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문학, 책읽기

<대심문관(大審問官)> -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중에서

어멍 2019. 1. 19. 21:38

 

 

<대심문관(大審問官)> - 도스또예프스끼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중에서

 

 

 

 

<대심문관> &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연말연초에 이종진 편역으로 한국외대출판부에서 발행한 <대심문관>을 읽었다. 대심문관은 도스또예프스끼의 마지막 장편소설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중에 삽입된 것으로 2013년에 삼성판 세계문학전집으로 읽은 소설 속에서 읽은 바가 있다.

 

      당시에도 인상이 매우 독특했는데, 평소 흔히 접하지 못하던 이국적인 매력의 여인을 언뜻 스쳐 지나친 느낌이랄까?! 하나의 독립된 단편인 이 작품을 읽은 후 받은 느낌은 깊고도 신선했다. 개신교 신자여서 다소 도발적인 주제이기는 했지만 뭔가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예수님의 깊은 가르침과 뜻을 엿본 느낌이랄까?!

 

      스쳐 지나간 그 여인의 잔영이 잊히지 않은 걸까? 따로 대심문관만 떼어서 엮은 책이 있길래 다시 읽어봤다. 삼성판이 워낙 오래된 것이라 그런지 번역은 외대판이 낫다. 더 자연스럽고 이해가 빠르다.

 

 

 

      외대판은 1장인 대심문관 기본 텍스트를 합해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나머지 6장은 대심문관을 다룬, 각기 다른 6(편역자 포함)의 강연 및 평론인데 대심문관을 분석, 이해하는데 따로 더 이상의 수고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충분하다.

 

      (종교)철학에 관한 내용이 많아 전체적으로 술술 읽히지는 않지만 아주 난해하진 않다. , 3장 로자노프의 글은 너무 지루하고 어려워서 읽다가 106P에서 점프하여 264P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외대판 <대심문관> 목차

 

 

 

      원문텍스트 외 나머지 6장에도 좋은 글들이 많지만 리뷰가 너무 길고 복잡해지므로 대심문관 원문(파란색으로 옮긴다.) 중 생각이 머물렀던 몇 대목만 간단히 일별하기로 한다. (너무 심오하고 거대한 주제라서 자세히 파고들어 리뷰하기에도 겁나고 버겁다. 아마도 도스또예프스끼 본인조차도 말년까지 씨름하며 고뇌에 고뇌를 거듭했던 주제일 것!)

 

      고전 읽기는 언제나 옳다. 백에 아흔아홉은 책값과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다. <까라마조프네 형제들>은 고전 중에서도 높고 아름다운 봉우리다. 그 중 <대심문관>은 가장 높은 정상이고 백미다. 도스또예프스끼 문학과 종교, 철학, 사상의 응결체다. 일반 독자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는 기독교인이라면 반드시 일독을 권하고 싶다. 생각하고 느끼고 얻을 것, 나아가 영감을 주고 깨우칠 만한 것이 많다.

 

 

 

      대심문관의 심문관은 이단심문관, 종교재판관이다. 이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형제 중 둘째인 이반 까라마조프가 동생인 알료샤에게 자신이 지어보았다며 들려주는 서사시로 일종의 (장편)소설 속의 또 다른 (단편)소설이랄 수 있다.

 

      배경은 16세기 스페인 세빌리아, 등장인물은 추기경인 대심문관과 재림예수다. 중세의 막바지 종교재판이 기승을 부리던 시대, 그것도 악명 높기로 유명한 스페인에 예수님이 오셨다. 최후심판의 날에 불벼락을 내리며 오신 것도 아니고 휘황찬란하게 천군천사를 대동하고 눈부시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오신 것도 아니고 1500년전 오셨던 그 모습 그대로, 그때와 똑같이 소박하고 평범한 인간의 모습으로 산책하듯 살그머니 이 지상에 오신 것이다.

 

      역시 그때와 똑같이 사람들은 그 주위로 구름처럼 모여들고, 예수님은 관 속에 누운 한 소녀를 살리는 기적을 보이시지만 이를 목격한 대심문관은 이내 얼굴이 어두워지고 눈살을 찌푸린 채 호위병에게 명령하여 예수님을 체포한 후 감방에 가둔다. 이후 감방 안에서 이어지는 대화 아닌 대화(대심문관의 독백형식을 빌은 대심문관과 예수님과의 대화, 혹은 대심문관과 작가와의 대화)<대심문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왜 오셨냐? 방해 말고 그냥 가시라! 조용히 사라지시라! - 이것이 대심문관의 요지다. 물론 그도 눈앞에 나타난 이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명백히 안다. 하지만 자신의 지위와 권력이 위협받는 것이다. (이 지상에서의) 자신의 존재이유가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한마디도 없이 대심문관에게 키스를 한 후 다시는 나타나지 마시라는 대심문관의 당부를 뒤로 하고 대심문관이 열어준 감방문을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난다. 이것이 대강의 줄거리다.

 

 

 

 

! 가란 말이야!!

나 좋다구 쫓아다닐 땐 언제구? - 관계역전, 상황역전

 

 

 

 

    이건 좀 이상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가 그리스도라는 걸 이내 알아챘단 말이야. - 23p

 

 

 

 

      이상하긴 하다. 후광도 없는데... 평범한 옷차림, 평범한 걸음걸이... 뭐 하나 특별할 것도 없고 기적도 없는데 모두가 빠짐없이 이내 알아챌 수 있을까? 뭔가 눈에 보이지 않는 특별한 아우라가 있나??... 하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굳이 이상한 얘기라고 써놨듯이 여기선 눈에 보이건 보이지 않건 달리 특별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거다. 그것이 핵심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내 알아채고 모이고 뒤따를 정도로 특별 곱하기 특별한 것이 하나님이고 예수님이다, 그래야 우리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후후하고 주장한다면 뭐 할 말이 없지만서도...

 

      맥락이 약간 다르지만 성경 <욥기>를 읽을 때도 이상했다. 하나님과 사탄이 욥을 놓고 내기를 하며 대화를 주고받은 후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이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시험에 처하게 한다. 그런데 그 분위기가 묘하다. 하나님과 사탄은 우호적이라고 할 순 없어도 결코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적대적 분위기가 아니다. 사무실이나 관청에서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지시하는 분위기, 또는 포커판에 마주앉은 동료와 게임을 즐기는 분위기랄까?! 어찌 보면 역할 분담을 하는 한 팀, 또는 반드시 이기고 꺽어야 하지만 없으면 재미없는 게임 상대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문점은 따로 있었다. 바로 하나님과 한 공간에서 그 얼굴을 마주보고 그 목소리를 직접 듣고 대화까지 하면서도, 하나님의 광채에 노출되고서도 어떻게 사탄으로 계속 남아있을 수 있는가 하는 거다. 멀리서도 모두가 이내 알아챌 정도의 능력이라면 그처럼 가까이 있는 존재는 변화시켜야 되지 않나? 그래야 하나님이고 예수님이지 않나? 하는 의문! 누가 평생 그런 기회,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것은 이야기의 마지막까지, 그 이후에도 자신의 이념을 꺽지 않을 것이 확실한 대심문관, 예수님과 마주보고 직접 대화를 나눴던 대심문관에게도 똑같이 갖게 되는 의문이다.

 

      이것은 한편으론 교만하고 억지스런 생각, 당돌한 질문이기도 하다. - ‘첫눈에 하나님이다! 필을 주셔야죠. 하나님이라면 순식간에 나를 거듭나게 하고 설혹 내가 아무리 떼를 쓰고 엇나가도 설득하고 돌려놓으셔야죠. 전지전능하다면서요. 그 정도는 돼야 하나님 소리 들을만하지 않겠어요? 당신이 정말 하나님이라면 날 좀 어떻게 좀 해봐요!’ - 이쯤되면 이 질문은 무의미해지거나 왜소화된다. 일찍이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동거동락했던 사도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고 유다는 예수님을 동전 몇 푼에 팔지 않았던가!

 

 

 

      과연 그럴까? 굳이 말하고 드러내지 않아도 모두가 이내 알아차릴까? 현실에선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건 확실히 이상한 이야기고 말이 안 되는 이야기다. 사람은 저마다 달라서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도 있고 둔감한 사람도 있고 지식, 지혜, 영성이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알아본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도 다른 얘기다. 사탄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다르듯 대심문관이 재림예수를 알아보는 것과 회심하는 것은 다르다. 인정하는 것, 이해하는 것, 동의하는 것, 곧 완전한 일치는 각기 다른 차원이다.

 

 

 

     결론이다. 예수님을 본다고 해서 모두가 알아채는 것은 아니고 알아챈다고 해서 모두가 설득당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보다 근원적인 비의가 숨어있다. 내 생각에 그것은 <대심문관> 전체가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비의, 도스또예프스끼가 갖고 있던 종교사상의 비의와도 상통한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은 자유 안에서의 사랑이고 그리스도의 믿음은 자유 안에서의 믿음이라는 거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시고 기적을 보이지 않으신 것, 십자가 위에서 천군천사를 부르지 않으신 것도 마찬가지다. 빵과 행복으로 유혹함이 없이, 힘과 권력으로 겁박함이 없이, 기적의 힘을 빌리지 않고, 오직 인간의 자유의지로 자신을 믿고 따르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그것만이 진짜라고 보신 것이다. 인간은 오직 자유 안에서만 신과 접촉할 수 있다. 자유는 신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사랑의 증거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그 자유의지로 자신에게 다다르기를 주문한다. 이것은 인간의 벗을 수 없는 무거운 짐이면서도 그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다. 그리고 그것은 죄의 씨앗이기도 하고 신에게 날아오를 수 있는 동력이기도 하다.

 

 

 

 

    우리는 당신의 위업을 수정하여, 그것을 기적과 신비 그리고 권위 위에 세워 놓았소. - 37p

 

    우리는 당신과 손을 잡고 있는 게 아니라 그 악마와 손을 잡고 있소. 38p

 

 

 

 

      그 악마는 누구인가? 광야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예수님은 그 유혹을 뿌리치고 이겨냈지만 우리(대심문관)는 그 유혹을 기꺼이 환영하고 받아들였다는 거다.

 

      당신(그리스도)이 교권을 우리에게 맡기고 떠난 후(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요한 21:17]) 우리는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 그 교권을 더욱 강화했다. 이제 우리의 힘과 기술은 당신은 물론 악마까지도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고 정교해졌다. 이 지역(나와바리)은 이미 내 관할이니 오래전에 은퇴하신 당신은 더 이상 간섭하지 마시라!

 

 

 

      그 유혹은 40일 금식으로 배고픈 예수님에게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라는 첫 번째 유혹,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보이라는 두 번째 유혹, 높은 산 위에서 세상 모든 나라와 영화(榮華)를 보여준 후 나에게 경배한다면 그 모든 것을 주겠노라는 악마의 유혹이다.[마태 4:1~11]

 

      이 세 가지 유혹을 받아들이고 대신 대심문관은 기적과 신비와 권위 세 가지를 얻었다. 교권을 작동하게 만드는 세 가지 핵심 키워드다. 성경 등에 쓰여 있는 기존의 기적을 주구장창 울궈먹거나 정 없으면 기적 비슷한 놀라운 이야기들을 발굴하거나 각색하거나 심지어 만들어내면 된다. 신비는 분위기, 이미지다. 불가지, 불가해한, 세속의 평범함을 벗어난 범접할 수 없는 오묘한 느낌이다. 구체적으로 건축, 음악, 미술, 의상 등으로 연출할 수도 있다. 권위는 권력이고 일련의 통일된 체제다. 교회의 구성, 체계, 규율 등으로 통제되는 시스템이다. 곧 로마가톨릭이다.

 

 

 

 

후안 데 플란데스(Juan de Flandes)의 <그리스도의 유혹(The Temptation of Christ)>

그림 전면의 첫번째, 오른편 성전꼭대기에서의 두번째, 왼편 산꼭대기에서의 세번째 유혹


 

      확실히 사람들은 이 세 가지에 머리를 조아리고 복종한다. 여기 자신이 예수라 주장하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하자. 한쪽은 홀홀단신 너무도 소박하고 평범하여 다소 초라한 실망스런 모습으로 믿음, 소망, 사랑, 자유, 정의, 희생, 십자가 등등 예수님이 일찍이 말씀하셨던 말씀을 지루할 만치 몇 시간이고 반복하고 있다. 한쪽은 수많은 추종자들을 대동하고(권위) 후광이 비치는 듯 눈부시게 고급진 그럴듯한 모습으로(신비) 한마디 말도 없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돌을 빵으로 만들어 보인다고 하자.(기적) 누구를 예수님으로 인정할 것인가. 누구에게 감격하고 환호할 것인가.

 

      인간은 말씀보다는 힘(권력)에 먼저 반응한다. 말씀보단 기적을 믿고, 신보다는 기적을 구한다. 할 수만 있다면 악마의 이 세 가지 유혹을 오매불망 간절히 바라고 환영한다. 예수님은 (지상의) 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하셨지만 사람들은 '빵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먼저 우리에게 먹을 것을 달라, 그러고 나서 믿음이든 선행이든 요구하라'며 달려든다.

 

      과연 당신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자신할 수 있겠는가?

 

 

 

 

    그 무력하고 영원히 죄 많은, 영원히 비열한 인간들의 눈으로 볼 때 과연 하늘의 빵이 땅위의 빵만 할 수 있겠소? - 31p

 

    당신은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했었소. 그들은 원래가 반역자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역시 노예이기 때문이오. - 35p

 

    비밀을 간직해야 하는 우리들만은 불행을 감수해야 하오. 그러니까 수십억의 행복한 갓난아기들과, 선악을 판별하는 저주를 자기 몸에 지닌 수십만 명의 수난자가 있는 것이오. 42p

 

    나는 광야에서 돌아와 당신의 위업에 수정을 가한 사람들 무리에 서게 되었던 거요. 말하자면 거만한 자들의 곁을 떠나 겸손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겸손한 사람들한테로 돌아왔단 말이오. - 43p

 

 

 

 

      대심문관이 보는 인간, 민중이다. 무력하고 죄 많고 비열하다. 나면서부터 언감생심 반역을 꿈꾸지만 어쩔 수 없는 노예들이다. 선악을 판별할 수 없는 미숙한 아기, 선도 모르지만 죄도 모르는 순수하고 겸손한 갓난아기들이다.

 

      자신은? 이런 양떼를 이끌어야 하는 목자다. 인류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저주를 짊어진 비밀의 보유자, 위대한 비애로 고뇌하는 인류를 사랑하는 수난자다. - 나도 한때는 당신의 선택을 받은 위대하고 강한 소수에 들기 위해 황량한 광야에서 메뚜기와 풀뿌리로 연명하며 당신이 말한 자유를 축복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갑자기 눈이 틔어 의지의 완성에 도달한다는 정신적 행복도 그다지 위대한 것이 못 된다는 걸 깨달았어. 자기 혼자만이 의지의 완성에 이른다면, 자기 이외의 몇 백만이나 되는 신의 아들들은 다만 조소의 대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45p)

 

      나는 이 대다수의 인간 편에 서겠어. 그들의 대단치는 않지만 그래도 조용한 행복을, 천성이 연약한 동물에게 알맞은 행복을 주기 위해(41p) 이 고난을 짊어지는 고역은 물론 필요하다면 악역까지도 자처하겠어. 위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그들과 같이 겸손해지겠어. , 이 겸손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겠어. (이 마지막 문장이 대심문관이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의 모든 주장과 생각의 기저를 이루는 대전제다.) - 이것이 대심문관의 주장이고 속내다.

 

 

 

      역사상 수많은 악질 독재 권력자들이 인간, 민중들을 보는 시각도 대심문관과 똑같다. - 빵만 던져주면 납작 엎드려 만족해야 한다. 행복해야 한다. 언감생심 이상을 꿈꾸거나 권력근처로 기어오르려 해선 안 된다. 가르쳐야 하고 통제해야 하고 심지어 두드려 패야 한다. 되도 않는 반역을 꿈꾸지만 열 번 때려주고 한 번 안아주면 고분고분해지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어쩔 수 없는 노예들이다. 자유와 진리를 감당할 수 없는 연약한 아기들이다. ~! 이 순진무구하고 가엾은 인간들에게 내가 아니면 그 누가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겠는가!

 

      많은 디스토피아 소설과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다. 통치수단으로서의 <우리들>의 강제와 획일성, <멋진 신세계>의 유희와 쾌락, <1984>의 감시와 통제, 숱한 SF영화에서 등장하는 첨단과학과 도구들은 그 밑바탕에 인간()에 대한 불신이 공통적으로 깔려있다. 진보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인간의 자유, 가능성, 존엄성을 철저히 부정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는 물론이고 그리스도(교) 안의 자유마저 부정하는 대심문관, 그가 꿈꾸는 로마가톨릭이 지배하는 세계는 '빅브라더'가 지배하는 <1984>보다는 '은혜로운 분'이 지배하는 <우리들>쪽에 가깝다. ☞ <우리들> <멋진 신세계> <1984> 그리고 <죽도록 즐기기>)

 

 

 

      그리스도가 평가하는 인간, 그리스도가 존중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와 반대다. 영원과 신성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세속적인 단순한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잠재된 고귀한 본성에 합치되는 가치 있는 행복을 바라는 존재다. 하지만 거기에 드는 인간, 그 평가를 넉넉히 만족시키는 인간이 소수인 건 확실히 대심문관의 말이 맞다. 그리스도의 자유와 진리는 날카로운 밤송이 안의 밤처럼 쉽게 다가가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심문관은 자신의 양떼를 거만하지 않고 겸손하며, 허황되지 않고 현실적이고, 고결하지 않고 서민적이며, 탐욕스럽지 않고 소박하다고 여긴다. 지구는 그런 사람들이 살고 있는 마을이고 안 그런 척 하면 위선자라 놀림 받고 외면 받는다. 아니, 실지로 지독한 위선자라 확신한다. 가족 몰래 지혼자 맛난 것을 먹는 얌체, 지상의 슬픈 곡조를 뒤로 하고 천상으로만 오르려는 무정한 자, 자기의 구원만을 바라는 욕심쟁이이자 불가능한 꿈을 꾸는 미치광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궤변이다. 대심문관 자신이 거만하고 오만하고 자기만의 욕심에 빠져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또 다른 의미에서의 (평범하고 겸손한 자들 중에서) 선택된 자라는 거다. 자신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라는 거다. (물론 겸손하지도 않다.) 예수 못지 않게 인류를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지만 그 자신 그 인류 중 하나, one of theme은 아니라는 거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는 일찍이 광야에서 고행과 기도로 온 몸이 이끼로 덮였던 자, 하나의 성좌 전체와도 맞먹는 가치를 지녔던 자, 그래서 악마가 열일 제쳐두고 착 달라붙어 끈덕지게 유혹했던 자, 결국은 그 유혹에 넘어갔으나 아직까지도 위풍당당함을 잃지 않은 비극적 인물인 것이다. 그래서 그의 말이 강력하고 심지어 고결한 이에게까지 동정과 공감을 사는 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변절했다는 것, 패배했다는 것, 원래 갖고 있던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을 잃었다는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심문관은 언뜻 논리적으로 치밀한 듯 보이지만 미치광이다. 타락천사이고 악마다. 이것이 움직일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대심문관은 인간의 어둡고 약한 본성을 볼모로, 대다수의 평범한 인간들을 인질로 신(하나님)에게 반역하고 있는 것이다. 그 반역을 통해 인간을 그(악마)의 노예로 지배하려는 것이다. 그가 이루고자 하는 것은 자유로운 인간들이 사는 신의 왕국이 아니라 그의 노예들이 사는 그(악마)의 왕국이다. 그는 인류를 사랑한다지만 신도 인간도 믿지 않는다. 신의 사랑도 인간의 고귀한 본성도 부정하고 있다.

 

 

 

      신(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신성을 부어주셨고 인간은 누구나 그 안에 그 가능성을 품고 태어났다. 그러므로 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 신을 믿는다는 것은 인간(본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단, 이것은 전자에서 후자의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신은 완벽하고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 신은 인간을 담을 수 있지만 인간은 신을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후자에서 전자로 나가는 것도 가능은 하겠지만 한계가 있고 위험하다. 자칫 이반이나 대심문관의 고뇌와 타락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고뇌하는 경건한 무신론자인 이반의 사랑은 존재의 의미에서 나온 사랑이 아니라 존재의 무의미에서 나온 사랑이며, 영원한 삶의 긍정에서가 아니라 지상적 삶의 고양된 한 순간을 위한 사랑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허무하고 괴롭고 슬픈 사랑이다. 대심문관은? 이반에 비하면 괘씸할 정도로 오만하다. 이미 타락하여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것은 이반 자신이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혹은 자신의 괴로운 생각들을 되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극한까지 끌고간 다소 과장된 얼굴이기도 하다.

 

      이 과장된 얼굴은 이반이 만들어낸 얼굴이지만 다시 독자적으로 이반에게 영향을 주고 이반을 유혹한다. (그만큼 악마적 유혹은 강력하고 치명적이다. 괴물의 얼굴이나 매혹적인 얼굴이다.) 그것은 '신이 없다면, 영원, 불멸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무시무시한 악마의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반면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까라마조프네 형제들>에 등장하는 알료샤의 스승)의 길은 이와 대비된다. 영원불멸한 신의 사랑을 깨닫고 그것을 더 넓게 확장하려는 이 길을 가야 한다.

 

      '나를 사랑하듯 너 자신을 사랑하고, 너를 사랑하듯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신께 바치는 경배나 Ego로서의 자기애를 확장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신과 나와 타인, 이 모두 안에 들어있는 신성을 발견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단, 그것은 신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늘에 있는 신의 사랑을 가지고 내려와 이 지상에 있는 나와 타인과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멀리 있는 인류에 대한 간접적이고 추상적인 원인애(遠人愛)보다 내 영역으로 들어와 나를 마모시키고 내가 마모시키는, 나와 영향을 주고받는 가족, 이웃, 자기주변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근인애(近人愛)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근인애보다 원인애가 손쉽고 사람보다 (애완)동물, 동물보다 식물, 식물보다 무생물이 사랑하기 손쉽다. 필요할 땐 꺼내쓰고 질리면 처박아 두어도 상관없는 예쁜 그릇이 사랑하기엔 가장 손쉽다. 내 일상과 더 멀고, 내 수고가 덜 가고, 내 의지가 덜 꺽이는 것일수록 사랑하기에 만만한 것이다. 사람은 익숙한 것일수록 둔감하여 공감하지 못하거나 가까운 것일수록 스트레스를 더 받아 사랑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만큼 에너지가 더 투입되니 그 사랑은 더 다채롭고 풍부하고 재밌을 수 있다. 이상하게도 사람보다 동물이 더 불쌍해 보이고 더 편하지만 동물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재밌고 행복한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세가지가 필요하다. 대상을 잘 헤아리고 살피어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 자기주도권에 집착치 않는 겸허한 이타정신, 스트레스를 넉넉히 소화할 수 있고 오히려 기쁨과 보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강인한 에너지다. 종합하면 '예민하고 겸허한 담대함'이 필요하다. 이 셋 중 가장 핵심은 담대함, 곧 에너지(주로 정신적 에너지)다. 감수성과 겸허함은 인성의 측면이 강하고 그것만으로 어느 정도의 사랑은 달성 가능하지만 한계가 있다. 반면 이 담대한 에너지는 지상을 초월한 신(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스스로 줄 수 없는, 무한정의 사랑의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다.

 

 

  

 

    죄수는 아무 말 없이 노인에게 다가오더니, 아흔이나 되어 핏기 잃은 그 입술에 조용히 키스했지. 그것이 대답이 전부였어. 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어. (중략) ‘어서 나가시오. 그리고 다시는 오지 마시오... 두 번 다시 오지 마시오... 절대로!’ - 47p

 

 

 

 

      이반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결말이다. 노인(대심문관)은 그나마 일말의 양심 혹은 두려움이 있었던 걸까? 전날에 백 명 가까이 화형을 집행했던, 예수님을 화형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대심문관은 예수님을 순순히 풀어준다.

 

 

 

      대심문관의 말은 확실히 궤변이지만 매력적이다. 나름대로 논리와 설득력도 갖추고 있다. 악마의 유혹이 항상 그렇듯 솔깃해지는 마력, 매력이 있지만 거기까지다. 적그리스도적인 악의 원리와 그리스도의 선의 원리 사이엔 언제나 유사점이 있으며, 여기엔 언제나 혼합과 대체의 위험이 있다. 알게 모르게 비슷한 것을 뒤죽박죽 섞어놓는다는 것이다.

 

      대심문관이 들려주는 유혹의 말은 충고 혹은 반면교사로 들어야만 한다. 그것이 위험하지 않은 지혜로운 방식이다. 이 서사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이지 비난이나 반대가 결코 아니다. 주의 깊게 읽는다면 독자는 대심문관의 독백 속에서 예수님의 침묵의 응답, 사랑과 관용이 응답을 내내 듣게 된다. 그것은 곧 작가가 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기도 하다.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리스도보다 아름답고, 심원하고, 이성적이고, 남자답고, 완벽한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신조를 확실히 밝힌바 있다.

 

      <대심문관>에서 엿볼 수 있는 로마가톨릭에 대한 도스또예프스끼의 생각은 매우 적대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론적인 러시아 공산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과도 맞닿아 있다. 그의 눈에 이 둘은 이념과 작동원리에서 유사한 점이 많다고 본 것이다. 모두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부정하고 완전한 복종과 충성을 요구한다. 로마가톨릭 입장에서는 금서라도 지정해야 할 판! 하지만 이것이 지금 현재 천주교, 로마가톨릭에만 뜨끔만 이야기일까? 개신교 역시 목회자건 일반성도건 음미하고 성찰할 대목이 많다는 거다.

 

 

 

      예수님이 실재로 재림한다면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당장 목회자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자 자연스런 현상이다. 존재이유가 사라지거나 급격히 축소된다. 중간과정 없이 패스, 예수님과 성도와의 직통이다. 중세 한때 성경이 일반에겐 금서였고 자국 언어로 번역되는 것조차 금지된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성도들 역시 당황되고 거북하긴 마찬가지! 사람 심리가 아무리 갖고 싶던 물건도 일단 갖게 되면 빛을 잃게 되는 것처럼 재림한 예수님은 더 이상 예전의 일방적인 찬양과 숭배를 바치던 그 예수님이 아니다. 신에서 인간으로 강등된 듯, 천상에서 지상으로 좌천된 듯,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오소서! 오소서!.... ? 오셨네!.... 뭐야? 예수님이 맞긴 맞는 것 같은데.... . 왜 오셨어요? ? (예전의 환상속의 그대가 더 좋았던 것을... .)

 

      하지만 이것은 기우일 수도 있다. 과연 우리가 재림한 예수님을 알아볼 수나 있을까?

 

 

 

      대심문관이건 소심문관이건, 신부님이건 목사님이건, 목회자건 일반성도건 아무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예수님. 아니, 아무도 그 정체를 알아채지 못하는 예수님. 가벼운 마음으로 이 지상에 살그머니 내려왔지만 홀로 멀뚱멀뚱 서있거나 그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이곳저곳 전전하며 쫓겨 다니는 예수님. 자신의 제자이자 후계자들에게 협박당하고 화형에 처해질지도 모르는 예수님. 2000년이 훌쩍 넘었지만 예수님도 그대로고 인간들도 그대로다.

 

      예수님을 받아들이려면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 닮아야 한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 모든 것 때문에 스스로 죄도 없이 피를 바치셨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축복받은 존엄한 존재지만 도스또예프스끼가 조시마 장로의 입을 빌어 말한 대로 사람은 누구나 모든 사람에 대해 죄가 있다.’ 이것이 대심문관과 고뇌하는 경건한 불신자인 형 이반에 대항하는 동생 알료샤와 조시마 장로의 주장이자 도스또예프스끼가 생각하는 가장 높은 도덕적, 종교적 경지다. 이 생각을 확장하자면 이런 거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기보단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축복받기 위해 태어나기보단 축복하기 위해 태어나고, 살기 위해 태어나기보단 살리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 세상에서 무엇을 받기 위해서라기보단 이 세상에 무엇을 주기 위해 태어난 사람. - 사람은 채권자가 아니라 채무자로 이 세상에 나왔다. 굳이 하나님의 축복을 들지 않더라도 태양과 물과 땅의 덕택으로 내 생명이 움텄으니 사람은 누구나 모든 것,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이 있다’ ‘나면서부터 이 세상에 갚아야할 빚이 있다는 거다.

 

      하나님(신이라고 해도 좋고 절대자라고 해도 좋다)이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생명을 주셨으니 내 의지와 관계없이 내 생명을 앗아간대도 달리 항변할 권리가 없다. 엄밀히 말하자면 어느 순간 갑자기 생명을 얻었으니 지금 당장 죽음을 당한대도 딱히 억울할 일은 없다. (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하여금 갚게 하겠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욥기 41:11])

 

 

 

      이 생각과 정확히 맞은편에 있는 것이 교만이다. - 나는 마땅히 그리고 반드시 사랑받아야 하고, 축복받아야 하고, 살아야 하고, 내가 준 것보다 내가 받은 것이 하나라도 더 많아야 하고, 모든 것 모든 사람이 나에 대해 책임이 있고, 나면서부터 이 세상으로부터 받아야 할 빚이 있다. 왜냐하면 나는 나면서부터 권리를 가진 이 세상의 주인이자 죄도 초월할 수 있는 초인이니까. (여느 인간과 같은) 노예는 물론 절대 평범하지 않은 떠받들여져야할 특별한 존재니까. - 결국 대심문관이 주장하는 인류애란 백퍼 뻥이란 얘기다.

 

      대심문관을 비롯한 누구든 모든 죄악의 근원은 교만이다. 그것은 자연스레 타인, 모든 인간에 대한 경멸로 이어진다. 선택받은 민족, 선택받은 사람이라 주장해선 안 된다. (신의 부름을 받았다는 목회자들이 특히 경계해야할 함정이다.) 인간의 교만과 욕심은 끝이 없어 급기야 초인을 주장하고 스스로 신이라 생각하기에 이르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공허함밖에 없다. 스스로를 구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타인을 구하는 것이다.

 

      낮은 사람과 함께 낮은 곳에 임하라. 그곳이 지옥끝이라도 함께 하고자 하는 마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 원문 텍스트 외에 불가꼬프가 쓴 4<철학적 유형으로서의 이반 까라마조프>에서 인용한 블라지미르 솔로비요프의 시 한 구절(291p)을 재인용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기로 한다.

 

 

 

      죽음과 시간은 지상에 군림한다.

 

      그대는 그들을 군주라고 부르지 말라.

 

      만물은 유전하다 암흑 속에 사라지느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오직 사랑의 태양이어라.

 

 

 

      이것이 길고도 열정적인 발언을 쏟아낸 대심문관에게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주는 메시지, 대심문관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는 예수님의 키스가 전하는 메시지다. 예수님의 입맞춤은 이성, 논리, 말로서 설명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기에 그것은 그냥, 메시지라기보단 키스이자 포옹이자 사랑 그 자체다. 영원한 것, 불멸의 것, 가치 있는 오직 유일한 것은 사랑의 태양, 신(하나님)의 사랑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