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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신앙생활

서른네 번째 주일 대표 기도문 (191201) -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어멍 2019. 12. 3. 00:25



서른네 번째 주일 대표 기도문 (191201) -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게 하소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주님 감사합니다.


    이 주일 저희가 오직 주님을 믿고 의지하여 주님 앞에 모였사오니 저희를 축복해 주시옵고 평강 내려주시옵소서. 저희의 잘난 점, 못난 점을 속속들이 모두 아시고 저희의 허물과 죄까지 품어 용서하시는 주님께 저희가 한없는 감사와 찬양을 드리오니 이 기도와 예배를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주님. 저희가 주님의 사랑스런 자녀, 성실한 제자들이 되길 소망하오니 저희가 더러운 곳을 깨끗케 하고, 어두운 곳을 밝히고, 막힌 곳을 뚫고, 끊어진 것을 잇게 하소서. 메마른 땅의 단비가 되게 하시고,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이란 미성숙한 자기애나 제 원하는 대로 누리거나 즐기는 것이 아닌 서로 아끼고 위하고 섬기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저희가 내 영역으로 들어와 나를 마모시키고 내가 마모시키는 사람들에게 주님의 사랑과 은혜가 전해지는 축복의 통로가 되게 하시옵소서.


    주님. 비록 세상과 사람이 저희에게 상처를 주더라도 온화하신 절대자이신 주님께서 넉넉히 품어 안아 위로하여 주시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 주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세상에 나가 주님의 사랑을 힘써 행하게 하시옵소서. 저희를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셔서 하늘에 있는 주님의 사랑을 가지고 내려와 낮은 사람과 함께 낮은 곳에 임하게 하시옵소서. 가까운 사람과 함께 주님의 사랑을 나누게 하시옵소서. 저희의 가족과 이웃과 저희를 둘러싼 모든 것들로부터 시작하여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확장하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세상에 오만하지도 않고 겁먹지도 않고 주님의 말씀을 겸손하고 담대하게 선포하게 하시옵소서.




    주님. 저희 안을 주님의 것으로 가득 채우길 소망하오니 세상의 헛되고 그른 것으로부터 저희를 보호하여 주시고 굳게 붙들어 주시옵소서. 교회의 벽을 허물고 문턱을 낮추어 세상과 소통하게 하시되 저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탁한 물결에 저희가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세상의 길흉화복을 쫓지 말고 오직 주님의 말씀과 진리를 쫓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 저희는 세상 것에 쉽게 겁먹고 쉽게 미혹되는 영과 육이 모두 연약한 어리석은 양떼입니다. 저희가 어느새 세상에 길들여져 주님에게 멀어져 있사옵니다. 저희는 필요하지도 않은 세상 것에 의존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주님 안에서 강해지지 않고 세상에 물들어 허약해졌습니다. 저희는 저희에게 부족하거나 필요한 것에 대해 기도하지 않고 저희가 원하는 것이나 심지어 저희를 해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저희를 돈과 세상물질로 인해 더 사나와지고 더 비굴해지지 말게 하시고 주님 안에서 더 겸손해지고 더 담대해지게 하소서. 예술가에게 언제나 만족과 갈증이 함께하듯이 저희들에게 언제나 주님에 대한 충만함과 갈망, 감사함과 소망이 함께하게 하시옵소서.




    주님. 꽃그림은 꽃보다 화려할 수 있어도 향기가 없고, 도시의 불빛은 아무리 눈이 부셔도 밤하늘 별빛의 경이로움이 없듯이 비교불가의 주님의 권능과 은혜를 찬미하게 하시옵소서. 주님이 지으신 세상에는 우연이나 진부한 것이 하나도 없사오니 저희의 삶이 첫 숨부터 마지막 숨까지 기쁨과 감사로 힘차게 고동치게 하소서. 낮에는 한없이 파랗고 높은 하늘, 밤에는 끝없이 어둡고 깊은 별들 속에서 무한히 크고 아름다우신 주님을 보게 하시고 저희 눈꺼풀 바로 위, 발걸음 바로 아래 계신 무한히 다정하고 친근하신 주님을 또한 보게 하소서.


    모든 것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시간과 모든 것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인 죽음이 이 지상에 군림하지만 저희가 그들을 왕이라 부르지 말게 하소서. 만물은 유전하다 암흑 속에 사라지느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랑의 태양 아버지 하나님의 은혜이시며 영원한 것, 불멸의 것, 가치 있는 오직 유일한 것은 오직 주님의 사랑뿐임을 깨닫게 하시옵소서.




    주님. 주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성가대의 목소리에 은혜 내려 주시옵고 몸과 마음을 다해 간구하는 모든 성도들 축복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목자이신 ◇◇◇ 목사님을 축복하사 항상 강건케 하여 주시옵고 저희에게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로 굳건히 세워 주시옵소서. 이 분께 성령을 내려주셔서 주님의 뜻과 말씀을 들려 주시옵고, 이 교회에 성령을 내려주셔서 주님의 뜻과 선을 다함께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기도문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주님의 사랑을 가까운 사람들부터 함께 나누고 서로 섬기자는 것, 중반부는 세상의 부귀영화 길흉화복을 쫓지 말고 오직 소망을 갖고 주님의 말씀과 뜻을 따르자는 것, 후반부는 가늠할 수 없는 주님의 권능과 영원하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찬미다.


 


인간이 지은 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것에 비교할 수 없다.





      내 영역으로 들어와 나를 마모시키고 내가 마모시키는 사람들 - 사람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영역을 둘러싼 주도권 다툼이 있다. 직장이든 주방이든 자기 나와바리에서는 제 맘대로 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멀게는 생존본능이기도 하고(내 먹이, 내 밥그릇은 건들지 마라!) 본질에서는 권력투쟁이다.(이곳에선 내 말 들어라!)


      < You always hurt the one you love (당신은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죠) > The Mills Brothers(밀스 브라더스) - 노래처럼 역설적이게도 사랑하는 사이일수록 상처를 더 많이 준다. 더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 부딪힐 확률이 많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랑 지극한 가족, 연인이라도 사람과 사람이 섞여 살고 영역과 영역이 겹치는 한 이것은 피할 수 없고 갈등도, 서로간의 상처도, 그에 따른 분노와 증오도 피할 수는 없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 깨닫고 주님의 힘으로 극복하여 주님의 사랑으로 행할 뿐이다.





      위로하여 주시되 거기에 머무르지 않고 - 거기에 머무른다면 안주다. 안주를 넘어 도피다. 세상을 외면하고 7살 철부지처럼 언제까지나 주님의 품안에서 어리광만 부릴 수는 없다.


      내 영역 밖의 멀리 있는 사람이나 대상을 사랑하기는 손쉽다. 내 영역 안의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대상은 어렵다. 사사건건 토를 달고 딴지를 거는 아내, 남편보다 차라리 지나가는 행인 1,2가 더 정답고 예뻐보인다. 사랑하기로는 필요할 땐 애지중지 꺼내 쓰다가 질리면 처박아 두어도 상관없는 예쁜 그릇이 가장 손쉽고 편안하다.



      원인애(遠人愛)보다 근인애(近人愛)가 더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자기 남편이 (시댁에) 불효자다, 진보적이다 말하는 아내는 거의 없다. 대개가 (너무) 효자다, 보수적이고 권위적이라고 여긴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 자기 아내가 알뜰하다, 센스 있다고 여기는 남편 역시 거의 없다. 대개가 헤프다, 센스 없고 눈치 없다고 여긴다.


      그래서 아무리 성령 충만한 목사님, 배움 깊은 학자, 자기희생의 사회혁명가라도 그저 집에서는 보수적이고 고집 센 게으른 밥충이일 뿐이다. 그래서 자기 남편보다 남의 남편이 더 멋져 보이고 자기 아내보다 남의 아내가 더 예뻐 보이고 자기 자식보다 남의 자식이 더 잘 나 보이고 자기 부모보다 남의 부모가 더 훌륭해 보인다. - 저런 남자(여자)와 단 하루만 살아보았으면 원이 없겠다! 저런 자식(부모) 둔 부모(자식)는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자랑스러울까!



      이렇게 가까운 사람과 환경에 상처받고 실망하고 지치다 보면 같은 이치로 (하늘에 계신) 주님은 사랑하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은 미워하고, 외진 기도원이나 교회는 편안하지만 시끄러운 세상과 삶의 터전은 불편해질 수도 있다.


      가까운 사람, 이웃부터 챙기고 사랑해야 한다. 미우나 고우나 자기 사람 귀한 줄 알아야 한다. 가까운 것을 소중히 여겨라. 남편을 귀히 여기고 아내를 사랑하라. 부모님을 공경하고 자녀를 존중하라. 주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힘써 - 힘든 일이기에, 더욱 힘써야 한다는 중의적 의미.


      성령의 넘치는 은혜와 도우심만으로 능히 행할 수 있다면야 좋겠지만 그리 간단치가 않다. 항상, 매번 넉넉히 행하기가 쉽지가 않다. 인간인지라 자주 힘에 부치기도 하고 가끔 시험에 들기도 한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굳은 의지를 갖고 힘써 행하기를 결심해야 한다. 싸움터에 나가는 용감한 마음으로 세상에 나가 파이팅해야 한다.





      저희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게 하시고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의 탁한 물결에 저희가 휩쓸리지 않게 하소서. - 교회가 세상을 밝히는가 세상이 교회를 밝히는가. 교회가 세상을 걱정하는가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는가. 세상과 교회 중 무엇이 더 세속적 욕망의 탁한 물결로 넘쳐나는가. 혹은 노골적으로 혹은 은밀하게 그 양상만 다를 뿐 지금의 교회가 세상보다 더 낫다고, 세상을 밝히고 정화하는 빛과 소금의 역할에 충실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요즘이다.




    지극히 세속적 욕망에 솔직한, 전혀 바람직하지 않은 기도의 예




우연히 들렸던 식당에서 보았던 개업축하화분




    살아서는 예수대박 불신폭망, 죽어서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임을 굳게 믿사옵니다.


    집값은 뛰게 하시고 세금은 낮춰 주시며 갚을 빚은 탕감해주시고 받을 빚은 이자까지 받을 수 있게 하소서. 주님께서 매달렸던 거친 나무십자가를 붙잡고 울며 엎드려 비오니 저에게 크고 눈부신 황금송아지를 내려주소서. 저를 형통케 하사 십의 일조를 드릴 것을 맹세하오니 제 수입이 한 달 1억이 되게 하소서. 아니, 십의 오조를 드릴 것을 맹세하오니 이왕이면 한 달 10억이 되게 하시옵소서. 바라옵건데 돈세다 잠들게 하시고 돈에 파묻혀 죽게 하소서. 할렐루야!



    저의 일가친척 자손들을 축복하시되 제 자식들을 그들보다 더욱 축복하사 첫째는 다윗과 같은 큰 권력을 쥐게 하시고 둘째는 솔로몬과 같이 큰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시고 셋째는 요셉과 같이 크게 출세하게 하시어 모든 사촌들 위에 우뚝 서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저와 저의 자식들이 어딜 가나 기죽지 않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선 능치 못함이 없사오니 저에게 주님의 놀라운 능력을 허락하사 저에게 자색옷을 입히시고 금빛 왕관을 씌우셔서 독수리의 날개와 사자의 발톱을 한 짐승에 태우소서. 그 발톱으로 적들을 짓이겨 혼비백산 패주케 하옵시고 제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홍해가 갈라지듯 뿔뿔이 흩어져 사라지게 하시옵소서.



    제가 미워하고 저를 미워하는 자들을 저주하사 그들을 어둠의 골짜기로 인도하여 지극한 고통 끝에 죽음에 이르게 하시옵소서.


    제가 사랑하고 저를 사랑하는 자들을 축복하사 그들을 넓은 풀밭으로 인도하여 지극한 행복과 영원한 평안을 맛보게 하시옵소서. , 그들보다 저를 더 축복하고, 그들 중에 저를 가장 축복하사 저에게 최고의 부와 명예와 권력과 영광을 허락하시옵소서.



    제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찬미하오니 제 것을 뺏지 마시고 저를 소멸치 마소서. 저에게만 죽음을 늦춰주시고 저에게만 시간을 멈춰주셔서 날이 갈수록 젊어지게 하시옵소서. 저에게 장수와 영생을 주셔서 살아서는 만인의 부러움과 존경을 받으며 건강하게 오래오래오래 살게 하시고 죽어서는 여~~~영원히 살게 하시어 천국의 가장 높은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고 맹인과 앉은뱅이와 혈우병을 낫구고 죽은 자를 살리시며 물 위를 걸으시고 다섯덩이 떡과 두마리 물고기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능력과 기적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렸사옵니다. 아멘!




    ※ 제 모든 것을 바쳐 주님을 찬미하오니 제 것을 뺏지 마시고 / 저에게만 시간을 멈춰주셔서 날이 갈수록 젊어지게 하시옵소서 - 제 것을 지키려 하면서 모든 것을 바칠 수는 없다. 날이 가고 있는데 시간이 멈춰 있을 수는 없다. 이것은 자체로 모순이다. 하지만 우리의 기도는 때때로 스스로 느끼지 못하지만 이처럼 관용적, 습관적, 맹목적이다.


    성경을 통틀어 예수님은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셨지만 시간을 멈추거나 되돌리는 기적은 행하지 않으셨다.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기적을 보이긴 하셨지만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죽지 않는 축복(혹은 저주)을 받은 인간에 대한 기록이나 예수님께서 늙은이를 젊은이로 되돌리는 기적을 행하셨다는 기록은 없다.



    ※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싫어하는 화법인 진지하지 않은 조롱, 비아냥, 냉소 그리고 되도록 쓰지 않으려는 화법인 오해의 소지가 있는 어렵고 복잡한 반어, 도치, 역설의 혐의가 있는 기도문의 예지만 솔까말 가장 세속적이고도 솔직한 여느 성도의 기도문이라고도 볼 수 있다. 강조과장법이 많이 쓰이긴 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깨닫더라도 인정하기 싫은, 조롱보다는 팩트폭격, 반어보다는 적나라한 진실 쪽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술가에게 언제나 만족과 갈증이 함께하듯이 - 오스카는 실망하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만족한 것도 아니었다. 진정한 예술가가 언제나 그러하듯이 말이다. <양철북> 315p





      모든 것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인 시간과 모든 것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인 죽음이 이 지상에 군림하지만 저희가 그들을 왕이라 부르지 말게 하소서. 만물은 유전하다 암흑 속에 사라지느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랑의 태양 - 죽음과 시간은 지상에 군림한다. / 그대는 그들을 군주라고 부르지 말라. / 만물은 유전하다 암흑 속에 사라지느니 /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랑의 태양이어라. : 블라지미르 솔로비요프의 시 한 구절, 이종진 편역 <대심문관> 291p










      ※ 밀스 브라더스의 노래에는 일종의 반전이 있는데 그 반전은 좀 뻔뻔한 뜻하면서도 진리를 꿰뚫어 본 뜻한 역설의 진실을 담고 있다.




    You always hurt the one you love (당신은 언제나 당신이 사랑하는 이에게 상처를 주죠.)


    The one you shouldn't hurt at all (당신이 아껴줘야 하는 사람인데도 말이죠.)


    ․ ․ ․ ․ 중간 생략 ․ ․ ․ ․


    So, if I broke your heart last night (그러니 지난밤 내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It's because I love you most of all (그건 당신을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사랑하므로 상처를 준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자주, 가장 깊은 상처를 준다.


      바꾸어 말하면 내가 (가장) 상처를 주는 사람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며, 내게 (가장) 상처를 주는 사람이 나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다.





      ※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 찬송가 가사처럼 세상에 버림받고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상처를 받으면 주님이 큰 위로가 된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홍수를 이룬 후 큰 위안과 기쁨을 얻고 용기와 원기를 회복할 수 있다. 교회, 기독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 종교시설이 갖고 있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순기능이다.


      본질에서도 역사적으로도 종교는 세상과 구별되는 영역이다. 세상에 지친 영혼의 안식처이자 세상의 논리, 법과 규범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운 도피처, 해방구의 성격이 있다. 일종의 정치적, 종교적 성역인 소도처럼 신구약의 유대교 회당은 분명 이런 성격이 있었다. 군사독재시절 명동성당이 민주운동권세력의 최후의 도피처, 은신처가 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세상은 험하고 사람은 불완전하기에 믿을 수가 없다. 전적으로 의지하기에 적당하지 않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가면 자칫 관심을 두고 애정을 쏟기에 적당하지 않다, 사랑하고 섬길 가치가 없다로 비약할 수 있다. 세상과 사람에게 실망을 넘어 환멸을 느낀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실재로 그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 현실에서도 문학작품에서도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면 <마담 보바리>의 엠마나 <위대한 개츠비>의 데이지나 - 당장 남성 케릭터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유감이다. 남성주인공에 우호적인, 심지어 멋들어지게 그려준 <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아그네스 그레이>의 브론테 자매나 <오만과 편견>의 제인 오스틴의 여성 작가들에게 축복 있으라!) 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자. 더 높은 곳에 소망을 두되 현실에 충실하자.

 

 



      ※ 원인애보다 근인애가 어렵다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멀리 계신 예수님이 내 곁에 가까이 다가와 실재하신다면 믿고 숭배하기가 도리어 어려울 수 있다. 편지로만 주고받던 상상속의 그대(그녀)가 더 아름다웠듯이 재림한 예수는 도리어 외면 받을 수 있다. 실재로 성경에도 예수님이 회당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보고 의아하여 수군거리는 고향 나사렛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경읽기 0078 참조)


      고향으로 돌아가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그들이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의 이 지혜와 이런 능력이 어디서 났느냐 [마태 13:54] - 거 예전에 감나무골 목수집 아들 예수라고 있잖여. 여름이면 항상 개울에서 물장구치던 꼬맹이 말여. 근데 그 꼬맹이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며 전국을 돌아다닌다네. 허허. . 어제는 마을 회당에 왔다고 해서 어떻게 컸나 궁금해서 가봤더니 말씀을 기막히게 하는 거여! 뭐랄까? 하여튼 그냥 말 잘하는 그런 수준, 그런 차원은 아녀! 정신을 차려보니께 내가 엎드려 그 발에 입맞추고 있더구먼... 허허... 허허허... 어디서 그런 재주와 능력을 배워왔을까??


      예수님의 그것은 어디서 난 것이 아니다. 배운 것이 아니다. 본래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배운 대로 아는 대로, 경험한 대로 느끼는 대로 판단한다. 인간은 인간의 눈으로 예수님을 본다. 자신만의 눈으로 신을 본다.


      이삭은 이삭이고 야곱은 야곱이다. 베드로는 베드로고 바울을 바울이다. 같은 하나님이라도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과 아들 야곱의 하나님이 완전히 같을 순 없다. 아무리 믿음 깊은 베드로와 바울이더라도 베드로의 신앙과 바울의 신앙이 똑같을 순 없다. 우열을 가리자거나 옳고 그름, 믿음의 깊이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인식과 경험의 한계, 스따~일과 개성의 차이를 말하려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가? 위대하지 아니한가?

 



      데이지는 사랑을 사랑한다. 사랑이 오고갈 때의 느낌과 기분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화려하고 럭셔리한 사랑이다. 그녀의 목소리엔 돈의 향기가 난다. 종이학 천 마리로는 그녀를 감동시킬 수 없다.


      개츠비는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사랑한다. 평균이상의 좋은 사람(Good Man)이고 보기 드문 순정남이다. 그는 유럽에서 공수한 이니셜이 수놓인 실크셔츠를 입고 핑크빛 수트도 넉넉히 소화해내는 폼생폼사, 스타일리스트다. 사랑에 있어선 완벽주의자고 아마도 일처리도 철저하고 용모도 한깔끔 할 것이다.


 


      데이지의 사랑이 철저히 수동적이라면 개츠비의 사랑은 철저히 능동적이다. 데이지가 사랑받는 것에 도취되어 있다면(난 좀 사랑스러운 듯 ^^) 개츠비는 사랑하는 것에 도취되어 있다.(난 좀 멋있는 듯 ^^)


      데이지는 개츠비가 아닌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아도 되었고 개츠비는 데이지가 아닌 누군가를 사랑했어도 되었다. 데이지는 개츠비에게,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그(그녀) 아니면 아니 되는 유니크한 그 무엇이 없었다. 결국 그들의 인연은 운명적이라기 보단 우연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데이지에게 사랑은 행복이다. 따라서 행복하지 않은 사랑은 사절이다. 괴로운 사랑, 아프고 시린 사랑, 가난하고 고달픈 사랑이 아닌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풍성한 사랑, 샹들리에처럼 화려하고 눈부신 사랑, 세상걱정 없고 책임질 일도 없는 어린아이가 누리는 들뜨고 재밌고 신나고 두근두근하는 사랑이다.


      개츠비에게 사랑은 미션이다. 따라서 어렵고 돈이 많이 들수록 해냈을 때 보람이 있다. 데이지를 만나기 위해 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열고 데이지를 만나기로 한 날엔 잔디를 가지런히 깎아 놓으며 흥분한 데이지를 살피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서 꼬박 밤을 세운다.




      (남녀간의) 사랑에 굳이 등급을 매긴다면 개츠비의 사랑은 상위 0.1%에 속하는 최상위다. 데이지의 사랑은 하위 0.1%에 속하는 최하위다. 데이지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개츠비는 그런 데이지 때문에 죽게 되고 그녀에게 쓸쓸히 잊혀 진다.


      비유하자면 무림의 절대고수가 시장 좌판에서 삥뜯는 동네건달의 암수에 치명상을 입는 것, 고고한 성인군자가 산전수전 다 겪은 사기꾼 양아치에게 뒤통수 맞는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간악한 바리새파 제사장들과 눈먼 대중에게 매맞고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과 같다. 의도성, 적대적 관계만 제외한다면 '개츠비 & 데이지'와 비슷한 그림들이다.


 


      그런 데이지에게 그런 사랑을 바친 개츠비는 위대한가?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는 그래서 더욱 빛을 발하는가? 돼지와 함께 빛이 바래지는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순정을 바친 개츠비는 그래서 더욱 위대한가? 아니면 그래서 결국 위대하지 아니한가?


      개츠비는 그런 데이지를 어느 정도 알고 이해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과연 영혼 깊숙이 서로 교류하였는지, 위대함을 넘어 숭고한 경지에 이른 가장 높은 수준의 사랑을 나누었는지 묻는다면 답은 결코 아니다! 어쩌면 개츠비는 데이지가 자기 것을 버리고 그에게 돌아오지 않으리라는 것, 결국은 그녀로부터 버림받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역할, 미션, 임무, 사명이 주어지면 잘못된 신념, 믿음, 이념을 위해서도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 사랑이라고 다를 리 없다. 데이지가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면 개츠비는 마치 오직 데이지만을 사랑하기 위해 태어나고 살아온 사람 같다. 매몰차지만 데이지의 가치, 사랑의 가치를 떠나서 개츠비에겐 이런 자기확신, 자기만족의 혐의가 있다.


      왜 데이지만을 고집하는가? (내겐 매력없는 케릭터, 심지어 복창터지는 케릭터다.) 막말로 세상에 여자는 많다. 남녀간의 사랑 말고도 위대하고 숭고한 가치가 많다.




      작중 인물은 작가의 분신으로 애정이 남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감안한대도 개츠비 앞에 붙은 '위대한(Great)'이란 수식어는 개츠비가 걸친 핑크빛 수트처럼 다소 과장되고 겉멋 들린 느낌이 있다.


      상징과 은유의 문학적 표현에 작정하고 시시비비를 가릴 일은 아니지만 굳이 내 생각을 말하자면 개츠비는 위대하지 않다. 다만 그의 버림받은 순정이 애틋하고 불쌍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