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때론 먹의 향내가 나는 글과 음악 그리고 사람

문학, 책읽기

여보, 나좀 도와줘 - 노무현 고백 에세이 [독후감]

어멍 2010. 4. 29. 22:55
 

    노무현 전 대통령이 1994년에 쓴 오래된 책이다.

    노동, 인권변호사로서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 픽업돼 정계에 입문한 노무현 대통령은 5공 청문회로 일약 정치스타가 되었으나 3당 합당에 반대하여 김영삼 대통령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 대가로 그는 다음 총선에서 부산에서 낙선한다. 이 책은 이 시기, 이런 짧지 않은 성공과 좌절을 맛본 후 그 동안의 일화와 소회를 중심으로 엮은 어렵지 않은 책이다.

    개인적으로 위인전, 자서전류는 즐겨 읽지 않는다. 그나마 평전이 그 중 읽을 만하다. 특히 유명인, 정치인들이 자신의 캐리어를 쌓기 위해, 선거를 앞두고 쏟아내는 홍보성 자서전류는 자화자찬에 알맹이가 빈약하기 일쑤다. 게다가 그 대부분이 대필작가에 의하거나 그들의 지도 내지 협의하에 쓰여진 것을 보면 작위적이고 어색한 것을 넘어 어이없고 닭살돋는 시추에이션을 드러내곤 한다.




우연치 않게 정치에 입문했으나 정치로부터 도망치고 싶어했던 한 사내가 쓴

닭살보다 연민을 느끼게 해주는 책.



    예전 김영삼 대통령이 야외연설 때 강한 바람에 연설 원고가 날아간 적이 있어 원고도 뒤죽박죽, 연설도 뒤죽박죽 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김영삼 대통령이 ‘건강은 빌릴 수 없어도 머리는 빌릴 수 있다’고 강역키(!) 주장하더라도 누구 머리에서 무엇을 빌릴 것인가 하는 정도의 머리는 학실히(!) 갖추어야 한다. 연설문 원고가 어디가 앞이고 어디가 뒤인지, 어떻게 연결해야 말이 되는지 정도의 머리는 갖추어야 한다. 이런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노무현 대통령의 평가는 어떠했을까?

    노무현 대통령이 평가하기를 김영삼 대통령은 ‘탁월한 정치인’, ‘뛰어난 두목’으로 김대중 대통령은 ‘참으로 아까운 분’, ‘허점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허점인 사람’으로 평가했다. 김영삼의 ‘탁월한 정치’라는 것은 정치감각, 권력투쟁, 돌파력에 주안점을 둔 뉘앙스이고 김대중의 평가에서는 존경과 안타까움의 뉘앙스가 스며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김대중은 김영삼과의 대권경쟁에서 패배하여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칩거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면 그 자신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양김씨가 길들이려 했으나 길들이기 힘들었던 ‘야생마’였다고 한다.

    노무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별명은 이밖에도 많다. 지지자들에겐 노짱, 노간지, 촌놈, 감자, 바보라는 애칭으로, 비판자들로부터는 노구리, 좌파 빨갱이, 깡패, 아마추어, 선무당에서부터 한때 술자리의 건배사로 유행했던 노시개(노무현 시XXX 개XX)까지...... 혹자는 그를 ‘단심이 있는 사람’(유시민), ‘쾌남아’(김대중 전 대통령)로 평가하기도 했다. 모두 핵심을 찌르는 적절한 표현이다. 하지만 충분하지 않다.


    내가 보기에 그는 ‘사람’이었다. 멋은 덜하고 좀 길고 맹맹하지만 그는 ‘가장 평범하면서도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사람’, ‘결코 평범하지 않았으나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이었다. 어려서는 악동이었고 반항기 다분한 학생이었고 커서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경상도 사나이였다. 가난에 멸시를 당하고, 좌절과 실패도 맛봤고 시기, 질투, 열등감, 경쟁심에서 자유롭지 않았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친구를 속이기도 하고 남의 것을 빼앗거나 훔치기도 하고 아내에게 손찌검을 하기도 했던 이 땅의 평범한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 이웃의 고통과 슬픔에 같이 아파했던 사람, 끊임없이 배우고 성장했던 사람, 항상 돌아보고 성찰했던 사람, 올라갈수록 교만하지 않고 겸손해지고 성숙해지는 사람이었다. 출세하여 대통령에까지 올랐지만 한번도 자신의 소박한 천성과 비천한 출신을 잊거나 배반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울퉁불퉁 원석이 차츰 아름답고 매끄러운 자태를 드러내듯이 젊음의 거칠음과 과용, 군더더기를 깍아내고 균형미와 원숙미의 완전함에 날이면 날마다 근접했던 사람이었다. 부끄러움을 잘 타고, 욕먹기를 너무도 싫어했던 사람, 거짓말이 선천적으로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이었다. 한편 자존심과 고집, 한마디로 곤조가 대단한 사람이었고 머리 역시 좋았던 것 같다.

    책은 시종일관 자신의 허물을 들추며 진솔하고 소박하게 아기자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맹자왈 공자왈 하나마나한 교과서적인 아름다운 이야기, 모범적 이야기로 채워져 있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진심, 그의 체취가 느껴진다. 누군가 대신 쓴 글, 예쁘게 꾸미고 각색한 글이 아니고 여기저기 주워들은 것을 짜깁기한 글도 아니다. 온전히 그의 머리에서 나와 그의 몸으로 쓰여진 그의 글이다. 여러 면에서 나라 안팎으로 보면 노무현은 김대중보다 작은 인물이다. 그러나 진보성향의 사람들에게 김대중이 존경받는다면 노무현은 사랑받는다. 이것은 그의 이런 평범함, 소박함, 진솔함에 있을 것이다. 그는 농부였고 공사판 노가다, 공장 노동자였고 고시생이었고 판사였고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가 얻는 것 없이 고생만 하는 노동인권변호사였다가 국회의원이었고 대통령이었고 은퇴한 촌로였다.




대통령 노무현, 촌로 노무현



    무엇이 그의 인생행로를 결정하였을까. 그의 천성, 그의 출신성분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아마도 삶의 순간마다 진로를 결정짓는데 항상 기본으로 작용했던 상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이라는 운명의 변수도 빠뜨릴 수 없다. 그가 김영삼의 눈에 띄어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않았더라면...삼당합당때 김영삼을 따라갔다면...대통령 당선의 영광은 없었을 것이다. 물론 죽음의 비극도 없었겠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그의 유언처럼 운명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삶을 결정짓는 것은 ‘만남’이다. 사건과의 만남, 사람과의 만남...그 만남과 만남의 연속, 그 합이 우리의 인생의 행로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만남은 다양하고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흉한 만남, 저주의 만남은 물론 없어야겠지만 좋은 만남, 안전한 만남, 매번 그렇고 그런 평범한 만남만으로는 평범한 인생길을 벗어날 수 없다. 세속적인 안온한 삶은 살지언정 비범하고 위대하며 대성하는 삶을 이루진 못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떠난 지금 그의 인생과 그의 만남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의 생이 그가 추억하기에 행복했을까, 불행했을까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의 만남이 그의 생을 특별히 특별하게 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처럼 지배계급의 어떠한 도움도 없이 홀홀단신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드라마틱하게 상승했던, 그리고 추락하여 비극을 맞았던 인물은 없다. 이후에도 흔치 않을 것이다.

    오늘 따라 그가 보고 싶다.