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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사≫ 5권 <왕의 도주> 리뷰

어멍 2023. 10. 28. 23:32

 

≪프랑스 혁명사≫ 5권 <왕의 도주> 리뷰

 

<왕의 도주>

부제 : 벼랑 끝으로 내몰린 루이 16세

 

  우리는 그릇된 법을 고치는 일을 단번에 할 수 없습니다. 기존의 법에서 모든 잘못을 한꺼번에 발견할 만큼 천재적인 입법가라 할지라도 그러한 잘못을 한 번에 뒤집어엎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는 잘못된 부분을 단계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 177p

 

    미라보(백작)의 말이다. 미라보는 유년과 청년시절 권위적이고 인색한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 아버지는 눈 밖에 난 아들에게 경제적 지원을 끊었고 심지어 봉인장 제도를 이용하여 감옥에 감금하기까지 한다.

    그 탓인지 덕인지, 미라보의 인생은 굴곡과 부침이 심했고 오랜 감옥생활에서의 독서로 많은 식견과 뛰어난 언변을 소유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제헌의회에서 가장 활발히 발언한 의원으로 아무런 원고도 손에 들지 않고 한 시간가량이나 열띤 어조로 조리 있게 연설하는 것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혁명 초기 미라보는 혁명에 우호적이었으나 시간이 갈수록 왕당파에 가까워진 끝에 왕에게 매수되어 국회에서 왕의 방패가 된다. 소문은 무성했지만 의심만 사던 미라보는 그가 죽은 후 루이 16세의 비밀금고에서 발견된 문서로 그가 왕을 위해 일하였음이 밝혀져 세간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결국 그는 1793년 11월에 위인들의 무덤인 팡테옹에서 유해가 추방된다.

 

    이처럼 고난과 궁핍으로 갖은 고생을 하던 이가 중간에 높은 뜻을 펼치더라도 종국엔 현실과 타협하여 안락을 추구하게 되는 예는 많다. 이렇게 한번 유혹에 넘어가고 뜻을 꺾으면 다시는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많은 경우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듦에 따라, 금력과 권력이 세져 지킬게 늘어남에 따라 사람은 보수적으로 변해간다. 진보좌파에서 보수우파로 가는 경우는 흔해도 그 반대는 없던지 희귀하다. 나폴레옹도 박정희도 처음 좌파였다가 나중엔 스스로 황제가 되고 독재자가 되었다. 역사에서 아름답고 훌륭하게 기억되는 이들은 변해가기 전에, 처음의 모습이 퇴색되지 않은 채 비교적 일찍 요절한 이들인 경우가 많다.

 

    미라보는 혁명에 우호적이었으나 본래 급진파는 아니었다. 그는 혁명과 왕의 화해와 공존을 바랐다. 미라보를 흑화된 변절자나 타락천사라고까진 볼 수 없지만 혁명파에서 멀어져 왕당파에 가까워지는 과정을 볼 때 위 발언은 그 저의가 의심된다. 바로 그럴듯한 명분과 논리로 딴지를 걸어 혁명의 강도와 속도를 늦추려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 자체로만 떼어놓고 보면 충분히 수긍함을 넘어 맞는 얘기다. 음미하고 숙고해볼만한 여지가 있는 주제다. 이것은 혁명을 포함한 개혁, 사회변혁에 대한 얘기, 넓게는 인류문명의 발달과 변화에 대한 얘기다.

 

    석기에서 청동기를 건너뛰고 철기로 넘어갈 순 없다. 물질문명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와 사회제도도 마찬가지다. 정체되지 않고 혼란스럽지도 않으면서 거쳐야할 단계를 밟고 다지면서 공동체가 진보해나가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이것은 이상일 뿐 현실은 녹록치 않다. 대개 도전과 응전, 작용과 반작용을 거치며 좌충우돌하면서 힘겹게 나아가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때론 방향과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적지가 옳더라도 심각한 부작용과 시행착오, 반동까지도 발생할 수 있다.

    이와는 별개로 차원이 다른 물결이 외부에서 유입되는 경우도 있다. 구한말 조선에 밀려들어온 서구과학문명, 기독교, 민주주의 제도 따위가 그것이다. 이 경우 역사는 대나무의 마디처럼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비약적으로 진보하게 된다. 내부에서도 진보의 축적, 모순의 폭발, 정치적 격변을 거쳐 역사가 일순간 도약할 때도 있다. 자고나니 들판에 백화가 만발해있는 것처럼 어제와 전혀 다른 오늘을 맞이한다.

 

    루이 16세가 통치하는 절대군주정의 프랑스에는 두 번의 큰 정치적 사건이 있었다. 첫 번째가 전국신분회의 소집이었다면 두 번째는 왕의 도주다. 국민의 대표들은 왕국의 수도인 파리로 모였고 왕은 파리로부터 도망쳤다. 그 도주가 실패로 끝나면서 왕은 더욱 궁지로 몰리게 된다. 이 사건은 애초 입헌군주제까지 나갈 것으로 예상되었던 혁명이 언젠간 공화정까지 치닫게 될 것이라는 강력한 예언인 셈이다.

    한국의 근현대사 역시 프랑스 못지않게 굴곡이 많고 파란만장했다. 한국은 심심한 ‘조용한 아침의 나라’기보단 롤러코스터처럼 현기증이 날 정도로 역동적인 ‘다이나믹 코리아’에 가깝다. 기질 역시 대비가 극적인 사계절을 닮아 무척 다양하며 끼도 많고 흥도 많고 재주도 많다. 무엇보다 지정학적으로 조용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

 

    국회의원 총선거를 6개월 앞둔 2023년 10월의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이대로라면 윤석열 대통령과 국민의힘의 큰 패배로 또 한 번의 큰 격변을 예고하고 있다. 사실 윤 대통령의 세력은 몇몇 정치 검사들 빼고는 없다시피하다. 수사권, 기소권으로 찍어 누르는 힘이 워낙 막강해서 그렇지 대세가 꺾이면 일반시민뿐 아니라 기존 정치인들의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선거결과에 따라 국민의힘은 영남자민련으로 쪼그라들어 소멸하고 윤 대통령은 탄핵되고 내친김에 개헌까지 가능할 수도 있다. 조중동 수구보수에겐 최악의 시나리오라서 이간질, 마타도어, 자작극 등 온갖 묘수를 써서 피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거대한 역사의 물결 앞엔 다 소용없다. 묘수가 절실하다는 것은 이미 궁지에 몰려있다는 말이다. 묘수는 딱 한번 쓸 수 있을 뿐, 묘수가 두 번 이상 나온 바둑은 이미 진 바둑이다.

 

    꼼수, 묘수의 유혹을 뿌리치고 뚜벅뚜벅 정수로 가야 한다. 역사를 믿고 시민을 믿고 원칙대로 묵묵히 가다보면 어느 순간 큰 길이 열린다. 지치지 말고 낙담하지 말고, 겸손하고 유쾌하게 진보의 길을 가자. 제비가 오면 봄이 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촉이 예민한 이는 폭풍전야의 고요함 속에서 위험에 대비하고 동트기 전의 짙은 어둠에서 희망을 본다.

    미래는 결코 어둡지 않다. 많은 혼란과 갈등을 거쳐야겠지만 촛불혁명을 경험한 시민들의 역량은 그것을 이겨내기에 충분하다. 지난 대선은 용병(윤석열 후보)을 픽업하고 세대갈등, 젠더갈등을 이용한 조중동과 이준석 전 대표의 묘수에 당한 것이다. 젊고 똑똑한 2030 남성들이 두 번 실수할리 없다.

 

    다시 미라보의 발언으로 돌아와서... 천재적인 입법가의 완전한 법은 없다. 완전한 입법가가 만든 모두를 만족시키는 제도는 없다. 정치제도뿐 아니라 세금, 국방, 입시제도 등등 어느 정책이든 불리한 자와 유리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시대에 한참 뒤쳐진 제도, 너무 앞서가는 제도, 너무 센 제도, 너무 약한 제도 등 제도마다 장단점을 파악하여 세밀하게 디자인해야 한다.

    어느 경우든 역사와 문명의 진보를 향해, 최대 다수의 공익을 위해, 최적의 제도를 만들고 계속해서 보완, 개선해야 한다. 때론 이르다 싶더라도 파격적인 것도 시험해보고 때론 뒤처진 것들이 따라오고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도 해야 한다. 선발대는 멀리 떨어져 앞서가더라도 본대는 보폭을 맞추어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 그것은 한 국가 안의 지역간, 세대간, 계층간 뿐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와 전 인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신중하면서도 진취적인 기상과 신념이 필요하다. 미라보는 나이 듦에 따라 식견은 더욱 깊고 넓어졌다 해도 그 신념과 기상은 안타깝게도 점점 졸아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전하께서 비선서 사제들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오직 헌법의 적들의 봉사만 받으시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몹시 불편했습니다. 우리는 전하가 너무 눈에 띄게 베푸시는 편애가 전하의 마음을 진실로 표현하는 것이나 아닐까 두렵습니다. - 210p

 

    왕은 슬프다. 왕은 괴롭다. 끊임없이 의지가 꺾이며 권력과 권위를 잃은 루이 16세가 파리 아낙네들의 반 협박에 의해 베르사유 궁보다 좁고 초라한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옮긴 이후엔 더욱 갑갑해졌다. 국회와의 관계도, 그에게는 여전히 백성인 시민들과의 관계도 원만치 않은 상황에서 왕은 억지춘향 식으로 행정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국회와 시민의 포로가 된 그의 행동과 표정에서 그 내색을 감출 수는 없었으리라.

    그의 주위에는 그에게 호의적인 왕당파들이 모여들고 그도 그것이 마음이 편하다. 그들은 귀족들과 성직자시민헌법에 맹세를 하는 선서를 거부한 고위 성직자들이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루이 16세는 마지못해 그 법을 승인하였지만 두고두고 그 법에 반감을 드러내며 종교적 양심을 저버린 것을 후회하였다.

 

    왕과 왕비는 튈르리 궁에서 국민방위군의 호위 혹은 감시를 받으며 간혹 궁을 찾은 백성들의 무례하고 당돌한 언행에 노출된 우울한 나날들을 보내야했다. 1791년 4월 18일 가족과 함께 기분 전환 겸 생클루 궁으로 가려는 루이 16세를 국민방위군과 군중이 저지한다. 왕은 오랜 시간 군중의 모욕과 위협을 받으며 오도 가도 못한 끝에 다시 튈르리 궁으로 돌아가야 했다.

    막연하지만 본능적인 촉을 지닌 민중은 이미 왕이 혁명에 적대적이라는 것, 어쩌면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모종의 행동(예를 들어 도주)을 하리란 낌새를 채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실재로 왕은 이전부터 도주를 권유받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파리시민들에게 오만가지 정이 떨어지면서 마음을 결정하게 된다.

 

    왕이라는 신분을 떠나 인간적으로 동정이 가는 상황이다. 오히려 왕이었기에 더 괴로운 나날들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루이 16세는 허울뿐인 왕보다는 하루라도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 사는 편이 나으리라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떠나야 하오. 과인은 명령하오. 당장 시행하시오.” 이 말이 통할 리 없었다. 왕은 절망적으로 뒤돌아서 자리로 돌아가 털썩 주저앉았다. - 289p

 

    결국 왕은 탈출, 말 그대로 야반도주를 결행한다. 측근들과의 오랜 사전 논의와 준비 끝에 1791년 6월 20일 늦은 밤 주위를 모두 물리치고 침실로 들어간 후 자정을 거쳐 6월 21일 새벽 1시경 가족과 함께 몇몇 수행원을 거느리고 마차를 타고 동부전선의 몽메디로 출발한다.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부이예 장군의 주력부대와 합세하여 몽메디 요새에 터를 잡으면 성공이다.

    우여곡절 끝에 어찌어찌 도주여행을 계속하여 몽메디를 코앞에 둔 오지마을 바렌에서 그 신분이 발각되어 도주는 허무하게 막을 내린다. 6월 21일 밤 11시를 전후하여 바렌 검찰관인 소스의 집 2층에 갇힌 왕은 자신의 백성에게 위와 같이 명령하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만 하루도 넘기지 못한 한여름 밤의 꿈이자 모험이었다. 결국 왕은 가던 길을 되짚어 6월 22일 아침 파리를 향해 귀환길에 오른다. 갈 때는 폭주족으로 하루가 걸린 신나고 쫄깃쫄깃한 여정이었으나 올 때는 굼벵이로 나흘이 걸린 우울하고 비참한 여정이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왕에 대한 여론은 급격히 악화된다. 왕이 파리를 비운 사이 왕의 초상화는 떼어졌고 왕의 흉상은 파괴됐다. 귀환길은 냉담하고 적의에 찬 백성들에 둘러싸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곤 했다. 스스로 백성의 아버지라고 칭하였는데 아버지가 자식들을 버리고 떠난 셈이 된 것이다. 더구나 그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붙잡혀 끌려오는 신세가 된 것이다.

 

듀플레시 베르트랑(Duplessi Bertaux) <파리로 귀환하는 국왕 가족>

 

    우리 역사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다. 선조는 임진왜란 때 백성을 버리고 황급히 몽진을 갔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때 황급히 서울을 떠나며 서울 시민들을 챙기지 않았다. 선조의 경복궁은 백성들에 의해 불탔지만 이 대통령은 그 이후 어떤 책임추궁과 질책을 받았는지는 모르겠다. 모두가 큰 잘못이되 누가 더 비난받아야 하는가?

    선조와 이 대통령은 전쟁이라는 난리통에 경황이 없었다고 변명할 수 있다. 조정과 정부를 보존하려는 명분을 내세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루이 16세와 다르게 여전히 온전한 권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충분히 권한과 능력을 발휘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백성과 시민들을 돌볼 수 있었다.

    반면 루이 16세는 초라한 권력, 허울뿐인 권력을 갖고 있었다. 사실상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자의에 의해, 치밀한 사전계획 하에, 빚쟁이가 야반도주하듯 몰래 도망갔다. 세 명 다 곤궁한 처지에 처했지만 루이 16세가 인간적으로 가장 동정이 간다.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었다. 세 명 중 꼴이 가장 우스워졌다. 그에겐 파리에서의 더 큰 고난과 비극이 예비되어 있었다.

 

    왕의 도주실패는 왕에게는 불행이었지만 프랑스에게는 다행이었다. 만약 성공했다면 십중팔구 내전이다. 분명 엄청난 희생을 치르겠고 결과는 왕과 왕당파의 승리, 혁명파의 패배로 끝났을 것이다. 이미 왕당파는 오스트리아 등 외국 왕들과 내통하고 있었고 일단 내전이 일어나면 주위의 왕들이 가만있을 수가 없다.

    부이예 장군 등이 이끄는 왕의 군대, 국내에서 숨죽이고 있던 귀족과 망명한 귀족들, 성직자들은 왕을 중심으로 모일 것이고 외부에선 프랑스를 둘러싼 왕국들, 로마교황청까지 합세, 지원할 것이다. 국내의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평민세력, 국민방위군만으로는 이들을 감당하기 힘들다.

    아마도 보수우파, 왕당파인 프랑코의 승리로 끝난 스페인 내전과 비슷했을 것이다. 양 진영을 구성하는 세력들도 유사하고 전쟁의 양상도 그 결과도 같을 공산이 크다. 더구나 당시에는 1930년대 스페인 내전과 달리 외부에서 도와줄 지원국이나 국제여단 같은 세계시민들도 없었다. 여러모로 프랑스, 유럽, 세계역사를 뒤바꿀 수도 있었을 하루 동안의 왕의 모험이었다.

 

  속박을 당하는 동안 어쩔 수 없이 해야 했던 모든 법적 행위가 무효임을 엄숙히 주장한다. - 295p

  (나의) 이 모든 배려, 고통, 너그러움, 인민에 대한 애정은 완전히 무시당하고 변질되었다. - 298p

 

    왕은 쌓인 게 많다. 울분에 차있다. 위 내용은 6월 21일 아침 왕이 떠난 침실에서 발견된 <왕이 파리를 떠나면서 모든 프랑스인에게 보내는 성명서> 중 일부분으로 이 편지에서 왕은 자신의 비참하고 곤궁한 처지를 한탄하면서 혁명과 국회, 그 중에서도 특히 자코뱅 클럽에 대한 적대감을 노골적으로 토로하고 있다.

    자신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의 배려, 고통, 너그러움, 인민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무시당하고 변질되었다고 한다. 나라와 인민을 위해 양보에 양보를 거듭하고, 참고 참고 또 참았는데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딱히 잘못된 것은 없다. 굳이 잘못을 찾으라면 그가 왕이라는 사실이다. 루이는 왜 왕으로 태어나서 이 같은 고초와 수모를 당하는가! 당시 망나니의 아들은 망나니 외에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루이 역시 마찬가지다. 이것은 그가 왕이었기에 받아야만 했던 일종의 벌이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자리에서 잘못을 저질렀다면 그 사람에게 얼마나, 어디까지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작금의 윤석열 대통령도 현재 자신의 낮은 지지율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 딴에는 나라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동분서주,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데 왜 인정을 안 해 주나? 왜 이 마음을 몰라주나! 많이 서운하고 의아할 것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가?

    대통령 본인이 잘못이다. 왕이 아니면서도 왕처럼 굴고 있다. 처음부터 21세기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제1공복인 대통령에 전혀 어울리지도 않고 한 사람의 민주시민으로서도 소양이 부족한 사람이었다. 언행과 통치스타일이 민주적 지도자보다는 왕을 연상시킨다. 무능함을 넘어 위험한 인물, 시대착오적 인물이다.

 

나는 왕이로소이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다!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의 말대로 이 대표 자신과 국민의힘과 조중동 언론이 좌판에는 양머리를 내놓고 실재로는 개고기를 판 것이다. 손바닥 ‘왕’자, 개사과, 열차좌석에 구둣발을 올린 일 등 구설수는 많았다.

    이런 사소하지만 비상식적인 언행이 인물의 됨됨이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단서일 수 있는데 어느 언론도 심도 있게 다루지 않았다. ‘왕’자도 이웃 주민이 응원의 의미로 써줬다는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느 언론도 추적하고 검증하지 않았다.

 

    현대 민주주의의 실패는 시민대중의 실패고 대중의 실패는 곧 미디어, 언론의 실패다.

 

  수세기 동안 절대권력이 저지른 범죄 때문에 산더미같이 쌓인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것을 보면서 인민이 무자비하다고 놀라는 일이 가당키나 한지요? - 316p

 

    6월 21일 왕의 편지를 읽은 국회는 6월 22일 그에 대한 반박문으로 <국회가 모든 프랑스인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한다. 위 내용은 그 편지의 일부분으로 편지에서 국회는 왕의 발언을 인정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하며 왕에 대해 서운함을 넘은 분노와 배신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국회는 왕의 발언은 툴툴거림에 불과하며 헌법을 비롯해 국회가 취한 모든 조치는 충분히 자랑할 만한 업적이며 온전히 인민의 행복을 위한 것으로, 인민이 왕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왕권이 인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며 왕을 탓한다.

 

    위에 발췌한 내용은 왕 뿐만이 아니라 귀족과 성직자를 포함한 왕당파, 혁명에 우호적이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모든 프랑스인들을 향한 국회와 헌법에 대한 변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호소력 있는 말이다. 중도파를 포함한 평범한 이들이 염려하는 바, 모든 보수우파가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바다. 점잖고 유복한 귀족주의자인 보수는(물론 저소득, 저학력의 거칠고 저속한 보수도 있다) 무자비함, 과격함, 폭력, 무정부, 혼란 등을 가장 두려워하고 혐오한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사의 대부분을 보수우파가 주도한 우리 역시도 프랑스 혁명에 대한 평가가 박한 면이 있다. 보수우파들은 프랑스 혁명의 과격성, 폭력성, 혼란상 등을 강조하며 깎아내리는 인상이다.

    하지만 이런 혼란상, 폭력양상은 좌파 우파 가리지 않는다. (긍정적 의미인) 혁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반혁명(반동), 전쟁, 정변, 쿠데타, 사화, 환국, 반정 등 정치적 격변기마다 예기치 않은 피해와 무고한 이들의 희생이 있어왔다.

 

    하여튼 왕의 도주실패 이후, 혁명은 더욱 급진화되며 과격해진다. 다시 돌아온 파리의 루이 16세 앞엔 이제까지 지나온 길보다 더 험난한 길이 놓여있었다.

 

    - 5권 리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