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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대통령의 재산기부? 난 반대!

어멍 2009. 3. 30. 15:53

    며칠 전 고위 공직자 재산내역이 공개되어 이명박 대통령이 356억원으로 1위를 먹었다. 이에 따라 그가 약속한 재산기부의 방법과 시기에 대해 관심이 고조-라기 보단 관심과 기대도 많이 떨어져서 주의환기정도-됐는데 재단출연 등의 말이 오가는 듯하다.

    어차피 재단이야 빛 좋은 개살구가 될 확률이 많을 뿐더러 삼성장학생, YS (언론)장학생 같이 MB표 장학생만 지원, 양산한다면 없는 것만 못하다. 개인적으로는 아예 없었던 일이 됐으면 싶다.


    재벌회장과 정치인의 범죄, 부패 혹은 단순히 재산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공헌이나 재산헌납을 자의반 타의반 강요하는 문화, 돈으로 면죄부를 받고 정치적 환심을 사는 문화는 없어져야 한다. 그것은 강자, 있는 자의 책임을 요구하고 사회계약, 사회적 의무를 중요시하는 서구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와도 다른 한국의 천민자본주의에서만 도드라지는 특징이다.

    사실 노블리스 오블리제도 공동체 윤리라기 보단 개인윤리, 개인과 공동체에 걸쳐있는 윤리라 할 수 있는데 단순히 여기에 기대고 의지하는 것보다는 공동체의 문제는 공공의 논리, 제도로 풀어가는 게 원칙이고 더 효과적이다.


    난민구제에 힘쓴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이자 박애주의자.

    토목, 광산, 건설업으로 억만장자가 된 성공한 사업가이자 사회, 자선사업가.

    공적영역의 간섭보다 사적영역의 자유를 중시하고 온화하고 도덕적인 보수, 보수의 자발적인 사회적 봉사와 책임, 자선을 강조한 미 공화당의 후버대통령.

    그는 경제정책에서 대실패하고 세계대공황의 단초를 제공한다.


                                   Hoover Dam. 미국의 10대 구조물. 대공황과 함께 후버가 남긴 유산.



    이런 후버에 비하면 한국의 부자, 기득권층의 윤리의식은 졸부 수준을 못 벗어났다. 하지만 시민대중의 수준 역시 실망스러운데 모든 것을 돈으로 때우고 해결하려는 행위를 여론이 요구하고 용납하고 성의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다는 면에서 국민들에게도 책임이 있다.

    엄밀히 얘기해서 반은 시기어린 질투이고 반은 선망어린 구걸이다. 시혜와 자선을 국민, 여론이란 거룩한 이름 뒤에 숨어서 삥 뜯듯 강요하는 것. 비겁하고 구차하다.


    법과 제도에 따라 처벌할 건 처벌하고 세금, 벌금 등으로 요구할 건 당당히 요구해야 한다.


    돈이면 다되는 세상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한 때 ‘돈 없는 사람은 정치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해서 입방아에 오른 적이 있지만 사실 돈 없이 정치하기가 그리 녹녹치 않은 현실에서는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돈으로 표도 사고 권력도 사고 그 권력으로 다시 돈을 불리며 교육과 혼인을 통한 학벌, 혈연, 지연으로 그 부와 권력을 세습한다. 권력도 시장에 넘어갔고 족보도 시장에 넘어갔다. 더 이상 가난하지만 기품 있고 뼈대 있는 가문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의 명문가가 곧 재벌가이다. 신분을 결정짓는 것은 피가 아니라 돈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자본주의하에서 기득권층이 믿는 유일한 것, 기득권층의 목숨 줄, 아킬레스건 역시 돈이다. 2002년 대선 때 조갑제씨가 한나라당 지지층인 보수적 기성세대에게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고 투표하려는 자제들의 용돈을 지급(!)하지 말라고 선동한 적이 있다. 뭣 모르는 젊은이들이 노무현의 사기에 혹해서 정신이 뺏긴 상태니 말로 어르고 달래 설득하지 못하면 실질적인 불이익을 주라는 주문이었다. 유치찬란하고 치사빤스한 일이지만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이것이 핵심이고 정치적 파워의 실체다. 이런 노회한 막가파 보수우익들이 정권을 잡으면 그 행태가 뻔하다. 사회 중요 포스트에서 인사권을 행사하는 단체장, 우두머리부터 시작해 말단 사원, 경비까지... 가장 먼저 민주세력, 진보인사의 밥통을 빼앗고 돈줄을 끊으려 할 것이다. 군사독재때는 총이 무섭지만 자본주의 민간독재때는 돈이 가장 무섭다. 총에는 폭력에 강제로 꺽여 비분강개하지만 돈에는 배고픔에 자의로 꺽여 비루, 비굴해진다.
    그렇게 용돈을 위해, 입사를 위해, 승진을 위해, 밥줄을 위해 한 때는 거칠고 진취적이며 도전적이었던 젊은이들이 거실에서, 면접장소에서, 회식자리에서 온순하고 다소곳이 자신의 뜻을 감추거나 꺽는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자본과 보수기득권에 편입되고 적응돼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령은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다. 보수층의 시선으론 참 건전하고 믿음직한 젊은이겠지만 네모난 세모, 하얀 검정, 미래의 기억같은 형용모순처럼 '젊은 보수'는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불편하고 한편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벌써부터 보수해서 뭐할텐가. 나이들어 이문열, 늙어서는 조갑제, 서정갑이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하긴 지금도 조갑제, 서정갑에 필적하는 극우, 수구 젊은이들이 간혹 발견된다는 보고가 있기도 하다.('젊은 수구'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형용배반? 형용훼손?)

    데모 등의 정치적 투쟁보다 더 치명적이고 영향력 있는 투쟁방식은 조중동 광고 불매운동 같은 소비자운동이다.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소비자운동에 대한 유례없는 탄압은 그들의 약한 고리가 어디인지, 이 운동이 가지는 잠재적이고 가공할 파괴력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고 있다.

    이젠 돈이 모든 것을 말하고 결정한다. 이대통령의 재산환원이 차일피일 미루어지는 것도 돈에 대한 대통령의 본능에 가까운 집요한 애착이 분명 작용하고 있으리라 본다.


    얼마 전 집권당 대표인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규제도 풀고 세금도 줄여줬는데 재벌들이 돈만 쌓아놓고 투자를 않는다며 애원에 가까운 하소연을 한 적이 있다. 자발적 자선에 비해 자발적 투자에 호소했으니 덜 아마추어, 덜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모든 차고에는 자가용을! 모든 냄비에는 닭고기를!’(후버대통령의 선거 캐츠플레이즈) 747, 주가 3000, 뉴타운 등의 주문을 외며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을 불러낸 흑마술사처럼 욕망할 줄만 알고, 욕망에 아부하고 삿되게 이용할 줄만 알지 욕망을 다루고 제어할 줄은 모른다는 점에선 매한가지다.

    투자하지 말라고 말려도 돈이 된다면 딸라빚을 내서라도 투자하는 것이 자본이고, 돈 앞에선 부모자식간에도 소송을 불사하며, 프리미엄이 붙는 아파트 청약을 위해선 이재에 밝지 않은 서민이라도 몇 날, 몇 밤을 줄서 기다리는 것이 바로 자본이다. 그것은 이성의 논리가 아닌 욕망의 논리, 인간의 논리가 아닌 자본의 논리인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에게 인정을 기대하는 것은 자선만으로 실업, 빈곤을 해결하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고 부질없는 난센스다.


    경제가 어려운 요즘, 지난 시절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저주에 가까운 악담을 퍼붓던 조중동은 돌연 정책은 제쳐두고 따뜻한 시선의 온정주의만을 강조하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한편으론 부자감세, 한편으론 복지감소 정책을 밀어붙이며 새벽시장으로 공장으로 어려운 민생순례를 시행하며 목도리 등을 나누어 주는 사이 어려운 이웃의 사연에 눈물짓게 하고, 명망가의 자선과 미담에 미소 짓게 하고, 기적을 이룬 위대한 역사를 회상시키며 자선캠페인, 모금캠페인, 위기극복 홍보에 여념이 없다.


                                                      설움에 겨운 눈물을 닦아주는 훈훈한 장면

                                                                                  or 
                            정치적 인질임을 자각하지 못한 이의 가망 없는 의탁(유사 스톡홀름 증후군?!)



    자선과 시혜, 인정과 사랑이 넘치는 사회는 좋다.

    하지만 사회적 의무를 저버리고 선심쓰듯 생색내듯 베푸는 시혜는 조작된 알리바이, 사기와 다름 아니다. 부자, 가진 자들도 푸념만 할 것이 아니라 의무와 도리부터 먼저하고 대접을 바래야 할 것이다. 자선에 쓴 돈이 많겠는가? 종부세, 법인세, 양도세, 상속세 등의 세금으로 낼 돈이 많겠는가?


    껌값으로 요리값을 지불할 생각은 말라.(게다가 생색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