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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6권 <헌법의 완성> 리뷰

어멍 2023. 11. 22. 23:12

 

≪프랑스 혁명사≫ 6권 <헌법의 완성> 리뷰

 

<헌법의 완성>

부제 : 입헌군주제 혁명을 완수하다

 

  “하느님은 왕들을 요구한 인간을 벌하기 위해 왕들을 주셨을 뿐이다.” 하느님을 섬기면 그뿐인 인간이 겨우 인간의 자식을 왕으로 섬기겠다고 했으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에르비에의 말이 담고 있는 냉혹한 진실에 감동해서 박수를 쳤다. - 84p

 

    1791년 7월 14일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환속한 종교인 에르비에가 설교한 내용이다. 그는 성경 사무엘서를 인용해 설교하였는데 아마도 [사무엘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울부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일 것이다. 불과 20여일 전인 6월 20일 도망친 왕으로 인해 시민들이 큰 실망과 슬픔을 겪었으니 사람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시의적절한 설교였던 셈이다.

 

    태초의 인간이 허허벌판에 내던져졌다고 보자. 그는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찾아 무리를 이루려 할 것이다. 그 무리 중에 우두머리를 뽑아 그의 보호 아래 들어가려 할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두목을 뽑고 부족장을 세우고 급기야 왕을 세운다. 평민 중의 실력자가 귀족이 되고 귀족 중의 우두머리가 왕이 된다. 왕 중의 왕(King of Kings)은 세속에서는 황제가 되고 종교적으로는 신, 곧 하나님이다.

    구약의 이스라엘 민족도 사사를 세우고 선지자를 세우고 왕을 세웠다. 이들에게 요구된 것은 강력한 육체적, 정신적 지도력이다. 초기에는 단순무식한 힘을 중심으로 모이다가 시간이 흘러 무리가 늘어날수록 혹은 무리를 늘리기 위해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종교 등을 매개로 하는 정신적 지도력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유대민족에게 괴력의 사사인 삼손과 종교지도자인 선지자 사무엘이 나타났다. 여사사인 드보라 역시 뛰어난 언변과 카리스마를 겸비한 여장부였을 것이다. 뒤이어 최초로 축성식을 받은 왕인 사울왕이 세워진다. 하지만 백성들은 사울왕으로 인해 울부짖게 된다.

    루이 16세도 사울왕도 왕이란 왕은 대개가 이러하다. 멸사봉공(滅私奉公), 공을 위해 스스로를 남김없이 희생한 왕들은 없다시피 하다. 권력자들은 좋은 일 하라고 주어진 권력으로 대개 나쁜 일 하는데 몰두한다. 시민들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으로 시민들을 억압한다.

 

    보통의 백성, 시민들의 사정은 어떠한가? 이들도 대개 마찬가지다. 왕을 원하기도 하고 노예를 원하기도 한다. 왕이 되려고도 하고 노예가 되려고도 한다. 왕 앞에선 납작 엎드려 노예가 되려 하고 노예 앞에선 기고만장 왕처럼 군림하려 한다.

    왕은 노예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이름이다. 노예도 왕 없이 존재할 수 없는 이름이다. 노예는 자신이 의지할 왕을 원하고 왕은 스스로 왕이 되길 원한다. 결국 사람들은 섬기든 군림하든 모두 왕을 원한다. '왕'은 갖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한마디로 멋진 것이다.

 

    왕은 권력이다. 인간의 권력욕은 지배하고 싶은 욕망만이 아니라 지배받고 싶은 욕망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왕의 상징, 권력의 상징인 왕관과 왕홀은 왕에게도 노예에게도 소중한 것이다. 인간에겐 일용할 양식만큼이나 일용할 권력이 필요하다. 누구나 그 존재의 유무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인간은 스스로 완전하고 당당한 자유인이 되길 원하지만 더 빠른 속도로 노예로 되돌아가려 한다. 노예의 삶도 그럭저럭 괜찮지만 마음속 깊이 노예를 부리고 싶은 욕망을 남몰래 품고 있다. 왕이든 백성이든, 주인님이든 노예든, 너나없이 권력에 예속된 노예이긴 마찬가지다.

 

    절대군주정에서 왕을 위해 일방적으로 희생해야 하는 백성은 본질에서 왕의 노예나 다름없다. 하지만 왕 역시 권력의 노예, 왕홀의 노예일 뿐이다. 인간의 비루하면서도 어두운 일면이다.

 

  그들(왕정주의자들)은 국회의원 290명이 6월 29일 절대군주제를 지지하는 소신을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때까지 축 늘어졌던 어깨를 추스를 수 있었다. 그들뿐 아니라 귀족들의 남녀 하인들도 한껏 고무되어 ‘애국자들’을 만나면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웃는 사람이다”라는 노랫말을 흥얼거렸다. - 94p

 

    루이 16세의 도주가 실패한 후 왕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주로 정치권 밖 평민, 인민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왕의 폐위, 재판과 처벌까지 요구하지만 왕당파, 귀족주의자는 물론이고 혁명을 수행중인 제헌의회의 대다수 국회의원 역시 왕을 감싸며 어떻게든 사태를 봉합하려 했다. 민중은 왕의 ‘도망’이라 했고 국회는 그것을 극구 ‘납치’라고 했다. 국회가 완성하려는 혁명은 절대군주제를 딱 입헌군주제로 바꾸는 데까지였다. 그들에겐 여전히 왕이 필요했던 것이다.

    혁명초기 왕의 명령까지 거부하면서 진보적으로 보였던 의원들이 갑자기 왕을 비호하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내 생각에 그것은 첫째가 대안부재다. 왕을 폐위하면 당장 누군가를 새 왕에 올리든지 급하게 공화정으로 나가야한다. 둘째가 그러한 정치적 상상력 부족, 사유의 제한이다. 아무리 계몽사상의 세례를 받았다 해도 수백 년간 이어져온 절대왕권의 관성력에서 벗어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셋째가 절대군주정 일색인 주변 나라와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다.

 

    결국은 의식하던 하지 않았던 공화정에 대한 두려움과 염려가 당시 혁명주도세력에겐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염려란 왕이 없는 공화정을 과연 프랑스가 감당할 수준에 이르렀는가 하는 점이다. 지금의 수준은 아니더라도 모든 인민의 평등과 민주주의에 기초한 공화정은 원래 힘든 것이다.

    민주공화국을 큰 무리 없이 운영하자면 국가의 시스템도 시민들의 의식수준도 일정수준에 올라서야 한다. 원래 주인노릇이 만만치 않다. 작은 구멍가게라도 주인보다 종업원이 맘이 편하다. 주인은 신경 쓸 것도 많고 손도 많이 가고 여기저기 고달프고 성가시다.

 

    당시의 프랑스 사정은 어떠했는가. 유럽전역이 비슷한 처지였지만 위생, 공중도덕, 치안(범죄율), 언론, 교육(문맹률) 등이 전부 열악했다. 선거권, 피선거권은 남성 그 중에서도 능동시민에게만 주워졌고 혁명의 열기에 비해선 투표율은 저조했으며 여성의 정치적 발언은 비웃음을 사는 분위기였다. 평등, 자유, 우애를 내세웠지만 식민지에서는 여전히 노예제도를 유지했다. 이는 지금의 21세기 문명사회에서는 말도 안 되는 야만이지만 당시의 프랑스만 해도 진보, 좌파를 포함해 엘리트, 일반대중 가릴 것 없이 모두 시대의 한계에 갇혀있었다.

    왕을 사랑하는 순박한 백성, 귀족을 존경하는 충직한 하인들이 여전히 많았다. 마치 이로부터 60여년 후 벌어진 미국 남북전쟁에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나오는 남부군에 입대해 전쟁에 나가려는 충성스런 흑인노예처럼, <장고 : 분노의 추적자>에 나오는 잔인한 백인농장주를 위해 봉사하는 영악한 흑인집사처럼, 이들은 왕과 주인님을 위해선 목숨도 내놓았을 것이다. - 물론 로자 팍스, 마틴 루터 킹, 말콤 X 같은 실존하는 전설적인 흑인인권운동가들도 많다.

 

주인님을 사랑했던 온순한 흑인노예 & 농장주의 권력을 분양받은 비열한 흑인집사

 

    이는 지금의 우리역시 마찬가지다. 자신의 신분을 잊은 채 현대판 귀족들을 흠모하고 별다른 식견 없이 색깔론이나 지역감정에만 휘둘리는 이가 적지 않다. 극우에 속해 국민의힘을 맹목적으로 지지하는 이들, 과거 이명박근혜를 찍었고 그들이 탄핵되고 수감되는 수모를 맥없이 지켜보며 함께 치를 떨었던 이들의 심정도 아마 위 귀족들의 하인과 유사했을 것이다.

    이들은 21세기에 살고 있지만 엄밀히 얘기해서 계몽주의 세례를 받지 못했거나 완전히 체득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아마도 얼마 전까지 속으로 “마지막에 웃는 사람이 진짜 웃는 사람이다”라고 되뇌며 복수를 꿈꿨을 것이고 결국 지난 대선에서 성공했다. 현재 그들의 삶의 질이 얼마나 나아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순간만은 승리감, 성취감에 젖어 행복했으리라.

 

    당시 프랑스의 정세를 파악하려면 국회를 중심으로한 세력분포를 봐야한다. 국회를 극우, 우파, 중도우파, 중도좌파, 좌파, 극좌로 나눴을 때 극우와 우파가 1/3 정도 되었다. 이들이 절대군주정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한 290명이다. 하지만 정국, 혁명의 주도권은 좌파에 있었는데 자코뱅 클럽의 중도좌파가 가장 큰 덩어리였고 코르들리에 클럽의 극좌파는 아직 미미한 수준에 머물고 있었다.

    극좌파에서 슬슬 공화제에 대한 얘기가 나오던 시점이었지만 앙시앵레짐의 수구 왕당파의 의지는 여전히 꺾이지 않고 완고했다. 역사에서 수구기득권의 저항, 반격은 항상 상상 이상으로 끈질기고 집요했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것으로 미국의 경우 최초의 흑인 대통령인 오바마가 당선되던 날 백인우월주의 사이트 가입자가 평소보다 10배나 늘어난 현상은 이런 사정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예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물밑에선 여전히 왕당파와 혁명파가 팽팽히 힘 겨루는 사이, 또 다른 갈등의 전선이 그어졌다. 이것은 결국 루이 16세를 왕으로 한 입헌군주제에서 그치려는 중도좌파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는 극좌파의 물리적 충돌로 이어졌다. 1791년 7월 17일 파리 샹드마르스 광장에서 왕의 폐위를 국회에 청원하려는 군중을 국민방위군이 해산하려는 과정에서 대규모 인명피해가 난 것이다. 바로 ‘샹드마르스 학살’ 사건이다.

 

  우리에게 (해산을) 공표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따르면 될 것입니다. 법적으로 세 번 공표한 후에 무력을 동원할 수 있음을 여러분은 잘 알지 않습니까? - 161p

 

    샹드마르스에 모인 군중은 말 그대로 민중이었다. 청원에는 모두 6000명 정도가 참여했는데 국회의 엘리트들과는 달리 수동시민, 여성들까지 포함해 글도 못 쓰는 이들도 상당하였다. 이들은 오직 평화적인 수단으로 그들의 뜻을 국회에 호소하려 하였으나 사태는 계엄령을 거쳐 인명피해까지 낳게 된다. 긴장이 고조되는 와중에 세 번의 해산 경고를 고지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총알이 시장 바이이를 비껴나가 국민방위군에 합류한 용기병의 넓적다리에 맞았다. 이것이 학살사건을 도발했다.

    청원자, 청원을 주도한 지도부, 구경나온 사람들까지를 모두 포함해 당시 그곳에 있었던 이들은 순진했던 것일까 용감했던 것일까? 그 군중 속엔 적의 밀정, 불순자는 없었을까? 이와 관련하여 급진좌파인사인 데물랭은 음모론을 주장했다. 계엄령이 선포되고 샹드마르스에 군중이 운집하고 대량학살이 벌어지기까지 하루 이틀 사이에 몇 가지 미심쩍은 이상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입헌군주제를 지키려는 국회의 의도를 관철하려 이러한 유혈사태를 사전에 유도, 계획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음모론은 이후 역사적으로 규명되진 않았으나 합리적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당시 국회는 임기를 얼마 앞두고 헌법을 완성하고 차기 입법의회 선거를 준비하기 위해 마무리에 한창이었다. 6월 왕의 도주, 7월 샹드마르스 학살, 9월 헌법선포와 제헌의회 폐회와 다음 입법의회 개원의 시간표로 볼 때 왕의 폐위는 의원 대다수가 받아들일 수 없는 엄청난 변수였다.

    그들은 어떻게든 정국을 안정적으로 매듭짓고 자신들의 임기를 끝내고 싶었다. 어쨌든 사태는 일단락되고 결국 국회의 의도대로 루이 16세를 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헌법을 완성하게 된다. 그들의 바람이 이뤄졌고 만약 음모, 기획, 공작이 있었다면 일단은 성공한 셈이다.

 

    폭압적 군사독재정권을 지나왔던 우리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계엄령과 고문, 의문사와 대량학살인 광주항쟁도 있었다. 그리고 항상 어김없이, 이런 경우엔 힘없고 평범한 백성, 시민들이 희생되었다.

    몇 해 전 박근혜 탄핵정국에서 촛불집회가 한창이던 시절 당시 추미애 의원이 계엄령을 예고, 경고한 일이 있었다. 대부분 생뚱맞다는 반응이었지만 이후 박근혜 정부에서 상당부분 준비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만약 계엄령이 발동됐더라면 샹드마르스나 광주에서와 같은 학살이 없으리란 보장이 없다. 대규모 촛불집회에서 작은 폭력사태라도 예상치 않게 발생하거나 당국에 의해 의도적으로 기획, 연출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계엄령의 빌미가 되는 이러한 폭력사태는 군중 내에서 자연 발생한 것이든 어둠의 세력에 의해 밖에서 기획, 연출된 것이든 패닉과 학살의 참극으로 치닫는다. 광장은 민의가 분출되는 해방공간이지만 무력에 의해 폐쇄 고립되면 학살의 생지옥이 된다. 군중은 설마설마 하다가 눈사태처럼 순식간에 총칼 앞에 노출 된다.

    유증기가 좁은 공간에 압축되면 그 자체로 발화력이 생겨 폭발하듯 대규모 군중이 밀집한 대중 집회는 촛불집회든, 태극기집회든 항상 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장기간에 걸쳐 대규모 인원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평화적으로 치루어낸

촛불집회는 한국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을 웅변하고 있다.

 

  재능이 없어도 덕이 있는 사람은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만, 덕이 없이 재능만 갖춘 사람은 재앙이 될 수도 있습니다. - 206p

 

    입법의회 선거를 앞두고 로베스피에르가 자코뱅 클럽에서 행한 연설인 ‘선거에 관한 지침’의 일부다. 지금처럼 선거관련 대중집회나 광고, 토론방송은 없었지만 당시만 해도 당선, 낙선운동이 있었고 정치클럽과 진보, 보수 언론들의 지지표명이 있었다.

    로베스피에르는 재능은 뛰어나지만 덕이 없는 인물, 재승박덕(才勝薄德)을 경계하였는데 당장 떠오르는 인물, 요즘 가장 핫한 인물은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아는 것도 많고 머리도 비상하여 팽팽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시야도 넓고 디테일도 강하여 재능 면에선 여야를 통틀어 군계일학이다.

 

    그는 재능에 비해 인기는 별로다. 일부 팬덤은 있지만 비판자(특히 보수)로부터 당돌하다, 예의 없다, 싸가지 없다 라며 미움을 받고 있다. 이는 장유유서의 유교적 정서가 강한 국민성 때문에 필요이상으로 증폭된 것으로 그에게는 부당하고 억울한 면이 있다.

    당 대표까지 했던 어엿한 정치인인데 어린아이 취급한다. 아무리 익명이 보장되는 인터넷 공간이라도 공인은 공인으로 불러주고 대접해줘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공적인 자리에서는 사적 인연이 있더라도 존칭이나 애칭은 삼가야 한다. 형님, 아우 하는 인맥질을 대놓고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이 전 대표에 대한 비판을 변호하자면 이는 타인에 대해 너무 완벽함을 요구하는 것이다. 공인은 물론 부모형제, 이웃, 배우자까지 우리는 우리 주위의 모든 이에게 나의 기준, 나의 욕심을 투사하고 있다. 조금의 결점도 용납하지 못하고 장점은 축소하고 결점은 확대해서 본다.

    맹상군이 닭울음소리와 개도둑질을 잘하는 식객 덕분에 무사히 위기에서 벗어나 함곡관을 빠져나왔다는 계명구도(鷄鳴狗盜)의 고사는 보잘 것 없는 재주라는 부정적 의미와 작더라도 요긴한 재주라는 긍정적 의미를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경우에 따라선 목숨을 살리는 절체절명의 재주가 되는 것이다.

 

(까치가 은혜를 안 갚는다면) 이 순간 가장 필요한 것은?

종소리 성대모사!

 

    좋은 소식이 나쁜 소식이 되고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이 되는 새옹지마처럼 세상 모든 것이 양면성을 갖고 있다. 사람도 모두 저마다의 장단점을 갖고 있고 장점이 곧 단점이 되고 단점이 곧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단점보다 장점을 먼저 보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특히 원만하고 행복한 관계를 위해선 항상 부딪히며 살아가는 가족과 이웃에게는 더욱 필요한 자세다.

    이 대표의 재능도 양면성을 갖고 있다. 한국정치의 발전을 위해서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고 악마의 재능으로 정치를 더욱 퇴행, 굴절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정치를 하는 프로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재능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재능 이외의 것까지 포함한 모든 면을 고려했을 때 과연 정치에 적합한 인물인지 회의적인 것도 사실이다.

 

    왕후장상 영유종호(王侯將相 寧有種乎-왕, 제후, 장군, 재상의 씨가 어디 따로 있느냐)지만 사람은 각자 적합한 자리가 있다. 드라마라도 장르에 따라 필요한 케릭터가 있고 그에 딱 맞는 배우가 있다. 가장 공공성이 강한 정치는 올곧고 의로운 사람이 해야 한다.

    이 전 대표는 큰 뜻과 이상을 품은 정치인이라기보다는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승리만을 바라는 정치기술자, 선거공학자처럼 보인다. 살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고 이기기 위해선 더 한 짓도 할 것처럼 보인다. 인품도 철학도 뭔가 존경할만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굳이 그를 위해 변명하자면 처음 정치의 길을 잘못 들어섰다. 그는 왜 젊은 나이에 보수정당에서 정치를 시작했을까? 어떻게 그런 반골기질에 가까운 개혁성향과 도전정신으로 수구에 가까운 보수정당의 귀족주의자들, 소위 꼰대들과 동고동락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그의 뛰어난 재능과 보잘 것 없는 이상(理想)이 애석하다!

    지난 대선에서 간발의 차이로 승리한 윤대통령의 0.73%는 이 전 대표의 몫이다. 반윤을 기치로 다가오는 총선에 참여하려는 이 전 대표의 역할과 파괴력이 또다시 주목받고 있다. 한번은 진보의 재앙이었던 그의 재능이 이번엔 보수의 재앙이 될지 아니면 소동만 일으킨 후 다시 윤대통령과 국민의힘의 품 안으로 되돌아갈지 지켜볼 일이다.

 

  시민들이여. 제헌의회는 1789년 6월 17일에 시작하여 1790년과 1791년에 걸쳐 헌법을 제정하는 일을 1791년 9월 3일에 원만히 끝마쳤습니다. - 259p

 

    전국신분회(삼부회)로 시작해서 국민의회가 되고 제헌의회가 된 국회는 1791년 9월 3일 헌법을 완성하고 9월 18일 헌법선포식을 열고 9월 30일 임기를 종료하고 폐회한다. 이어서 입법의회 의원들이 국회를 구성하는데 이들은 선거법에 의해 제헌의회 의원은 제외된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제헌의회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며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겼다. 프랑스 역사상 최초의 성문헌법을 완성하고 최초로 투표로써 입법의원들을 뽑아놓고 물러났다. 국내외적인 수많은 과제와 크고 작은 돌발변수와 씨름하며 극한 갈등과 격무에 시달리며 2년여를 달려왔다. 프랑스는 이제 신분사회에서 시민사회로 탈바꿈했다.

    시대의 한계는 있었지만 그들은 충분히 칭찬받을 만하며 스스로의 자부심 역시 대단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든 헌법이 천년은 아니더라도 백년은 가리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채 2년도 못되어 헌법은 개정되고 루이 16세는 단두대에서 처형된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이것을 예상한 이는 없었을 것이다.

 

    - 6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