출세한 인물이다. 머리가 영민하여 주로 재산관리와 회계를 담당하였다. 그러다 욕심이 생기고 급기야 반역심까지 품게 되어 주군인 이에야스를 멸망시키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하는데...
자신의 친정가문인 이마가와를 멸망시킨 오다 노부나가에 협력하여 그의 딸을 며느리로까지 들인 남편 이에야스를 증오하는 쓰키야마 마님(곧 첫째이자 정실부인인 세나). 소아적이고 질투심과 세속적 욕망이 강한 마님. 화려한 슨푸에서 자유로운 유년시절을 보내다 한적한 시골인 오카자키로 시집와 독수공방의 나날들로 욕구불만에 차 있는 마님.
야시로는 이런 마님과 간통한 후 마님을 충동질해 적장인 다케다 가쓰요리와 내통하여 적군을 몰래 무혈입성시킨다는 밀서를 주고받게 한다. 대신 그녀는 가쓰요리에게 자신과 아들의 목숨, 얼마간의 영지, 재가를 위한 남편감을 보장받는다. 벼락출세한 재승박덕 소인배와 자기 한 몸 안녕과 세속적 행복만을 추구하는 아녀자가 의기투합한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귀하다가 갑자기 천해지는 것을 탈영(脫營), 부하다가 갑자기 빈해지는 것을 실정(失精)이라고 하는 병명으로 따로 부르고 있다. 하지만 그 반대, 천하다가 갑자기 귀해지거나 빈하다가 갑자기 부해지는 것 역시 병적인 부정적 증상을 동반한다. 차이는 전자(탈영과 실정)는 육체적, 정신적 변화를 함께 보이지만 후자는 주로 정신적, 정서적 변화만을 동반한다는 것!
건방져진다. 교만해진다. 대담하고 문란해진다. 진시황 사후 농민반란을 일으킨 진승과 오광처럼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왕,제후,장군,재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다. 주군의 마님까지 품에 안아봤으니 지나치게 출세한 야시로의 눈엔 이제 세상 온갖 것이 가능해보인다. 과거는 잊은 채, 초심은 온데간데없고 욕망을 쫓아 추락을 향한 폭주만이 남았을 뿐이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고 돈이 요물이다. 숙맥인 시골청년도 서울에 올라와 돈맛을 보면 서울 토박이보다 더한 속물이 된다. 광속으로 타락한다. 덕을 갖춘 절제할 수 있는 인간이 되기 전에 돈맛을 먼저 알게 되면 위험하다.
오가 야시로, 가롯 유다 – 모두 똑똑하다. 모두 돈을 가까이했던 회계, 경리 담당이다. 이에야스와 예수라는, 모두 주군과 스승을 충실히 따랐던 가신과 제자였다. 모두 돈과 욕망, 현실에 민감했던 세속적 인간이었다. 모두 숫자에 밝아 빈틈없이 꼼꼼하였는진 몰라도 뜻이 높거나 마음이 넉넉하지 않은 협량의 인물이지 않았을까 싶다.
모시기 전 멀리서는 감히 올려다볼 수도 없던 주군이 가까이서 보니 별 것 아니다. 나도 주군만큼, 주군보다 더 잘 할 것 같고 영지의 백성들을 더 부유하게 행복하게 돌 볼 것 같다. 소문을 들어보니 어마어마한 게, 현실을 개혁하고 민족을 로마로부터 해방하리라 기대했던 예수가 몇 년 쫓아다니다보니 사랑이다, 구원이다 웬 뜬구름 잡는 말만 하고 있다.
야시로도 유다도 나름대로 초심은 훌륭했을 것이다. 별 볼일 없는 출신으로 고속 승진한 야시로는 목숨을 바쳐 충성을 다하리라 다짐하고, 유다는 예수님을 모시고 재능과 노력을 다하여 제 민족을 구원하리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주군의 원대한 이상과 스승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깨닫고 거기에 다다르지 못했다. 자신의 고집과 욕망에 따라 엉뚱한 샛길로 빠져 스스로 타락하고 멸망했다.
단, 야시로의 초심은 순박하고 작은 것이었고 유다의 초심은 정치적이고 큰 것이었다. 야시로의 초심은 거대한 망상으로 치달았고 유다의 초심은 은전 몇 닢으로 쪼그라들었다. 유다에겐 로마제국으로부터 폭력투쟁을 불사한 혁명을 통해 유대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갈망했던 종교적 민족주의 정치운동 단체인 열심당원의 혐의가 짙었던 것이다.
유다의 변절과 배신은 일제시대로 치면(로마식민지였던 당시 유대 사정이 일제식민지였던 조선의 사정과 매우 흡사하다.) 항일독립군 하다가 돈 몇 푼에 일본 밀정이 된 것과 같다. 최근의 예로 들면 노동운동, 민주주의 운동하다가 출세와 부귀영화를 위해 군부독재 기득권세력에게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과 같다.
이재오, 민중당 출신이다. 김문수, 노동운동을 위해 위장취업까지 했다. 하태경, 강경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의 투쟁의 대상이던 새누리당에 들어가 공천에 목매달고 있다. 웬만한 새누리당 의원들보다 더 새누리스럽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세 명 다 경상도 출신이라는 거! 자신의 이념과 가치를 버리고 지역주의에 편승해, 혹은 굴복해(한국에선 지역이 이념, 가치, 정책보다 세다) 출세를 위해 변절한 것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들의 원대하고 숭고하기까지 한 이상이 국회의원 뺏지 하나로 쪼그라들었다.
작은 차 타다가 큰 차 타기는 쉬워도 큰 차 타다가 작은 차 타기는 어렵다. 거친 것 먹다가 좋은 것 먹기는 쉬워도 좋은 것 먹다가 거친 것 먹기는 어렵다. 바른 길 가다가 샛길로 빠지기는 쉽지만 샛길 가다가 바른 길 찾기는 어렵다. 선을 쌓다가 악으로 타락하긴 쉬워도 악에 몸담다가 선으로 돌아오기는 어렵다. 태어난 것은 늙고 새것은 헤지는 것처럼 이것이 세상의 이치다.
처음 깨끗한 것은 깨끗할수록 더 빨리 더러워진다. 처음 뜻이 아무리 훌륭하고 원대하더라도 그것을 담을 마음의 그릇이 크고 굳세지 않으면 풍선마냥 순식간에 쪼그라든다. 그렇다고 깨끗하고 텅 빈 마음이 더러워질까 두려워 언제까지나 봉인해 둘 수만은 없는 노릇! 세상은 험하고 유혹은 지천으로 널려있고 몸도 마음도 날마다 연약해지는데 어떻게 할 것인가?
더러움을 경계하는 것을 넘어 우리의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더욱 깨끗하고 더욱 훌륭하고 더욱 원대한 것으로 채워 넣는 방법밖엔 없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자차도 죽겠어요. 어머니와 함께 죽겠어요.”
오이치 부인은 단검에서 손을 떼고 저도 모르게 자차히메를 끌어안았다.
‘이렇듯 싫어하는데 같이 죽어도 괜찮은 것일까?’
아이의 장래를 불쌍히 여겨 함께 죽으려는 것은 잘못이 아닐까......? (412p)
아사이 나가마사와 오이치 부인 사이의 맏딸 자차히메는 죽기 싫다. 살고자 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져 함께 자결하려는 어머니는 갈등한다. 자차는 이제 겨우 5살이다. 장차 커서 적장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후실이 되는 요도마님이 곧 자차다. 오이치 부인 자신도 살아남아 재가하고 자차 역시 결국 아버지의 원수에게 시집가게 되는 셈!
모략, 배신, 패륜, 살육이 판치는 전국시대에서 정략결혼은 다반사요 여자들은 물건처럼 이곳저곳, 이 가문 저 가문으로 보내져 재혼에 재재혼에 사돈관계를 맺는 수단으로 이용된다. 어제까지 죽고 죽이다가도 오늘 사돈관계를 맺는다. 적장의 아내나 딸을 취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원수에게 시집가기도 한다.
당시 성리학이 보급되지 않아 여성의 정절의식도 희박했고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생존에만 급급했던 시대상으로 보면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동시대의 조선과 비교한다면 성적으로 더 개방되고 자유로웠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여성인권, 발언권은 조선에 미치지 못했던 듯싶다.
그 험한 세상에 어린 딸을 두고 차마 혼자갈 수 없었으리라.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지만 아무리 자기자식이라도 죽이는 건 죽이는 것이다. 생명이 깃든 순간 이미 독립된 인격체다.
이해와 동정을 넘어 분노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다. 계백은 전쟁에 나가기도 전에 처자식을 죽여 스스로 퇴로를 끊고 각오를 세웠다. 더한 살인이다. 품일장군은 전세를 뒤집고자 어린 아들 관창을 홀로 적진으로 돌진시켜 희생시켰다. 더더한 살인이다.
이것은 순국도 아니고 충성도 아니고 잔인한 살인이고 패륜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대개가 악이다. 너무도 자연스럽고 지극한 사랑의 대상인 처자식을 한낱 도구로 여긴 것이다.
모두 내 맘대로 해도 되는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마음대로 때려도 되고 죽여도 되고... 선의로 아무리 자식을 위해 노심초사 애를 쓰더라도 자식은 자식만의 뜻이 있고 길이 있다. 악의든 선의든 너무 옭아매서 내 뜻대로 하려 해선 안 된다.
내 자식은 내 것이 아니다. 내 물건은 내 것이 아니다. 너도 내 것이 아니고 나도 내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들일 뿐! 내 몸을 포함한 일체의 것은 내 것이 아닌 언젠간 부서져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굳이 소유권을 따지자면...
내 몸을 포함한 일체의 것은 모두의 것이다. 이 우주의 것이다.
《대망(大望)》 3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